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바라본 "휠리오크베"(Filioque) 논쟁/ 신문철
I. 들어가는 말
20세기가 시작되면서 교의신학에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그 하나는 전통적 신론에 대한 재해석으로서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부각된 것이다. 본 정기 학술 세미나에서 필자가 발표하고자 하는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는 이 두 가지 신학적 흐름 속에서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중요한 교리이다.
역사적으로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는 서방교회가 성령의 발출에 대하여 초대 교회가 고백한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출된다"는 고백에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휠리오크베(filioque) 구절을 첨가함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서방교회가 휠리오크베 교리를 정식으로 채택한 581년의 톨레도 회의 때부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논쟁은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분리시키는 중요한 신학적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휠리오크베(filioque) 논쟁이 현대의 삼위일체론과 함께 다시 논의되고 있다. 동방 신학자들은(특히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동방 신학자 Vladimir Lossky) 서방 교회가 휠리오크베(filioque)를 신조서에 삽입함으로써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와 성령의 존재의 원천인 성부의 권위를 손상시켰고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변형시켰다고 주장한다.
더 중요한 것은 서방 교회의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에 의해서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의 위치가 격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성자에 종속시키는 종속론을 야기시켰고, 삼위일체론을 이위일체론(binitarianism)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고있다. 반면에 서방 교회는 휠리오크베(filioque)를 삼위일체론을 더욱 정확히 표현하는 정통적인 교리로 간주하고 있다. 만약 성자가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n)이라면 당연히 성령의 발출에 참예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초 블라디미르 로스키(Vladimir Lossky)에 의해 삼위일체론과 성령론의 "뜨거운 감자"로 자리잡은 "휠리오크베" 교리는 지금까지 신학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본 논문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논의 되어 온 "휠리오크베" 교리를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하며 동방의 삼위일체론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을 비교 연구함으로서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에 하나의 삼위일체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제한된 지면 안에서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휠리오크베 논쟁을 분석한다거나, 삼위일체론의 전반적인 분야를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본다. 다만 필자는 교의신학의 한 관점에서 휠리오크베 논쟁에 하나의 삼위일체적 대안을 제시하는데 그 의미를 둔다.
본 논고의 주제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본 논문은, 첫째, 휠리오크베 교리의 형성 과정을 역사적 관점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둘째, 휠리오크베 논쟁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므로 삼위일체 논의의 핵심 주제인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와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의 관계에 대한 논의와 본질(Nature)과 위격(Person)의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셋째,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에서 논의되고 있는 신학적 주제들을 분석하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신학적 관점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에 대한 삼위일체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의 역사적 배경
1. 휠리오크베 구절의 첨가(The inclusion of the filioque clause)
교회의 초기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사건들 중의 하나는 동방과 서방의 교부들이 만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서(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381)에 대한 일치이다. 381년에 작성된 신조서에 성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주님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 받으시고 영광받으신다 . . ." 이 신조서에서 동방과 서방 교부들은 성령에 대해서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고"라는 신앙을 고백한다. 하지만 서방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서에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침묵과 특별히 성령을 발출함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함을 인지하고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휠리오크베(filioque) 구절을 가르쳤고 다음과 같이 신앙을 고백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The Holy Spirit is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그리고 589년의 톨레도(Toledo) 대회 때에 서방 교회는 아리우스주의를 반박하기 위해서 휠리오크베 교리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였고, 675년 브라가(Braga) 회의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아들에게서도"(filioque)라는 교리를 공식적으로 덧붙여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한 성령"이라고 변경했다. 그 이후 "성자로부터"라는 의미의 라틴어 휠리오크베(filioque)는 서방 교회가 행한 이 덧붙임을 가리키게 되었고, 1000년대를 전후하여 서방교회의 예전에 일반적으로 휠리오크베가 채택되었고, 1014년 황제 하인리히 2세의 대관식에 교황으로는 베네틱트 8세가 처음으로 휠리오크베를 신조에 삽입한뒤, 로마의 예전에도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결과적으로 휠리오크베 교리는 서방 교회 내에서 규범이 되었으며, 서방 교회가 표방하는 중요한 신학이 되었다. 하지만 동방교회는 "이중 발출"(double procession)의 개념인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를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휠리오크베 교리는 동방교회가 인정하지 않은 서방교회 단독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동방 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 교회가 휠리오크베(filioque)를 신조서에 삽입하므로 성령의 위치를 격하시켰고, 더욱 중요한 것은 서방교회가 휠리오크베를 인정함으로 오직 하나의 신적 근원이신 성부의 권위를 손상시켰다고 서방의 필리오크베 교리를 비난하였다. 하지만 서방교회는 휠리오크베 교리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서에 첨가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ius)의 삼위일체론을 따르는 것이고, 성자의 신성과 호모우시오스(homoousios)의 개념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는 교리라고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휠리오크베(filioque) 논쟁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1054년)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의 역사적 발전 과정
성령의 이중발출(double procession)을 의미하는 휠리오크베 교리는 서방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그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서방교회의 전통적 교리가 되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와서 성자에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피조물을 성화하기 위해서 성자에게서 나오시며, 동시에 두 분에게서 나오신다." 그러나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휠리오크베(filioque)를 신학적으로 정립한 거의 400년 후인 9세기경 동방의 포티우스(Photius, 810-895)와 서방의 안셀름(Anselm, Archbishop of Canterbury)에 의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신학적 논쟁으로 발전되었다.
포티우스(Photius)는 서방의 선교사가 불가리아(Bulgaria)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신조서에 휠리오크베 교리를 삽입하는 것에 대한 강한 반발로 서방교회의 교황과 서방 신학 전체(특히 서방의 삼위일체)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포티우스(Photius)는 휠리오크베 교리에 대해서 다음 몇 가지 신학적 문제점들을 지적하였다. 첫째, 포티우스(Photius)는 서방의 휠리오크베 교리를 비판하기 위해서 동방의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 의존한다.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그들의 삼위일체론에서 신적 존재(divine existence)의 근원을 본질(essence)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성부의 위격에서 찾고 있다. 포티우스(Photius)는 휠리오크베 교리를 비난하기 위해서 성부 한 분만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와 성령을 포함한 모든 것들에 대한 유일무이한 최고의 원인이며 근원이다. 성자는 성부의 아들이 "되며"(begotten), 반면에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출한다"(proceeding). 이 두 용어는 성자와 성령이 다른 방법으로 성부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개념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티우스(Photius)는 주장하기를 성부만이 유일한 모든 신성의 기원이요 원천이기 때문에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했다는 것은 신성모독이요 한 분이신 성부 안에 신성의 "두 가지" 원천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만일 서방교회가 주장하는 성부와 성자는 한 본질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성부로부터 나오실 때 성자로부터 동시에 나오신다고 주장한다면, 성령도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시기 때문에 성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실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구분 짓는 "낳으심"(generation)과 "발출하심"(proceeding)의 구분이 없어지기 때문에 각 위격을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티우스(Photius)는 서방의 휠리오크베 교리를 새로운 형태의 양태론(modalism)으로 보았다. 셋째, 포티우스(Photius)는 성경적 증거(요한복음 15:26)를 제시하면서 서방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보내심"(sending)과 "나오심"(proceeding)은 같은 뜻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성경 속에 나타난 "아들의 영"(the Spirit of the Son),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이라는 표현을 오직 구원의 경륜 속에서만 이해할 뿐, 내재적 관계의 "영원한 나오심"(eternal procession)과 분리를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포티우스(Photius)는 주장하기를 휠리오크베 교리는 부당한 삽입이며, 성부의 주권(monarchia)을 파괴하여 삼위 안의 위격적 존재를 상대화 시킨다는 것이다. 포티우스(Photius)는 동방교회의 입장에서 휠리오크베 교리를 신학적 논쟁의 핵심으로 부각시킨 장본인이며, 성부의 위격을 좀더 강화하기 위해서 그는 좀더 경직된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포티우스(Photius)은 고백하기를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출"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성부로부터만 발출"(from the Father alone)하신 다는 것이다. 그는 동서간의 분열에 도화선을 당긴 최초의 동방 신학자이다.
포티우스(Photius)의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에 대한 신학적 비난에 대해서 서방은 11세기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1098년 바리 회의(the Council of Bari)에서 교황 우르반 2세(Urban II)가 안셀름(Anselm, Archbishop of Canterbury)에게 공식적으로 동방의 포티우스(Photius)의 이론을 반박할 것을 요청하면서 휠리오크베 논쟁은 가속화 되었다. 안셀름은 포티우스(Photius)의 이론을 공격하기 위해서 근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의지하고 있다. 안셀름은 주장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본질을 소유하고 계시고 아들의 신적 본질은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분명히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성령의 신적 본질은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한 관계에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령은 "아버지의 영"(the Spirit of the Father)인 동시에 "아들의 영"(the Spirit of the Son)이시기 때문이다. 안셀름은 또한 구원의 경륜 속에서 "아들로부터 보내심(sending)을 받은 성령"(요14:16; 15:26)과 "성령이 아들로부터 영원한 나오심"(eternal procession)을 구분한 포티우스(Photius)의 이론을 반박하고 있다. 만일 내재적으로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면 성령은 구원의 경륜 가운데서도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 그리고 만일 아들이 구원의 경륜 속에서 성령을 보내시면(sending), 성령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eternal proceeding)는 것이다. 안셀름은 영원한 하나님과 구원의 경륜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통일성(unity)을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안셀름은 주장하기를 성령의 "이중발출"(double procession)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요10: 30)되심을 증거하고 있다고 믿는다.
휠리오크베 논쟁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동방과 서방의 대표적인 두 신학자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에 휠리오크베(filioque) 논쟁은 서방과 동방 교회의 신학적 차이에 의한 오해로부터 발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신학적 발전 과정(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을 살펴보면 양쪽 모두 자신들의 독특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신학을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서방 교회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서방 교회는 초대 이단자 아리우스(Arius)와 그의 추종자들과 끊임없는 신학적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증하기 위해서 니케아 신조에서 정의된 본질의 개념인 homoousion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존재성(pre-existenc)을 그들의 삼위일체론에 핵심적인 요소로 도입하였고, 계속되는 아리우스의 추종자들과의 논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호하기 위해 6세기 경에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를 그들의 공식적인 신앙으로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곧 서방 교회의 신학이 아버지와 아들 중심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휠리오크베 교리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개념과 함께 성자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할 뿐 아니라 성자와 성부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방 교회는 그들의 삼위일체 신학이 성부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아리우스(Arius)와 같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자를 만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성령의 해방자들"(pneumatochians)을 만났기 때문에 성부와 성령의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 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방 신학자들은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전통을 따라서 모든 신성의 근원이신 성부의 위격과 "성령이 성부로부터 발출"한다는 믿음으로 성령의 위격과 그 분이 곧 하나님이심을 끊임없이 변호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휠리오크베 논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을 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III.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의 신학적 배경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논쟁에 대한 신학적 배경은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에 근거하고 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완성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삼위일체의 출발점을 위격이 아닌 본질의 통일성에서 찾고 있으며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통일성에서 휠리오크베 교리를 발전시켰다. 반면에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캅파도키아 교부(Cappadocian Fathers)들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들은 성부의 위격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를 완성하면서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와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의 구별을 강조하였다(특히 휠리오크베 교리를 반박함에 있어서).
그러므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논쟁은 다음의 두 가지 삼위일체적 해석 방법을 중심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 하나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질"(Nature)과 "위격"(Person)의 관계에 대한 논의이다.
1.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와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의 관계를 중심으로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와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는 본질(nature)과 위격(person)에 대한 논의와 함께 휠리오크베 교리와 전통적 삼위일체론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신학적 주제이다. 비록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연구가 현대 삼위일체 논쟁에서 비로소 도출되었지만,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 논의 속에서 이미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구분은 역사 속에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삼위일체성을 나타내시는 방법과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경륜 이전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삼위일체적 존재 방법의 차이로 이루어진다. 휠리오크베 교리는 구원의 경륜(oikonomia) 가운데 나타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경륜적 관계를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에서 이해한 것이고, 동시에 성자와 성부의 동등성 혹은 동일본질(homoousion)을 나타내는 중요한 교리이다.
휠리오크베 교리는 4세기 이후 교부들의 신학이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로 전환되면서 영원하신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리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재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휠리오크베 교리는 그 기본적 바탕을 구속의 경륜 속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1.1. 니케아 이전(pre-Nincene)의 삼위일체 :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
니케아 회의 이전에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동방과 서방 모두 경륜적 혹은 기능적 측면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2세기 말 리용의 감독 이레네우스(Irenaus)의 신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레네우스는 구속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논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구별하였다. 터툴리안도 경세(oikonomia)를 근거로 세 위격을 구별하면서 각 위격은 "그들의 존재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그들의 등급을 통하여, 그들의 본질을 통하여서가 아니라 그들의 형태를 통하여, 그들의 힘을 통하여서가 아니라 그들의 현현을 통하여 구별"된다고 말한다. 한 하나님 안에 계신 세 분의 신적 "페르소나"(persona)는 각기 맡은 분야가 있다.
아버지는 창조와 그 후의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인류에게 구원을 허락해 주었다. 그 구원을 수행하기 위하여 아들이 성육신(Incarnation) 하셨다. 그리고 성령은 아들이 수행한 구원을 결실하도록 했다. 이러한 구원의 구조에서 아버지는 절대자로서의 위치에 머물러 있는 동안 아들이 제이의 위치에서 구체적으로 구원의 조건을 성취하신다. 성령은 제 삼의 위격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협조하여 구원을 완성하신다. 경륜적 삼위일체란 이와 같은 구원을 위한 구조 안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초대 교부들은 어디까지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원론적 입장에서 이해하면서 삼위의 사역을 경륜적 혹은 기능적(functional)으로 구분하였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이고 초월적인 측면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계시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세상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발전되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가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신적 존재임을 확신케 했다. 그러나 경륜적 삼위일체가 함유하고 있는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경륜적 삼위일체론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이해 하는데 있어서 종속주의(subordinationism)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경륜적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이해한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위계 질서가 나타난다.
즉, 신성의 제일 원리 혹은 근원은 성부 하나님이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낳으심을 받은 제이의 위격이고 성령은 제삼의 위격이 된다. 이러한 경륜적 삼위일체는 오리게네스에 의해서 종속주의로 발전되고 아리우스(Arius)에 의해서 성자의 신성이 부인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는 4세기 이후부터는 삼위일체의 논의에서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로 전환되고 만다.
1.2. 니케아 회의 이후(post-Nicene) :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에서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로 전환
경륜적 삼위일체가 구원의 경륜 가운데 나타나신 삼위의 관계성을 말한다면,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 이전에 영원 전부터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서술이다. 초대 교부들의 경륜적 삼위일체가 비록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서술이지만 성자와 성령의 위격을 성부의 위격에 종속시키는 종속론을 야기 시킨 것이 사실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구원의 경륜 속에 나타난 경륜적 종속을 아리우스가 내재적 종속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아리우스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초월성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다: "우리는 오로지 출생하시지 않고, 오로지 영원하시고, 오로지 시작이 없으시고, 오로지 참되시고, 오로지 불명하시고, 오로지 지혜로우시고, 오로지 선하시고, 오로지 주님되시고, 오로지 만물의 심판자이신 한 분이신 하나님을 고백한다." 물론 여기서 아리우스가 주장하는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의 본질은 절대 초월적이고 절대 불변하기 때문에, 성부의 본질은 어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우스에 의하면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 같은 본질(homoousios)이 아니다. 성자와 성령이 내재적으로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면, 필경 성자와 성령은 성부로부터 창조되신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의 내재적 종속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교부들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고백한 신앙고백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교리이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 이시라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교리는 곧 교부들의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데. 이때부터 교부들의 삼위일체는 구원의 경륜 가운데 나타나신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논하기 보다는 본질(ousia)에 관한 질문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즉 "호모우시오스"는 하나님의 본질적 통일성을 의미하는데, 아들의 신성이 아버지의 신성과 동일하며, 참으로 동시에 아들의 신성이 아버지의 신성이며, 혹은 아버지의 신성의 충만함이 아들의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본질의 통일성에 대한 강조는 서방의 삼위일체론을 완성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삼위일체론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는 삼위일체를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삼위일체는 유일하시고 하나이신 참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인 동시에 동일한 본체에서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바로 말하며, 믿으며,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론을 썼다". 즉,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본질(essentia)이시라는 것을 말하며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한 본성, 한 신성, 한 의지, 더 나아가서 한 활동만이 한 하나님에 귀속되지 세 위격들 개개 자신들에는 귀속되지 않는다.
이러한 본질의 동일성에 대한 강조는 성령의 발출에도 적용이 되는데,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os)이시라면 당연히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신다는 휠리오크베 교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휠리오크베 교리는 근본적으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동일한 본질적 관계에 관한 교리이다.
2. "본질"과 "위격"의 구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서에서 삼위일체론이 완성된 이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어떻게 한 하나님이 세 위격체가 될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세 위격체가 한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였다. 이 질문을 해석하기 위해서 두 가지 뚜렷하게 다른 접근 방식이 삼위일체 논쟁 가운데서 출현하게 되었다.
하나는 동방 교회의 삼위일체론이다. 동방 교회의 교부들은 위격의 개념이 본질의 개념에 선행한다고 생각함으로써, 삼위의 위격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으로 성부의 위격을 강조하였다. 즉 성부의 위격(person)은 성자와 성령의 존재 근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므로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주장하였다. 이후로 동방교회는 위격 중심의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다. 다른 하나는 서방 교회의 삼위일체론인데, 서방 교회의 교부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성을 발전시키므로 삼위 하나님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본질(One Substance)을 갖고 계심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방의 삼위일체와 서방의 삼위일체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2.1.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 위격(person) 중심의 삼위일체
동방의 삼위일체론은 오리게네스(Origen)부터 시작된다. 오리게네스는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하나의 본질(mia ousia)보다 세 위격(treis hypostases)을 강조하는 위격 중심의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키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을 개체(individual essence)로 표현하기 위해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란 용어를 사용했다.
오리게네스는 세 위격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를 아들과 성령의 본질의 근원이라고 강조한다. 즉,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성육신 하시기 전부터 영원의 영역에서 아버지에 의해 "낳아지신 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리게네스는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는 계시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영원하신 낳으심"의 존재론적 관계로 이해하면서,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영원한 종속관계(subordination)로 발전시켰다.
보다 발전된 위격 중심의 삼위일체 교리는 초대 동방의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 방법은 삼위일체의 기본적인 표현인 "하나의 본질(mia ousia), 세 위격(treis hypostases)" 중 하나의 본질보다 세 위격에 대한 신학적 발전을 모색하였다는 것이다. 나뉠 수 없는 한 분 하나님은 세 분의 위격 속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동방 교부들의 신학적 업적이 출현하는데,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처음으로 우시아(ousia)에서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를 구분하여 우시아(ousia)는 하나의 본질 개념으로 사용하고,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를 세 분의 위격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삼위일체론을 더욱더 세밀하게 발전시키면서 위격(person) 중심의 삼위일체론을 형성한다.
위격에 대한 그들의 연구에서 가장 독특한 특징은 곧 삼위 하나님의 존재의 근거를 성부 하나님의 위격(hypostasis)에 두었다는 것이다. 비록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성자나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부의 위격(hypostasis)이 삼위일체의 최고 원천(principle), 혹은 최고의 근원(origin)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현대 동방 신학의 권위자인 지졸라스(J.D. Zizioulas)는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위격 중심의 삼위일체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 "존재의 세 모형은 그 실체에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 즉 아버지에게서 은혜를 입고 있다." 그러므로 동방의 삼위일체론은 위격(hypostasis)과 분리된 본질(ousia)은 존재하지 않으며, 위격은 본질보다 선행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의 근거이다. 그래서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yssa)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부의 한 인격에서 성자는 아들이 되며, 성령은 발출한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yssa)는 삼위일체 안에서의 단일성의 궁극적인 배경은 성부라고 주로 주장하고 있다. "세 인격은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는데, 그 세 인격의 일체성의 배경은 바로 성부이다." 그러므로 동방신학의 전통은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을 따라서 신성의 근원으로 "성부의 위격을" 강조한다.
2.2.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 : 본질(substantia) 중심의 삼위일체
서방 삼위일체론의 발전은 터툴리아누스부터 시작되는 데,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성"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의 계시 속에 나타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속 사역을 수행하는 경륜적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터툴리아누스는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에서 한 하나님이 셋으로 사역하심을 예수의 말씀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라는 예수의 말씀에서 하나(One)를 "혼자"(single) 혹은 "개인적"(individual)이 아닌 "한 본질"(una substantia, One Substance)이라고 말한다. 즉, 한 하나님은 어떤 숫자적이나 개별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구별되어지는 한 본질(una substantia)인 것이다. 여기서 터툴리아누스의 삼위일체론은 삼위의 관계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신성의 단일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신적 본질(One Substance)에 기반을 두고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킨 대표적 서방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캅파도키아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성부 하나님은 삼위의 관계성 속에서 성자와 성령의 근원(origin) 혹은 처음(principle)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캅파도키아 교부들과는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 이라는 말을 위격에 관해서만 쓰고, 본질에 관해서는 쓰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하나(One)는 위격의 하나가 아니라 본질의 하나이다. 즉 영원 가운데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곧 하나의 본질(One Substance)이라는 것이다. 이종성교수는 이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관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절대자, 단일자, 분할될 수 없는 자, 모든 범주를 초월한 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는 성서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으나, 하나님을 더 깊게 그리고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에 철학에서나 다른 종교에서 쓰고 있던 개념까지 동원하여 성서적 하나님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려고 했다. 그때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삼위일체론은 대체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자 관계를 위주로 해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점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자체 이해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을 절대 단일자로 이해했다."
서방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위격을 해석하는 본질 중심의 삼위일체론이다. 이와 같은 신학적 배경에서 서방교회는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를 정립하였는데 동일본질(homoousios)이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의 발출(procession)에 참여하신다는 것이다. 반대로 동방의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바탕으로 본질보다 위격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위격의 우위성은 캅파도기아 교부들에 의해 더욱 발전이 되는데 캅파도기아 교부들은 아들과 성령의 근원으로서 성부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다. 신성에 대한 단일한 근원인 성부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휠리오크베(filioque) 이론을 반박할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휠리오크베(filioque) 는 신성의 두 가지 원천, 즉 성부와 성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이해는 휠리오크베(filioque) 이론에 대한 양보할 수 없는 동방과 서방 교회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서방교회는 제3차 톨레도 회의(589년)에 공식적으로 휠리오크베(filioque) 이론을 받아들인 이후에 675년경에 휠리오크베 이론을 니케아 신경에 공식적으로 삽입함으로써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를 완성하였다. 반면에 다메섹 요한(John of Damascus, 750-850)과 포티우스(Photius) 같은 동방 신학자들은 휠리오크베(filioque) 이론을 반대하였다. 동방의 삼위일체론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을 보다 쉽게 구분하기 위해서 휠리오크베(filioque) 논쟁과 관련된 동방과 서방의 신학적 주제들을 다음의 몇 가지로 열거해 보려고 한다.
IV.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의 주요 주제들
1.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권위에 대한 강조
동방교회는 초대 에큐메니칼 공의회(the ancient Ecumenical Councils)에서 만들어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서의 권위를 중요시하고 있다. 동방과 서방 교부들의 합의 하에 신조서에 고백 되어진 모든 신앙고백들은, 특히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출되신다", 성령께서 동방과 서방 공교회들의 신앙을 인도하시기 위하여 영감을 주셨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만일 신조서의 어떤 내용을 바꾸거나 첨가할 것이 있으면 초대의 에큐메니칼 공의회와 같은 권위 하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방교회는 초대 공의회의 권위를 가지고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교리를 비난하면서, 휠리오크베 교리는 권위 있는 공의회를 통하지 않고 서방교회의 단독적인 삽입에 지나지 않으므로 휠리오크베 교리는 신학적으로나 권위적으로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the Roman Catholic Church)도 동방교회와 같이 초대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교황과 서방 카톨릭 교회의 전통 가운데 만들어진 모든 공의회도 초대 에큐메니컬 공의회와 똑같은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후대에 서방교회의 신조서에 삽입된 휠리오크베 교리의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한다.
2. "성령의 보내심"(sending)과 "아버지와 아들의 영"에 대한 해석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filioque, 그리고 성자로부터) 교리에 대한 주된 차이는 요한복음 15장 26절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내가 아버지께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라는 구절에서 서방교회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구원의 경륜 가운데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서도 똑같이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되신다는 것이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성령은 "아버지의 영" 혹은 "아들의 영"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성령의 발출에 함께 참여하신다는 것이다.
동방교회도 성령이 구원의 경륜 안에서 성자로부터 나아가심과 "그리스도의 영"되심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도 성령이 구원사적으로 성부와 성자의 파송(sending)을 받는 것을 인정하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구원의 경륜 속에서 나타내신다. 하지만 아들과 성령의 관계에 있어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별을 강조하는 동방 신학은 경륜적으로 나타나신 성령의 이중발출(double procession)이 내재적 삼위일체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즉 동방교회는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전통을 따라 성부의 주권을 신성의 유일한 뿌리와 근원으로 보면서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하듯이, 성령도 성부로부터만 단일하게 발출(proceeding)한다고 믿는다.
3. "신성"의 근원 : 성부의 위격이냐? 본질이냐?
휠리오크베 논쟁의 가장 핵심적인 신학적 이유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삼위일체에 대한 접근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비록 동방과 서방 모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서에서 형성된 근본적인 삼위일체 신학을 고백하지만 삼위일체를 해석하는 해석학적 방법론이 다르다. 동방교회는 삼위일체의 "한 본질"(una ousia)과 "세 위격체"(treis hypostases)를 해석하기 위해서 근본적으로 "본질"보다는 "위격"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또한 동방교회는 니케아 이전의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강하게 나타난 군주신론적 삼위일체론을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만 동방의 삼위일체론 안에는 군주신론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동방의 삼위일체론을 완성한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에서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군주신론적 삼위일체에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주권(monarchia)과 "신성의 근원"은 "성부의 위격"이라고 강조하면서 삼위 안에 한 하나님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성부의 위격 중심의 삼위일체론은 서방의 휠리오크베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발출은 성부의 주권적 사역인데 만일 성자가 성령의 발출에 참여 한다면 하나님의 단일한 주권(곧 성부의 주권)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동방교회는 성자가 두 번째 원리라거나 혹은 성부와 더불어 한 원리라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서방의 휠리오크베 교리를 비난한다.
동방교회가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성부의 위격"을 중심으로 발전시켰다면, 서방교회에서는 삼위의 신성이 즉 "본질"이 단일성의 원리이다.
서방교회는 하나의 신적 본질에 기반을 두고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 세 위격들이 내부적인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방교회는 신적 본질의 단일성을 크게 강조하면서, 그 단일성 안에 셋의 개념을 풀이하고 있다. 삼위의 "위격"보다 "본질"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서방교회는 성령의 발출에 있어서 성령의 나오심(proceeding)을 성부의 고유한 주권(monarchia)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성부와 성자는 각자의 위격으로 구분되기 이전에 단일한 본질이시므로 "신성의 근원"을 성부의 위격에만 국한시킬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말은 "성령의 발출"은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본질이신 성부와 성자의 이중 발출(double procession)인 것이다.
V.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에 대한 삼위일체적 전망
1.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위격의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논쟁은 근본적으로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관한 논의이다. 동방교회는 삼위 간의 내적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성부는 무출생자로서 "무출생성"(unbegottenness)을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서 갖고 계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의 내재적 관계에서 "출생성"(begottenness)과 "발출"(procession)의 신적 속성을 각각의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안에 소유하고 계신다. 하지만 삼위에서 성부의 수위성은 무출생성에 의해 보장되므로 성부는 신적 존재(ousia)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서 성부는 그 존재의 근원을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시지만 성자와 성령은 그 존재의 근원을 성부와의 영원한 존재 관계에서 성부에게 의존한다.
그러므로 성부만이 온전히 신성의 근원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발전한 동방의 삼위일체는 성부의 위격을 중심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성부와 성령의 관계"는 어느 정도 설명을 하였지만, 신성의 근원을 성부의 위격에만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성자와 성령을 성부께 종속시키는 종속론의 문제가 남아 있다. 또한 삼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동방교회의 진짜 문제는 "성자와 성령의 관계"의 불확실성에 있다.
이러한 동방교회의 종속론적 삼위일체의 문제점을 서방교회는 휠리오크베 교리를 통하여 극복하고자 시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휠리오크베 교리를 동방 신학의 문제점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 서방교회는,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성부의 위격"에 두지 않고 단일 존재로 보고 그 안에 세 위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서방교회는 하나님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위격들이 논리적으로 신적 본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은 성부의 위격이 아니고 삼위의 존재 양식의 근원이 되신 하나의 본질이다. 성부와 성자의 위격의 동일본질(homoousios)로부터 출발한 서방의 휠리오크베 교리는 본질적인 면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등한 관계"와 동방교회에서 해결하지 못한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비록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본질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휠리오크베 교리의 근본 원리는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대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적 개념의 위격(persona)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가 페르소나시요, 성자가 페르소나시요, 성령이 페르소나이시므로, 확실히 세 페르소나가 계시다"라고 말하므로 삼위일체 안에 세 분의 위격(persona)이 계심을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위격은 오직 그들의 관계성 안에서만 정의되고 구분될 수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고 있다: "또 하나님에 대한 말이 그 모두가 그의 본질에 관한 것도 아니다. 관계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자에 대한 성부의 관계나 성부에 대한 성자의 관계 같은 것이다...
오직 아들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성부라고 부르며, 따라서 아들도 오직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성자라고 부르는 것이므로, 이 명칭들은 본질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상호 관계에 대해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휠리오크베 교리는 "성부와 성자의 동등한 관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본질 중심의 삼위일체론에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위격들의 동등한 관계성에 대한 하나의 삼위일체적 대안이었다. 하지만 휠리오크베 교리가 "성령의 두 가지 원천"을 암시하는 것과 "성령의 위격"을 격하시켰다는 동방교회의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삼위일체적 대안으로 동방의 캅파도키아 교부들이 그들의 삼위일체론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내재적으로 동등한 관계성 설명하기 위해서 발전시킨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개념을 도입하고 싶다.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다음과 같이 perichoresis를 설명하고 있다: "perichoresis의 개념은 세 인격들이 각자의 개체성을 유지하는 한편 각각의 인격이 다른 두 인격의 생명을 공유함을 의미한다. 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하여 '존재 공동체'a community of being라는 이미지가 자주 상용된다. 존재 공동체 안에서 각 인격은 각각의 독특하게 구별되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인격들을 통찰하며 또한 다른 인격들에 의하여 통찰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하기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약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유일하신 성부 하나님 단독의 행위도 아니요,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독자적인 나타나심도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상호 공유적인 위격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존재 방식의 측면에서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교리를 보완할 수 있는 하나의 삼위일체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한 하나님이시지만, 위격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존재 공동체"(a community of being)를 형성하시며 각 위격은 각각의 독특하게 구별되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어느 한 위격도 다른 두 위격들과는 분리되어서 존재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영원 속에서 상호 공유적 관계로 존재 하시는 삼위의 하나님은 그 모습 그대로 계시의 역사 속에서도 상호 공유적 관계로 서로 도우시고 사랑하시며, 공유하시므로 우리들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원하신 상호 공유적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사역하시는 아들(곧 말씀)과 성령의 동등한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2.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아들과 성령의 상호 보완적 관계
우리는 앞의 논지에서 서방의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는 동방의 삼위일체 속에 내재된 성부의 위격에 대한 성자와 성령의 종속적 위험성과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침묵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신학적 대안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서방교회의 휠리오크베 교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에서 성령의 위치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를 보완하는 하나의 신학적 대안으로 상호 공유적 개념인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의 도입을 제안하였다.
내재적으로 상호공유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신을 그대로 구원의 역사 속에서도 상호공유의 관계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경륜에서 각기 다른 시점에서 다른 "존재의 양식"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적 관계 가운데 존재하시는 세 분의 위격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적 행위에 상호공유의 관계로 위격적으로 참여하시는 것이다. 내재적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상호공유의 관계는 경륜적인 창조 사역과 구원 사역에도 상호공유의 관계로 참여하셨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재적 상호 교통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시는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시는 과정에서도 서로 도우시며 사랑하시는 상호공유의 역동적 관계로 사역하신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서방의 필리오크베(filiouqe) 교리는 성자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이다. 성자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상에 있을 때 성령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구원사적으로 부활하신 성자가 성령을 파송하시기 전에, 성령이 먼저 성자를 파송했다.
휠리오크베(filioque) 교리가 온전히 주장되기 위해서는 신약 성경 속에서의 성령과 성자가 상호 공유(perichoresis)의 관계 속에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신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않된다. 공관 복음서는 삼위일체의 상호 공유적 관계 속에서 성령님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지상 사역을 이끄는 모습으로 묘사하신다. 즉, 성령이 메시아 위에 머물 것이라는 것은 메시야가 성령의 강림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마태와 누가에 의하면 성령이 예수 위에 머물게 된 것은 그의 성육신 사건부터이다. 마태복음 1:20절에 기록되기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즉, 성육신의 사건은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성자께서 우리의 인간성을 취하신 삼위일체적인 사건이다. 성령은 예수의 세례 때도 예수의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이 임하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성령이 확증하셨는데, 이것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마 3: 16-17). 시험을 받으실 때(마4:1),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마12:28) 등등 공관복음서에서 성령은 삼위일체적 교제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끄는 관계로 묘사된다.
그러나 바울과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보냄을 받으시고, 성자의 뜻 가운데 활동하신다. 요한은 기록하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요 14:16), 또한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5-26)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삼위일체적 교제 속에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파송 하시고 성령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서 모든 제자들을 말씀으로 양육시키시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또는 "아들의 영"으로 묘사하므로, 구원의 사역 속에서 아들이 성령의 사역을 주도하시는 관계로 말씀하고 있다(롬 8:9; 고후 3:17; 갈 4:6; 빌 1:19).
성자와 성령은 영원 전에 상호공유의 관계로 존재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계시된 구원의 역사 속에서도 동등한 자격으로 서로 도우시며 상호공유의 관계로 구원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
이러한 성자와 성령의 상호 공유적 관계를 삼위일체 신학 안에 회복시키는 것을 휠리오크베 논쟁(filioque controversy)에 대한 하나의 삼위일체적 대안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복음주의 조직신학회 발표 글/ 신문철 교수/ 개혁신학연구원)
출처: http://cafe.naver.com/systematic.c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