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과 아프리카

by reformanda posted Apr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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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랜치스코 2025.jpg

 

 

교황과 아프리카

 

교황 프란치스코(Francesco, 1936-2025)가 세상을 떠났다. 천주교회는 이른 선종(善終)이라고 일컫는다. 착하게 마무리하거나 평온하고 거룩하게 생을 마쳤음을 뜻한다.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이다로마가톨릭교회 계산법에 따르면 그는 제266대 교황(재위: 2013-2025)이다.

 

사람의 허물은 죽고 나면 감추어진다. 사람들은 허물은 감추고 자랑스런 것만 내놓으면서 영웅시 한다. 망자 욕하지 않기, 망자 미화(Posthumous glorification), 사자 영웅만들기를 한다. 여러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특히 한국에는 유교적 전통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를 욕하지 않는다는 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풍자적으로는 "죽으면 용서된다"는 말처럼 사람이 살아 있을 땐 비판 받던 일들도 죽고 나면 감싸지고, 공적만 부각된다. 최후의 예의를 다하려는 문화적 심리 현상이다. 이 글도 그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최초의 남미 출신, 최초의 예수회 출신, 최초의 남반구 국가 출신 교황이다.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포르투갈어, 영어, 우크라이나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프란치스코는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이다. 화공학자와 나이트클럽 경비원으로 잠시 일다하가 신학교에 입학했다. 1969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2013313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자신의 교황 명을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따서 프란치스코라고 명명했다.

 

프란치스코는 사회적 소수자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관용을 촉구했다. 소박하고 격식에 덜 얽매인 형식에 따르는 생활로 잘 알려져 있다. 동성애자들을 사회적으로 소외시키거나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교회 내에서 여성의 역할 확대를 강조했지만, 여성의 사제 서품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가 이미 불가하다고 밝혔다며 교회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미혼모 자녀의 세례를 거부하는 사제들을 질책한 바 있다.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예수회에 입회하기 전에 베르고글리오는 나이트클럽 경비원과 청소 관리인, 화학 실험실의 연구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소속 원죄 없으신 잉태 신학교에 입학 후인 1958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시작했다. 젊은 신학생 시절에 그는 삼촌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한 여성을 만나 그녀의 지성과 아름다움을 보고 잠시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머릿속에서 계속 그 여성이 생각났기 때문에 잠시 신학생이자 예수회원으로 계속 남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예수회 수련생 시절에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인문학을 공부했다. 1960년에 서원을 하고 정식으로 예수회원이 되었다.

 

1960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산호세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수료했다. 1964년에 원죄 없으신 [성모] 잉태 대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잠시 고등학교에서, 살바도르 대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1967년에 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1969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산미겔 신학교의 철학·신학 대학원에서 계속 공부했다. 그리고 예수회 입회자들을 관리 감독하는 수련장과 신학 교수가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교황 선출 직후, 교황 전용 의자에 착석한 채로 추기경들의 축하 인사를 받지 않고 일어서서 받았다. 이전까지 바티칸에서 통용되었던 관례의 변화를 예고한 분명한 증표였다. 이전 교황들과는 달리 교황 전용 붉은색 모제타를 입지 않고 흰색 수단만을 착용한 채,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발코니에 교황으로서 처음 대중 앞에 나타났다. 전임자들처럼 순금으로 만든 가슴 십자가 대신에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시절부터 착용한 철제 가슴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 많은 사람과 만남의 자리를 갖기 위해 자신의 거주지로 교황의 공식 관저인 사도 궁전 대신에 성녀 마르타의 집을 선택했다. 교황의 관저 밖에서 기거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4816일 대한민국을 방문했고, 당시 세월호 참사에 대해 추모했다.

 

프란치스코 통치 기간, 칠레의 페르난도 카라디마 신부는 수십 명의 아동들을 성추행했다. 이 사건은 2002년부터 피해자들의 고발이 이어졌고 2010년 이후부터 언론에 보도되었다. 카라디마 신부는 2011년 면직당했다. 그런데 2015년 바티칸 교황청이 아동 성추행이 벌어진 오소로노 교구에 카라디마 신부의 제자인 바로스 주교로 임명하면서 사건이 다시 불거졌다.

 

성추행 피해자들은 바로스 주교가 성추행을 알고도 묵인했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카라디마 신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들은 바로스 주교가 성추행 장면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도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카라디마 사건으로 칠레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용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교구의 분열이 이어졌다. 수백 명에 달하는 신자와 시민들은 바로스 주교의 취임식에서 바로스, 오소르노를 떠나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118(현지시각) 칠레를 방문한 자리에서 바로스 주교를 둘러싼 성추문 은폐 의혹에 대해 증거를 가져오면 이야기할 것이라고 했다. “단 하나의 증거도 없고 모든 것이 중상모략이라며 바로스 주교를 두둔했다. 세계 각국서 교황에 대한 비판이 들끓자 결국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며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홍혜원은 일리노이 어바나삼페인 대학교에서아프라카 역사 전공  박사과정 학생이다. 아래는 그가 페이스북에 쓴 교화와 아프리카에 대한 글이다. 그가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흥미로운 글이다.

 

오늘날 전 세계 가톨릭 신자 중 약 5분의 1은 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대륙의 가톨릭 인구는 1960년대 이후 무려 여섯 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콩고민주공화국, 나이지리아, 케냐와 같은 나라들은 사제와 수도자를 가장 빠르게 배출하는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유럽에서 신앙의 동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는 현실과 대조적으로, 아프리카는 가톨릭의 미래로 불릴 만큼 활력을 지닌 공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대륙을 자주 방문하고, 단순한 목회적 차원을 넘어 교회의 존재론적 중심이 남반구로 이동하고 있음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에게 아프리카는 돕는 대상이 아니라, 가톨릭이 다시 태어나고 있는 장소, 곧 교회가 새롭게 자기를 성찰하고 재정의할 수 있는 실존적 경계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은 그가 남긴 깊은 도덕적 유산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많은 매체들은 그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보여준 연민애정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흔한 프레임을 잠시 멈추고 물어야 한다. 그가 진정 남긴 것은 제국의 해체 이후, 남겨진 기억의 폐허 위에서 신학적 존재가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를 묻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교황은 한 국가의 수장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제국 그 자체였던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유럽 제국주의의 내면적 윤리를 구성하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식민지화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조직이었다. 16세기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선교사들의 영혼을 위한 사역은 곧바로 토지의 약탈과 노동 착취로 이어졌고, 그 구조는 깊은 침묵 속에서 세계의 기억으로부터 지워져갔다.

 

그렇기에 오늘날 교황이라는 존재가 아프리카 대륙의 상처받은 기억과 마주선다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를 넘어선다. 그것은 제국이 자신을 신처럼 내세웠던 질서를 낮추고, 그 질서가 남긴 상처 앞에 마침내 무릎을 꿇는 순간일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이 나라의 피를 빨아먹은 외부 세력들을 지목하며, 단순한 평화 담론이 아닌 역사적 고발을 택했다. 이는 정치 지도자들이 대부분 피하려 드는 누가 피해자인가, 누가 가해자인가의 도식을 적시한 행위였다. 이 발언은 결코 가벼운 수사가 아니다. 가해의 구조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고, 국제 자본과 광산 경제는 오늘도 제국의 경제적 심장을 다시 뛰게 하고 있다. 교황의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기억의 재정치화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공식적인 국가 수장이 아니며, 교황청은 콩고를 식민 지배한 벨기에도 아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윤리적 힘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잘못을 고백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공동의 기도를 위해 자리를 비우는 자로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개입이었다.

 

 

우리는 흔히 정치의 언어로 사과와 용서를 정의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침묵은 정치적 침묵이 아니었다. 그는 사과의 주체가 되기를 자처하지 않았고, 대신 경청의 존재론을 선택했다. 이 세계에서 피해자의 말이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는 말하기를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제국의 계승자로서 권위를 잇되, 그것을 기도와 경청의 방식으로 전복시켰다. 프란치스코는 제국의 잔해 위에 다시 제국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폐허 위에 머물렀고, ‘폐허 위에 있다는 감각그 자체를 교회의 윤리로 되살렸다.

 

그의 마지막 발걸음은 지도자의 행보가 아니라 순례자의 길이었다. 제국이 남긴 기억의 조각들 사이를 걸으며, 그는 다시금 교회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아마도 그는 아프리카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제국이 망가뜨린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고, 그 안에서 함께 고통을 견뎌낸 이들과 눈을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를 아프리카를 사랑한 교황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아프리카가 잊히지 않도록 기억을 지켰던 자, 그리고 그 기억 앞에서 제국이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대신 침묵했던 자였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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