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식 교수의 지속창조론(유신진화론)과 종교다자중심주의
원제: <박영식 교수의 저작물에 대한 신학검증위원회 보고서>에 대한 의견
박영식(교양교육원),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2022년 1월 18일 화요일, <신학검증위원회 보고서 송부 및 의견 제출 요청>이란 제목의 업무연락과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검증위원회’(아래 검증위)가 작성한 보고서 요약본(2쪽 분량)을 받았습니다. 검증위 태동의 동기와 보고서 작성의 이유와 경위, 그리고 위원 명단과 이들의 신학적 배경에 대해 공식적으로 통보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제게 전달된 보고서 요약본에 대한 ‘의견’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 저는 고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 분량과 신학적 논의의 정도를 명확하게 확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성결교회와 서울신학대학교에 속한 목사와 교수로서 책임감을 가지며, 검증위 보고서에 담긴 오해를 풀고 검증위가 문제 삼았던 주제에 관해 신학적 이해를 돕고자 최대한 성실하고 진솔하게 이 글을 서술하였음을 밝힙니다.
1. 저는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와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 빌레펠트의 베텔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005년 가을에 귀국하였습니다. 수년간 시간강사로 활동했고, 2012년 겨울, <서울신학대학교 교양교육원 기독교의 이해 담당> 교수임용에 지원하여 2013년 1학기부터 지금까지 교양교육원 교수로 재직하며 한 해에 약 500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2012년 지원 당시 제출한 신앙고백서에 사도신경을 따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고, 시범 강의의 주제도 ‘창조’를 택하여 발표하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성서 전반을 꿰뚫는 중요한 신앙적, 신학적 주제입니다. 저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사도신경에 명시된 것처럼 성서와 초기 교회 전통을 따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하며,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믿습니다. 즉, 창조를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돌보시고 이끄시며, 궁극적으로는 창조를 완성하시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3. 저는 이러한 저의 기본적인 창조신앙이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타당하다고 봅니다. 17세기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교의학에 따르면, 하나님의 창조는 태초의 창조(creatio originalis)와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로 구분되며, 창조를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보존(conservatio)하시며, 피조물과 협력(concursus)하시며, 또한 통치(gubernatio)하십니다. 저는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신학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만물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의 약속(계21:5)에 기반한 새창조(creatio nova)를 지향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는 창조에서 종말로 이어지는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과도 일치하며 현대의 주류 신학자들(위르겐 몰트만,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미하엘 벨커, 크리스티안 링크, 알리스터 맥그라스, 존 폴킹혼, 한스 큉 등)의 견해와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는 인류와 세계의 역사는 ‘자연의 나라’에서 ‘은총의 나라’를 거쳐 ‘영광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으며, 이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창조 활동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4.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옛날 옛적의 특정한 시간에 이미 끝나버린 사건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성서의 하나님은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신(creatio ex nihilo)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죽은 자를 생명으로 일으키시는 부활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와 부활의 힘으로 지금도 역사하시는 역사의 주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창조는 통속적인 창조 이해보다 훨씬 더 풍성합니다. 이를 몇몇 성서 구절과 관련해서 간략하게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시편 104:30.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2) 시편 102:18.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시 일을 기록하여라. 창조될 백성이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
3) 이사야 65:17-18.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4)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5) 이사야 44장 24절. 너의 구원자, 너를 모태에서 만드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바로 만물을 창조한 주다. 나와 함께 한 이가 없이, 나 혼자서 하늘을 폈으며, 땅도 넓혔다.”
1)의 시편은 봄바람을 생각나게 합니다. 봄바람에 새롭게 새싹들이 돋아나고 생명이 싹트는 자연의 사건을 성서는 하나님의 창조로 묘사합니다. 즉, 창조는 자연 사건과 대립되지 않으며, 자연 사건을 포괄합니다. 자연과학자가 자연의 탄생과 변화 과정을 자신들의 언어로 설명한다면, 신학자는 성서에 근거하여 이를 하나님의 창조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처럼 지금도 만물을 새롭게 살리시는 창조의 활동은 계속적 창조입니다. 교회와 신학은 계속적 창조를 또한 ‘섭리’(providentia)라고 부릅니다.
2)와 3)의 말씀은 대표적으로 하나님 창조의 ‘미래’를 지시합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는 옛날 옛적에 있었던 특정 사건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새로운 사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창조의 완성에 해당되는 새창조를 지시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포괄하는 하나님의 활동 전체를 지시합니다. 창조를 시작하신 하나님(창 1:1)께서 창조를 지속하시며, 심지어 안식일에서도 창조적 사건을 일으키시며(요5:17), 창조세계가 신음과 탄식 속에 희망하는(롬 8:18이하) 새창조를 완성하실 것(계 21:1이하)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4)와 5)의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와 ‘모태에서의 나’와 연관시켰는데, 이는 종교개혁 전통에서, 특히 루터의 대교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 창조신앙을 구체적인 나의 실존, 나의 삶과 연관하여 이해한 것과 상통합니다. 또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창조를 로마서 8장의 피조물의 고난과 연관해서 해석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창조는 이제 ‘모태에서 생성’이라는 생물학적이고 의학적인 ‘과정’과도 연관됩니다. 의학자는 모태에서 배아가 어떻게 형성되고 태아가 어떻게 자라가는지를 과학적인 용어들로 설명하겠지만, 신앙인은 이를 하나님의 창조활동으로 이해하며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병이 치유되는 과정을 의학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치료(divine healing)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치료 과정을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과학자의 시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저는 하나님의 창조를 자연과 세계의 창조뿐 아니라 내 육체와 영혼, 내 삶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활동으로 이해하며, 고통과 아픔에서 탈출구를 열어주시는 구원의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5. 성서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창조는 우주 만물의 시작에서부터 그 종말론적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자연과 세상뿐 아니라 나의 실존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간과 공간을 포괄합니다. 이때 창조 세계를 포착하려는 신학과 과학은 참된 의미에서 오른손과 왼손처럼 대립이나 갈등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두 분야가 하나의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언어로 묘사한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결코 대립이나 길항의 관계에 놓인 것이 아니라 대화와 공명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전통은 이를 ‘하나님의 두 책 이론’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과학자 갈릴레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이란 책을 통해 하늘의 운행에 대해 알려주시며, 성서라는 책을 통해 하늘 가는 길을 알려주신다.’
6. 우리가 과학적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을 비롯한 과학적 모델링과 개념들에 익숙해야 하듯이,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언어적, 문학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성서에 관한 선(先)지식을 무시하고 본문을 해석한다면, 신학을 무의미한 작업으로 취급할 뿐 아니라 극단적인 문자주의나 근본주의로 기울어져, 우리의 신앙을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조롱거리로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의 창조신앙은 한편에서는 본문이 처해 있는 역사성을 염두에 둬야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오늘날 성서의 의미를 묻는 우리 시대의 시간성도 간과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저의 저작들은 이러한 ‘해석학적 노력’의 결실이라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결과 성서가 증언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드높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가 과거지사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과도 긴밀하게 연결된 생생한 사건임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7. 검증위는 저의 창조신앙이 성결교회 전통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성결교회의 창조교리는 기독교 일반의 창조신앙과 다를 바 없으며, 창조된 피조물(자연과 세계)이 주된 관심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세계와의 관계가 신앙의 핵심에 놓여 있습니다. 과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관심을 둔다면, 신학은 창조주 하나님께 관심을 둡니다. 이미 성결교회의 사부(師父)라고 불리는 이명직 목사님께서는 “종교와 과학은 서로 투쟁할 것이 아니며, 충돌의 원인은 종교가 과학을 배척하고, 과학이 종교를 불신함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자연을 연구하는 것은 과학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신앙과 과학의 수준을 구분해 주셨으며, 지구의 연대에 대해서도 6천 년에 붙잡히지 않고 훨씬 더 오래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개방된 자세도 보여주셨습니다. ‘전통’(tradition)은 어원적으로 흐르다, 넘겨주다(tradere)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살아있는 샘물, 활천이 되어 사중복음의 생명을 전하는 성결교회의 신학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근거하여 현대적 논의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제게 가르침을 주셨던 전성용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데이빗 퍼거슨의 『우주와 창조자-창조신학 입문』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서울신학대학교에서 10여 년 전부터 교양 필수과목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기독교의 이해』는 창조와 진화의 양립가능성을 주장하며, 몰트만과 샤르뎅의 창조와 진화 이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황덕형 총장께서도 자신의 논문에서 무신론적 과학주의의 도전에 맞서 신학과 과학의 대화의 중요성과 함께, 진화적 창조론의 거장인 폴킹혼의 견해도 소개해 주셨습니다. 검증위가 말하는 성결교회 전통이 단순히 초기 성결교회로 회귀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제가 앞서 밝힌 창조신앙은 현재까지 형성된 성결교회의 신학 전통에 편승하여 더욱 풍성하게 전개될 수 있다고 봅니다.
8. 저는 『창조의 신학 - 나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습니다』(동연, 2018)에서 ‘과학주의 무신론’(리처드 도킨스와 에드워드 윌슨)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검증위는 이를 간과한 듯 보입니다. 더 나아가 검증위는 ‘자연주의적 진화이론’이란 개념을 사용했는데, 이 개념을 과학적 진화이론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개념적 혼동에 빠진 듯합니다. 검증위가 사용한 ‘자연주의적 진화이론’이라는 개념은 진화이론에 의존한 무신론적 철학 또는 세계관을 뜻합니다. 하지만 과학과 철학(세계관)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관성의 법칙이나 중력 법칙은 자연법칙이지만, 이를 근거로 하여 이신론(deism)을 전개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무신론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관성의 법칙 자체를 무신론이라고 말해서도 안 되며, 간단하게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즉, 과학으로서의 진화이론과 철학으로서의 자연주의적 진화이론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진화는 자연 속에서 관찰되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이러한 진화 현상에 대한 모델링과 가설 설정, 이론 정립, 검증의 과정을 통해 과학으로서의 진화이론이 제시됩니다. 하지만 제시된 과학이론은 여타의 인간적 진리추구와 마찬가지로 완결된 진리가 아니며, 다양한 학문분과에서 검증되고 토론되는 과정 속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진화생물학도 불완전하며 수정 보완되어 왔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무신론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중력이론이나 양자이론 등의 과학이론에 무신론과 유신론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듯이, 진화생물학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이와는 달리, 자연주의적 진화이론은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서 신적 존재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배제하고 부정하는 무신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도킨스나 에드워드 윌슨이 주장하는 자연주의적 진화이론을 비판하고 배격합니다. 오히려 저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자연세계를 창조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창조를 신앙합니다. 은총은 자연을 배제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신학적 표현처럼, 하나님의 창조는 자연의 진화보다 넓고 깊습니다. 성서의 표현대로, 만물이 주께로부터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며(롬 11:36),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로서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엡 4:6).
9.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인정하고 믿습니다. 하지만 창조의 방법(how)에 대해서는 각기 상이한 입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지구 연대를 6천 년으로 보고, 창조의 하루를 24시간으로 생각하는 창조과학회(젊은 지구 창조론)의 입장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검증위는 제가 “창조과학을 사이비과학으로 폄하”했다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창조과학’의 주요 이념은 1938년에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멤버들로 구성된 홍수지질학회(DGS)의 논리를 따르며, 성서의 무오성에 근거한 문자주의를 고수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성서 무오설을 옹호하는 보수적인 칼빈주의자였던 벤자민 워필드는 진화론이 진리에 가까우며, 성서의 창조와 대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칼빈의 창조론’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계속적 창조를 주장한 칼빈을 옹호하며, 그를 진화론자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개방적 태도와는 달리 창조과학은 자신들의 창조설이 과학이론이라고 주장하며 당시 복음주의 과학자들의 모임인 ‘미국과학자협회’(ASA)에서 분란을 일으키자, 안타깝게도 과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창조과학을 ‘사이비과학’(pseudoscience)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미국 법정에서 창조과학은 지적설계론과 함께 과학으로 인정받고자 몇 차례 법정 소송을 감행했지만(1980년대 아칸소와 루이지애나 재판), 최근 도버 재판(2004년)에서도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 은 과학이 아니라는 철퇴를 맞게 된 것입니다.
10. 위르겐 몰트만과 더불어 현대 개신교 신학을 대표하는 판넨베르크(그는 자신의 신학 체계를 삼위일체론적 창조론으로 전개했습니다.)는 지구 연대 6천 년을 주장하는 창조과학의 견해를 “장난스럽고 경박하다”고 평했습니다. 2008년 독일교회협의회(EKD)는 독일 공립학교(초중고)에서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들의 가르침을 “잘못된 길”(Irrwege)로 규정했고, 창조과학이란 이름의 근본주의는 성서의 창조 본문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해서 성서 본래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본문의 의도를 곡해한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창조과학은 현대과학을 부정함으로써 신앙과 과학이 마치 양자택일인 것처럼 오해하도록 만들며, 결국 이들의 근본주의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성서이해가 건전한 창조신앙을 해치고, 되레 아이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 창조과학의 세례를 받았던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창조과학의 그늘에서 벗어나 성서적이고 신학적이며 과학적으로 소통가능한 창조이해를 찾아 지적 탐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 예로, 창조과학의 초창기 멤버라 할 수 있는 양승훈 교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신학은 창조와 관련하여 자연과학자들과 열띤 토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탁월한 양자물리학자이면서 동시에 신학자인 폴킹혼을 비롯하여 알리스터 맥그라스, 이안 바버, 로버트 러셀, 아서 피콕 등 과학자이면서 신학자로 활동하는 연구자들이 많을 뿐 아니라,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신학과 과학의 대화를 위한 센터를 구축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11. 안타깝지만 여전히 6천 년 설을 고집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천문학적 독법으로 예수님의 탄생일이 5월이라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자가 있는 한, 창조과학을 사이비과학이라고 보는 통속적인 평가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도 1925년 <기독신보>를 보면, 창조와 진화를 양자택일로 보지 않았으며, “진화적 창조론”, “오랜 지구론”이라는 개념을 들어 창조신앙을 소개하곤 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성결교회의 이명직 목사님도 지구의 나이를 6천 년으로 보는 견해와 함께 수백억 년에 이른다는 당시의 새로운 견해에도 열린 입장을 밝히셨습니다. 저는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의 공헌이 전혀 없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들의 신앙적 열정을 저는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성서의 진리를 사수하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하지만 진리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이어야 하고, 보편타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창조신앙이 비합리적이고 반과학적일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신학은 과학보다 더 깊고 더 큰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12.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찍이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이라는 저술을 통해 창세기 1장-3장에 대해 매우 상세한 견해를 밝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 다시 고쳐쓰기도 했습니다만, 그의 문자적 해석은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매우 영적이고, 논리적이며 또한 철학적인 해석입니다. 그는 창세기 1장 1절의 하늘과 땅을 영적 세계로 해석했으며, 순간 창조와 점진적 창조를 연결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창조신학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통상적으로, 비그리스도인도 땅과 하늘, 이 세상의 다른 요소들, 별의 운동과 궤도, 별의 크기와 상대적 위치, 일식과 월식의 예측, 해와 계절의 순환, 동물과 나무와 돌 등에 관해서 얼마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이 지식이 이성과 경험으로부터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이때 혹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서의 의미를 제시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주제에 관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어떤 불신자가 듣게 된다면, 그것은 부끄럽고 위험한 일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무지를 드러내 보여주면서 조롱하고 경멸하는 그러한 당혹스러운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성서해석이 언제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며 비과학적일 이유는 없습니다.
13. 검증위는 ‘해석 없는 문자주의’를 권하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119편 73절, “주께서 손으로 몸소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세우셨으니..”라는 구절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태 속으로 당신의 손을 집어넣어 나를 빚으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닐 것입니다. 해석이 필요하겠죠? 자연적 과정, 즉 의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바로 그 과정이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시는 과정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검증위의 ‘해석 없는 문자주의’는 역대상 21장 1절과 삼하 24장 1절 등장하는 사건 주체의 불일치를 어떻게 해석 없이 이해하실 것인지요? 창조 본문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내용의 상이성을 어떻게 설명하실 수 있는지요? 또한 태양은 넷째 날에 비로소 창조되었는데, 어째서 창조의 첫날부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될 수 있으며, 하루가 24시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창조가 6일에 끝나고 제7일에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면, 이제 제8일과 그 이후 모든 날에도 하나님이 안식하고 계시다고 봐야 하는지요?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빛을 만드셨지만 어둠을 만든 것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사야 45장 7절에는 빛도 어둠도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여전히 이런 본문도 ‘해석 없는 문자주의’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지요? 어떤 이해에 도달하든 해석 없이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도 우리의 눈이 없다면 볼 수 없듯이 하나님이 쓰신 성서도 우리의 해석 없이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14. 검증위는 저의 종교신학적 견해를 언급하며, 이웃종교를 존중해야 한다는 저의 ‘다자중심주의’가 “선교적 타종교 이해”와 상반된다고 말했습니다. 검증위가 말한 “선교적 타종교 이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알 순 없지만, 이웃종교를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고 폄하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다른 종교의 고유성을 존중하지 않고 깎아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웃종교에 대한 존중과 고유성에 대한 이해를 언급한 저의 ‘다자중심주의’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해도 전도가 가능하고 이웃종교를 존중하면서도 얼마든지 전도가 가능합니다. 아니, 상대를 존중할 때 더욱 전도가 잘 될 것입니다. 제 판단에는, 안타깝게도 검증위가 ‘종교다원주의’와 저의 ‘다자중심주의’를 혼동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다자중심주의는 제가 박사학위논문에서 사용한 주장으로, 세계신약학회장이었던 안드레아스 린데만 교수는 제 이론을 종교신학적 삼분법 중에서 검증위와는 정반대 입장인 ‘배타주의’라고 평하셨습니다. 그런데 검증위가 이를 다원주의와 결합시켰으니 매우 유감(遺憾)스럽습니다. 더구나 제가 쓴 논문 중에는 다자중심주의의 관점에서 존 힉(John Hick)의 다원주의를 비판한 것도 있습니다.
15. 마지막으로, 저는 신학은 설교와 마찬가지로 우리시대의 새로운 질문과 도전에 직면하여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을 책임적이고 소통가능한 언어로 서술하고 선포해야 한다고 믿기에, “창조와 진화의 주제에 관해 교육함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성결교회의 교리적 입장에서 명확히 교육할 것을 제안한다”는 검증위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감사를 표합니다. 하지만 검증위의 구성과 신학적 오해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을 표합니다. 그럼에도 이를 통해 저는, 한국교회와 성결교회를 위한 신학 작업의 중요성과 학문적 엄밀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고 성찰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연구에 매진하며, 한국교회와 사회에 신학적으로 공헌할 수 있도록 정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창조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념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역사 전체를 아우를 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하나님의 행위임을 더욱 설득력있게 증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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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출처] 기독교 일간지 신문 기독일보 2024년 04월 16일 화요일
2024년 3월 학교법인 서울신학대학교(총장 황덕형) 백운주 아사장은 유신창조론을 강의한 박 교수에 대하여 징계를 의결하였다. 이유는 박 교수의 저서 『창조의 신학』(동연, 2018)을 포함한 그의 창조신학이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교단의 창조론과 배치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여러 진보진영의 학회들이 “마녀 사냥”이라고 하면서 해당교수를 옹호하고 있으며 복음주의 학계 안에서는 “교단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기독교학술원에서 여러 해 창조론 포럼을 진행해온 학자로서 본인의 의견을 진술하고자 한다.
1. 신학의 학문적 자유는 일반대학에서는 허용될 수 있다.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재직했던 한스 큉 교수가 교황의 무오설 부인 등 가톨릭 교리에 대하여 비판하는 강의를 했을 때 학교당국은 튀빙엔 가톨릭 신학부에서 큉 교수가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고 일반대학부에서 자유스럽게 강의하는 신분을 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톨릭 신학부에서는 기본적으로 교수가 가톨릭 전통 안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제약이 주어져 었다. 큉의 강의는 이에 위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튀빙엔 대학 일반학부에서는 제약없이 종교에 대한 학문적 자유로운 논의가 가능한 것이었다.
오늘날 이처럼 일반대학과 신학대학원의 차이가 있다. 일반대학에서는 진화론이나 유신진화론이나 창조론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각 학자들의 학문적 소신에 떠라 강의할 수 있다. 신학대학원은 그렇지 않다. 교단의 신앙고백 아래라는 제약이 있다. 신학대학원에서는 교단의 신앙고백에 위배된 강의는 교단과의 계약위반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징계가 주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 기독교대학에서도 학문의 자유가 허용된다 하드라도 무신론 사상까지 비판적 여과없이 가르치게 된다면 교회적 내지 사회적 지탄을 받을 수 있게된다.
2. 신앙고백 위에 운영되는 교단 내에서는 교단의 정관에 맞추어야 한다.
기독교신학은 하나님에 관하여 논하는 학문적 성찰로서 2천년 역사를 통하여 발전해 왔다. 역사적 전통의 기독교회는 성경 계시에 입각한 사도적 전승을 이레네우스 이래로 중요시하여왔고, 성경에 합치하지 않는 영지주의 문서 및 오리겐의 보편화해론 등 비사도적 교리는 성경에 합치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배제하였고 정통교리와 신앙을 지켜왔다. 역사적 교회는 성경적 가르침에 합치한 것만을 가르치고 지켜왔기 때문에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중세교부, 종교개혁, 그리고 청교도 들의 전통을 통하여 오늘날 기독교의 본질을 지켜온 것이다.
이런 맥럭에서 성결교단같이 자기 교단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단 신학교에서 교수들에게 성결교단의 신앙고백을 지켜서 강의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의 학교법인과 교수와의 약속인 것이다. 교수들은 이 약속에 서명하고 그 교단의 교수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교수는 교단과의 약정(約定)을 지켜야 한다. 만일 교수가 그 약정을 지키지 않았다면 이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
3. 유신 진화론은 전통적 창조론을 오늘날 시대의 흐름에 맞게 타협한 비성경적 이론이다.
유신 진화론 내지 진화적 창조론은 “생물학적 진화는 과학적 사실이다“라는 신념 때문에 창세기를 진화론에 적극적으로 꿰어 맞춘 타협이론이다. 전통적인 창조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시대정신에 대하여 만족한 설명을 하지 못하자 간격이론(Gap Theory, 재창조설), 점진적 창조론, 유신진화론, 다중격변론, 진화적 창조론 등 다양한 타협이론들이 나왔다.
타협이론들의 공통점은 지질시대표로 상징되는 오래된 지구연대를 주장하는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믿고, 성경(특히,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에 기록된 내용들을 진화론에 꿰어 맞추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진화와 빅뱅을 이용해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유신 진화론은 무신론적 진화론자들도, 성경적 창조론자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유신 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류는 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라 하등한 공통조상에서부터 진화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4. 유신 진화론은 창세기의 역사성 부인, 기독교의 원죄교리 등 기본 교리에 위배된다.
유신 진화론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실재로 존재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본다. 유신 진화론에 의하면 현대 유전학에 따라서 오늘날 인류는 단지 아담과 하와 두 명에게서 유래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다양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신 진화론자들은 방향이 결정되지 않은 물질의 과정에 의해 낮은 영장류에서 사람이 기원했다고 본다. 이들은 인류의 조상이 수만명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은 아담을 첫 번째 사람으로, 하와를 아담의 아내가 되도록 창조된 여자라고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를 창조하시고”(창 1:27).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의 아내로서 지으심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 18). 당시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었다”(창 2:20). 이 구절은 당시 지구에는 다른 어떤 사람도 없었음을 단언한다. 그러므로 유신진화론자들이 당시에 아담과 하와 외에 수만명이 있었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해석이다.
인류가 아담에게서 유래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아담이 하나님께 대항한 단 한번의 반역행위의 결과로 모든 인간이 도덕적으로 부패한 성품을 물러받았다는 원죄 사상은 치명적으로 손상된다. 역사적 아담의 부인(否認)은 바울의 로마서에서 증언하는 바울의 원죄 교리에 명백히 배치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와 더불어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과 그를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칭의론도 부인된다. 기독교 교리의 기본이 무너지는 것이다.
5. 유신 진화론은 비판적인 관점과 더불어 신학생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소개되어야 한다.
필자도 기독교 대학에서 현대신학을 강의해왔다. 교수는 현대신학을 소개할 수 있으며 다양한 신학흐름들을 학생들에게 소개하여야 한다. 그러나 무비판적으로 소개하거나 자기의 사상을 학생들에게 주입하기 보다는 비판적 견해와 더불어 학생들이 충분히 취사선택하도록 강의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아진다. 그런데 교단 신학교 강의실에서 유신 진화론을 마치 사실인냥 주입식으로 강의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계역위반이다. 그러므로 학교 재단이 이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다.
6. 창조과학은 사이비 과학이 아니라 하나님 창조에 대한 하나의 진지한 과학적 설명이다.
창조과학이 젊은 지구론을 말하는 것이 지구 역사 수십억면을 말하는 오랜 지구론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고, 창세기의 하루를 오늘날 24시간으로 계신하는 것에 대하여 태양이 생기기전 사건이라 하여 유사(類似) 과학 내지 사이비 과학으로 매도하는 것은 경솔한 태도가 아닌가 보아진다. 필자는 창조과학자들과 함께 여러 해 세미나를 개최해보았다. 한국 창조과학자들은 권위있는 해외 유명대학교에서 과학의 자기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권위자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예전에는 창조론을 비판하고 진화론에 심취했는데 회심을 경험하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후에 지구와 자연질서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고백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창조를 증명하고자 하지 않고 단지 과학적 증거로써 설명하고자 노력하는 자들이다. 이들을 서이비 과학자로 매도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가 아닌가 보아진다.
7. 학문의 자유는 일반 대학의 영역에서는 보장되나 교단 신학교 테두리 안에서는 절제되어야 한다.
오늘날은 지동설을 주장한 갈리레오에 대하여 당시 천주교가 이를 제제한 중세와 같지 않다. 학교법인은 대체로 학자의 신앙과 양심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진다. 단지 학문의 자유아래 신앙고백이 훼손되는 것을 제재하는 책임감이 학교 경영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이번에 서울신대에 일어난 징계 사건은 마녀사냥이나 종교재판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학교법인과 교수 사이의 계약관계에서 이해하면 된다. 계약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위반할 때 처벌이 따르는 것이다. 해당교수는 자기에게 주어진 칭계에 대하여 성숙의 기회로 받기 바란다.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가 강의할 수 있는 기관을 찾으면 된다. 또는 자기가 뜻을 펼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면 된다. 본인의 자유에 맡겨진 것이다. 이러한 선택의 폭이 넓게 주어지는 것이 오늘날 개방된 자유사회의 모습이다. 포스트모던 시개라 할지라도 절대적 자유는 어느기관에서도 없다. 학문의 자유는 양심과 양삭의 제약 속에서 누려져야 한다고 본다.
8. 오늘날 기독교교단 신학교는 신학적 정체성을 지켜서 탈 진리 시대에 성경적 진리를 지키는 목회자를 양성 사명을 다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와 구미의 기독교가 전통에서 탈피하여 새속주의를 비판적으로 방어하기 보다는 이에 침잠하면서 기독교 정체성이 약화되었다. 신학교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서구 및 미국의 신학교의 학생수는 현저하 감소되었다. 신학의 자유주의화 여파로 신앙의 세속화애 따라서 교인수가 감소되고 신학생수도 감소되었다.
이에 대한 실례로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가 회자되고 있다.. 뉴욕 유니언 신학교는 1940년대 나치 정권에 맞서기 위해서 독일로 떠나는 디트리히 본훼퍼를 교수로 붙들려고 했을 때 라인홀드 니버와 리차드 니버 등 저명한 복음주의(기독교현실주의)적 신학자들에 의하여 학문적 명성을 떨쳤다. 그 후에 과격한 성경 비평학, 해방신학 등 자유주의 신학이 득세하면서 미국교회가 약해지고 신학생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2천년대 들어와 그 반세기 이전의 명성이 빛을 상실하고 무명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보수주의 신학의 소위 맏형이라는 신학대학교가 동성애를 비판하는 복음주의적 열정의 교수를 동성애 반대하는 교수를 좋아하지 아니하는 당시 정부의 방침에 따라 ”성희롱 강의했다“는 누명을 씌어 해임 조처하면서 오랜 전통에 불명예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입학지원생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에 반해서 성결교단 서울신학대학교는 학교법인이 교단의 성경적 진리에 따라 운영되기 때문에 많은 신학교가 미달 사태를 맞을 때 이 학교만은 학생들이 차고 넘쳤다. 이 사실은 그만큼 교단의 정체성이 살아 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신학교가 초기의 창립 정산을 지켜주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