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가?

by reformanda posted Aug 0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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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가?

 

1. <리포르만다> 역본

 

 

유럽 중세후기 작품인 <그리스도를 본받아> (De Imitatione Christi, c.1520)는 불멸의 기독교 고전이다영혼을 정화시키고 영성을 고양한다. 다양한 국적과 기독교 종파의 사람들이 읽고 감상해 왔다. 독자들의 신앙 성숙을 고무하고, 깊은 영성을 고양하는 탁월한 책이다.

 

 

신학저널 <리포르만다>는 총 114회에 걸쳐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글을 '아카이브' 항에 게시했다. 독자들의 영적 성숙과 영성 고양에 이바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독자 각자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거울이기를 바라면서 쉽지 않은 작업을 완료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1420년경의 작품이다. 그러나 지금도 프로테스탄트와 로마가톨릭 신학도들 모두의 사랑을 받는다신학생들이 필독서처럼 애독한다.

 

 

이 책은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기 1세기 전에 출간된 책이다. 프로테스탄트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등장하기 전에 저술된 작품이다. 다소 가톨릭적인 시대 정서를 담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안셀무스의 <왜 하나님은 사람이 되었는가?>와 함께 어두운 중세기를 영롱하게 밝힌 빛나는 걸작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고 닮는 노력을 하라고 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한다. 겸손과 사랑, 단순하고 경건한 삶을 강조하면서 내면의 헌신과 실천적 경건을 균형 있게 제시한다.

 

 

이 작품은 기독교 신앙을 교리 체계로 이해하는 독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충격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다. “겸손함이 없다면 삼위일체와 같이 버거운 주제를 이야기하는 게 무슨 소용 있는가?” “나는 삼위일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보다 차라리 참된 뉘우침을 원한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또 온갖 철학자들의 말을 꿰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참으로 옳고 놀라운 지적이다.

 

 

이 책은 주제를 정신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내적 생활로 인도하는 훈계,” “내적 위로에 대하여,” “존엄한 성만찬에 대하여등으로 구분한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 저술된 까닭에 독자들이 읽기에 다소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다. 그 내용도 15세기라는 시대적 종교적 상황을 반영한다.

 

 

2. 누구의 작품인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ns a Kempis)로 알려져 있다. 토마스의 본명은 토마스 헤메르켄(Thomas Haemerken)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이름은 출신 지명을 이름에 연결시켜 부르는 라틴식 호칭이다.

 

 

이 책의 저자가 토마스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원고는 저자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는다. 원본이 완성된 지 약 20년이 지난 1447년에 필사된 사본이 처음으로 토마스 아 켐피스를 저자로 표기했다.

 

 

일부 교회사가들은 토마스 아 켐피스를 편집자로 간주한다. 파리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한 쟝 드 거존과 토마스 아 켐피스가 소속된 수도공동체를 창설한 헤라르 트 흐로테가 저자일 것이라고 본다.1460년 사본은 1429년에 세상을 떠난 쟝 드 거존을 저자로 표기했다. 그리고 몇몇 인쇄본 역시 그를 저자로 간주했다.

 

 

쟝 드 거존은 학자형 사제였다. 수도사가 아니었다. 이 책의 문체나 인용문 그리고 거론한 주제들을 보면 대학교의 총장이나 사제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다소 덜 학문적이지만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공동생활에 힘쓴 한 수도사의 모습과 더 잘 어울린다.

 

 

한편, 이 책이 헤라르트 흐로테의 저작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그의 험난한 삶이다. 성공한 법률가 흐로테는 중병을 앓은 뒤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1374년에 모든 재산과 높은 지위를 포기하고 영적인 훈련에 몸을 던졌다어느 수도회에서 엄격한 금욕을 실천했다. 훈련과 시험의 시기를 거친 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을 설교했다.

 

 

네덜란드인 흐로테는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하다가 설교권을 박탈당했다. 그런 뒤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냈다. 어쨌든 현재까지 남아 있는 7백여 권의 사본들 가운데 흐로테를 저자로 표기한 책은 없다.

 

 

토마스 아 켐퍼스는 오래 동안 이 책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왔다. 토마스는 공동생활형제단(Brethren of the Common Life)이라는 수도단의 일원이었다. 1392, 네덜란드 데벤터르의 이 형제단에 들어가 거기서 공부하고 신앙과 공동체 정신을 배웠다독일 켐피스(Kempen, Kempis) 출신으로 나중에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토마스의 이름은 처음 이 책이 만들어진 지 20년 뒤에 기록된 헌정사에 등장한다. “이 책은 즈볼레 부근 성 아그네스 산의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가 집필했다.” “이 책은 1441, 즈볼레 부근 성 아그네스 산의 켐펜 출신 토마스 형제의 손으로 마무리되고 완성되었다고 표기되었다이 헌정사들은 토마스가 실제 저자가 아니라 편집자이거나 또는 사본 필사자 또는 제작자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토마스는 1399년에 어거스틴 수도원 또는 즈볼레 형제단 수도회에 들어가 1413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429년에는 수도원 부원장 직을 담당했다.1471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성경 필사만이 아니라 설교, 상담, 저술, 젊은 수도사들의 훈련에 힘썼다. 수도사답게 그리스도만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삶을 유지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영적인 삶을 살았다.

 

 

토마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독일 종교개혁운동이 발생하기 이전이었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때였다특히 형의 죽음이라는 힘겨운 일을 겪고서 하나님의 내적인 위로를 의지하면서 평안을 추구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이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점들을 고려하면 이 책이 토마스의 작품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토마스는 1471년 92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3. <준주성범>(遵主聖範)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원본은 1418-1427년경 네덜란드에서 라틴어로 엮어졌다.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세상에 나왔다. 한국어판은 1913년부터 부분적으로 번역되어 오다가, 1923년 장로교의 조선야소교서회가 <긔독셩범>이란 제목의 책으로 1-4부 전체를 최초로 완역했다. 역자는 이원모 장로였다.

 

 

조선성공회(현 대한성공회)1924년에 허세실(Cecil Hedges) 선교사가 번역한 <준주성법>(遵主聖範)이란 제목의 완역을 출판했다. 라틴어 원문, 한자본, 일본어본, 영어본을 대조하여 번역한 것이다. 한국천주교 서울대교구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신부는 1954년에 이를 완역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우리의 표상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도록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큰 감화와 도전을 주며 빛나는 신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래서인지 한국어로 가장 많이 번역된 외국의 경건 서적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의 기독교 출판사들마다 독자적인 번역본을 출간하고 있다.

 

 

<리포르만다>는 한국인의 영성회복과 영혼정화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 책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했다. 독자들이 명료하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도록 라틴어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의미전달이 이루어지도록 번역했다. 난해하거나 불명료한 부분을 신학적으로 검토하고 전후 문맥을 따져 의미 변화 없는 범위 안에서 현대 한국어로 옮겼다. 일부분은 의역하여 한국인들의 영성훈련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도록 했다.

 

 

15세기의 라틴어 책을 번역하는 작업은 당시 기독교 세계였던 유럽의 정서, 정신성, 망딸리떼, 교리, 사상, 문화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이 작업은 교의학과 교회사와 기독교사상사를 전공한 자의 몫이다. 그래서 '리포르만다 역본'은 장차 100년 뒤에도 한국어 독자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명료성을 지닌 문체로 번역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작업을 한 것이다.

 

 

4. 중세후기의 교회개혁운동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성화 사상에 영향을 끼친 첫 번째 경건서로 꼽힌다. 이른바 종교적 회심을 경험하도록 한 것이다. 존 웨슬리는 이 책이 모든 성도들이 가정에 한 권씩 소장되어 있어야 한다면서 축소판을 편집하여 출간했다고 알려진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전사이며 '예수회' 설립자 익나티우스 로욜라는 평생,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책을 읽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기독교의 신학, 실천, 윤리학, 영성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초기 기독교 문헌에도 비슷한 언급이 나타난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것을 기독인들의 삶의 근본적인 목적이라고 보았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는 내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외적인 부분에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자고 했다. 마구간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옷이 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프랜시스 자신이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은 동방교회와 비잔틴 신학의 주요 주제이기도 했다. 14세기에 저술된 니콜라스 카바실라스의 <그리스도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감을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인 덕이라고 보았다.

 

 

네덜란드의 사제 헤르트 호르테는 당시 교회가 수도원의 전통을 점차 잃어가고 있고 성직자들의 도덕적 가치가 떨어져가고 있음을 인식하고서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을 전개했다. 초대 교회의 복음적 생활을 지향하는 신앙 쇄신 운동이었다. 신학적 사변이나 외면적 신심 형식보다는 영적 내면성의 충실과 수도원 개혁을 전개했다. 믿음이 약화된 성직자들의 재교육이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이 데보티오 모데르 공동체안에서 쓰여 진 책이다. 이것은 중세후기의 교회개혁운동, 신앙개혁운동이었다. 당시 북유럽에서 성행한 종교개혁운동이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이 운동이 추구하던 정신이 확산되었고, 드디어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의 흥기(興起)에 이바지했다(Gordon S. Wakefield, 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Spiritualit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83, 113-114).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중세기에 진행된 교회개혁운동의 유산이다.

 

 

5. 검색 시대에서 사색 시대로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는 성경을 잘 알았다. 고대의 철학과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 책에는 저자의 상당한 지성과 독서력과 깊은 영성이 집약되어 있다. 학식의 높고 낮음과 무관하게, 이 책을 읽는 독자 어느 누구라도 주를 따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도록 직관적으로 다가가는 힘이 지니고 있다.

 

 

이 책은 당장 어느 부분을 펼쳐보아도 영적인 묵상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잠깐만 읽어도 영혼에 불을 밝히는 메시지들을 만날 수 있다. 금언 모음집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특정 주제나 꼭지 또는 단락만 따로 묵상해도 무방하다. 한 단락만 읽어도 독자는 이 책이 주는 유익을 누릴 수 있다.

 

 

이 책은 프로테스탄트 경건주의 운동을 비롯해 수많은 교회 역사의 위인들에게도 깊은 도전과 감화를 주었고, 한국교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인류는 초연결망, 유비쿼터스, 메타버스, 인공지능이라는 특별한 정보통신 시대에 진입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깊은 사색은 하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스마트폰, 인터넷, 챗지피티,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그 내용을 단편적으로 기억하지만 깊은 사색을 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과학 기술은 현대인들을 중독, 우울, 상처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게 한다.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격을 상실하게 한다.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뿐, 스스로 성경과 경건 서적을 읽으며 그것의 진가를 묵상하기를 게을리 하게 한다. 현대인이 영성 회복으로 건강해지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선배들의 영적인 금언집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묵상하는 것이 첩경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우리를 정보 검색에서 사색으로 이끈다. 현대인을 중독과 우울 그리고 상처의 늪에서 은혜의 강으로,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서 스스로 영적 양식을 취하는 높은 단계의 묵상으로 인도한다. 영혼에 필요한 맑은 공기를 제공하는 화창하고 푸르른 은혜의 숲을 만나게 한다. 우리 영혼이 숨을 돌리고 온전히 회복되어 혼탁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갈 힘을 얻게 한다.

 

 

6. 영성의 다양성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중세 후기의 수도주의적 기독교 영성의 결정체이다. 당대의 기독교 영성을 대변한다. 토마스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는 종교개혁 신학자들이 성경에서 확인한 '이신칭의'라는 구원관을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성만찬에 관한 묵상은 당시의 가톨릭 교회관을 다소 반영한다. 성찬을 올바르게 집례하라고 권한다. 삶을 돌이키는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면서 주의 몸과 피를 합당히 받아 영혼의 회복과 경건의 은혜를 얻으라고 한다.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하나 됨으로 나아가라고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주역인 신학자 마틴 루터는 기독교 영성의 초점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 만인 사제직, 신과의 개인적인 관계 그리고 신자 자신들이 성경을 스스로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데 있다고 보았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은혜의 무상 선물이다. 성경은 신성한 계시의 궁극적인 원천이며 신행의 최고의 권위이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 연합으로 구원받은 자가 사제나 교회라는 조직체 없이도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의 인도를 구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등아 영성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종교개혁신학자 존 칼빈의 영성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언약신학 곧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를 언약에 기초한 것으로 보는 신학사상, 규율과 도덕적 행위 등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기독교 공동체와 개인의 도덕적 생활과 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신의 주권에 대한 신앙, 인간의 전적 타락,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계획, 하나님의 은총, 언약 신학, 성경의 권위와 충분성 곧 신의 계시기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원천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7세기 칼빈주의의 영성은 정치, 교육, 문화를 포함하여, 다양한 삶의 영역에 기독교 원리를 통합하고 실천하는 정신과 노력을 의미한다. 아브라함 카이퍼에 따르면, 기독교 영성은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중심 개념이다. 신의 은총이 영적 또는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와 인간 활동의 모든 측면에 확장된다고 본다.

 

 

카이퍼에게 기독교 영성은 일, 예술, 과학, 정치,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영향력을 인정하는 신앙을 포함한다. 영성은 사적인 헌신적인 종교적 수행이나 의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독교 영성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능동적이고 책임감 있게 참여하고 노력하는 총체적인 접근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과 원칙 아래 사회의 여러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진보계 기독교는 역사적 기독교의 영성에서 진일보하거나 일탈한 영성을 천명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미시오 데이’(하나님의 일) 곧 세상사 해결을 기독교 영성 활동의 최고봉으로 여긴다. 인권투쟁, 환경보호, 기후변화 통제, 질병방지, 문맹퇴치, 전쟁방지, 핵무기 억제 등 우리 사회의 핵심 이슈들을 해결하는 일에 열성을 다하는 것을 '영성'으로 규정한다.

 

 

새계교회협의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치지 않고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한다. 모든 종교들을 동일동가로 여긴다. 모든 종교가 다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라고 한다. 종교다원주의는 현대 진보계 에큐메니칼 운동 '영성'의 극치이다. 마치 유물론자들이 공산주의 실천 정신을 지고의 '영성'으로 여기는 것과 일치한다.

 

 

7. 영적 생활과 경험과 실천

 

 

토마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15세기의 기독교 영성의 핵심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이 말하는 ‘영성’은 내적 열정, 성령 체험, 영적 경험, 기도, 하나님 사랑, 경건, 신앙 고백, 가치관, 신명순종, 헌신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영성대신에 신앙이나 정신이란 말을 대체해도 무방하다. 

 

 

'영성'을 어떤 영적 상태지향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면 모든 기독교적 경험이나 윤리실천이나 경건 행위를 모두 영성에 담을 수 있다. 사랑, 진리, 지혜, 하나님 경험, 기도, 경건생활, 예배, 헌신, 가치관과 도덕성, 신앙, 봉사 등은 모두 영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영적 삶을 위한 창조적 선물인 영성을 받았다. 이 점에서 영성은 하나님, 자기 자신, 이웃, 창조 세계와의 생동적인 관계를 위한 능력이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성’(spirituality)이 아니라 영적 생활’(spiritual life) 또는 영적 경험’(spiritual experience)이다.

 

 

영성의 경험적 또는 기능적 차원은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기능을 상실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회복, 유지, 성화의 여정에 이르고 있다. 기능적 또는 경험적 차원의 영성 이해는 영성을 신령한 성품 또는 거룩한 성품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맺음말

 

 

한상동 목사(1901-1976)는 한국교회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다.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이기도 한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주도했다. 그러한 탓으로 일제치하에서 5년 이상 옥살이를 했다.

 

 

한상동은 광복 후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를 세웠다. 그는 예장 고신이라는 교회공동체의 동력이었다. 한 때는 교회연합운동에 앞장 섰다. 예장 고신파와 승동파의 합동을 주도했다. 그 결과로 등장한 '예장 합동'이라는 교단 총회의 총회장을 첫 두 해에 걸쳐 역임했다.

 

 

한상동이 장로회신학교(평양)를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신학교 교과목을 따라 영어 시험을 치렀다. 생소한 외국어 시험에는 한상동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험지를 앞에 놓고 한숨을 쉬며 주여!”를 연발하고 있었다.

 

 

한상동 옆자리에 앉아 시험을 치르는 급우 학생의 시험 답안지가 자꾸만 한상동 쪽으로 밀려 다가왔다. 옆에서 동료가 급우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자기의 답안을 보도록 답안지를 옆으로 밀어준 것이었다.

 

 

한상동은 시험지를 덮어 놓고 자리를 떠나 교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회개하였다. “주님, 제가 평소에 살아온 삶이 어떤 것이었기에 나를 가장 잘 아는 급우가 자기의 시험지를 보여 주면서 제가 그것을 보고 답을 쓸 것이라 생각하였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살고서도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한상동의 영성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말해준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임재,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깊은 체험, 삶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실천을 의미한다. '영성'이라는 용어가 어떤 영적 상태지향성을 나타내는 경우 그것은 모든 기독교적 정신, 경험, 행위를 일컫는다.

 

 

우리는 중세기 수도주의 유형의 영성, 영적 통찰, 영적 경험, 영적 가치관 등을 지닌 사람을 일컬어 자주 영성이 탁월하다고 한다. 영성을 이렇게 규정함은 너무 단순한(naive) 접근이다. 기독교 영성은 수도주의적인 개념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 영성의 핵심 요소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담고 있는 수도주의적 영성은 기독교 영성의 중심부에 해당하지만 전부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하고 헌신하는 수도주의적 영성을 보여준다. 이 영성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영성 일탈 시대의 현장에 필요한 기독교 영성의 기본 요소들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영성과 관련하여 우리로 하여금 검색 시대에 머물지 않고 혼적인 사색 시대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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