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번역의 문제*
강 창 구 교수(충남대학교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
1. 서론
일반적으로 번역학이 독자적 학문으로 성립된 시기를 20세기 80년대로 본다. 번역의 긴 역사를 생각하면 참으로 늦은 독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2년 한독문학번역연구소의 설립과 1993년 이 연구소의 학술지 번역연구 1호 발행을 시작으로 번역에 대한 학문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어 1999년 조직된 한국번역학회가 번역학연구를 발간하고, 2006년에는 한국번역비평학회가 번역비평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1) 그런데 이들 학술지를 통해 적지 않은 번역관련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음에도 기본적인 번역의 이론이나 방법론에 대한 연구는, 다시 말해서 체계적인 번역학 구축의 노력은 국제적 발전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20년 전에 번역학의 성립과 발전 경향에 대한 개관이 제시되어 논의의 단초가 마련되어 있었음에도2) 이를 이어가는 논문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3) 위의 학술지에 발표되는 논문들이 대부분이 실제 번역에서 부딪치게 되는 어려운 사례나 번역된 작품에 나타난 오류들을 지적하는 데에 머물고 있다. 1999년의 한국번역학회 창립총회에서 번역학이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일부 어문학 계열의 교수들에게도 그 명칭마저 생소한 형편”4)이라고 진단하거나 2006년에 창립하는 한국비평학회가 우리의 번역 논의가 여전히 오역시비에 그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5) 이런 사정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얼마 전 스티브 잡스의 전기 스티브 잡스 한국어판에 대한 ‘오역논란’은 여전히 이런 지적이 그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6)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문제는 관점에 따른 방법 선택의 문제임에도 이를 옳고 그름의 문제와 섞어 놓고 있어서다.
직역ㆍ의역의 논쟁은 역사가 깊다. 기원전에 이미 앞선 희랍문명을 받아들이느라 활발한 번역활동을 하던 고대 로마에서 원전의 ‘자구에 충실한’ 번역이냐 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번역이냐 하는 논쟁이 있었다.7) 결국 이때에 시작된 논쟁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 문제가 이처럼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는 것은 번역가들이 실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부딪치게 되고, 번역물의 독서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독자를 자극하는 문제이기 때문일 터이다.
번역의 문제는 문학작품의 경우 더욱 어려워진다. 문학텍스트는 소통을 위한 일반 텍스트와 달리 예술작품으로서 심미적인 기능까지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긴 번역론의 역사에서 문학번역이 항시 중심에 놓여온 이유이다. 세계화에 의한 문화권간의 급격한 교류 증가가 통번역에 대한 수요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번역 시장에서 문학의 비중이 아주 경미해진 오늘날에도8) 논의의 중심은 여전히 문학번역이다.
이 글이 의도는 번역사와 역사를 같이 하는 긴 직역ㆍ의역 논쟁의 원인을 번역의 기본성격에서 살펴보고, 번역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문학텍스트의 성격, 즉 ‘문학성Literarizität’의 성격을 번역의 관점에서 검토하려는 것이다. 앞의 것은 우리의 소모적인 오역논쟁의 지양에, 뒤의 것은 문학 번역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모색해 보려는 노력이다. 짧은 글에 성격이 두 과제를 담으려다 보면 마땅히 다루어야 할 부분을 지나치거나 다루는 문제를 무리하게 단순화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2. 번역의 이중 과제
번역의 역사는 문자가 성립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번역에 대한 논의 또한 오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번역에 대해 학문적 접근이 본격적으로 시도되기 전의 번역논의는 거의가 실제 번역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신의 번역작업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거나 실제 작업과정에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들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리고 이런 발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원문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본래의 뜻에 충실하게 옮기는 직역을 할 것이냐, 아니면 원문의 단어나 구절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의 뜻을 살려 옮기는 의역을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번역이 일차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이 문제는 모든 번역 또는 번역자가 짊어져야 하는 이중과제에서 나온다. 번역이란 하나의 언어, 즉 출발어로 된 텍스트를 다른 언어, 즉 목표어의 텍스트로 바꾸는 것이다. 이때 원칙적으로 출발텍스트와 목표텍스트는 언어만 빼놓고 나머지 모든 것에서 ‘등가Äquivalenz’관계9)를 가지는 것이 이상적이다. 번역자는 자신이 번역한 텍스트가 언어만을 빼고 출발텍스트의 모든 것, 즉 모든 내용과 형식뿐만 아니라 그 형식과 내용이 산출해 내는 의미와 효과까지도 동일하게 재현해 내어야 한다. 물론 없던 것을 더해서도 안 된다. 그러려면 번역자는 출발텍스트에 충실하여 원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 다른 한편 번역은 원전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니 만큼 번역을 읽을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목표어의 어법을 준수하고 목표어 공동체의 문화적 규범까지를 고려하여 옮겨야만 한다. 즉, 번역자는 원작과 작가의 의도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쉽게 이해하려는 번역 독자의 욕구도 충족시키는 이중의 과제를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중의 과제를 실제 번역에서 만족하게 수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두 언어는 독어와 영어처럼 가까운 친족관계에 있는 언어라 하더라도 구조와 용법이 완전히 같은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또 모든 언어에는 그 언어 공동체의 문화가 스며 있기 때문에 동시에 양쪽의 문화를 따르는 것도 불가능하다.10) 그러니 작가에 충실하다 보면 독자를 소홀하게 되고, 또 독자를 배려하다보면 작가를 소홀하게 된다. 번역자가 가지는 이중의 과제를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없는 이 딜레마, 여기에서 의역과 직역의 논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번역 논의에 있어서도 독일은 긴 전통을 가지고 있다. 루터의 성서 번역이 독일어에 미친 영향이나 그리스ㆍ로마 고전이나 셰익스피어의 수용이 독일문학에 미친 영향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의 번역학 발전에 대한 기여 역시 상당하다. 현재도 독일은 세계 제일의 번역국이다.11) 독일의 예에서 이 이중 과제의 해결을 위한 논의를 간단히 살펴보자.
「두 개의 번역원칙이 있다. 그 하나는 외국의 작가를 우리에게 데려와 그를 우리 작가로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와 반대로 우리가 그 낯선 이[작가]에게로 건너가서 그의 상황과 그의 언어방식과 그의 고유성에 빠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Es gibt zwei Übersetzungsmaximen: die eine verlangt, daß der Autor einer fremden Nation zu uns herüber gebracht werde, dergestalt, daß wir ihn als den Unsrigen ansehen können; die andere hingegen macht an uns die Forderung, daß wir uns zu dem Fremden hinüber begeben und uns in seine Zustände, seine Sprachweise, seine Eigenheiten finden sollen.12)」
외국의 작가를 데려와 우리 작가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은 번역된 그의 작품이 원래 우리글로 만들어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읽히게 번역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번역자가 원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번역함으로써 달성된다. 이것이 의역이다. 반대로 우리가 작가에게로 건너가 작가의 상황, 언어, 고유함에 빠진다는 것은 원본에 ‘충실하게’ 단어 대 단어 또는 자구 대 자구, 문장 대 문장을 그대로 번역하여 작가나 출발어 공동체의 상황이나 출발어의 특징과 작가의 문체적 특징 등을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직역이다.
그런데 텍스트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축어적으로 옮기면, 다시 말해 직역을 하면 구조와 어법에서 출발어와 다른 목표어의 일반적인 언어사용법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독자가 이해에 어려움을 얻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반대로 의미의 전달에 초점을 맞춰 출발어의 어법에 상관없이, 목표어의 일반적 어법에 맞게, 자유롭게 의역하면 원본의 형식이나 내용이 달라지는 위험이 따른다.13) 이것을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원본에 충실하여 원본
의 특징이 그대로 번역본에 드러나면 그것을 읽을 때 번역된 텍스트임을 쉽게 알 수 있고, 쉽게 이해하려는 독자의 욕구를 고려하여 자유롭게 한 번역은 마치 그것이 애초부터 목표어로 제작된 원본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하여 ‘드러난offen’ 번역, ‘숨겨진verdeckt’ 번역이라 하기도 한다.14) 독일의 논의에서는 번역텍스트를 읽을 때 출발어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되어 텍스트의 어법이나 관례가 자신들의 것과 다르다는 느낌을 주게 하는 직역을 ‘낯설게하는 verfremdend’ 방법이라 하고, 자신들이 말하는 어법이나 용례에 맞아 독일어 원작을 읽고 있다는 느낌을 주게 하는 의역을 ‘독일어화하는verdeutschend’ 방법이라 한다. 전자를 주장하는 대표하는 사람이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이며, 후자를 대표하는 이는 루터Martin Luther이다.
아다시피 루터는 자신의 성서번역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비난에 대응하여 「번역에 대한 공개서한 Sendbrief vom Dolmetschen」(1530)15)을 발표하여 자신의 태도를 밝힌다.
「집안의 아낙네, 골목의 어린애, 장터의 보통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또 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그들의 입을 쳐다보고 나서 번역하여야만 한다. 그래야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사람들이 자신들과 독일어로 말하고 있음을 안다.
man muß die Mutter im Hause, die Kinder auf der Gassen den gemeinen Mann auf dem Markt drum fragen, und denselbigen auf das Maul sehen, wie sie reden und darnach dolmetschen; da verstehen sie es denn und merken, daß man deutsch mit ihnen redet.16)」
이렇게 읽을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목표어의 어법에 맞게 옮기는 것이 바로 독일어화[국어화]하는 번역이다. 이러한 번역은 당연히 출발어에 비교적 덜 얽매게 되는, 다시 말해서 자유로운 번역, 의미중심의 번역, 의역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덧붙여 두어야 할 것은 루터는 독일어에 정리되어 있지 않은 개념들, 특히 신학적인 용어들은 독일어의 통용성에 상관없이 자구적으로 번역하여 원래의 개념이 뒤틀려지는 것을 예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니까 루터는 자유로운 번역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할 경우 축어적 번역도 피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17)
루터에 대립적인 태도는 19세기 번역논의 중에서 가장 중요한 슐라이어마허의 번역의 여러 방법에 대하여Ueber die verschiedenen Methoden des Uebersetzens(1813)에 나타난다. 그는 우선 단지 내용을 전달하는 텍스트와, 언어의 독특한 형식이 텍스트의 내용과 더불어 “보다 높은 질서의 통일체 eine Einheit höherer Ordnung”18)를 이루는 텍스트를 구별한다. 일상생활에 대한 정보나 신문기사처럼 사실을 전달하거나 물건을 설명하는 텍스트들이 전자로, 여기서는 언어가 단지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문학이나 철학적인 글은 내용과 형식이 통일을 이루는 텍스트이다. 이해와 해석 그리고 번역 가능성과 같은 번역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런 텍스트들이고, 문제가 되는 것도 이런 텍스트이다. 즉, 그에게 번역은 이해하고 이해시키는 해석학적 과정이 전제되어 있다.19)
엄격히 말하자면 이런 텍스트는 ‘번역할 수 없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말해지는 것, 즉 내용과 그것을 언어로 엮어내는 방식, 즉 형식이 개별 언어의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언어가 내용을 담은 그릇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내용이 되거나 또는 내용을 결정한다. 바로 이것이 정신과학을, 언어 밖의 사실을 다루는 자연과학과 구별하여, 다른 방법으로 연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언어가 지시하는 언어 밖의 사물이나 사실만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의미하는 그것까지를 포착해야만 한다. 또한 이런 언어에는 말하는 사람인 저자 자신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기도 하며, 더 나아가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정신Geist der Sprache”20)까지 나타난다. 그러니까 이러한 텍스트를 번역하려면 텍스트의 내용만이 아니라 출발어의 특징, 저자의 개성, 문화적 역사적 배경까지도 이해하고 해석하여 이를 번역에 함께 실어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렇게 언어의 정신까지 전달해 주어야 하는 까다로운 텍스트의 번역 방법으로 두 가지를 구별하여 제시하는데, 그 이유를 종래 통용되는 충실이냐 자유냐 하는 관점을 넘어 보다 철학적으로 제시한다. 그 하나는 작가로 하여금 마치 독일 사람이 독일 사람에게 말하고 썼을 것처럼 번역을 하여 번역이 마치 원본 같이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모국어에서 ‘생각과 언어가 하나’21)라는 언어관을 가진 그에게 실행이 불가능한 방법이다. 그리하여 원본의 언어의 정신이 번역에서도 전달될 수 있는 번역을 위해서는 할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그러니까 번역자는 자신의 독자에게 교양 있는 독자가 원어로 된 작품을 읽을 때에 느끼게 되는 그런 이미지와 그런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만 한다. 이때 교양 있는 사람이란 우리가 좋은 의미의 애호가 및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으로 그 외국어에 능통하여, 전체를 파악하기 전에 학생들처럼 하나하나를 먼저 다시 모국어로 옮겨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여전히 낯설어 작품의 아름다움을 마음대로 즐길 때에도 언제나 그 언어의 모국어와의 차이성을 의식하는 그런 사람이다.
und der Uebersetzer muß also sich zum Ziel stellen, seinem Leser ein solches Bild und einen solchen Genuß zu verschaffen, wie das Lesen des Werkes in der Ursprache dem so gebildeten Manne gewährt, den wir im besseren Sinne des Worts den Liebhaber und Kenner zu nennen pflegen, dem die fremde Sprache geläufig ist, aber doch immer fremde bleibt, der nicht mehr wie die Schüler sich erst das einzelne wieder in der Muttersprache denken muß, ehe er das Ganze fassen kann, der aber doch auch da wo er am ungestörstesten sich der Schönheiten eines Werkeserfreut, sich immer der Verschiedenheit der Sprache von seiner Muttersprache bewußt bleibt.22)」
출발어의 언어 정신마저 드러내면서 동시에 원본처럼 보이는, 그러니까 원본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번역본의 독자가 원본처럼 느끼는 그런 번역이 불가능한 만큼 목표를 한 차원 낮추자는 말이다. 먼저 출발어를 능숙히 구사하고 출발어 공동체의 문화에 정통하나 그렇다고 하여 출발어가 모국어는 아닌 교양 있는 사람을 설정한다. 이 사람은 출발어에 능통하므로 원본을 읽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모국어로 된 텍스트는 아니므로 독서과정에서 출발어와
목표어의 차이성을 늘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번역의 목표를 이 독자가 원본을 읽을 때에 느끼는 출발어의 이질성을 목표어의 독자가 번역본을 읽을 때에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두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본에 충실한 번역에 무게를 둔 주장인 셈이다.
20세기에도 두 번역관의 대립은 계속되고 있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다른 이유에서 원본에 충실한 번역을 주장한다. 그는 어떤 예술작품도 독자나 청중이나 관람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23) 전제하에 “진정한 번역은 투명하다. 그것은 원작을 은폐하지 않으며, 원작이 빛을 받는 데에 방해하지 않는다. 번역은 다만 저 순수 언어의 빛이 자신이 매개로 더욱 강화되어 그만큼 더 충만하게 원전 위에 떨어지게 할 뿐이다.”24) 물론 이 주장은 문학번역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번역학이 체계화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대립은 여전하다. 언어학적인 연구방법에 무게를 두는 독일의 ‘라이프치히학파Leibziger Schule’ 등은 등가관계에 무게를 둔 이론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원전에 비중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출발텍스트의 은유나 강조기법, 주제의 전개, 방언이나 은어 같은 언어적 특성 등을 목표텍스트에서도 같은 정도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무역, 외교, 문화 등의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국가간, 문화권 간의 교류가 일상이 된 지금은 번역되는 텍스트의 종류가 한없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번역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어 번역에 대한 접근도 다양해지면서 무엇보다 텍스트의 기능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수용자들이 필요에 의해 위탁한 텍스트를 번역해야 하는 경우 먼저 번역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그것의 실현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류에 맞춰 수용자를 중시하는 이론의 대표적인 것이 스코프스이론Skopostheorie25)이다.
이상의 논의 과정에서 확인되는 일이지만 작가를 존중할 것이냐 독자를 먼저 배려할 것이냐, 또는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대립되는 주장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앞에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선택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택은 주로 텍스트의 성격에 달려 있다. 실용적인 텍스트의 번역은 독자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으며, 문학번역을 중심에 두고 논하는 이들은 원작에 무게를 둔 주장을 편다.26) 실제의 번역 예를 보아도 그렇다. 번역의 대표적인 예로 든 루터의 성서번역은 근 오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두루 읽힐 만큼 명번역의 예가 되고 있으며, 슐라이어마허의 번역관을 따른 낭만주의 시대의 번역들도 셰익스피어나 그리스의 고전작품들을 독일화했다는 평을 듣는 명번역들을 낳아놓았다. 사실 명번역들은 두 방법을 절충하고 있다고 하겠다. 직역을 주장하는 사람도 가독성을 무시하지 못하며, 의역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상황에 따라 자구적 번역을 피하지 않는다. 루터가 신학 개념들을 축어적으로 번역하고, 슐라이어마허의 방법은 최상이어서가 아니라 언어관과 문학관에 따른 부득이한 선택이었음은 이미 보았다. 앞의 괴테 인용은 괴테가 뷜란트Christoph Martin Wieland에 대한 추도사에서 그의 번역 업적을 거론하는 부분에서 나온 말로,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두 방식의 장점들은 모범적인 예들을 통해 모든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다. 여기서도 중도를 찾으려는 우리의 친구는 두 가지를 결합하려고 애썼지만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감성과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서 첫 번째 방식을 우선하였다.
Die Vorzüge von beiden sind durch musterhafte Beispiele allen gebildeten Menschen genugsam bekannt. Unser Freund, der auch hier den Mittelweg suchte, war beide zu verbinden bemüht, doch zog er als Mann von Gefühl und Geschmack in zweifelhaften Fällen die erste Maxime vor.27)」
3. 문학번역의 문제
텍스트의 유형Typ은 번역의 방법을 결정하는 데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유형이란 기사, 편지, 소설, 광고 등의 다양한 텍스트 종류들을 텍스트의 기본적 성격 또는 기능에 따라 크게 범주화한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에 여러 기능이 동시에 있을 경우에는 그 중요도에 따라 기능들 사이에 위계가 생기고, 그에 따라 유형이 결정된다. 유형이 번역에 중요한 것은 텍스트의 유형이나 종류에 따라 원본과 번역본의 등가관계를 따질 때에 등가의 위계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번역전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28) 유형 분류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하고 있는데, 예컨대 라이쓰K. Reiß는 뷜러Karl Bühler의 언어의 기본기능 이론을 원용하여 내용 중심의 정보텍스트informative Texte, 수용자의 심리변화를 노리는 작전텍스트operative Texte, 그리고 미적 표현이 중요한 표현텍스트expressive Texte의 세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29) 그리고 표현텍스트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문학텍스트이다. 여기서는 문학번역의 문제를 다루는 만큼 간단히 문학 텍스트와 그 외의 텍스트로 나누어서 본다. 문학의 세계는 허구의 세계이니 만큼 허구텍스트Fiktive Text와 사실Sachtext로 나눌 수도 있다.
문학 텍스트가 사실 텍스트와 구별되는 것은 문학텍스트의 언어가 일반적인 언어와 다른, 다시 말해서 일반적 규칙에서 벗어난 ‘일탈적 언어abgewichene Sprache'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문학 번역의 이론과 방법을 체계화하는 데에도 일반 번역이론에서와 다른 점을 고려하여야만 한다. 이미 언급된 바지만 문학텍스트는 일반 텍스트의 주기능인 정보 전달뿐만 아니라 심미적 기능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만큼 더 복잡하고 더 어렵다.
그것은 이중적으로 그러하다. 첫째, 일탈적 언어 사용을 형식주의이나 구조주의의 말을 빌려 말하면, 문학텍스트를 이루는 언어기호들은 “이차적 질서의 기호체계ein Zeichensystem zweiter Ordnung”30)로서 사실을 전달하는 일반 텍스트의 일차적 기호체계와 다르다. 형식주의의 중심 개념인 ‘낯설게하기 Verfremdung’는 바로 이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일차적 기호체계와 다르면서 나름대로의 ‘이차적’인 질서 또는 규칙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시학이나 문예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뛰어난 문학작품은 이러한 규칙과 전통을 뛰어넘어 새로운 기법이나 형식을 개발하거나 개선한 작품들이다. 모든 작품들이 ‘일회적einmalig’이기는 하지만 이런 뛰어난 작품들의 일회성은 더욱 뚜렷한 것이다. 이런 문학작품의 특성이 다음 인용에 잘 나타나 있다.
「시학의 원래 대상은 문학텍스트에 들어가 그 텍스트들의 특별한 영향을 결정하는 특별한 규칙성들이고, 그와 더불어 결국은 그러한 구조를 만들어내고 그 영향을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 즉 시적 능력이라고 하는 어떤 것이다.
Der eigentliche Gegenstand der Poetik sind die besonderen Regularitäten, die sich in literarischen Texten niederschlagen und deren spezifische Wirkung bestimmen, und damit letzten Endes die menschliche Fähigkeit, solche Strukturen zu produzieren und ihre Wirkung zu verstehen, also etwas, was man poetische Kompetenz nennen könnte.31)」
일반 텍스트의 규칙과는 다른 문학의 특별한 규칙성과, 규칙성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적 구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이해하는 시적 능력이 시학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문학의 특별한 또는 이차적 규칙성은 하나의 텍스트를 문학이 되게 한다. 이것에 의해 ‘문학성Poesität/ Literarizität’이 산출된다. 두 번째의 대상인 시적 능력은 하나의 문학작품을 다른 문학작품들과 다르게 하거나 또는 그것들보다 뛰어나게 하여 문학텍스트간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게 한다.
문학번역이 번역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은 바로 번역 일반이 공통으로 지고 있는 과제와 더불어 문학텍스트의 문학성을 다치지 않고 옮겨야 하는 또 다른 과제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시학의 두 번째 대상은 텍스트마다의 개별적인 것으로 일반화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문학성을 산출하는 일탈적 언어 사용과 더불어 문학 텍스트를 일반 텍스트와 구별해주는 또 하나의 특징은 문학텍스트가 구현하는 세계가 실제 현실세계와는 다른 허구의 세계이며, 그래서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실제 현실과 다른 독립된 현실이라는 점이다. 언어의 일탈성이 무엇보다 시에서 두드러진다면, 이 허구성은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32) 이 허구성은 무엇보다 문학텍스트가 작가라는 사람에 의해 생산되어, 예술작품으로서 유통되며, 수용자에 의해서도 사실텍스트와는 다르게 수용되는 사회문화적 전통과 이것들의 연관에 의해 구성된다. 동일한 내용, 같은 글이라 하더라도 소설 속의 그것은 신문이나 논문에 실렸을 때의 그것과는 달리 허구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1) 허구성Fiktionalität
문학 텍스트가 제시하는 사건은 작가의 머리 속 사건이자 독자의 머리 속에서 재구성되는 허구 세계의 사건이다. 소설, 특히 사실주의적 소설은 현실의 모방임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 속에 전개되는 사건은 소설 밖의 사건, 예컨대 신문기사의 내용과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텍스트의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의 사건으로 현실 세계가 아닌 텍스트 내 세계의 일이다. 설령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의 인물들과 일치하고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나 지리적 내용이 실제와 일치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예컨대 클라이스트의 O 후작부인 Die Marquise von O...은 “무대를 북에서 남으로 옮겼을 뿐인 실제 사건Nach einer wahren Begebenheit, deren Schauplatz vom Norden nach dem Süden verlegt worden”란 부제를 붙이고, 사건의 무대나 등장인물들을 알파벳 머리글자로만 밝혀 실제 인물이나 장소를 감추려 한다는 인상을 주어 실제의 사건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문학적 기교일 따름이다. 또 어떤 작가는 이와는 반대로 독자들이 작품 속의 사건을 사실로 여길 것을 우려하여 작가가 독자들에게 사실로 착각하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독자들이 사실이나 다름없는 사건임을 믿게 하려는 기교이다. 이러한 현실성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문학텍스트의 세계와 사건을 텍스트 밖의 인물이나 사실과 관련되어 있는 사실텍스트들의 내용과는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주지하다시피 사실 텍스트의 내용은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사실 텍스트의 번역자는 텍스트와 현실과의 괴리를 발견하였을 경우 텍스트를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학텍스트의 경우 번역자는 그에 반하여 그와 같은 괴리가 바로 작가의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수정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의미를 읽어내려 애쓰게 된다.
「열여섯 살의 칼 로스만이 - 한 하녀가 그를 유혹하여 그의 애를 낳았기 때문에 가난한 부모들에 의해 미국으로 보내져 - 뉴욕의 항구로 들어갈 때 이미 속도가 느려진 배 위에서 이미 오랫동안 보고 있던 자유의 여신상이 갑자기 더 강렬해진 햇빛을 받는 것을 보았다. 칼을 든 팔이 마치 새로이 뻗은 것처럼 솟아올랐고 그 주위를 자유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Als der sechzehnjährige Karl Roßmann, der von seinen armen Eltern nach Amerika geschickt worden war, weil ihn ein Dienstmädchen verführt und ein Kind von ihm bekommen hatte, in dem schon langsam gewordenen Schiff in den Hafen von New York einfuhr, erblickte er die schon längst beobachtete Statue der Freiheitsgöttin wie in einem plötzlich stärker gewordenen Sonnenlicht. Ihr Arm mit dem Schwert ragte wie neuerdings empor, und um ihre Gestalt wehten die freien Lüfte.33)」
이 인용은 카프카의 아메리카Amerika 시작 부분이다. 주인공이 배를 타고 뉴욕의 항구로 들어서면서 대면하게 되는 자유의 여신상이 손에 칼을 들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여신상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횃불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을 기술하는 텍스트라면 번역자는 이를 바르게 고쳐 놓거나 주석을 달아 오류임을 지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메리카를 번역하는 사람은 그것이 문학작품임을 알고 이를 고치지도 주석을 달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것을 바로 작가가 의도적인 왜곡으로 보고 분명하게 그대로 번역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현실세계의 요소들 역시 작품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작품 세계의 독자적인 원칙에 따라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의 세계가 현실세계에서 독립되어 있다는 것은 작품 속의 사건이 이 허구성을 근거로 사실텍스트의 경우와 달리 취급되게 되는 것에서도 분명해진다. 소설 속의 살인사건은 수사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그것이 신문기사일 경우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소설 속의 발언은 언어가 명시적으로 말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보다 큰 관련성 속에서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다른 뜻, “보다 깊은 뜻 tieferen Sinn”34)을 지니게 된다. 이때의 관련성이란 텍스트가 소설이나 비극 등으로 제작되어, 시장에서 문학작품으로 유통되며, 수용자들 역시 문학작품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사정의 관련성이다. 그리하여 칼을 쥐 여신상은 횃불을 든 현실의 여신상과 대비되고, 그럼으로써 새롭게 특별한 의미가 생겨나고, 그것이 칼을 든 실제 여신상의 의미를 뛰어넘는 깊은 뜻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작품 속의 사건은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장소에서 특정 인물들에 의해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현실에서의 이런 구체적인 사건은 실제로 법률적 사회적 책임을 지게 되지만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난다. 그러나 문학작품 속에서의 사건은 그런 책임이 없는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허구이기 때문에 개연적인 사건이 되고, 그래서 전범적 성격을 띄게 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인정되는 문학의 존재 이유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그 사건은 현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유사한 사건들에 대한 분석이고, 해석이고, 처방이 된다. 결국 작품 속의 허구적 사건은 작품 밖 현실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되고 해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허구성과 관련된 번역의 문제는 텍스트의 가상이 사건을 어떤 관련성 속에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를 해결하는 일이다. 이 관련성은 문학 내의 장르나 양식, 또는 문학사적 전통 등과 작품 외적인 문화적, 사회ㆍ역사적 배경 등과의 관련성이다. 따라서 문예학적 지식과 더불어 출발어 공동체의 사회ㆍ문화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고 있어야만 바른 번역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2) 일탈의 언어
문학텍스트는 사실 텍스트와는 다른 관련성 속에서 유통되고 심미적 관점에서 수용된다. 다시 말해서 독자로서의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제시하는 일들이 허구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임을 예상하면서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세계가 그 자체 내의 독자적 세계가 되게 하는 일반적인 관례들과, 문학사적이고 문학어사적으로 형성된 언어적, 문체적 그리고 예술적 규범들에 대한 지식, 그리고 상상력과 같은 문학 감상에 필요한 개인적인 심미적 능력을 동원하여 텍스트를 수용한다. 그리고 이때 기대하는 것은 심미적, 예술적 감동이다. 이때 문학텍스트가 주는 심미적 성격은 무엇보다 독특한 언어의 사용에서 나온다. 시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일반적 어법에서 벗어난 일탈의 언어에 있다는 말이다. 형식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런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을 알아보게는 하나 제대로 보게는 해주지 않는 일상어의 관성적 작용을 깨부수어 그것들이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는 적절한 수단das geeignete Mittel, den Automatismus der Alltagssprache, die uns die Dinge zwar wiedererkennen, aber nicht eigentlich sehen läßt, zu durchbrechen, so daß sie uns in ganz neuem Licht erscheinen können.”35)이다. 운율의 사용이나 은유와 같은 수사기법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일상어와 다르기는 하지만 다름대로의 전통과 법칙이 있다. 그래서 이 일반적 용법에 벗어나지만 다름대로의 규칙을 지키는 문학어를 이차적 질서의 기호체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통과 법칙 역시 끊임없는 파괴의 위험에 처해 있다. 심미적 가치의 많은 부분이 독창성 내지 개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작가는 끊임없이 전통적 형식을 변형하거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운율은 더 자유로워지고, 리듬은 유연해지며, 은유는 더 대담해 진다. 이처럼 작가는 종래의 언어를 확대하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낸다. 이들에게 언어는 사실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그 목적 자체인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어나 구문은 종래의 사전적, 지시적 의미와는 다른 함축적, 내포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의미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종래의 의미와의 관계에서 다의성도 생긴다.
언어의 일탈적 사용에서 나오는 다의성은 문학어의 중요한 특성이다. 사실 텍스트가 일의성을 지향하여 일반적 용법에 따르는 명료한 어휘를 선택하고, 올바른 문법에 따른 문장을 구성하여, 여러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능한 한 없애야 하는 반면에 문학텍스트는 독특하게 사용된 언어, 다시 말해서 통상적 관례에 따르지 않는 어법을 사용함으로써 통상적인 의미에다 새로운 의미를 더하여 다의성을 산출하는 것이다.
문학어의 이 일탈의 언어는 텍스트의 모든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다. 시의 두운이나 각운의 음성적 요소에서부터 어미나 품사의 종류, 문장의 형태 같은 문법적 요소, 은유나 환유와 같은 의미적 차원, 텍스트의 구성과 같은 전체 텍스트 차원에서도 가능하다.36) 물론 이런 텍스트의 내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맥락이나 독자의 기대 등과 같은 텍스트 외적 요소들과의 관계에서까지 가능하다.
이렇게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는 문학텍스트를 번역할 때 번역본 역시 원본이 지닌 예술적인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언어의 일탈이 다양한 층위에서 일어나는 만큼 그 해결도 난이도에 편차가 많다. 목표어에 출발텍스트의 어휘나 용법, 또는 형식에 상응하는 언어적, 문학적 수단이 있으면 다행한 일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수단이 전무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새로운 문학전통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37)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유럽어의 다양한 운율이나 각운법 등은 어절의 강약이나 장단이 없다시피 한 우리말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원작이 지닌 다의성, 또는 불확정성도 원작이 출발어 독자에게 허용하는 만큼 목표어 독자에게도 허용해야만 한다. 그래야 번역본의 독자도 원본의 독자와 마찬가지의 심미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번역자는 자신이 번역과정에서 수행한 해석을 가지고 다의성을 줄이거나 불확정성을 해소해 버려서는 안 된다. 다의성 번역의 어려움은 다양한 의미를 최대한 이용하는 말장난을 옮길 때에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따금은 한계에 부딪치게 하여 번역의 불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것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Alice in Wonderland를 번역한 사람들이 토로하는 어려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번역을 포기하고 주석을 달아 설명해 주는 것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말장난의 묘미, 즉 문학성이 사라지고 말게 된다.
이렇게 번역의 불가능한 문학 텍스트가 적지 않다. 특히 시의 경우가 그렇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양한 차원에서 일어나는 번역의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을 몇 가지 예를 살펴보는 것으로 줄이자. 그 해결에서도 일탈적 언어 사용에서 생기는 음악성이나 이미지 또는 다의성과 더불어 허구텍스트냐 사실텍스트냐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 내적, 사회문화적, 상호텍스트적 관계 등도 당연히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먼저 언어 단위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일탈적 사용이다. 예를 들어 음성적, 음운적, 형태적, 어휘적 유사성을 근거로 생기는 언어의 연상이 심미적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있는데, 언어 외적인 사물이나 사실을 말하면서도 그 표현에 나온 언어들 간의 관계로 이런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이때 언어 외적 사실보다 언어 내적 관계에서 생기는 효과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이를 위해 외적인 사실이나 관례를 바꿀 수도 있다. 소월의 「산유화」에서 “갈 봄 여름 없이”라고 일상적 어법과 다르게 쓴 것처럼 번역에서도 원본의 음성적 느낌을 전하기 위해 원본의 단어와 뜻이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모차르트의 이태리어 돈조반니 Don Giovanni의 1막 5장에서 돈조반니가 농락한 여자의 수가 1800이나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사를 독일어로 번역할 때 음성적 효과를 위해 tausendachthundert가 아니라 tausend로 번역하는 것이다.38) 말하자면 단어를 바꿈으로써 생기는 음향효과가 여자의 수를 1800를 1000으로 바꿈으로서 입게 되는 의미 손실보다 심미적 관점에서 더 크다는 것이다. 소설이나 희곡의 경우 앞 부분에 앞으로의 진행이나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 제공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포착해서 번역에 제시하지 못하면 감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런 구조적 특성 역시 언어내적 의미관계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처럼 원본의 언어내적 의미를 목표어로 옮기는 어려움만 있는 게 아니다. 출발어 공동체와 목표어 공동체의 사회문화적 차이가 어려움이 되기도 한다. 사회문화적 의미는 특정 문화나 국가, 사회적 그룹, 종교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미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할 때 생긴다. 그것들은 번역할 때 목표어 공동체의 문화적 특성과의 관련에서 또는 일정한 소통상황과 연관시켜 생각해야 한다. 파우스트Faust 1부에서 마녀의 묘약을 먹고 젊어진 파우스트가 길거리에서 그레첸을 처음 만나 수작 거는 장면에서 그레첸의 대사 “Bin weder Fräulein, weder schön,/ Kann ungeleitet nach Hause gehn.”의 Fräulein을 많은 우리말 번역이 ‘아가씨’라고 하여 순결한 그레첸으로 하여금 자신은 처녀가 아니라는 뜻이 되어 버리게 번역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시대의 변화에 달라진 문화적 상황을 번역에 반영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일이다.
사회문화적 의미들은 해당 언어만이 가지는 뜻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옮길 경우 부득이하게 주석의 형태를 띠어야만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함부르크의 환락가인 Leeperbahn을 옮길 경우 그냥 레퍼반으로서는 그것이 지닌 함축적인 의미가 전달되지 않으므로 ‘함부르크의 한 구역 레퍼반’, 또는 ‘함부르크의 환락가 레퍼반’, 경우에 따라서는 ‘북독일 항구도시 함부르크의 환락가 레퍼반’과 같은 식으로 옮겨야만 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또한 문학텍스트들은 다른 작품이나 다른 작가와 다양한 방식으로 연관시킴으로써 소위 상호텍스트적 의미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 역시 이와 비슷한 번역의 문제를 낳는다.
마무리
지난 세기 후반의 번역학에 대한 활발한 논의의 배경으로 급격한 세계화에 따른 각 분야에서의 번역활동의 증가를 든다. 사정은 우리에게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번역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번역 활동을 검토하는 번역비평이나 유능한 번역가 양성을 위한 교육의 바탕이 될 번역학 구축에 대한 노력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긴 번역 논의의 중심에 서온 직역/의역 논쟁은 저자에게 충실하고 독자에게 봉사해야 하는 번역의 이중 과제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문제이어서 논의가 반복되는 것은 당연하나 이것을 빈번히 오역문제와 섞어서 논의하는 것도 그렇다. 직역이나 의역을 선택하는 것은 텍스트의 성격이나 번역의 목적에 따른 번역자들의 선택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번역 논의에서 언제나 중심에 놓이는 문학번역은 문학 텍스트의 언어가 내용의 전달 수단으로 쓰이는 일반 텍스트와 달리 심미적 기능까지 담당해야 하는 점에서 일반 텍스트의 번역과 다른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즉 원전의 문학성도 손상되지 않게 번역하여야 하는 것이다. 문학성은 일반적인 언어 사용과 다르게 사용되는 문학어의 일탈성과, 일반 텍스트와 다르게 생산되고 유통되고 수용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허구성이다. 따라서 출발어의 일탈적인 언어사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이의 효과적인 재형상화를 통해 원본의 효과가 번역에서도 동일하게 얻을 수 있어야 하고, 또 작품의 허구적 사건이 상호문학 텍스트적,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생겨나는 보다 깊은 의미를 목표어 공동체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도 달성되도록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번역에 대한 논의를 어렵게 하는 것은 번역과정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번역자의 주관적 요인이다. 번역방법의 선택, 번역자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번역자 개인의 성향과 능력, 번역의 목적, 전략의 선택 등이 다 그런 요소들이다. 그러니 하나의 텍스트의 번역이 번역자마다 다르고, 동일한 번역자라 하더라도 시간이 다르면 번역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번역의 기본조건이다. ‘좋은 번역은 사랑의 노동에서만 나온다’는 말은 이런 어려움의 극복을 위한 번역자의 태도를 지적한 말이라 하겠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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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이 연구는 2010년도 충남대학교 학술연구비에 의해 지원되었음.
1) 유감스럽게도 번역연구는 2002년 10호로, 번역비평은 2009년 3호로 중단되고 말았다. 다행히 번역학연구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년 2회 발행하다 2008년186 독어교육 제55집부터 4회씩 발행하고 있다. 한 호에 대략 10편의 논문이 실리고 있으니 한 해 대략 40편의 번역 관련 논문이 나오는 셈이다.
2) 심재기: 「최근 문학번역 이론의 흐름과 번역비평의 나아갈 길」, 번역연구 제1집 (1993), 67-104쪽.
3) 이상섭: 「외국어문학 교육에 있어서 번역 훈련의 필요성」, 번역연구 제4집(1996).
4) 유명우: 한국의 번역과 번역학, 번역학연구 창간호 (2000), 229쪽.
5) 교수신문 2007. 03. 02.
6) 2011. 11. 20자 한겨레 인터넷신문.
7) Judith Woodsworth : Geschichte des Übersetzens, in: Mary Snell-Hornby et. al. (Hg.): Handbuch Translation, 2. verb. Aufl. Tübingen: Stauffenburg 2006, 39 쪽 참조.
8) 독일의 경우 번역에 종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문학전문 번역가는 전체 번역가의 1% 이하라고 한다. Peter Schmitt: Marktsituation der Übersetzer, in: Mary Snell-Hornby et. al. (Hg.): Handbuch Translation, 9쪽 참조.
9) 어떤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재현하였을 경우 이 등가관계가 번역을 번안, 요약, 설명 등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실제 번역에서 글의 내용, 형식, 기능 등이 동시에 등가를 이루도록 번역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러 종류의 등가를 구분하기도 한다. 번역 논의에서 등가관계를 강조하는 Werner Koller는 1) 외연적denotativ, 2) 내포적konnotativ, 3) 텍스트규범적textnormativ, 4) 실제적pragmativ, 5) 형식적-심미적formal-ästhetisch 등가로 구별한다. 이것들은 텍스트의 종류에 따라 다른 비중으로 고려된다. 이때 비중의 차이가 소위 ‘등가의 위계 Hierarchie der Äquivalenz’를 이루게 된다. Vgl. Werner Koller: Einführung in die Übersetzungswissenschaft, 7., aktualisierte Aufl. 188- 272쪽.
10) Wilhelm von Humboldt의 언어관이나 Sapir-Whorf-Hypothese 참조.
11) Vgl. UNESCO의 Index Translationum (http://www.unesco.org/xtrans/) 참조.
12) Johann Wolfgang von Goethe: Drei Stücke zum Thema Übersetzen, Hans Joachim Störig (Hg.): Das Problem des Übersetzens, Darmstadt: Wiss. Buchgesellschaft 1963, 35쪽.
13) 예컨대, 이해를 돕기 위한 출발텍스트의 사례가 목표어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다른 사례로 바꿀 때 같은 경우이다.
14) Vgl. Alena Petrova: Was macht literarische Übersetzung literarisch? (2008년 VI. Insbrucker Ringvorlesung zur Translationswissenschaft의 ppt.)
15) 당시 dolmetschen은 übersetzen과 구별 없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16) Martin Luther: Sendbrief vom Dolmetschen, in: Störig: 앞의 책 21쪽.
17) Koller는 루터의 최종 기준은 신학적 원칙이라 한다. Werner Koller, 위의 책 39쪽 참조.
18) Werner Koller, 위의 책 41쪽.
19) 슐라이어마허는 언어가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쓰인 텍스트 옮기기를 ‘dolmetschen'이라 하여 'übersetzen’과 구별하여 번역 논의에서 제외한다.
20) Schleiermacher, Störig의 앞의 책 41쪽.
21) 훔볼트Humboldt로 대표되는 독일 낭만주의의 언어관으로 ‘언어의 정신’이란 말도 이런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Schleiermacher, Störig의 앞의 책 60쪽. 또는 Radegundis Stolze: Übersetzungstheorien: eine Einführung, 3., aktualisierte Aufl. Tübingen: Narr 2001, 30쪽 참조.
22) Schleiermacher, Störig의 앞의 책 51쪽.
23) 발터 벤야민 (황연산ㆍ김영옥 옮김): 「번역가의 과제」, 번역비평 창간호 2007, 186쪽 참조.
24) 같은 글, 195쪽. 또는 Walter Benjamin: Die Aufgabe des Übersetzers, Störig의 앞의 책 192쪽.
25) 스코포스란 목적이란 의미의 그리스 말로,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번역의 목적이고 목적은 독자의 요구에 따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론으로 Katharina Reiß와 Hans Vermeer: Grundlegung einer allgemeinen Translationstheorie에 의해 시작되었다.
26) 네델란드, 벨기에, 이스라엘 등에서 문학번역을 ‘기술적descriptive’으로 연구하는 일군의 연구자들을 일컫는 소위 “조정학파Manipulation School”은 “모든 번역은 어떤 목적을 위해 원전을 어느 정도 조정하지 않을 수 없다. all translation implies a certain degree of manuplation of the source text for a certain purpose”라고 인정하고 자신들의 방법이 ‘목표 중심적target-oriented’임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Mary Snell-Hornby: The Turns of Translation Studies, 47-50쪽 참조.
27) Goethe, 앞의 곳.
28) Susanne Göpferich: Text, Textsorte, Texttyp, in: Mary Snell-Hornby et. al (Hg.): Handbuch Translation, 61-63쪽 참조.
29) Katharina Reiß가 Karl Bühler의 Organon-Modell을 원용한 분류이다. Stolze의 앞의 책, 121-123쪽 참조.
30) Jochen Schulte-Sasse u. Renate Werner: Einführung in die Literaturwissenschaft,
München: Fink 1977, 22쪽.
31) Manfred Bierwisch. Christoph Küper: Linguistische Poetik, Stuttgart: Kohlhammer 1976, 15쪽에서 재인용.
32) http://de.wikipedia.org의 Literarizität 항목 참조.
33) Franz Kafka: Amerika.
34) http://de.wikipedia.org의 Literarizität 항목.
35) Christoph Küper의 앞의 책 10쪽.
36) Küper의 앞의 책, 3장 시적 택스트의 구조 Die Struktur des poetischen Textes 참조.
37) 예컨대 우리의 현대문학은 번역을 통한 형식 도입에 크게 힘입고 있다.
38) Koller의 앞의 책 288쪽 참조.
38) Koller의 앞의 책 288쪽 참조.
39) 유종호: 문학이란 무엇인가, 95-11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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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Benjamin, Walter: Die Aufgabe des Übersetzers, in; Störig, Hans Joachim (Hg.): Das Problem des Übersetzens, Darmstadt: Wiss. Buchgesellschaft 1963, S. 182-195.
Goethe, Johann Wolfgang von: Drei Stücke zum Thema Übersetzen, in: Störig, S. 35.
Göpferich, Susanne: Text, Textsorte, Texttyp, in: Mary Snell-Hornby et. al (Hg.): Handbuch Translation, 2. verb. Aufl. Tübingen: Stauffenburg 2006, S. 61-64.
Koller, Werner: Einführung in die Übersetzungswissenschaft, 7., aktualisierte Aufl.
Küper, Christoph: Linguistische Poetik, Stuttgart/Berlin/Köln/Mainz: Kohlhammer 1976.
Luther, Martin: Sendbrief vom Dolmetschen, in: Störig, S. 14-32.
Petrova, Alena: Was macht literarische Übersetzung literarisch? (2008년 VI. Insbrucker Ringvorlesung zur Translations- wissenschaft의 ppt.)
Reiß, Katharina u. Hans Vermeer: Grundlegung einer allgemeinen Translationstheorie, 2. Aufl. Tübingen: Niemeyer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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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lte-Sasse, Jochen u. Renate Werner: Einführung in die Literaturwissenschaft, München: Fink 1977.
Snell-Hornby, Mary et. al (Hg.): Handbuch Translation, 2. verb. Aufl. Tübingen: Stauffenburg 2006
________: The Turns of Translation Studies, New paradigms or shifting viewpoints?, Amsterdam/Philadelphia: John Benjamins 2006.
Schmitt, Peter: Marktsituation der Übersetzer, in: Mary Snell-Hornby et. al. (Hg.): Handbuch Translation, S. 5-13.
Stolze, Radegundis: Übersetzungstheorien: eine Einführung, 3., aktualisierte Aufl. Tübingen: Narr 2001.
Störig, Hans Joachim (Hg.): Das Problem des Übersetzens, Darmstadt: Wiss. Buchgesellschaft 1963
Woodsworth, Judith (übers. aus Englisch v. Rolf Geiser): Geschichte des Übersetzens, in: Mary Snell-Hornby et. al. (Hg.): Handbuch Translation, S. 39-46.
발터 벤야민 (황연산ㆍ김영옥 옮김): 「번역가의 과제」, 번역비평 창간호 2007.
심재기: 「최근 문학번역 이론의 흐름과 번역비평의 나아갈 길」, 번역연구 제1집 (1993), 67-104쪽.
유명우: 「한국의 번역과 번역학」, 번역학연구 창간호 (2000), 229쪽.
유종호: 「시와 번역」, in: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2001, 9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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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e.wikipedia.org의 Literarizität 항목
교수신문 2007. 03. 02.문학 번역의 문제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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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2012.09.24 논문심사일: 2012.10.31 게재확정일: 2012.11.01>
2014년 3월 5일 오후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