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간의 대화운동의 목적은 '대화'가 아니다

by reformanda posted Jun 0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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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간의 대화운동의 목적은 '대화'가 아니다

 

류현웅 (2005년의 글)

 

원제: WCC의 종교간의 대화가 기독교 선교에 미친 영향: 종교다원주의를 중심으로

 

 

I. 서론

 

 

기독교에서 타종교에 대한 입장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선교학적인 맥락에서이다. 1928년 예루살렘 대회가 '대화'를 처음 제안했을 당시 기독교의 용서와 사랑의 복음을 나누기 위한 목적이라는 기본정신 아래 타종교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왔다. 이러한 타종교에 대한 관심은 특별히 기독교 안에서 제3세계 신학과 선교에 초점을 맞춘 에큐메니칼 신학 전통으로부터 부각되어 왔으며, 기독교 밖에서는 인도 전통이나 종교인 및 종교학자들간의 다양한 대화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하는 큰 흐름을 이루어 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타종교와의 대화는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변증적인 입장에서 출발한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차츰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으므로 그것을 존중해야한다는 입장으로 변화되었으며, 급기야는 존중의 차원을 넘어서 타종교와 기독교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며 기독교의 절대적인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는 오늘 한국의 현실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카톨릭과 불교의 종교간의 대화를 들 수 있는데, 1994"승려가 첫 성당 미사 강론"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뿐 아니라 올 515일 석탄일을 전후한 카톨릭과 불교와의 상호 왕래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한 울타리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실로 엄청난 충격이다. 단순한 만남과 대화가 아닌 타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에로까지 발전하며,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모형변화를 자극하는 WCC의 타종교와 대화 정책은 기독교 선교를 불필요하게 만들뿐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까지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와같이 "다양한 종교의 공존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과 함께 "헤겔의 진화론에 근거하여 트렐취는 종교는 모든 문화의 산물이요, 한 인종의 사상의 결정체이므로 한 종교가 다른 종교의 사람을 회심시키거나 바꾸는 것은 적절치 아니하고, 다만 상호 동의와 이해만 있을 뿐이며 기독교가 타종교에 비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현 상황에서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하며, 개신교 선교는 어떠한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한번 던질 수밖에 없어졌다.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 현실은 더 이상 어느 한 종교가 한 사회 속에서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식하게 하고 있다. 또한 종교다원주의는 상대의 종교없이 내 종교도 존재할 수 없다는 태도를 갖게 한다. 나아가 세계 평화와 정의,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각각의 종교는 단순한 이해가 아닌 조화, 연합, 화합을 통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종교인들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런 종교 상호간의 영향은 불가피하고, 종교인들의 만남은 더욱 광범위하게 늘어날 것이다. 결국 윌프레드 겐트웰 스미스가 말했듯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때로는 우리의 이웃과 동료로, 때로는 우리의 경쟁자와 친구로 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인류공동체 안에 다양한 종교체계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류의 일치에 장애요인이라기 보다는 인간문화의 풍요함을 드러내는 긍정적인 요소이다"라고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 득세하며 기독교의 절대성은 상대화되고 각각의 종교에 대한 가치 중립을 제기하고 있다.

 

 

본인은 이와같은 상황에 이르도록 만든 원인과 그런 상황 속에서 온전한 선교를 위한 대책을 본고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특별히 선교적인 관점에서, WCC의 종교간의 대화가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가 점차 구원의 포괄성, 보편성을 표방하며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기에 기독교는 절대성과 배타성을 버리고 대화의 광장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WCC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며, 이러한 변화가 기독교 선교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WCC 이전시대와 이후시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종교간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다원주의로 흐르는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며, 이러한 타종교와의 대화가 각각의 종교는 가치 중립을 표명하여야 한다는 종교다원주의를 가져 왔고, WCC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 선교에 부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으며, 이러한 종교다원주의 시대 속에서 기독교 선교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종교다원주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해보며 그 타개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본론에서 기독교가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를 배타주의, 포용주의, 그리고 다원주의라는 3가지 형태로 살펴보며, 각각의 태도가 주장하는 원론적인 요점을 간략히 살펴보고, WCC 운동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WCC의 종교다원주의적 이해의 흐름을 WCC 회의를 중심으로 조사할 것이다. 또한 본론의 3장에서는 종교다원주의의 등장배경을 다양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살펴보며, 종교다원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선교에 미친 영향을 비판적으로 고찰해 볼 것이다. 동시에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놓인 기독교 선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살펴보며 결론을 맺고자 한다.

 

 

II. 본 론

 

 

1. 기독교와 타종교의 대화 유형

 

 

1) 배타주의

 

 

배타주의란 구원 또는 해방이 한 종교에서만 독점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으로, 기독교가 이러한 배타성이 강하며, 이러한 입장 때문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고 기독교는 주장한다. 또한 "기독교는 어떤 다른 종교와도 결코 비교되어질 수 없고 단지 대조"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이 입장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명백한 고백의 명시적 믿음 없이 구원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오직 참된 하나의 종교가 있을 뿐이며, 오직 한 분 구원자가 있을 뿐임을 강조하는 배타주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공통적인 태도를 취한다. 첫째로, 성서의 절대적 권위와 신언으로서의 말씀이 담지하고 있는 계시적 성격을 강조하며, 성서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방도를 제시한다고 강조한다. 둘째로, 구원은 단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인류 구원의 유일무이한 중보자라고 강조한다. 셋째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사이에는 본질상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며, 기독교만이 구원의 참종교이므로, 개종을 목표로 하는 복음선포가 있을 뿐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절충주의나 대화는 불필요하며 비신앙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모든 종교를 은총에 의한 계시의 경험과 변증법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확대되어가는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반격을 가하고, 기독교를 신의 은총과 계시가 나타나는 유일한 종교"임을 강조하며, 기독교와 다른 종교전통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단언한다. 또한 기독교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식이며, 다른 종교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는 노력이므로 하나님에 관한 불확실한 지식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계시는 종교를 받아들여 참된 종교로 만드는 징표"를 말하며, 이 계시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단 한번 영원히 발생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기독교 이외에는 계시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기독교는 참된 종교"이고, 타종교는 거짓 종교라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한편 하나님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려는 인간적인 노력들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며 그것은 곧 개종을 의미한다. 결국 타종교와의 만남, 대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타종교인들을 기독교화 하는 것이라는 암시적인 결론을 내리며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2) 포용주의

 

 

 

 

 

세계종교들은 구원의 길을 제시하나 잠정적, 예비적, 불완전한 것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하나님의 용서가, 신앙을 명백하게 표현하는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시인하는 입장이지만, 인류를 구원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예수에 대하여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은 열려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완전히 배타적인 입장이 아닌 그리스도 밖에서의 구원의 가능성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포용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포용주의의 대표적 학자인 칼 라너의 타종교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타종교와 기독교와의 차이점을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첫째는, 모든 종교전통들은 하나의 동일한 종교적 뿌리에 기초를 둔, 서로 다른 가지들이라고 본다. 종교전통간의 차이는 모든 종교전통,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잠재해 있는 동일한 익명의 계시(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와 신앙(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선천적인 방향지워짐)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명시화(explicit), 개념화(conceptualize), 그리고 주제화(thematize)"됨으로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로, 종교전통간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지 질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 종교전통들이 서로 다른 것은 동일한 익명의 계시와 신앙이 "서로 다른 정도로 반성(reflection)"되기 때문이며, 다른 말로 하면 "서로 다른 정도의 지식으로 명시화되고 개념화되고 주제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동일한 계시에 대한 서로 다른 정도의 반성이란 이해의 빛에서 볼 때, 기독교는 현존하는 모든 종교전통들 가운데 익명의 계시와 신앙을 의식의 세계에로 가장 분명하게 명시화하고, 개념화하고, 주제화한 "절대적인 종교"라고 라너는 말한다.

 

 

여기서 라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에 대한 선험적인 경험에 대한 해석의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믿는다. "실질적이고도 참된, 그리고 초자연적인 계시의 역사는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분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성되며, 우리는 구체적인 종교사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선험적인 경험의 몰이해와 이 경험에 대한 적절한 이해 사이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된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신을 인간과 교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과 그 교통하심을 받아들이려는 인간이 결정적으로(irrevocably) 하나가 되어 있고, 그에 따라 전 인류의 계시와 구원의 역사가 그 분 안에서 목표에 다다랐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은 기독교적 개념과 주제를 통하여 가장 명시적으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또한 다른 종교전통에서 익명의 계시가 현시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전통에서 서로 다른 정도로 명시화 될 수 있는 이 가능성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게"(completly) 실현되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명시화들이 충분한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궁극적인 기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라너는 다른 종교전통들은 기독교와 동일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이 그 잠재성을 기독교와 똑같은 정도로 현실화한 것은 아직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라너는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밖으로 나아가 선교사로서 그들을 만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그 목적은 이미 비기독교 종교전통에 속하여 있는 "익명의 신앙""명시적인 신앙"에로 끌어올리려는데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익명의 신앙은 명시화되지 않으면 공허한 것이고, 더 나아가 다른 종교전통 속에 있는 익명의 신앙은 반드시 기독교를 통하여 나타난 명시적인 신앙과 관련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 라너는 타종교인들이 각각 자기 종교전통과 공동체 안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종교전통 안에 작용하는 명시화하는 기준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종교전통 자체를 기독교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르트와 비교해볼 때 라너에게서 대화의 궁극적 목적은 다른 종교인들을 개별적으로 한명씩 한명씩 기독교에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전통 그 자체를 기독교에로 개종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포용주의 태도에서 넘을 수 없는 한계선이 있다. 모든 세계 종교는 계시적 구원진리를 부분적으로, 불완전한 형태로서, 불투명한 실체로서 나타내고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완전하고도 투명한 구원진리를 본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증언하고 그의 은총의 역사 위에선 기독교는 모든 종교적 진리의 성취자, 완성자, 규범자, 궁극적인 것의 계시자, 능가할 수 없는 구원자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익명의 기독교들로서의 다른 종교전통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고 그에 따라 다른 종교전통들은 결국 기독교에로 향한 예비적 단계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라너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의 빛 안에서, 그리스도는 절대적 구원자이며 기독교는 절대적 종교라는 내적 확신으로부터 종교전통간의 대화를 시작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로 인해 타종교인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타종교는 그리스도의 참된 보편적인 교회로 수렴되고 성취, 완성되어야 한다는 카톨릭의 교회 중심적인 입장을 피력하며 기독교의 배타주의 성향을 제거시키고자 하였다. 비록 라너의 이론이 기독교의 배타적인 성향을 제거시키려는 의지는 보였지만 결국 기독교라는 전제하에 그의 이론을 전개하였기에 다원주의 신학자들로부터 여전히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3) 다원주의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Peter L.Berger)에 따르면, 다원주의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가질 수 있는 세계관이 하나 이상인 상황, 다시 말하면 여러 세계관 사이의 경쟁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세계관들을 상대화시키는 이러한 다원주의적 상황은 종교적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버거는 말하기를 종교다원주의는, "서로 다른 종교 집단들이 경쟁적 상황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종교다원주의는 종교다원화시대에 다양한 가치관과 종교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특정 종교가 유일한 진리이며, 가치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의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므로 다양한 종교들을 인정하면서 각 종교의 가치규범이 다양하게 공존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종교다원주의가 서 있는 이론적 기반은 자연주의 사상과 상대주의 사상이다. 즉 자연의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이 일어났고, 그 안에서 점차 진화의 과정을 거쳐 종교도 형성되었고, 기독교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주의 사상은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와도 배치되며,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역사 속의 어떤 요소도 절대적일 수 없듯 이 세상의 어떤 문화나 종교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가치의 상대화를 주장한다. 그래서 기독교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모든 종교를 동일한 지평에서 취급하는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 정신은 칼 라너의 신학과 트렐취의 신학을 정신적 모체로 해서 이를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시킨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로는 힉(J. Hick), 파니카(R. Panikkar), 니터(P. Knitter)등이 있는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신이 절대적으로 계시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에, 이제까지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 신중심의 신학으로 바뀌어야 함을 강조한다.

 

 

힉에 의하면 신은 상이한 문명들에서 성찰되기 때문에 상이한 계시와 종교를 통해 현현되며, 비록 계시와 종교가 각각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디서나 하나의 신이 인간정신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면서 활동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근본적으로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신적 실재나 종교적인 경험은 동일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종교다원주의를(종교간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존 휙은, 신적 실재 자체는 똑같은 하나의 실재이나, 인간 인식 능력의 제한성 때문에 각각을 다른 현상으로 설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동일한 신적 실재가 때로는 인격적으로, 때로는 비인격적으로 파악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인식의 제한성 때문이라고 한다. 궁극적인 신적 실재는 인간의 사유나 언어를 초월하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신적 실재 자체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결국 신적 실재는 인간의 제한된 인식의 틀로써 경험한 것을 표현할 뿐이기에 그러한 것을 모순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상호 보충적인 것으로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존 휙은 예수의 역사도 수많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의 역사중 하나일 뿐이지, 그 역사만이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의 역사는 아니라고 말한다. 마치 한 교단의 이름 아래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듯, 계시의 보편성과 역사성에 의해 각기 다른 종교형태로 발전하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역시 니터도 말하기를, 신의 구원의 길은 예수라는 인물 속에서도 계시되어 있고, 타종교의 여러 위대한 성인들을 통해서도 계시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파니카도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키며 말하기를 우주적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 속에 성육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 안에 유일하게,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규범적으로 계시되었다는 것을 거부하며, 예수는 그리스도일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고, 그리스도는 여러 종교에서 여러 형태로 만날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서는 나사렛 예수를 절대화하는 그리스도 절대주의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종교다원주의의 공통적이고 핵심적인 주장을 3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타종교에도 신적 계시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즉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범종교적인 신적 실체를 주장하며 기독교를 상대화시킨다.

 

 

둘째로, 우주적 그리스도론 혹은 보편 기독론이다.

 

 

즉 그리스도는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에도 나타난다는 사상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지만 그리스도는 꼭 예수일 수만은 없다고 주장한다.

 

 

셋째로, 타종교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잠재적 인사', '익명의 그리도인'이란 표현은 타종교 신봉자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데 이런 주장은 전통적 의미의 개종은 무의미하다는 점을 뜻한다.

 

 

결국 이러한 주장이 오늘의 종교다원주의의 핵심적인 사상이다.

 

 

 

2. WCC의 타종교와의 대화 흐름

 

 

기독교가 타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선교적인 관점에서이다. 19세기말 미주와 구라파에서 유행을 이루던 세계선교운동에 힘입어 세계도처에서는 교회가 세워지고, 타종교는 점차로 이 땅에서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예상을 했으나 그러한 예상이 빗나가게 되면서부터 타종교에 대한 관심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20세기에 들어서자 예상과 달리 세계도처에서는 타종교와 전통종교들의 부흥이 일게 되었고, 어쨌든 타종교의 세계를 선교의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로서는 저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20세기의 이러한 경향은 에딘버러를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하여 계속 이어지는 선교회의를 거치며 타종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함께 종교의 다원적 상황에서 기독교가 서야될 위치를 확고히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을 제기하였고, 급기야 기독교 선교는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라는 높은 장벽과 부딪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을 이제부터 WCC 이전과 이후라는 시간적인 관점에서 WCC가 타종교와의 만남과 대화에 어떠한 자세로 임하였고, 그 결과 어떤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WCC 운동 이전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화는 이미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World's Parliament of Religion)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시도는 20세기의 전환기적 분위기에서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19세기의 전반적인 경향은 기독교의 절대성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배타주의적인 입장이 주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서 상황이 크게 달라져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하여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어 갔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WMC)에서 문화인류학의 관점에서 타종교에 대한 관심이 구체적으로 표명되었다. 타종교가 선교에 미치는 심각한 도전과 영향을 의식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타종교를 선교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전략개발적 성격을 가졌던 이 대회에서는, 기독교와 타종교를 비교하면서, 타종교에도 '소량의 진리'가 있음을 인정은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를 강조하였다. 비록 기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던 시기였을지라도, 이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타종교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19세기와는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타종교에 대해 보다 적극적 태도를 보인 것은 1928년 예루살렘에서 모인 선교대회에서부터였다. 에딘버러가 타종교 속의 소량의 진리를 조심스럽게 인정하면서도 기독교의 절대적인 진리를 전하는 것을 선교의 목적으로 삼았던 반면, 이 회의에서는, 타종교는 비록 기독교보다 열등하지만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으며, 기독교는 타종교의 부족을 보완, 완성시켜 준다는 '성취설'(fulfilment theory)이 대두되었다. 이 대회에서 채택한 성명서에서 성취설에 대해 , "타종교의 모든 진리들이 기독교에 있을 뿐 아니라, 기독교는 타종교의 진리보다 더 균형이 있으며 정확하다.타종교가 가르치지 않거나 모르는 것은 기독교는 성취로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라고 제시하며,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관계를 진리와 거짓보다는 우열과 열등의 관계로 이해하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촉구하게 되었다.

 

 

이 대회 이후 타종교와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윌리암 호킹(William Hocking)이었다. 그가 1931년과 1932년 중국, 일본, 인도를 방문한 후 쓴 선교에 대한 재고(Rethinking Missions)라는 보고서에서, 동양종교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고 기독교 선교는 유교도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유교도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전통적 기독교 선교관에 도전하였다. 즉 타종교를 일종의 신앙체로 인정하여 그곳에서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종교간의 대화를 통한 화해(reconciliation)를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현재의 기독교는 타종교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며 타종교들이 줄 수 있는 공헌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1938년 인도 마드라스에서 열린 탐바람 대회에서는 핸드릭 크레머로 하여금 호킹의 선교에 대한 재고(Rethinking Missions)에 나타난 절충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도록 한 회의였다. 그는 여기에서 기독교 계시는 본질적인 면에서 다른 종교들과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의 접촉점은 없으며 또한 있을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이 대회에서는 타종교와 문화가 중요한 의제로 취급되었고, 타종교의 '경험적 가치와 도덕적 우수성'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1947년의 휘트비 대회에서는 타종교에 대한 특별한 논의는 없었으나, 전후(戰後) 상황은 타종교와의 대화를 더욱 촉진하게 하였다. 하지만 1952년 빌링겐 선교대회에서는 선교의 목표를 샬롬의 구현으로 제시하며 호켄다랺이 주장한 'Missio Dei' 개념이 WCC 선교신학의 기초가 되면서 선교개념 자체에 큰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혼란 즉, 복음, 선교 그리고 구원의 개념 혼란은 타종교와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개념상, 회개란 다른 종교와 자아의 죄로부터 주와 구주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로 돌아서는 것이며, 구원이란 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새롭고 영원한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의 선교론 등장으로 구원과 회개의 개념이 정의와 해방 등으로 대치되었고, 자연히 선교에 대한 개념도 타종교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개념에서 함께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하에서 선교가 복음의 선포로부터 타종교와의 대화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며, 세상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결국 격변의 1960년대를 맞이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2) WCC 운동 이후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들이 정치적으로 독립을 성취하면서부터 아시아 대륙의 전통문화와 종교의 부흥 운동을 계기로, 종교혼합주의와 다원주의에 관한 문제는 점점 심각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WCC 신학은 보다 분명하게 타종교와의 대화를 넘어 타종교의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급변하는 1960년대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화는 궁극적으로 구원관에 있어서 교회 안과, 교회 밖의(intra muros et extra muros) 차이를 외면하는 종교다원주의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탐바람 대회의 크래머와 충돌을 겪은 후 잠잠하던 타종교에 대한 연구가 1950년대에 활발해지면서 1961년 뉴델리에서 개최한 제3WCC 총회에서 종교다원주의는 다시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5IMCWCC와의 공동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살아있는 제종교"에 관한 주제로 공동연구를 시작하며 종교간의 대화를 적극 모색하였고, 이 공동연구의 제안에 따라 1961년 뉴델리에서 모인 WCC 3차 총회에서는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고 타종교를 '산신앙'(living faith)으로 표현함으로서 대화를 더욱 권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타종교에 관한 전도는 대화로 대치되었다. 한편 타종교를 '다른 신앙' 혹은 '산신앙'으로 표현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다른 신앙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며, 성령이 역사한다고 주창하였던 WCC 뉴델리 총회에서, 인도 신학자 더바난단(P.Devanandan)은 비기독교 종교들을 '성령의 창조적 사역'에 대한 응답이라고 해석하고, 복음을 비기독교적인 실존철학적 신앙의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구원의 효과는 기독교 공동체 내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우주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비추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활동한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타종교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를 혼합주의로 자처하고 말았고 혼합주의적 선교개념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1968WCC 웁살라 총회에서는, "다른 신앙이나 무신앙의 사람들과 만남은 대화로 발견해야 한다. 다른 종교의 사람들과 대화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절대성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상실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타자에 대한 진정한 신자의 태도는 인간적이고도 인격적이며 적응성이 있으면서 겸손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대화는 타종교와 만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임을 주장한다. 또한 비록 이 대화는 선포와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복음증거에 있어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이제까지 선교의 중요한 내용이었던 선포를 무시하는 차원으로까지 진행되어 갔다.

 

 

이처럼 1960년대는 1938년 탐바람 회의 이후부터 줄기차게 지켜오던 타종교에 대한 부정적이고 배타적이었던 바르트와 크래머의 주장과 결별하기 시작했고, 하나님 계시의 보편성과 타종교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종교혼합주의에 양보하게 되었고 선교신학의 개념자체에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1973"오늘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모인 방콕 대회의 마지막 날 카스트로는 "우리는 지금 선교시대의 마지막 석양에 서 있으며, 동시에 세계선교의 새로운 여명에 서 있다"라고 말하며 "복음주의적 선교의 시대는 지나갔고, 세속적 사회주의적 범 세계적 선교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천명했다. 또한 이제 새 시대를 향한 출발에 즈음하여 교회는 아프리카 문화를 긍정하고, 인도의 종교적 전통을 널리 보급하고, 사회혁명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일들을 맡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WCC는 특히 1970년대의 크고 작은 여러 회의에서 불교, 힌두교, 회교, 유대교 등 타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종교간의 대화를 구체화하였고, 1971년에는 인도 신학자 사마르타(S.J.Samartha)를 종교간의 대화 프로그램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사마르타는 선교, 전도, 선교전략, 선교사등과 같은 용어는 그 자체가 종교적 제국주의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을 증거하는데 부적절하며 비성경적인 용어라고 말한다. 또 대화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도록 전하는 것은 신구약성경에 위배되며, 신앙은 역사적 경험의 열매이지 사람에게 강요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그의 기본적인 입장을 제시하였다.

 

 

WCC 내에서 이러한 종교 혼합주의적 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사마르타는 종교간의 대화가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희망이라고 피력하고 성경적 진리 개념과 힌두교적 진리 개념이 상호 보완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특히 그는 힌두교의 범(Brahman) 사상과 기독교 삼위일체설을 용해시킴으로서 범신론적 혼합주의에 빠졌는데, 그는 타종교 속에도 그리스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보편 기독론을 주장하여 마호멧, 크리쉬나, 짜라투스트라등을 예수와 동일시하였다. 결국 그의 혼합주의적 보편 기독론은 기독교의 기독론과 힌두교의 범사상을 혼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마르타는 교회연합에 대한 관심에서가 아니라 인류연합에 대한 목적으로 가지고 과거적인 교회들 사이의 대화를 넘어서서 이제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세계공동체를 위한 목적으로 모든 종교인들의 협력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사마르타의 기본적인 입장에 기초하여 1971년 아디스아바바 총회에서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주요사업으로 채택하였고, 나이로비 총회, 치앙마이 총회를 거치면서 1979년 킹스턴 총회등에서는 대화국을 설치하고 중앙위원회가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한 지침'을 채택했는데, 이 지침에서는 혼합주의의 위험을 경계하면서도 '대화''선교'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과, 타종교 신봉자들도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1965년부터 1975년까지 WCC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던 토마스(M.M.Thomas)는 타종교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타종교에서 역사하는 성령을 발견하고자 하는 혼합주의적 경향성을 더욱 농후하게 하였다. 그는 이미 방콕 대회에서 힌두교인이 '대화'를 통해 종교를 바꾸거나 새로운 종교 공동체로 이동해 갈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문화공동체에 그대로 속해 있으면서 '기독교적 힌두'가 될 것을 주장하였고, 2년 뒤인 1975년 나이로비 총회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혼합주의'를 촉구했다. 그는 당시 총회 주제였던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하고 연합한다'는 내용으로 강연을 하면서 '대화'를 통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란 문화와 종교가 서로 침투하는 거짓된 혼합주의가 아니라,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서 교리적인 차이를 초월하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토마스는 이러한 종교적 차이를 초월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그리스도와 관련된 혼합주의'라고 부르며 창조주이며 구원주이신 하나님이 타종교인들 가운데서도 역사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1983년 제6차 뱅쿠버 총회"를 거치면서 거듭 확고히 되었는데, 뱅쿠버 총회의 타종교에 대한 입장은, 이 세계가 종교적 이념으로 다원화된 세계임을 전제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종교적인 진리를 찾는 일에 창조적으로 일하고 계심을 인정하며, 대화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세상에 어떻게 활동적이신지를 더 분별하고, 다른 신앙인들이 궁극적 실재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찰들과 경험들을 그것들 자체 때문에 감사하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대화의 해로 설정한 1985년부터는 "내 이웃의 신앙과 나의 신앙-종교간의 대화를 통한 신학적 발견들"이라는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9년 산 안토니오 대회에서 CWME총무 스톡웰은 타종교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는데, 그는 "우리는 예수님만이 구원의 주라는 말에 대해서는 '그렇다, 아니다, 모른다'라는 세 가지 표현을 썼다. 주님이 우리에게 유일한 구세주인 것이 사실이라는 견지에서 '그렇다'이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다 지옥간다는 입장에서는 '아니다'이고 모든 종교의 종국적 판결이 하나님께 있다는 점에서는 '모르겠다'를 주장했다. 결국 타종교 속에서도 하나님은 발견될 수 있으며,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입장을 보였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복음증거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호켄다이크의 'Missio Dei'1952년 빌링겐 대회 이후 WCC의 선교신학의 기초가 되면서, 이 이론이 61년 뉴델리, 68년 웁살라 총회를 거치는 동안 복음과 선교의 개념을 지극히 정치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선교론이 제시하는 선교의 목표인 샬롬의 구현이 전체 에큐메니칼 신학의 기본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복음전도에 대한 WCC의 입장은 점차 보편구원설을 지지하는 경향으로 기울게 되었고, 또한 두번째 이유인 타종교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면서 WCC가 기본적으로 대화(Dialogue)의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복음전도의 열기는 식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WCC가 추진한 종교간의 대화 프로그램은 기독교적 교리와 신앙의 절대성과 유일성이 무시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대화를 통한 진리의 공동추구와 타종교 속에서 역사하는 '영성'과 타종교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는 종교신학적인 시도는 포괄적인 종교혼합주의와 다원주의로 발전하며 기독교 선교계에 커다란 혼란을 몰고 왔다.

 

 

3. 종교다원주의의 비판적 고찰과 기독교 선교의 방향

 

 

1) 종교다원주의의 비판적 고찰

 

 

종교다원주의 등장 배경

 

 

서구 세계를 지배하였던 강력했던 기독교의 점진적인 쇠퇴에 반해 이슬람의 강력한 도전, 동양종교의 서구 유입 등은 종교의 복수현상을 현실화하였고, 타종교의 실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갔다. 더 이상 기독교의 우월성을 논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현실적 상황은 결국 타종교와의 관계정립을 촉구하였고, 종교적 관용주의에서 출발한 타종교와의 관계는 결국 포용주의로, 포용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침내 종교다원주의가 등장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의 등장은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전호진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 등장 배경을 말한다.

 

첫째로, 종교다원주의는 서구 사회의 변화 즉 미국과 유럽 내에서 기독교 독점시대가 사라지고 동양종교가 소개되며 부흥함으로서 발생한 사회적 변화에서 일어난 것이다.

 

 

둘째로, 서구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실망을 느끼고 동양종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며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동양종교에서 진리와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데 기인한다.

 

 

셋째로, 서구와 제3세계의 반서구 감정이 종교다원주의를 부채질하고 있다. 특히 서구의 많은 백인 지식인 중에는 서구의 식민주의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대한 강한 자책감을 가진 자들이 많은데 이들은 기독교와 서구문명에 불만을 가지고 동양종교를 찬양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기독교의 선교는 서구의 우월주의와 패권주의의 상징이므로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넷째로, 선교를 위해 종교간의 대화를 제안하였던 WCC의 종교적 대화가 결과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초래하였다.

 

 

다섯째로, 비서구세계의 문화적 정체감 회복이 종교다원주의에 큰 자극 요인이 되었다. 즉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침투로 인하여 문화적 위기를 느끼게 되어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을 찾자는 운동과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의 종교는 더 이상 우상이나 미신이 아닌 구원과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대부분의 비서구 국가는 기독교를 서양의 종교로 배격하고 자신들의 종교를 더 고수하는 문화적, 종교적 복고주의가 나라마다 성행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현시대를 풍미하는 상대주의와 민주화가 종교다원주의의 직접 혹은 간접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20세기의 철학, 사회학, 문화 인류학 등은 진리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상대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요인들의 가장 근본적인 등장배경으로는 선교적인 관점에서 일 것이다. 즉 선교과정 중에 선교현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효율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타종교에 대한 관심은 관심의 수준을 벗어나 오늘날과 같은 개신교 선교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종교다원주의에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 개혁주의적 선교는 무모한 개종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선교지의 문화와 종교를 나름대로 연구하고 평가, 수용해야 한다는 종교적 관용주의에서 출발하여 종교간의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였고, 드디어는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진리와 구원이 있다고 종교다원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종교다원주의는 그동안 정복적인 선교관을 가진 서구 중심의 선교가 가져온 후유증 중의 하나임을 WCC 종교간의 대화 흐름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문제점

 

 

WCC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는 각 종교가 다른 종교들 안에서, 다른 종교들과 함께,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통일을 꾀함으로서 세계의 평화, 정의, 민주화를 지향하고자 한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어보며, 이들이 가진 문제점을 신중심주의적 종교다원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포괄적으로 살펴본 후 그 가운데 기독교 선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계시와 구원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종교다원주의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문제점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코페르니쿠스적 신 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신론, 기독론, 구원론을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타종교의 범신론을 수용한다. 특히 WCC 내에서 종교간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인 더바난단, 사마르타, 토마스 등은 아시아의 범신론적인 영성, 특별히 힌두교의 철학적 체계와 범 사상에 기독교의 믿음과 교리를 용해시키며 기독교의 힌두교화를 조장하였다. 결국 기독교만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파괴하고 철저하게 세속화시켜 버리며 혼합주의로 흐르게 하고 있다.

 

 

둘째로,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으며 각자의 종교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길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WCC 내에 상대주의적 기독교 선교관을 뿌리내리도록 만든 대화국 책임자인 사마르타는, 타종교에도 기독교가 발견한 진리가 있기 때문에 선교는 포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기독교의 상대화를 초래하였고, 기독교를 타종교와 같은 구원의 한 방편으로 전락시키며 선교 무용론을 야기하였다.

 

 

셋째로, 성경이 신적 계시의 산물이며 신앙과 삶의 절대규범임을 부인한다. 이들은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타종교들의 경전과 동일한 지평에서 보고 성경을 타종교의 경전들과의 소위 지평융합이라는 이름으로 상대화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전호진 교수도 "복음주의가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이유는 신학적으로 그것은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정함으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행위를 그릇된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넷째로, 종교다원주의는 종교간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만인구원론'적 입장이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모든 사람이 모든 종교를 통해서 구원이 이룩될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에 대하여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결국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인간으로 성육하신 분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또한 유일한 계시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상대화시킴과 동시에 기독교의 절대성과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스스로 포기하며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인 역동성을 상실하였고 범신론과 종교혼합주의에 그 자리를 내어 주었다.

 

 

특별히 신중심주의적 종교다원주의에서는 모든 종교의 배후에 하나의 신적인 실재가 있고 모든 종교적인 표현을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즉 하나의 신적인 실재에 대한 응답인 신의 이미지로서 각 종교를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간에 가장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는가! 그럼에도 1973년 방콕에서 열린 제2CWME대회 개회연설에서 세계불교연합회 회장 디스쿨 푼 프리스마이(Diskul Poon Prismai)여사는 "기독교와 타종교인들은 겉모양은 다르나 다 같은 목표에 도달한다는 다원주의적 입장을 지지하며, 불경과 성경은 같은 영에 의해서 서로 다른 용어로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과 불경에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다. 성경과 타종교의 경전에는 질적 차이가 있다.

 

 

크래머도, "만일 모든 종교가 하나님의 계시의 결과라고 한다면, 우리는 왜 모든 종교들 가운데 흐르는 일반적인 통일성을 발견하지 못하는가? 왜 그렇게 많은 모순과 그렇게 많은 혼동들이 있는가?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될 수 없다"라고 지적한다. 동일한 신적 실재에 의해 계시된 가장 본질적인 내용만큼이라도 서로 충돌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특별히 구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다르다. 기독교에서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함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이 죄로 인해 죽은 것이고 스스로는 구원할 수 없다는 점을 성경도 명백히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오히려 산 정상의 절대자가 산 아래로 내려와서 자력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절망 가운데 있는 인간을 사랑하심으로 산 정상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관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타종교는 타력구원이 아니라, 자력구원을 이야기한다. 구원의 개념에 있어서도, "기독교는 부활과 소망의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 초자연적인 천국과 지옥을 믿으며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부활을 통하여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도의 종교는 영혼이 육체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구원이다. 물질세계에서 해방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특히 회교는 천국은 남자들이 특권을 누리는 인종차별의 구원관이다."

 

 

한편 동양의 종교 속에서도 너무나도 상이한 점을 우리들은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다원주의자들이 선교의 목표로 삼는 인간성의 회복, 인간화를 주창하는 구원관을 만나게 되는데, "유교는 인간의 지식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점진적 세계평화 실현을 도모하는 사회구원을 제시한다. 여기서 유교의 사회구원이란 윤리적으로 이상적인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계공동체인 대동사회를 실현하는 것이다. 한편 도가 만물 속에 내재한다는 범신론을 가진 도교에서의 구원은 자연과의 신비적 합일이나 불로장생의 개인적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여, 인간화를 구원의 목표로 삼는 유동식 박사는 "구원이란 서로 의존하고 서로의 괴로움을 없이하며 기쁨을 나누는 인간사회를 형성하는데 있다"라고 본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이고 실존적인 죽음의 문제를 도외시한체 단지 추상적인 도덕과 인간화만을 구원의 목표로 추구하는 오류를 남기며, 기독교와는 너무나도 달라 비교를 출발점을 설정할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어떻게 동일한 신적 실재에 의해 주어진 구원에 대한 개념과 구원관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또한 종교의 목표에 있어서도 불교의 목표는 생명의 소멸이며, 복음의 목표는 생명의 풍성이다. 힌두교는 탄생과 환생의 회전, 곧 윤회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선포하지만 복음은 죄의식과 죄의 능력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선포한다. 회교의 낙원(관능적인 기쁨의 장소)에 대한 견해는 확실히 기독교의 천국(도덕적으로 완전한 장소)에 대한 견해와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이러한 모순은 피조물의 영에 의해 주어진 것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어진 것을 분별하지 못함으로서 생겨난 것이다. 범신론에 빠짐으로서 야기되는 필연적인 차이인 것이다. 그럼에도 WCC 진영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과 타종교들의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혼돈함으로써 종교다원주의를 수립하려고 한다.

 

 

기독교는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범신론적 종교가 아니다. 자력구원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성육신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그가 사망에서 부활하신데 핵심이 있다. 범신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혼합주의와도 다르다.

 

 

WCC 진영의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각 종교전통들이 만남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숙되어가고, 각 종교의 정체성을 잃어버림 없이 상호간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WCC 진영에서 말하는 대화, 만남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러한 기대는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지닌 특수성, 절대성, 독자성과 우월성을 포기함으로서 공통의 보편적인 신적 개념을 추론할 수 있다고는 말하나, 타종교와의 공존을 위해 어떻게 각 종교가 본질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만의 존재근거인 특수성, 절대성, 독자성과 우월성을 버릴 수 있겠는가!

 

 

 

 

 

각 종교의 근본적인 본질을 유지하며 서로간에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상일 뿐이다. "예를 들면 회교도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신도 아니며, 십자가 위에서 죽지 않았고, 죽음에서 부활하지도 않았다고 하는 한편, 기독교인은 이 모든 사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데 어떻게 회교와 기독교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의견을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혹은 힌두교인의 엄격한 일원론(오직 영적인 것만이 실제이다)과 기독교의 이원론(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둘다 실제이다)이 조화될 수 있는가?" 설령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공존을 위해 탈을 쓴 위선이요 종교혼합주의로 자연스럽게 인도하는 주장일 수밖에 없으며 기독교 선교의 필요성을, 기독교만의 유일성, 독자성, 절대성과 진리를 상대적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사실 "기독교는 교리와 윤리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때문에 유일하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이 차이가 난다. 그는 유일한 분이다. 그 분만이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시다. 타종교에 있어서 어떤 다른 것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리스도이다. 타종교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그리스도가 없는 것은 그들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선교의 동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아 본 것처럼 WCC의 종교다원주의와 범신론적 혼합주의로 흐르는 대화의 신학은 결국 인간의 이성 안에 신의 계시를 가두어 두는 것이며, 기독교 선교를 일으키는 동기 그 자체를 잘라버리는 행위이다. 종교다원주의의 선교의 목적은 인간화이며, 세계평화를 추구하고, 불신앙에 대한 회개를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기존의 기독교 선교가 타종교인을 개종시키는 것으로 삼았던 반면, 종교다원주의 선교에서는 타종교를 존중하면서 기독교를 증언하는 것에서 선교의 목표를 찾고 있다. 이같은 종교다원주의 선교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화와 세계평화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완전히 상대화되며 타종교의 구원을 추구하는 선교무용론에 빠지게 된다. 그러기에 WCC가 주창하는 종교다원주의적 흐름은 선교의 핵심을 상실하게 한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수용하게 될 때 기독교의 존립자체가 어렵게 되고, 기독교 선교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심어줄 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다.

 

 

2)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기독교 선교의 방향

 

 

회의론적 인식론, 서구 기독교의 쇠퇴, 종교간의 교류,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과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 신학적 경향,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 신학의 변화, 그리고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영향 등으로 대두된 종교다원주의의 문제의 핵심이 되는 부분은, 타종교를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는 각 종교가 다른 종교들 안에서, 다른 종교들과 함께 자신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통일을 꿈꾸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기본적으로 선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변론이나 진리의 우열을 가리는 토론이 되어서는 안된다. 토론하고 설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고통과 갈망과 의지까지 포함하는 실존적이며 역사적인 전인간을 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질, 진리, 생명이신 예수의 은혜에 들어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같은 회개와 변화는 합리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이 축복을 받게 되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도 없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세에서 선교의 방법론적이거나 전략적인 차원을 거론하기 이전에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재점검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가 취하여야 될 태도와 사명은 무엇인가?

 

 

첫째로, 온전한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지 기독교를 전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복음은 순수하고 궁극적이다. 반면에 기독교에 대한 많은 표현들은 불순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복음과 기독교는 엄격히 구분하여야 한다. 기독교가 복음이 아니다. 복음만이 기독교요, 기독교를 존재케 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돌아 보았을 때 복음만이 전파된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 수많은 불순물들이 포함되어 전해졌다. 그러한 결과가 기독교의 절대성에 손상을 입히며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 경향으로 치닫게 만들었음을 자성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적 기독교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위한 노력으로서 둘째로, 기독교가 성경으로 되돌아가서 철저히 성경적 검증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다시 굳건하게 섬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의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의 능력에 기초했고,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이 "오직 말씀으로"라는 모토아래 이루어졌듯, 오늘날의 신학과 선교도 다시 한번 말씀으로 되돌아가 정체성 회복을 위한 산고의 진통을 치뤄야 할 것이다. 그동안 WCC 진영에서는 인도주의적 관점과 합리주의적인 이성에 근거한 성서의 자의적 해석 결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러기에 피터 바이엘하우스도 방콕대회를 바라보며, "현 에큐메니칼 운동이 현대신학의 영향을 받아 선교의 유일한 기반이 되는 성경을 떠나서 현대인들과의 대화에 치중함으로서 오늘날비기독교적인 이념과 타종교들 가운데 역사하는 사탄적 세력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는데, 기독교가 성서중심주의를 버렸을 때, 즉 성서를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비성서적인 종교다원주의가 발생하는 것임을 기억하며 성경으로 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로, 종교다원주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계시에 관한 것이었다. 선교 현장에서 늘 마주치고 논쟁이 되는 것이 계시이기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참된 계시에 대한 확고한 신학적 연구와 타종교의 계시에 대한 이해를 함께 비교, 연구, 검토함으로서 참된 계시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앙의 재무장이 필요할 것이다.

 

 

넷째로, 원심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먼저 구심적으로 기독교 내부의 갱신이 필요하다. 교회의 갱신을 통해 드러나는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의 모습 속에서 케리그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즉 기독교에는 참 진리가 있고, 온전한 구원을 제시하는 계시의 종교라는 복음의 핵심이 긍정적으로 타종교 세계에 드러날 수 있도록 먼저 기독교 내부의 갱신이 필요할 것이다.

 

 

 

 

 

다섯째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타종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타종교인들이 비록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복음의 진리이지만, 타종교인에 대한 태도를 지나치게 이분법적 관점에서 구원받지 못한 멸망의 자식으로 볼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요, 우리의 이웃으로 바라보는 열린 시각과 함께 관계중심의 선교로 나아가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다른 사람과 우리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은 죄인이고,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들이라는 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선포할 책임을 뜻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특권을 뜻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로, 타종교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종교다원주의의 신학자들은 타종교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비하여 복음주의 신학자는 타종교 연구가 없으므로 학문적 대응에 한계가 있다. 사실 지금까지 기독교의 전통종교에 대한 이해는 이분법적인 패러다임에서 출발함으로서 타종교 연구의 출발점을 봉쇄하거나, 그 연구방향을 일방적으로 규정지어 버렸다. 이러한 종교에 대한 배타적 시각은 타종교에만 악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기독교 자체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하나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연구는 객관적인 시각마저 형성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은 종교에 대한 배타성에서 사람에 대한 배타성으로까지 전이되고 있다는데 또 다른 문제점을 발생시키고야 말았다.

 

 

결국 타종교에 대한 연구를 회피하는 것은 아직도 종교다원주의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거나 혼합주의의 위험부담에 대한 무책임한 기피일 것이다. 성서와 교의는 연구하나 토양인 문화와 전통종교에 대하여는 무지한 복음주의 진영의 현실은 결국 감정적 대응 외에 할 일이 없게 되어버리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도 보다 깊은 타종교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사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선교는 어떤 형태로든지 타문화에 대한 적대적 사고, 기독교 우월주의, 그리고 획일주의에 기반을 둔 종교적 제국주의 전통에서 수행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선교는 다른 종교전통에 대한 상호이해와 상호연대성을 모색하는 가운데, 그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타종교에 맞추어서 그들과 적당한 타협을 하며,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심어주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III. 결론

 

 

종교적 봉헌은 각자가 진리라고 믿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자에게, 그가 믿는 종교는 절대적인 신념체계로서 자신의 전인적인 헌신을 요구하며, 동시에 그 신봉자는 자신의 그런 종교에 절대적 내지 우월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강력히 주장하게 되며 결국은 종교간의 갈등과 마찰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마찰과 갈등의 위험을 극복하고, 다른 종교의 존재와 가치를 겸허하게 인정하면서도 자기 종교의 절대성에 대한 확신을 상실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가 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배타적인 자기만족으로부터 벗어나 열려진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WCC 내에서는 타종교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의 결과는 타종교와의 대화에서, 이해, 그리고 수용과 절충의 단계로 혹은 종교에 대한 상대주의적 견해에서 포용주의를 거쳐 다원주의에로 발전의 과정을 밟아 왔다.

 

 

이러한 비약적인 사고의 전환은 WCC가 비기독교 종교의 가치와 구원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들 종교의 역기능이 기독교의 역기능보다 더 심각하다는 현실을 외면함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사회정의와 인간화를 선교의 중요한 목표로 보는 이들은 비기독교 종교의 세계에서 빚어지는 비인간화와 미개발과 비민주를 지적하기를 외면하는 오류를 범하면서도 오히려 정통기독교의 오류와 문제를 지적하는데만 급급해 하는 모습을 보이며 혼합주의적 경향을 농후하게 보여왔다.

 

 

결국 전통적인 기독교의 문제를 해결하려다 기독교의 본질까지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WCC의 타종교와의 대화 정책은 기독교가 타종교를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주체로 인식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 결과 "WCC를 중심으로 종교간의 대화는 오늘에 와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종교의 다원성을 주장하는 상황신학이 날로 심각하게 신학세계를 좌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믿는 신앙과 종교적 독선 혹은 배타주의와는 구별해야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만 독점하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림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차이점과 차별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든 타종교인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요, 서로 사랑해야할 이웃이다. 그러기에 모두가 하나되어 아름답고 복된 세상,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고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기독교 선교는 수행되어 왔으나, 어떤 형태로든 타문화에 대한 적대적 사고에 근거한 종교적 제국주의, 서구 우월주의 전통에서 수행되었다는 것 또한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과거의 잘못 비추어진 선교의 모습으로 인해 복음의 본질을 잃어가면서까지 타종교와의 대화에 임해서는 안될 것이다. 복음의 본질을 버리고 다른 종교와의 지평 융합을 할 때에 기독교는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뿐만 아니라 기독교 자체도 사라질 위험이 있음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선교는 다른 종교전통에 대한 상호 이해와 상호연대성을 모색하는 가운데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도와야 할 것인데, 다른 종교와 가까이 하면서,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그들의 종교나 문화가 인간의 문제해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가 유일한 진리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결국 이것은 타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도 부분적인 진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신학적 접근의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인 이해로 타종교와 그것의 삶의 양식을 접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타종교인들을 과소평가 하지도 말며, 그들을 무조건 이단시하지도 말며, 오직 진리에 입각해서 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함으로서 비판받고, 핍박받고 고난을 받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이지만, 우리가 비윤리적으로, 비논리적으로, 비문화적으로 타종교를 부당하게 취급해서 비난받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또한 기독교 스스로도 사회 속에서 한 종교라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질적 차이를 강조하며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내부의 종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감안하더라도 기독교도 현실적으로 하나의 종교이며, 기독교인은 한 사회 속에서 엄연한 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선교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기독교가 이런 상황 속에서 여전히 타종교에 대해 무지하고 배타적인 태도만을 지닌다면 기독교는 사회적으로 고립될 것이며, 이것은 기독교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조차 울타리에 가두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이제부터는 오히려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혼합주의의 도전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세계적, 역사적 신앙으로 재정비하여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에 더욱 분발하도록 자극하는 촉진제로 받아들이며, 위축되고, 배타적 고립의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보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굳건하게 기초하고, 보다 개방적이고, 보다 의연한 자세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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