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필의 '아리랑 환상곡' 평양 공연 (2008)
뉴욕필의 아리랑 환상곡 - 겨레의 통일 노래
아래의 글은 최덕성이 통일을 염원하면서 쓰고 2008년 3월 8일에 <리포르만다>에 게재한 글(Old Reformanda 목회저널 65번)의 앙코르이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동평양대극장에서 공연(2008. 2. 26.)한 ‘아리랑 환상곡’을 중심으로, 뉴욕 필이 그 다음날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같은 곡을 공연하는 것을 직접 들으면서 메모한 것을 정리한 글이다. 통일을 기도하는 마음을 담은 글이다. 뉴욕 필의 평양 공연 중 ‘아리랑 환상곡’ 연주는 다음을 '클릭'하면 열린다. 이 곡은 우리 겨레의 하나 됨을 기원하는 '통일의 노래' '겨레의 노래'이다.
뉴욕필의 '아리랑 환상곡'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 서울연주회를 관람하고서
1. 미제국주의자들
‘미제국주의자들의 각(脚)을 뜨자.’ 호기심 많은 어린 시절,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었던 북한 라디오 방송의 정치 구호 중 하나이다. ‘각을 뜨자’라는 말은 짐승을 잡아 머리 다리 등 몇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뜻한다. ‘미국인의 각을 뜨자’던 그 외침은 강하다는 느낌을 넘어서서 살기가 등등했다. 북한 사람들에 대해 소름 끼칠 정도의 거부감을 갖게 했다.
어느 날, 나의 아버지는 “북한 사람도 사람이다.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정치 체제와 사상이 다를 뿐이다”고 말해 주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뿔난 짐승이며, 부모가 죽어도 묘(墓)를 만들지 않고 그 시신을 썩혀 농사 거름으로 사용하는 자들이라고 일러주던 학교 선생님의 이야기가 ‘진짜 그러한가’ 라고 물었을 때 들려 준 말씀이다.
아버지께서는 그토록 사랑하던 맏아들을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잃었다. 인민군에 대항하다가 전사한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보이시던 그분이 “북한 사람도 사람이다”고 한 그 말은 어린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2. 뉴욕필의 서울연주회
아내를 따라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서울연주회(2008.2.28.)에 간 것은 그들이 평양연주회(2008.2.26.)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서울에 왔으며, 세계 3대 교향악단 중 하나이기에, 연주를 직접 보고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 때 미국 시민권자였다. 뉴욕필이 평양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남한인과 미국인에게도 감동을 줄 것이며, 그들이 엮어내는 선율의 아름다움 속에서 북한인, 남한인, 미국인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로 향했다.
뉴욕필의 연주회는 ‘음악의 힘’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예술적 기량이 넘치는 것 같았다. 연주회는 ‘애국가’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애국가가 연주되고 연주시간 동안 기립하던 풍속에 없어졌듯이, 교향악단이 애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근년에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
서울에서의 ‘애국가’ 연주는 평양에서 오프닝에 해당하는 외교적 대구를 이루는 장면이었다. 공산주의 적대국가에서 연주하는 미국교향악단이 북한 ‘애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의례적인 절차이다. 그러나 엇그제까지도 ‘미제국주의자들의 각을 뜨자’고 외치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도 평양에서 미합중국 국가 ‘별 빛나는 깃발’이 연주된 것은 특기할 일이다.
서울연주회는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16세기 네덜란드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에그몬트 백작의 기백을 상징하는 웅장하고 열정적인 이 곡을 대한민국 독립기념일을 이틀 앞둔 날 서울에서 연주한 것은 뜻 깊었다.
서울연주회는 대부분 베토벤 교향곡으로 채워졌다. 교향곡 5번 ‘운명’은 하이라이트였다. 남과 북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을 지녔다는,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변화해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의미를 담아 연주한 것이다. 뉴욕필의 사장 자린 메타 씨가 “가장 훌륭한 곡이기도하고 현재의 상황, 정세에 딱 맞아 떨어져서 결정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서울연주회는 한국인 피아니스트로 크게 이름 난 손열음 양(22세)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로 이어졌다. 한국의 전통 의상을 응용한 검정색 드레스를 입은 손열음은 한국에서 음악 공부를 ’완성’한 피아니스트이다. 그의 연주는 뉴욕필과 유쾌한 조화를 이뤘고, 장한나, 조수미 등 젊은 한국인의 음악적 천부성과 기량을 다시 한 번 세계에 보여주었다.
지휘자 마에스트로 로린 마젤(78세)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과 비제의 ‘아를르의 여인’ 등을 앙코르곡으로 선사했다. 마지막으로 북한 작곡가가 편곡한 ‘아리랑 환상곡’을 편곡 버전 그대로 들려줬다. 마젤이 세 번째 앙코르를 위하여 지휘대 위에 섰을 때, 피콜로와 하프가 ‘아리랑’의 멜로디를 울리기 시작했다. 남북한의 ‘애국가’는 다르지만 ‘두 나라는 원래 같은 나라’라는 사실을 역설하는 듯했다.
3. 아리랑
일부 언론은 ‘아리랑 환상곡’이 연주되는 동안 일부 관객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서울연주회는 평양공연과 달리 실내조명을 어둡게 하여 연주자들에게만 빛의 초점을 모았기 때문에 관객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투적인 수사이지만,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음악작품은 문자로 기록된 본문과 마찬가지로 지휘자와 연주자에 따라 관객에게 전달되는 느낌이 다르다. 작품에 대한 느낌과 해석 또한 연주자에게서 관객과 청중에게 넘겨진다. ‘아리랑’은 평양과 서울에서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어지게 할 정도로 큰 감동을 주었다. 나 자신도 형언하기 어려운 깊은 감동을 받았다.
평양연주회를 관람한 어느 남한 관객은 ‘아리랑’이 연주되기 시작할 때 객석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자신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나이 들면서 감동도 눈물도 모두 없어진 줄 알았는데 마구 가슴이 뛰면서 주책없이 눈물이 자꾸 흐른다. 나만 우는가. 아니다. 이곳 평양의 관객들도 감동으로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지휘자 마젤은 평양에서의 마지막 앙코르 곡인 아리랑을 연주하던 순간에 대해 “우리도, 그들도 모두 감동했다. 음악을 통해 우리나 그들(북한 사람들)이나 모두 같은 인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즉 "북한 사람도 사람이다"는 말이었다. 마젤의 이 말은 내가 그 음악회에서 확인하고 싶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아리랑'을 통해 북한인과 남한인과 미국인이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아리랑'에는 그 이상의 어떤 것, 즉 ‘아리랑’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만이 느끼고 감동하는 어떤 것이 있다. ‘피는 이데올로기보다 더 진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것을 가지고 남과 북의 우리를 감동시켜 준 사람들은 ‘미제국주의자들’이었다. 뉴욕필의 ‘아리랑’ 연주는 그들이 더 이상 각(脚)을 떠야 할 원수가 아니라 우리가 한 핏줄인 것을 확인시켜 주는 동무이며, 우리의 하나 됨을 돕는 훌륭한 이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뉴욕필이 평양사람들에게 들려준 ‘신세계’는 체코 출신 드보르작이 3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작곡한 곡이다. 흑인영가와 아메리칸인디언 음악 등 미국적 선율을 사용한 매우 미국적인 작품이다. 나라마다 그 민족 특유의 정서가 물씬 배어나는 멜로디가 있기 마련이지만, 역사가 짧고 다인종 국가인 미국은 우리의 ‘아리랑’에 해당하는 민요가 없다.
포르투갈의 민속음악인 파두(Fado)의 애조 띤 곡을 드라마틱하게 펼치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노래를 들으면 그 선율에서 묻어나는 독특한 정서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흐느적거리게 만든다. 베토벤의 ‘운명’도 파두가 지닌 비감 이상으로 심대한 무엇을 느끼게 하는 게르만 음악이다. 프랑스의 샹송, 낭만과 열정의 이탈리아 칸초네, 정열적인 스페인의 플라멩고, 바다와 이별을 떠올리게 하는 일본의 엔카, 흥겨움과 애상이 함께 녹아있는 중국의 민꺼(民歌)는 모두 그 국민이 일상적으로 즐겨 부르는 선율이며, 그 민족만이 느끼는 공통의 감동을 담고 있다.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하동아리랑 등 별조(別調) 아리랑과 이 모든 아리랑들을 아우르는 중심축 본조(本調) 아리랑이 있다.
외국인들은 종종 “당신 나라의 대표적인 노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 순전한 ‘우리 멜로디’를 듣고 싶어 한다. ‘쾌지나 칭칭 나네,’ ‘날 좀 보소,’ ‘아리랑’ 등이 있다고 하면 “‘아리랑’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묻는다. 갑자기 머쓱해진다. 엉거주춤 위기를 잠시 모면하고 싶어진다. “아리랑은 언제, 어디서, 왜 생겼습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우리 것에 대한 지식이 넉넉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
어느 분은 ‘아리랑’이 '사랑하는 님' 이란 말이라고 풀이한다. '아리'는 '좋아하는,' '사랑하는' 이란 뜻의 옛말이며, '랑' 은 '사람' 혹은 '님'이란 뜻이라고 한다. '랑군,’ '랑자' 라는 말의 '랑'과 같은 말이란다. '랑군,' '랑자' 가 두음법칙에 의해 '낭군', '낭자'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어느 분은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라고 풀이한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리랑’의 뜻은 ‘고운님’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이라는 뜻이 된다. 이 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라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랑’의 본향은 강원도 정선이란다. 그곳 아리랑이 조선조 말 경복궁 중수를 계기로 전국에 퍼져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이 됐다고 한다. 경복궁 중수를 위해 문경의 박달나무가 베어져 사용됐고, 당시 공사를 위해 전국에서 인부가 동원됐다. 귀향한 인부들은 각지에서 본조 아리랑을 닮은 여러 형태의 아리랑을 낳았다고 한다.
‘아리랑’은 망국의 시대에 나라를 떠난 외국 동포들이 나라 잃은 한을 달래고 민족공동체 회복을 꿈꾸며 눈물로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광복 후에는 이런 저런 단체 행사가 이 노래를 즐겨 불러 우리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민족혼과 얼이 구구절절 녹아들어 있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와 동족상잔의 전란을 거치면서 이 겨레의 슬픔과 비분을 담아냈다.
‘아리랑’은 러시아의 ‘까레이스키’동포, 재중동포, 재미동포, 재일동포 그리고 북한인과 남한인을 선율 하나로 묶어주고, 한 핏줄임을 확인시켜준다. 뉴욕필 부악장이며 차석 바이올리니스트 김미경 씨(36)는 “아리랑을 연주할 때에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한국계 단원 8명을 포함해 모두가 울었다”고 했다.
‘아리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얼을 담은 ‘어머니’이다. 우리는 그 품에서 아픔을 덜고, 상처를 치유하고, 위안을 얻고, 희망을 찾아 오늘에 이르렀다. 그것을 연주하는 선율에는 어느 곳에나 한국인 음조의 원형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아리랑’이 2002년 독일에서 열린 한 음악인대회에서 ‘세계 100대 노래’ 중 으뜸을 차지했다고 하는 기쁜 소식도 들린다. 한국인 심사위원이 한 사람도 없는 가운데서도 지지율 82%라는 엄청난 성원을 받아 선정됐단다.
4. 북한 작곡가 최성한
‘아리랑’은 5음계 우리 민요이다. 뉴욕필이 이를 서양악기에 맞게 편성하여 멋진 곡을 맛깔스럽게 연주한 것은 그 교향악단의 수준 높은 실력을 돋보이게 한다.
뉴욕필이 평양과 서울에서 연주한 앙코르 마지막 곡 ‘아리랑 환상곡’은 북한 음악가 최성한(환?) 씨가 편곡한 것이다.
서울은 북한 작곡가의 작품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수용했다. 옛날 우리나라는 월북 작가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북한 음악가의 곡이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대단한 환영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최성한 선생을 만나보고 싶다. 아무런 장애 없이 자유롭게 찾아가 밤새도록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변화를 조속히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민족의 ‘운명’이다.
최성한 선생을 만나면 미국의 어느 대학 도서관에서 읽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 노래’(Song of Arirang)를 읽은 소감을 전해 주고 싶다. 남과 북 모두에서 잊혀 진 항일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학)은 혹독한 일제의 감옥 감방 벽과 기둥에 손톱으로 ‘옥중가 아리랑’를 새겼다. “동지여 동지여 나의 동지여 / 그대 열두 굽이에서 멈추지 않으리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열두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은 한민족의 영혼을 사로잡는 소리이며, 심금을 울리는 선율이다.
뉴욕필이 빚어낸 그 슬프도록 아름답고 장중한 선율 ‘아리랑’은 남과 북을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게 했다. ‘아리랑’ 연주를 감상하는 객석 표정은 동평양극장이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나 매 마찬가지였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뉴욕필의 ‘아리랑’ 연주를 들으면서 그 곡이 베토벤의 ‘운명’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운명’과 ‘아리랑’은 견줄 수 없는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평양교향악단도, 서울교향악단도 아닌, 미국교향악단의 한민족 민요 연주를 남녁 서울에서 감상했다. 분단된 마지막 민족국가의 비극과 불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아리랑'은 베토벤의 '운명'보다 나의 가슴을 더욱 애절하게 했고,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5. 야누스적 두 얼굴
뉴욕필의 평양연주회가, 미국이 북한에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으로 보고 이를 호되게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북한의 야누스적 두 얼굴과 미국의 야누스적 두 얼굴을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교활한 김정일과 더 교활한 유태세력의 불륜적 평양 동침”이라고 한다. 인민을 위한답시고 지배자가 없다고 말하는 북한 공산집단과 인권을 앞세워 전쟁을 자행하는 미국의 세계 지배세력은 그 야만적 모습을 뉴욕필의 화려한 평양공연에서 드러냈다고 한다. 자유와 인권을 주창하면서 아랍국가들을 차례로 폭격하고 북한 지도자 김정일에게 환희의 찬가를 연주하는 미국(유태세력)의 야누스적 얼굴을 보였다는 것이다.
뉴욕필의 환상적 공연을 전 세계에 생방송하면서도 평양에서 개최될 축구경기에 남한의 애국가와 태극기를 불허하겠다고 우기는 북한의 야누스적 얼굴도 확인했다고 한다. 가장 선한 구호를 외치면서 가장 악한 행동을 하던 미국과 북한이 뉴욕필의 평양연주회로 불륜의 키스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뉴욕필이 북한 체제에 환상적인 교향악을 울려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긴장의 땅에 화해무드를 조성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것은 남과 북 모두에게 소중하다. 잘 한 것은 잘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미국과 외교관계가 없는 북한이 뉴욕필을 맞아들여 연주회를 연 것과 때를 맞춰 평양 거리는 반미 구호를 접었다고 한다. 이는 커다란 정치적 발전이다.
그러나 미국을 철천지원수로 여겨 악마시하는 선전선동과 ‘미제국주의자들의 각을 뜨자’고 외치면서 형성된 적대적 의존관계가 청산되지 않은 상태이다. 북한 지도부가 문화행사를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삼은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버릴 수 없다.
대남 평양방송은 29일 “미국 뉴욕교향악단의 평양방문을 취재하기 위해서 왔던 미국 CBS 방송 기자 쿠쿠가 북한을 ‘대단히 매혹적인 나라’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쿠쿠가 ‘평양에 와서 본 것들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영생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고 주장하며, 북한 체제 선전에 이번 공연을 이용했다고 한다.
뉴욕필이 김정일 위원장을 찬양하고 평양시민들이 미국을 환영하는 듯한 정치선동 ‘쇼’를 연출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평양연주회가 북한의 빈곤과 인권과 핵 개발이라는 심각한 문제들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이맘 때 압록강변 신의주를 바라다보면서 느낀 참담했던 심정을 회상하면서, 뉴욕필의 평양공연이 절대다수의 북한주민들에게는 사치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6. 사치품
신의주 압록강 건너 편 단동의 밤은 대한민국의 보통 도시에 비하면 ‘컴컴’하다. 중국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희미한 불빛의 도시이다. 그 단동에서 바라본 신의주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낮과 밤의 모습은 참으로 참담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대형 망원경으로 밤낮 둘러보아도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는 허탈한 실상이었다.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동토'였다.
마침 북한 전역에 홍역이 유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한 돈 900원이면 치료할 수 있는 것을, 돈이 없고 약이 없어서 수많은 나의 동족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소식에,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에는 굶주려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고, 신앙의 자유를 빼앗겨 죽는 자들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그 나라에서 개최된 뉴욕필의 연주회는 사치품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대한민국에도 미국에도 가난한 자들은 많다. 베토벤의 ‘운명’을 사치품으로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북한 같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북한 주민들이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신세계’를 연주하는 ‘미제국주의자들’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잠시 저 꽃밭 너머의 새로운 세상을 꿈꾸어 보았을까? 이념도 사상도 넘어서는 세상, 미움도 가난도 배고픔도 없이 모두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그려보았을까? 평양의 외국인 동선(動線)을 벗어난 거의 모든 지역이 뜨거웠던 공연장 안과 달리 춥고 어둡고 배고프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을까?
북한 주민의 비참한 삶과 인권유린 현실을 고려하면, 뉴욕필이 거슈윈(Gershwin)의 ‘파리의 미국인’을 연주하는 대신 흑인노예들의 고단한 삶을 노래한 영가(靈歌), 또는 ‘나는 없는 것이 많다’(I Got Plenty oNuttin) 등을 연주하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북한 지도부에 대해 쓴 소리 한 마디 하고자 한다. 여러 분이 소중하게 여기는 이데올로기보다, ‘북한식의 사람다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배고픔이다. 자유와 생명과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사회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7. 음악 외교
뉴욕필의 평양 연주회 중계화면에 비친 어느 청년의 돌발적인 기립박수는 평양시민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인 것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그는 공연 도중 3층 객석에서 혼자 기립박수를 쳤다. 주위 관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일어서서 박수를 보내던 이 청년의 모습이야말로 진짜 사람 냄새 나는 반응이었다. “북한 사람도 사람이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뉴욕필의 평양연주회는 북한 개방을 위해 미국이 작은 문을 여는 역할을 했다. 뉴욕필의 사장은 “북한 전역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뉴욕필의 평양공연이 주민들의 미국에 대한 시선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줬으리라 기대한다”고 한 말했다. 음악외교의 효과를 염두에 둔 언급이다. 그런 변화가 진정으로 그리고 조속히 오기를 희망한다.
보도에 의하면 뉴욕필이 평양을 떠나는 날 ‘로동신문’ 톱기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근 교체된 쿠바 지도부에 축전을 보냈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는 인민이 많은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세계 각국이 달라진 나라의 지도부에 축전을 보내는 그 날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들과 남과 북의 우리가 ‘아리랑’을 진짜 마음 놓고 부르는 날이 될 것이다.
나는 평양교향악단이 미국의 심장부 뉴욕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하루 속히 보고 싶다. 미국은 상호존중 정신을 가진 나라이다. 평양교향악단이 뉴욕에서 공연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평양이 주체적으로 발전시킨 우리 민족악기 연주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우리 민족 구성원이 연주하는 교향악을 듣고 싶다. 그 음악은 뉴욕필도 베를린교향악단도 빈교향악단도 연주할 수 없는, 세계인을 위한, 우리 민족에 의한, 우리 민족의 소리이리라.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주무르고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한 가지 더 바란다면 인간과 선율과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그것을 연주하는 기예와 감상하는 귀를 우리에게 부여한 창조자를 찬양하는 북녘 사람들의 우리민족 멜로디 연주를, 세계의 도시 뉴욕에서 듣고 싶다.
최덕성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2008-03-04 13:20 <리포르만다>
조선중앙텔레비전이 방송한 리경숙의 '아리랑' 노래도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