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 김영관

by dschoiword posted Feb 2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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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 / 김영관 (페묵에서)

어느 교회 목사가 주일 아침 설교에서 죄에 대하여 아주 강하게 말했더니 이튿날 어느 여자 교인 한 분이 목사님 집으로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어제 설교에서는 죄에 대하여 너무 솔직하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애들이 그 말씀을 듣고, 그렇지 않아도 교회에 잘 나오지 않으려 하는데 앞으로는 너무 그렇게 솔직하게 죄에 대해서는 말씀 안하시면 좋겠어요.” 이 충고를 듣고 있던 목사가 일어나더니 약장에 가서 ‘극약’이라는 쓴 약병을 가지고 와서 그 교인에게 하는 말이 “자매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뜻을 잘 알겠습니다. 자매님의 말씀은 이 약병에서 ‘극약’이라고 쓴 딱지를 바꾸라는 말씀이지요. 제가 이 독약이 든 병에서 ‘극약’이라고 쓴 딱지를 떼버리고 ‘꿀’이라고 써 붙이면 좋을 까요? 그러...면 위험하지 않겠지요? 자매님, 사람이 듣기 좋은 말로만 하면 더욱 영혼을 죽이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죄중 하나는 교만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교만은 다른 모든 정신적인 것이나 도덕적인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결국 죄란 자기 본위에서부터 생기게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자기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곧 교만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16장 5절에 보면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 지라도 벌을 면치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29장 23절에는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101편 5절에는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것을 참지 못하십니다. 교만에도 몇 가지 모양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가 잘 생겼다고 교만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다고 교만합니다. 어떤 이는 자기가 사업을 잘한다고 교만합니다. 어떤 이는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에게 교만합니다. 곧 영적, 지성적, 물질적, 사회적 교만입니다.

그 중에도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것이 영적인 교만입니다. 모든 죄가 여기에서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4장 12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을 보세요.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었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지우리로라.” 여기 계명성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리라’ 한 말이 다섯 번씩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 위에 오르리라’

이것이 영적인 교만으로 우주의 모든 죄 가운데 첫째되는 죄입니다.

영적인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보다도 자기 자신의 덕을 더 내세웁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그렇게 영적으로 교만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내가 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스스로 잘난 체, 자기만으로 가득한 자세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야고보 4장 6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있는 것으로 자만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보면 모두가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이거 매우 위협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적인 교만입니다. 자기 자신을 순결해 보이고 다른 사람은 다 불순해 보입니다. 자기 자신은 정통 신앙이고 다른 사람은 다 이단으로 보여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정해 버리고 맙니다.

옛날 예수님 때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자기들만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알고 다른 사람은 다 그렇지 못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이단으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교만하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 눈에는 들보가 가로 막혀 있으면서도 형제의 눈 속의 티를 가지고 나무라지 아니 합니까? 그래서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헐뜯고 비판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미워하십니다. 영적인 교만은 가장 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교만은 지성적인 교만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 2절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좀 배워서 다른 사람보다 그 방면에 아는 것이 많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의해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게 이런 지식을 주셨는데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해 볼까하고 생각하며 그 방면으로 힘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여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스스로 “나는 똑똑한 사람이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 사람처럼 모자라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대학 2학년을 영어로는 소포머(Sophomore)라고 합니다. 본래 헬라어에서 유래된 말인데 소포스(Sophos), 지혜로운(Wise) + 모로스(Moros), 바보스러운(Foolish)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본래의 뜻은 ‘바보같은 지혜’라는 뜻입니다. 사실 대학의 2학년쯤 되면 세상에 높은 사람 없어 보입니다. 자기를 가리키는 교수도 우습게 보입니다. 어른이 없습니다. 자기가 제일 잘나 보이고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나같은 지성인이 어떻게 무조건 믿을 수 있나?’ 하면서 비판하려 하는 자세에 서려고 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우튼(Issac Newton)의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내가 아는 지식이란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가 바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겸손한 말입니까? 정말 지식이 많은 사람은 겸손합니다. 그런데 뭐 조금 배운 사람이 혼자 하는 것처럼 교만하기 쉽습니다.

지성적인 교만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원수가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곳보다 자기의 지식을 의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잠언 3장 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는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지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은 자기의 지식의 범주 안에 집어 넣어보려 합니다. 그대로 안되면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그에게서 배우기를 싫어합니다. 지식을 초월하고 경험을 초월하고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고 신앙을 고백하기를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믿음이 없는 지식을 가지는 것은 우리 마음의 절반밖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전에 어거스틴(Augustin)은 ‘알기 위해서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1편에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지성을 반대하거나 무시하지 아니합니다. 더 높은 지성을 권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처럼 마음을 해롭게 하므로 변화 받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지성적으로 교만한 것을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잠언 26장 12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교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교만입니다. 물질적인 소유도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데 물질적인 소유가 많아지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흔히 사회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돈만 있으면 부러운 것이 없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명기 8장 18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을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재물 얻은 능력을 누가 주셨어요? 하나님이 주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교만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자기 스스로 얻은 것처럼 생각할 수 있어요? 역대상 29장 12절에 보면 다윗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물질의 소유가 많은 것 때문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시편 62편 10절에 “냇물이 늘어도 거기에 치심치 말라”고 경고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9절에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적인 소유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가진 것이 많다고 교만할 수 있습니까? 야고보서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할 수 없습니다. 교만은 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교만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교만입니다. 인도 같은 데는 네 가지 계급이 있어서 밑의 계급의 사람들은 위의 계층의 사람과 상종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이 범한 죄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다 같이 만드셨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습니다. 다 평등하게 지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구별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구별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은 없습니다. 남녀의 차별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차별의식이 있습니다. 이거 소위 사회적 교만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이요, 비기독교적입니다.

전에 독일의 히틀러(Hitler)는 자기 게르만 민족은 초민족(超民族)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다른 민족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공산주의자들은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는 너무 다르게 무서운 계급 사회를 이루어 집권자의 독재 앞에서는 일언반구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되고 무조건 찬양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보일 때는 여지없이 처단해 버리고 맙니다 독재 사회에서 있는 비극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만은 죄라고, 교만은 하나님의 나라의 거치는 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