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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안의 4대 이단을 아십니까?
영남신학대학교의 최태영 교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 위원장 임준식 목사)가 개최한 ‘제98회 이단·사이비 대책세미나’(2014.1.16.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아래의 글을 발표했다. 교회 안에 있는 이단이 교회 밖의 잘 알려진 이단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교회 안의 이단 가운데 시급히 대책을 강구해야 할 대상으로 △펠라기우스주의 △로마가톨릭주의 △종교다원주의 △신사도운동을 꼽는다.
이 글은 한국교회의 기존의 이단연구가들의 접근방식이나 관점과 조금 다르다. 흥미로운 주요 특징은 4가지이다. (1)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비분강개했던 사도 바울을 언급하면서 한국교회 안에 암약하고 있는 이단사상, 이단운동에 별다른 경계심을 갖지 않고 이들을 간과하는 교회의 현실을 개탄한다. <리포르만다> 운영자 최덕성 교수가 오래 전부터 강조해 온 바와 동일하다. (2) WCC 부산총회(2013)를 계기로 전개된 종교다원주의 관련 'WCC반대 투쟁'과 비평적 학문활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통합측 교단 소속 목사가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하는 신학 관점을 이단 논의 마당에서 발표한 것은 특이하다.
(3)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이단 아니라고 판단 발표한 다락방운동(대표 류광수 목사)과 박윤식 목사 등을 이단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4) 한신대학교의 김경재 교수(명예)를 포함한 다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 특히 2013년 정초 발표된 '4대 신학조항'을 쓰레기로 여기고 이를 거부하는 성명서들을 발표한 신학교수들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관련자들, '유보적 칭의론을 주창하는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 그리고 WCC 추종자들과 관련하여,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전제와 조건을 설정하고 제시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지적하거나 설명하는 결기와 단호함을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전문은 <교회와 신앙>(2014.1..21.)에서 옮겨왔다. 이해를 돕고자 일부분을 의미 변화 없는 범위 안에서 고쳐썼다. 옮겨 실음에 대하여 저자와 <교회와 신앙>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리포르만다> 편집자 주-
현재 한국교회 내 이단: 펠라기우스주의, 로마가톨릭주의, 종교다원주의, 신사도운동
최태영 교수 / 영남신대, 예장통합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전문위원
1. 이단에 대한 성경의 교훈
1) 갈라디아서 1:6~9. 이단(“다른 복음”)에 의해 흔들리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심정을 생각해 보라.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을 두번이나 반복한다. 이러한 과격한 선언을 하는 바울에게 있는 것은 예수(진리)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교회(양떼)에 대한 사랑이리라. 기독인이 사랑이 있으면 이단에 대하여 저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단에 대한 저주가 없다면, 예수와 교회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2) 마태복음 13:24~30의 비유가 말하는 예수님의 교훈. “가만 두어라”라고 한다. 이 말씀은 이단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 가져야 할 사랑과 인내와 권면의 필요성 또 예수님은 교회 안에 이단이 자랄 것을 알고 계셨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가라지를 뿌리 뽑고자 하는 지나친 노력을 경계하셨다. 이는 어차피 가라지 문제는 심판의 때에 가서야 해결될 일이기 때문이다. 이단은 종말의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단에 대한 대처는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 덕 보다 해를 끼치게 된다. 이단에 대해 저주를 선포하되, 분별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2. 교회사에서의 이단 개관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을 살펴보면 바른 교리를 확립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이단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다.
1) 고대교회의 이단들: △삼위일체론적 이단들: 일신론, 양태론, 삼신론에 대하여,
하나님은 언제나 삼위(성부, 성자, 성령)로 계시며, 삼위는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낳은 바 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온바 되신다. △기독론적 이단들: 두 본성에 대한 이해 결핍 바른 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있으며, 신성과 인성은 서로 혼합, 교환, 분리, 분열되지 않는다. △구원론적 이단들: 펠라기우스주의/준펠라기우스주의 바른 교리: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노력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2) 종교개혁 시대의 이단들에 대하여
로마(가톨릭)교회가 보는 오직성경-오직은혜-오직믿음-오직예수(sola scriptura / sola gratia / sola fide /solus Christus)
3)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이단정죄가 약화되고, 성경(계시) 보다 이성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였다. 그 결과로 성경적 교리에 근거한 이단 정죄는 약화되었다. 그러나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와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를 주창하는 계몽주의의 정신은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 신앙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그 자체가 이단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현대의 대표적 이단들
① 여호와의증인: 삼위일체론과 지옥심판을 부정, ② 몰몬교: 성경외의 경전, ③ 통일교: 성경외의 경전, 종말(재림)론, ④ 신천지교: 종말론(요한계시록에 대한 왜곡된 해석), ⑤ 하나님의교회: 신론(어머니 하나님), ⑥ 신구원파: 구원론 왜곡.
3. 교회 내 이단 사상
이단의 심각성은 바른 교리(정통신조)를 약화시키거나 질식시키는데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단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불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와 이단에 대한 태도가 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종교는 기독교의 바른 교리를 위협하지 않는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각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단은 기독교의 교리를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단에 대해서는 교리적으로 싸워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한다.
이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하나는 이미 교회에 의해 정죄당한 집단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통일교, 구원파, 신천지교, 하나님의교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 있는 이단 사상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암약하고 있는 비복음적 가르침을 통칭한다. 우리가 정말 위험하게 여겨야 할 것은 후자이다. 전자는 이미 검증되었고, 또 눈에 잘 띄는 이단이므로 대처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후자는 눈에 잘 띄지 않으므로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전자는 교회가 비교적 잘 대처해 왔으므로 현재 그렇게 크게 위협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후자는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게 교회를 파괴시킴으로써 가공할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교회 안의 이단 사상 가운데서 교회가 시급히 대책을 강구해야 할 대상은 펠라기우스주의, 로마가톨릭주의,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신사도운동이다.
1) 펠라기우스주의
교회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교부로 일컬어지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가 교회에 끼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여는 펠라기우스 논쟁과 도나투스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모두 이단 문제에 관련되지만 그 중 더 심각한 것은 펠라기우스주의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하나님의 은총을 역설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비판을 받고 교회에서 정죄되었지만, 죽지 않고 그 이후 줄기차게 교회 안에 남아 있었으며, 오늘날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펠라기우스 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긍정에 있다.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업적을 쌓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노력에 의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에 의하여 배격되었고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는 곧 바로 세미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로 소생한다. 준펠라기우스주의로 번역되는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과 은총론을 받아들이지만 거기에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혼합시켰다.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구원을 향해 상당한 수준에 이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더해짐으로써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도 역시 펠라기우스주의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세미펠라기우스주의를 포함한 펠라기우스주의는 고대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사람들이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긍정이다. 인간은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인간은 위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인간에게는 무언가 본질적인 선이 있다는 것, 결국 인간은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상이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는 교회에 만족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펠라기우스주의는 마침내 중세 로마교회를 장악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16세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슬로건은 로마가톨릭교회가 펠라기우스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증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sola gratia, sola fide 가 바로 그것이다. ‘오직 은총’은 로마교회의 공로와 은총, ‘오직 믿음’은 로마교회의 믿음과 선행이라는 공식을 타파한 슬로건이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공로와 은총, 믿음과 선행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산물이다. 인간의 가능성에 근거한 펠라기우스주의가 중세교회의 미몽 속에 부지불식간 교회의 교리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공로와 은총은 인간이 노력하여 이룬 공로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더해져서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이다. 준펠라기우스 사상이다. 믿음과 선행은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선행이 있어야 의롭게 된다는 것인데, 선행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방점을 둔, 역시 준펠라기우스 사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교회를 펠라기우스적 이단으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은총의 구원론, 복음의 진리에로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난공불락의 로마교회의 교권에 의하여 도리어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파문당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부득이하게 프로테스탄트 교회(개신교)를 형성하게 되었다. 개신교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를 회복한 교회이다. 그에 비해 로마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떠나 펠라기우스의 교설에 몸을 담고 있는 거대한 이단적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펠라기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라는 이름을 제거하고 다른 이름으로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살아남았고, 현대 교회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형태의 인본주의는 펠라기우스의 후손들이다. 인간을 긍정하고, 인간을 높이고, 인간의 업적을 기리는 인본주의적 행태는 ‘오직 하나님’이라는 은총 교리를 부정하는 펠라기우스적 산물이다.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칭송하고, 사람에게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부여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가 아니라 펠라기우스주의이다. 오늘날 기독교 언론을 장식하는 수많은 인물 사진과 그들의 업적에 대한 광고들은 펠라기우스주의가 우리 기독교 안에 얼마나 팽배해 있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인간을 높이려는 집요한 행태는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선악과, 곧 원죄의 발로일 뿐이다. 바르트는 죄의 가장 뚜렷한 양상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는 교만이라고 하였다. 개혁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원죄의 철저성 및 인간에게는 선이 하나도 없다는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교리가 성경의 진리임을 천명하였다. 마치 인간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는 것처럼 서로 서로 사람을 높이고 사람의 업적(행위)을 칭송하는 이러한 죄를 용인하고 따르는 것이 교회 안에 있다면, 그것은 교회 안에 있는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로마가톨릭주의
앞에서 펠라기우스주의로서의 로마교회를 보았는데, 로마교회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도 이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집단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먼저 종교개혁자들의 슬로건 중 앞에서 말한 것 외의 두 가지를 더 보자. 곧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로마교회의 핵심적인 사상, 곧 성경과 전통, 그리스도와 마리아(및 성인)에 대한 비판이다.
‘오직 성경’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개신교의 단 하나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진리의 출처는 오직 성경뿐이라는 신앙고백이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 성경이다. 모든 가르침의 진위는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가려져야 한다. 중세의 로마교회가 성경의 진리에 완전히 역행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의 원리로써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로마교회는 성경 외에 전통이라는 또 다른 진리의 출처를 내놓았다. 전통이란 교회의 결정을 가리킨다. 교회회의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면 그것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는 성경도 하나의 전통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전통이란 원리에 따라 로마교회는 성경에 없는 것을 무엇이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7성사, 연옥설, 면죄부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로마교회가 얼마나 성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집단인지는 종교개혁자들을 파문하고 출교한 이후의 행보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로마교회의 감독을 교황이라 칭하며 그에게 무오한 존재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였다. 마리아를 제2의 중보자로 격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원죄 없이 성자를 잉태하였고, 몽소승천하였다는 교리를 선포했다. 성경에서는 도저히 근거를 댈 수 없는 그들만의 교리들이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성경적 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 거기에다가 로마교회는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의 교회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역사상 가장 견고한 독재체제를 세계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것이 로마교회이다. 이것을 필자는 로마가톨릭주의라고 말한다. 이 거대한 로마가톨릭주의는 온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종교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우리 개신교에 끼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상 세계 최대의 단일종교단체인 로마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5)를 계기로 개신교와 모든 세계의 종교들의 맏형 노릇을 자임하였다. 그리고 개신교 지도자들에게도 화해의 손을 벌리며 교회의 일치를 도모할뿐더러 나아가 세계의 모든 종교를 통합하는 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개신교는 로마교회에 대한 경계의식을 점점 풀어가게 되었고, 오히려 거대한 로마교회체제를 동경하는 듯하다. 우리가 눈을 들어 살펴보면 한국과 세계의 개신교 교회들이 거대한 로마교회체제를 벤치마킹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한 개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독재체제의 모델이 선호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강력한 독재체제가 거대한 국가를 만들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종교적으로도, 특히 교회에서도 통한다는 것이 비극적인 현실이다. 교회로부터 절대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담임목사가 제왕처럼 운영하는 소위 대형 교회가 한국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로마교회의 대성당과 같은 거대한 예배당을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건축하고 그 위용을 과시하는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로마교회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는 오히려 작은 자들의 공동체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거대한 제국을 꿈꾸지 않으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신약성경은 로마의 바티칸 같은 거대한 건축을 암시하는 가르침이 없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침 뱉음, 채찍질, 못 박힘 당하시고 조롱받으시고 수치를 받으시고 죽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길을 따르도록 가르치시고 명령하셨다. ‘내 나라’는 세상의 것과 다르다고 하셨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세상 나라와 질적 차이가 없는 거대한 나라를 지향하여 왔다. 우리 개신교가 그러한 로마교회를 닮아간다면 이것이 어찌 교회 안에 있는 이단적 요소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로마교회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은지 입장을 정할 필요가 있다. 루터와 칼뱅이 로마교회를 적그리스도의 집단이라고 규정했는데, 칼뱅의 정신을 계승하는 오늘의 개혁교회(장로교회)는 더 이상 로마교회를 경계하지 않는 것 같다. 종교개혁 시대보다도 로마교회는 훨씬 더 비성경적으로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더 가까워지려고 하는듯한 진보적 개신교의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다. 최소한 교리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로마교회와의 차이를 분명히 확인하고 선을 긋지 않는다면, 거대한 로마교회체제와 그들의 이단적 교리에 동조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은 불문가지가 아니겠는가?
3) 종교다원주의
종교개혁자들의 4대 슬로건 중 마지막은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다. 로마교회가 여기에 마리아를 더하였고, 나아가 성인들(saints)을 더하여 그들의 공로가 교회 안에 쌓이고, 면죄부를 사면 그 공로를 덧입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로마교회에 의하면 하나님과 죄인들을 화목하게 하는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 아니라,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에게까지 확장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종교다원주의다. 곧 다른 종교들도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소위 메시야가 있을 수 있다는 사상으로서, 그러므로 기독교는 절대적인 최고의 종교가 아니라 종교들 중의 하나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가르치는 신약성경을 기독교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으로 제한하면서 그것이 만인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진리주장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것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구원의 길이지만, 유일한 길은 아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고 구원의 진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한다. 루터는 일찍이 이신칭의 교리를 교회의 존폐가 달린 교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는 교회를 폐하는 이단이 아닐 수 없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근본적으로 와해시키는 사상이므로 교회는 배격하지 않을 수 없는데, 유감스럽게도 서구의 신학계에서는 종교다원주의를 용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류신학사상으로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서구권에서 기독교가 쇠퇴하게 된 것은 종교다원주의 사상의 범람으로 인하여 교회의 구원론이 무너진 데에 크게 기인한 것으로 사료된다. 작년에 성공적인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진보와 보수 진영 간에 종교다원주의 논쟁이 일었던 것을 우연적인 사건이거나 불행한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도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하여 깊이 성찰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 교단을 비롯하여 한국 교회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4) 신사도운동
신사도운동은 20세기 초반의 오순절운동, 중반의 성령은사운동, 후반의 빈야드로 대표되는 예언과 표적 운동에, 교회성장의 열망이 덧붙여져 나타난 새로운 성령운동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말 미국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고 있다. 전문가들의 조사에 의하면 세계 개신교의 약 40% 이상이 신사도운동의 영향권에 들어갔다고 한다. 아직 한국교회 안에 크게 침투된 상황은 아니지만 만약 이것이 교회 내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500년 개신교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운동의 정체를 잘 파악하여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성령을 빙자한 비성경적인 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지적된다. 하나는 신사도라는 직분에 관한 것이다. 곧 1세기 때에 예수께서 사도들을 세워서 교회를 세우고 다스리게 하신 것처럼, 오늘의 시대에는 성령께서 새로운 사도와 선지자(신사도)를 세우신다고 한다. 그래서 사도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로 교회를 재편하기를 열망하신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는 말씀을 빙자한 소위 새 부대론이다. 다른 하나는 이 운동이 지향하는 신앙 내용, 곧 가르침인데, 그것은 세속적 부, 건강, 행복, 그리고 성공을 지향하는 소위 번영신학이라는 것이다.
이 운동이 성공하면 현재 대부분의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교단체제는 무너지고 신사도 중심의 중앙집권적 거대교회 체제로 교회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 경우 결과적으로 나타날 교회의 형태는 로마교회를 벤치마킹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상당수 대형교회는 신사도운동이 목표로 하는 교회체제에 이미 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운동이 성공했을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현저하게 후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신사도운동은, 첫째, 전통적인 목회자 중심의 교회체제를 무너뜨리고 신사도 중심의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체제를 추구하며, 둘째,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복음의 진리, 곧 십자가의 도 대신에 이 세상적 가치관과 철학을 추구한다. 그 결과 기독교는 세상적인 종교, 세속적 철학으로 변모되고 말 것이니, 이것을 어찌 이단적 운동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4. 결론
이단에는 그 이론과 행태에 있어서 수준이 낮고 유치하여 이단성이 쉽게 드러나는 집단도 있고(신천지교, 하나님의교회, 통일교 등), 그 이론이 정교할뿐더러 실천성에 있어서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력이 있어서 그 이단성을 쉽게 분별하기 힘든 사상 내지 운동도 있다. 둘 중에서 교회에 더 파괴적인 것은 단연 후자라고 할 수 있다. 후자 중에서 현재 우리나라 교회에 파고들어 암약하고 있는 사상으로서는 펠라기우스주의, 로마가톨릭주의,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신사도운동을 들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고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사상을 전개한다는 점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신천지교나 하나님의교회처럼 드러나게 반교회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집단들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실상 더 위험한 후자, 곧 교회 안에 암약하고 있는 이단적 사상과 운동에 대해서는 별다른 경계심을 갖지 않고 그저 간과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비분강개했던 사도 바울이 생각난다. 교회 안에 암약하고 있는 이런 이단적인 사상과 움직임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가 감당해야 할, 이 시대 교회의 과제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