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어느 나라 국민이었는가?
김문수의 근대 한국사관은 옳은가? 2024년 8월 26일, 대한민국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에 대한 국회 청문화가 파행하다가 산회했다. 김문수는 “일제통치 시기의 한국인의 국가는 일본이었다, 그걸 몰랐는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질문자 국회의원은 “그럼 당신의 조상과 우리의 조상들이 일본국 국민이었다는 말인가?”라고 하면서 반발했다.
김문수는 일제통치 기간 한국인을 지배한 국가는 일본이었고, 한국인은 일본의 식민지 국민이라고 말했다. 당시의 한반도에 살았던 한국인(조선인)은 '일본국' 국민이었다는 말이다. 과연 김문수의 역사관은 옳은가?
아래는 이 주제에 대한 이해를 돕는 질문과 답이다. 대중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문: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어느 날인가?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7월 4일이다. 이 날은 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미국 전역에서 다양한 축하 행사가 열린다.
문: 1776년 7월 4일이 독립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영국의 식민통치 지배 아래에 있지 않았는가? 독립을 선언한 것과 진정으로 독립국이 된 것은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 독립을 선언한 것과 실제로 독립국이 되는 것은 다르다. 1776년 7월 4일은 미국의 13개 식민지가 독립선언문을 통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그러나 이 선언만으로 미국이 즉시 독립국이 된 것은 아니다.
독립전쟁(미국 혁명전쟁)은 1775년에 시작되어 1783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전쟁의 결과로 미국이 실제로 독립을 이루었다. 178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이로써 미국은 진정한 독립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1776년 7월 4일은 독립의 선언을 기념하는 날이며, 이후 수년간의 전쟁과 협상 과정을 거쳐 미국은 실질적으로 독립국이 되었다.
문: 미국이 실제로 독립국이 된 것은 어느 날인가?
미국이 실질적으로 독립국이 된 날은 1783년 9월 3일이다. 이 날은 미국과 영국 간의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이 체결된 날로, 영국이 공식적으로 미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파리 조약에 의해 미국은 13개 식민지가 독립국으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으며, 이는 미국이 실제로 독립국이 된 중요한 전환점이다.
문: 미국은 1783년 9월 3일을 실질적 건국일로 기념하는가?
미국은 1783년 9월 3일을 실질적인 건국일로 기념하지 않는다. 대신,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1776년 7월 4일로, 이 날을 미국의 탄생일로 기념한다. 7월 4일은 미국의 13개 식민지가 독립선언문을 통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날이기 때문에,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일로 자리 잡고 있다.
파리 조약이 체결된 1783년 9월 3일은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날로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국가적인 기념일로는 널리 기념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7월 4일이 독립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으며, 이 날을 중심으로 다양한 행사와 축하 행사가 매년 열린다.
문: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날(1776. 7. 4.)로부터 실질적인 건국일(1783. 9. 3.) 사이에 영국 13개 식민지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영국의 식민지인인가 아니면 미국인인가?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이 발표된 이후부터 1783년 9월 3일 파리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영국의 13개 식민지 주민들의 신분은 상당히 복잡했다.
독립선언 이후 (1776년 7월 4일 이후): 독립선언문이 발표된 후, 이 13개 식민지 주민들은 자신들을 "미국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법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영국과 결별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했고, 새로운 미국이라는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갔다. 그러나, 국제법적으로나 영국의 입장에서 이들은 여전히 영국의 식민지 주민으로 간주되었다.
독립전쟁 기간 (1775년-1783년): 이 기간 동안 실제로는 미국 독립군과 영국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많은 주민들이 독립을 지지하며 미국인으로서 싸웠지만, 여전히 영국의 충성을 지지하는 로열리스트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주민들의 신분은 상당히 이분화되어 있었으며, 일부는 자신을 미국인으로, 일부는 여전히 영국의 식민지인으로 여겼다.
파리 조약 체결 이후 (1783년 9월 3일 이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이때부터 13개 식민지 주민들은 국제적으로도 공식적인 미국 국민으로 인정받았다.
이 기간 동안 13개 식민지의 주민들은 법적으로는 영국의 식민지인이었으나, 많은 이들이 자신들을 미국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는 파리 조약 체결 전까지 이들은 영국의 식민지 주민으로 간주되었고, 이후에야 비로소 미국 국민으로 인정받았다.
문: 미국의 경우에 비추어보면, 대한민국의 독립기념일은 어느 날인가?
대한민국의 독립기념일은 8월 15일이다. 이 날은 광복절로 불리며, 1945년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한다.
한국은 광복절을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비슷하게 해방을 기념하는국가적인 기념일로 널리 축하한다.
문: 한국인들이 일제에서 자유를 얻은 해방기념일(1945.8.15.)과 대한민국이 세워진 건국일(1948.8.15)은 다르다. 대한민국이 1919년에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한국인들도 많다. 대한민국의 생일은 어느 날인가?
대한민국의 생일, 건국일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주요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8년 8월 15일: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된 날이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독립 국가로 인정받으며, 이 날을 현재 대한민국의 법적 건국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919년 4월 11일: 일부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1919년 4월 11일로 본다. 이 날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로, 이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목표로 한 정부였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수립일을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의 법적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이지만,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일을 상징적 건국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문: 1919년 4월 11일이 대한민국 건국일이면 왜 마라톤 선수 손기정 씨는 베르린올림픽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는가? 1919년 4월 11일과 1945년 8월 15일 사이에 한국인이 미국, 중국, 네덜란드 등지로 유학을 가거나 여행을 갈 때 어느 나라의 여권을 가지고 갔는가?
손기정 마라톤 선수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이유는, 당시 한국이 여전히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인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약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일본 식민지 시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임시정부는 한국인들에게 독립 운동의 상징이었으며, 해외에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주장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외교적, 정치적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
2) 손기정 선수와 일장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은 당시 일본 대표로서 마라톤에 참가했고,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다. 이는 한국이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 국적을 가진 선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3) 여권
1919년과 1945년 사이의 기간: 이 시기 동안 한국인이 해외로 유학을 가거나 여행을 갈 때는 일본 정부가 발급한 여권을 사용해야 했다. 손기정 선수는 일본 여권으로 독일에 입국할 수 있었을 것이 틀림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 운동가들을 위해 임시 여권을 발급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여권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 여권을 사용했다.
따라서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도 한국인들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해외에서 일본 국적자로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문: 1919년과 1945년 사이의 기간에 태어나는 한국인들은 출생신고를 했는가?
1919년과 1945년 사이에 태어난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일본의 법과 행정 시스템에 따라 출생신고를 해야 했다. 이 시기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출생신고도 일본 정부의 통제 아래 이루어졌다.
출생신고 과정: 일제강점기 출생신고: 한국인 부모들은 자녀가 태어나면 일본 정부가 운영하는 행정기관에 출생신고를 했다. 이때 아이들은 일본의 호적에 등록되었으며, 일본식 이름을 강요받기도 했다.
호적 시스템: 출생신고는 일본의 호적 시스템에 따라 이루어졌고, 이는 일본 본토와 동일한 방식으로 관리되었다. 따라서, 당시 태어난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의 기록에 남아 있었다.
1919년과 1945년 사이에 태어난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행정체계 하에서 출생신고를 했고, 이는 일본의 법적 관리 아래 이루어졌다.
문: 출생신고를 일본국의 호적 시스템에 따라 했고, 외국으로 여행갈 때 일본이 발행하는 여권을 가지고 갔으면, 당시의 우리가 속한 국가는 '대일본제국'이 아닌가?
그렇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은 대일본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법적으로 일본의 통치 하에 있었다. 따라서, 당시 한국인들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국민으로 간주되었다.
근거: 출생신고 및 호적 등록: 한국인들은 일본의 행정 시스템에 따라 출생신고를 했고, 이는 일본의 호적에 등록되었다.
여권 및 국적: 외국으로 여행을 가거나 유학을 할 때도 일본이 발행한 여권을 사용해야 했다. 이 여권은 대일본제국이 발행한 것으로, 한국인들은 법적으로 일본의 국민으로 여겨졌다.
올림픽 참가 등 국제적 활동: 국제적인 무대에서도 한국인들은 일본 대표로 활동해야 했다.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본 국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들은 법적으로 일본 제국의 국민으로 취급되었으며, 공식적인 국가 소속도 대일본제국이었다.
문: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았던 시기의 한국인들의 국가는 '대일본제국' 국민이었다는 말인가?
일제강점기(1910-1945년) 동안, 한국인들은 법적으로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 취급되었다. 이는 한국이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 병합된 결과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이루어진 법적, 행정적 조치의 결과이다.
핵심 요점: 병합조약과 법적 지위: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한국인들은 법적으로 일본 제국의 통치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은 일본 법률의 적용을 받았고, 일본 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
호적과 여권: 한국인들은 출생 신고를 일본의 호적 시스템에 따라 해야 했으며, 외국으로 여행을 갈 때도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사용했다. 이는 법적으로 한국인들이 일본 국민으로 간주되었음을 나타낸다.
국제적 활동: 국제무대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의 국민으로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는 일본 대표로 출전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 국기를 달고 경기에 참여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법적 및 행정적 측면에서의 지위를 설명한 것이며, 한국인들이 일본 제국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 통치에 반대하며 독립운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추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19년에 수립되었으며, 이를 통해 독립 국가로서의 한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따라서, 당시 한국인들은 법적으로 일본 제국의 국민으로 간주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인식하며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문: 국가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국가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영토(Territory):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일정한 지리적 공간을 의미한다. 영토에는 육지, 해양, 공역 등이 포함된다. 영토는 국가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적 기초를 제공한다.
국민(Population): 영토 내에 거주하며 국가의 법률과 제도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국민은 국가의 주권을 지지하고,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주권(Sovereignty): 국가의 영토와 국민에 대해 독립적이고 자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한다. 주권은 내적으로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외적으로는 독립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타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
그 밖에도 국가가 성립되려면 국제적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는 국가의 법적 성립에 필수적인 요소라기보다는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들에게는 영토, 국민, 주권이 없었다. 당시의 '국어'는 일본어였다. 국제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한국인은 대일본제국의 식민지 백성이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은 국제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대일본제국의 식민지였으며,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 백성으로 취급되었다.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영토: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한국의 영토는 일본 제국의 일부로 병합되었다. 따라서 한국은 독립된 영토를 상실하고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2) 국민: 한국인들은 법적으로 일본 제국의 국민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출생신고, 호적 등록, 여권 발급 등 모든 행정적 절차에서 일본 정부의 법과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
3) 주권: 한국은 주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일본 제국이 한국을 통치했다.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의 법률과 지배 구조 하에서 살아야 했으며, 독자적인 정치적, 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4) 언어와 문화: 일본은 한국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강제하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억압했다. 이는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동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5) 국제법적 지위: 국제적으로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인정받았으며, 독립된 국가로서의 지위는 인정받지 못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독립된 국가로서의 핵심 요소인 영토, 국민, 주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의 지배하에 법적, 행정적, 문화적으로 종속된 상태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을 통해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문: 한국인들이 다른 나라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여러 가지 형태로 독립운동을 통해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또 국가 기능을 가지고 국민에게 세금을 받는 독립적인 국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국인은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까지는 대일본제국 국민이었던 것은 사실인가?
그렇다.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기간 동안, 한국인들은 법적, 행정적으로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로, 국제법적으로도 인정된 사실이다. 다음은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1) 법적 지위: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말미암아, 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고, 한국인들은 법적으로 일본 제국의 국민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의 법률과 제도 하에서 생활했으며, 일본 정부에 의해 발급된 호적, 여권 등을 사용했다.
2) 국제적 지위: 국제적으로도 한국은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간주되었다. 이는 외교나 국제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한국은 일본을 통해서만 국제 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3) 주권 상실: 한국은 일본의 통치 아래에서 주권을 상실했고, 독립적인 정부나 국가 기능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세금이 징수되고, 일본의 법과 질서에 따라야 했다.
4) 독립운동: 이 시기 동안 많은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19년에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광범위한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실질적인 통치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법적, 국제적, 실질적으로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 간주되었다. 이 기간 동안 한국은 주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문: 다음 글을 읽고 난 다음, 나의 질문에 답을 해 달라.
프랑스는 1940년 5월,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서부 전역에서 1개월 만에 패배했다. 프랑스의 제3공화국이 붕괴했다. '자유 프랑스'(France libre)는 1940년 런던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의 주도로 성립된 망명 정부이다. 프랑스 본토에서 활약한 레지스탕스 일부는 드골 장군을 지도자로 인정하고 따랐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공산당계는 샤를 드골을 보수 반동주의자로 간주하여 반대했다. 필리프 페탱 원수가 프랑스 북부에 비시에 정부를 세우고 독일에 항복했다. 이것을 일컬어 비시 프랑스라고 한다.
‘자유 프랑스’는 ‘비시 프랑스’를 독일의 괴뢰 정권으로 규정하고, 프랑스에서 탈출하여 런던으려 망명했다. 망명한 샤를 드골은 라디오 방송으로 프랑스인들에게 독일에 계속 저항하라고 연설했다.
‘자유 프랑스’와 영국과 캐나다는 ‘비시 프랑스’를 괴뢰 정부로 보았다. 윈스턴 처칠은 ‘자유 프랑스’를 프랑스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여 지지했다. 그러나 미국은 오히려 ‘비시 프랑스’를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이 때문에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 갈등이 조장되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보기에는 ‘자유 프랑스’는 나라를 독일에 점령 당하고 조국을 잃은 망명자들이 세운 나라 별 저항운동 단체 중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과 자유 프랑스 사이 갈등이 해소된 것은 루스벨트가 사망하고,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계승한 이후이다.
문: 오늘날의 프랑스는 '자유 프랑스'(France libre)란 조직체의 정통성을 인정하는가? 프랑스 역사 기록에서 자유 프랑스가 프랑스의 제3공화국 다음으로 등장한 합법적인 정부 또는 국가로 인정하는가?
그렇다. 오늘날의 프랑스는 '자유 프랑스'(France libre)의 정통성을 인정한다. 현대 프랑스 역사 기록에서도 '자유 프랑스'는 프랑스의 제3공화국이 붕괴된 이후 프랑스의 정통성을 계승한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고 있다.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는 프랑스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정당한 저항 운동으로 간주되며, 나치 독일에 항복하고 협력한 '비시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독일의 괴뢰 정부로 평가받는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드골은 제4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프랑스의 공식 지도자로서 인정받았고, '자유 프랑스'는 프랑스 공화국의 연속성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프랑스는 '자유 프랑스'를 제3공화국 다음에 등장한 합법적인 정부로 보고 있으며, 프랑스의 역사 교육과 공식 기록은 이를 널리 인정하고 있다.
문: 대한민국의 상해 임시정부가 정통성을 지닌 국가 조직으로 인정할 수 없는가?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된 이후 미국 군정이 한반도 남쪽의 한국을 잠시 통치했다. 미 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게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대를 가지고 있지도 했지만 프랑스의 망명정부의 경우와 다르다.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광범위한 인정을 받지 못했고, 실질적인 통치 권한을 행사하지도 못했다.
문: 현대적인 의미의 국민국가(nation-state)에 대한 정의 곧 영토, 인구, 주권이라는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은 언제 형성되었는가?
현대적인 의미의 국민국가(nation-state)에 대한 정의 곧 영토, 인구, 주권이라는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은 17세기, 특히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Treaty of Westphalia)에서 널리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 조약은 유럽에서 30년 전쟁을 종식시키며 국가 주권과 국가 간 법적 평등의 원칙을 확립했고, 현대 국제 시스템에서 국민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시기부터 영토가 명확히 구분된 영토, 안정적인 인구, 해당 영토에 대한 주권이라는 개념이 국민국가의 정의에 중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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