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프의 스승 신학자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c. 1320-1384)는 서양 중세기독교 역사에 등장하는 종교개혁자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을 태동시킨 교회 개혁의 새벽별이다.그의 가르침과 사상은 교회 개혁과 영어 성경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위클리프는 교회의 전통을 최고 최종 권위로 여기는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곧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최고 최종 권위로 천명했다.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로마교회의 전통, 관습, 가르침을 거부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세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기에 담대히 진리를 외쳤다.위클리프는 교회 개혁을 옹호하고 성경을 중세 영어로 번역하여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위클리프의 신학에 결정적인 가르침을 준 신학자는 누구인가? 사람은 배움에서 사상을 얻고 노력으로 열매를 거둔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에 영향을 준 스승과 인물은 누구인가?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의 머튼 칼리지에서 1356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발리올 칼리지에서 1361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1365년에 캔터버리 홀의 교수로 재직을 시작했다. 이 배움과 연구의 과정에서 그에게 영향을 준 신학자는 누구인가?
첫째, 위클리프의 신학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교사는 성경이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로 거센 로마의 신학을 물리차고 성경적 진리를 천명하는 비평적인 신학자로 자리매김했다. 위클리프의 신학적 사고의 혁신은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시작되었다.
위클리프는 옥스포드대학교에서 여러 신학 작품들을 접했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성경을 읽고 그것에서 영감을 받는 점은 남달랐다. 당시 성경은 매우 희귀했다. 대형 규모의 대학 도서관에서 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성경 한 권의 값은 오늘날의 한화로 약 5억 원 정도였다.
위클리프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했다. 그리고 여러 선배 신학자들에게서 배웠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그 시대의 작품들을 접하고 존경하는 여러 사람들의 가르침과 이론들을 배웠다.가르침을 받고 접한 것들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위클리프의 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교사 가운데 한 명은 위클리프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100년 전에 살았던 로버트 그로스테테(Robert Grostete)였다.링컨교회 목사인 그는 60세의 나이로 1235에 링컨에 있는 자신의 교회를 개혁하고 싶어 했다.
그로스테테는 수도사들의 부도덕과 탐욕을 질타했다. 당시의 교황 인노센트 4세의 권위와 그의 생활 방식을 거부했다. 그를 ‘루시퍼의 화신’이라고 일컬었다. 그로스테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성직자였다. 교황의 법을 어기고 전능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었다.
그로스테테는 성경연구자, 교황의 적, 로마에 대한 경멸자로 알려졌다. 위클리프는 그로스테테가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과 논평들을 연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 번째는 토마스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 c. 1300-1349)이라는 신학자였다. 성직자, 학자, 수학자, 물리학자였으며, 잠깐 동안 캔터버리의 대주교로 재직했다. 스콜라주의 철학자이며 신학박사인 그는 한동안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사목이었다.
브래드워딘은 극도로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학자 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을 매우 존중했다. 옥스퍼드대학교 머튼 칼리지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를 설교하고 가르쳤다. 브래드워딘의 작품은 유럽 전역에 전해졌으며, 로마교회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학자들과 교회를 향하여 어거스틴 신학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네 번째는 인물은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1285-1349)이었다. 윌리엄은 정복될 수 없는 박사(Unconquerable Doctor)였다. 로마가 어찌할 수 없는 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옥스포드대학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유명론 학파(Nominalist school)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교황 요한 22세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던스 스코투스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윌리엄의 가르침을 비난했다.
오캄의 윌리엄은 한 동안(1324-1328)프랑스 아비뇽에 있는 교황청 감옥에 갇혔다. 그가 하나님의 삼위일체, 창조, 인간의 자유 의지와 같은 기독교 신앙이 철학적 또는 자연적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곧 성경에 근거한다고 주창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인물들은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1182-1226)를 포함한 위대한 인물들이었다. 위클리프는 프란시시의 삶과 작품을 연구했다.편지와 글을 읽었다.위대한 교부 어거스틴(354-430)의 신학 작품들을 읽었다. 어거스틴의 자서전 <고백록>, 조직신학서 유형의 <신의 도시>와 <기독교 교리> 그리고 <은혜의 본성> 등을 읽었을 것이 분명하다.
여섯 번째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였다.아퀴나스는 약 80편의 작품을 저술했다. <이방인에 대한 로마교회의 가르침>과 <신학대전>이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다.위클리프가 아퀴나스의 사상을 고스란히 수용하지는 않았다.자신의 신학 구축과 비평적 사고 능력의 향상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것은 틀림없다.
위클리프 시대에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 외에는 다른 신학이 없었다. 바티칸의 입장과 다른 작품이 있었지만, 이들은 항상 금지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이용할 수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위클리프의 신학은 로마가톨릭주의를 벗어난 것은 매우 특이하다.
중세기 교회개혁자 위클리프의 '개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성경이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완벽한 구원의 실재에 눈을 뜨게 되었다.어떤 면에서 위클리프가 주창한 것들은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이미 주장한 것들일 수 있다. 위클리프와 그 이전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두 가지이다. 그가 성경을 발견한 것과 자신이 믿는 것을 자신감과 대담함을 가지고 높이 주창한 점이다.
위클리프는 그로스테테와 브래드워딘의 경우처럼 자신의 신학이 로마에 의해 방해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로마가 불만을 표해도 개념치 않았다.인간의 마음이 불타오르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 있고 영감을 받은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위클리프의 신학은 그의 삶과 배움의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발전했다. 교황권력의 오류가 점점 분명함을 인지하면서 그는 교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다.위클리프 신학의 기초는 과거의 인물들이 구축했지만 그는 그것들을 성경으로 정당화 했다.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위클리프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곧 성경에 대한 전적 신뢰와 의존이다. 이 종교개혁자는 성경에 대해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증명할 수 없는 교리를 거부했다.
위클리프가 오늘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훌륭한 근본주의 신학자로, 그리고 아주 복음적인 설교자로 등장할 것이다.'오직 성경'의 중요성을 외치는 신학자이며, 과장된 이야기나 속임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로 나타날 것이다. 성경에 근거하여 단호하고 설득력 있는 강의와 설교 메시지를 전파할 것이 분명하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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