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수동 순종, 머레이와 맥클라우드의 견해

by reformanda posted Jul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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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동-수동 순종, 머레이와 맥클라우드의 견해

 

 

최근 한국교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수동 순종과 능동 순종 논의를 지켜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스도의 두 가지 순종을 찬성하는 분들의 글들을 읽어보면 최근에 이 주제가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개혁주의 선배들이 사랑하고 지켜온 신학적 전통이기에 이것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과연 이러한 태도는 옳은가? 과연 개혁주의 선배들이 사랑하고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이기에 따라야 할까? 개혁주의 선배들이 주장해 온 내용이므로 무조건 성경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물론 개혁주의 선배들의 가르침이 귀한 신학적 유산으로 우리의 신앙을 올바르게 세워준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이 세상 누구도 완벽한 신학을 가질 수가 없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 때문에 다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존 칼빈은 기록된 말씀 안에서의 신학을 주창하였다. 기록된 말씀을 넘어서는 순간 마귀적 광란에 사로잡힌다고 경고하였다.

 

 

특정 전통이기에 성경적이고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개혁주의 선배들의 가르침이 아닌 오히려 로마천주교의 입장 아닌가? 개혁주의 선배들은 자신들의 신학이 베뢰아교회 성도들처럼 정말 그러한가 하고 늘 성경을 통하여 진단되고 더욱 성경적으로 발전하기를 소망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능동, 수동 순종을 나누는 편에 서 있는 분들이 이러한 자세를 보여주지 못하는 점은 참으로 아쉽게 다가온다.

 

 

가장 최근의 영어권에서 이 주제가 어떻게 다뤄지고 있을까? 개혁주의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래도 영어권에서 가장 개혁주의적인 신학자로 꼽히는 두 분, 존 머레이와 도날드 맥클라우드의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존 머레이

 

 

존 머레이 박사는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1년간 조직신학을 가르치다가 프린스턴신학교가 좌경화되자 1930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옮긴 후 36년 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머레이는 성경신학자였던 게르할더스 보스의 영향으로 철저히 성경신학에 기반을 둔 조직신학을 추구하며 가르쳤다.

 

 

이러한 이유로 머레이는 개혁파 선배들의 신학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성경 신학적 기반 위에 더욱 성경적인 신학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결정적 성화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결정적으로, 근본적인 성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결정적 성화를 기반으로 점진적인 성화가 가능함을 설명하였다.

 

 

그는 이와 함께 개혁파 선배들이 고수해 온 행위언약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용어라는 점을 제안하였다. 그의 <조직신학> 25, 아담에 대한 경륜에서 철저한 성경신학적 연구를 통하여 그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는 아담에 대한 경륜이 성경에서 언약으로 지시되지 않는다는 점과 함께 히브리서 주해를 통하여 성경이 첫 언약으로 규정한 것은 시내산 언약이었다는 사실을 자세히 논증한다.

 

 

존 머레이 <조직신학> 2314(p.163)는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한다. "구속 사업의 중추적 사건들-죽음과 부활-을 그는 메시야 권세의 행사에서 성부의 명령을 좇아 성취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비슷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을 핵심에 놓고 있다(5:19; 2:7,8; 5:8,9; 10:9,10). 증거들은 우리가 속죄에 관해 갖고 있는 개념이 순종의 개념에 의해 지배될 때에만 성경적으로 방향이 정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혁파 신학의 대부인 존 칼빈의 통찰력은 이런 맥락에서 상기되어야 한다. "그러면 누군가가 묻기를,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 대하여 호의를 갖게 하고 인자하게 할 만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 죄를 철폐하고 우리와 하나님의 분리를 소멸시키고 의로움을 얻었는가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에 대해 그의 완전한 순종에 의해 이것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머레이 박사는 이렇게 칼빈의 글을 인용하여 우리의 칭의의 근거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라는 사실을 제시한 뒤,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개로 나누는 개혁파 선배들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그 후 개혁파 신학에서 속죄의 교리를 신조화 할 때 그리스도의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순종의 강조를 상기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네 항목으로 나누어 순종이라는 범주를 설명해 나갈 것이다.”  이렇게 말한 후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내부성, 점진성, 정점을 이루는 요구, (순종의) 동력으로 나눈 뒤 이를 설명한다.

 

 

머레이의 <조직신학> 2, 223쪽은 칭의에 대한 머레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특별히 4번째 항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위 책 5번째 항목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특히 그의 피를 통해서이다"고 말한다. 이 명제에 대한 근거로 다음의 성경 구절들을 제시한다. 로마서 3:24,25 ; 25:5,9 ; 6:7; 8:33, 34; 고린도후서 5:18-21.  이 모든 구절들은 그의 피가 우리의 칭의의 근거가 됨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머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속한 덕목은 특히 그의 구속적 성취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우리는 칭의의 근거가 되는 의를 찾으면서 바로 이 점에 주의를 돌리고 있다.”

 

 

머레이는 앞의 책 7번째 항목,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이며 순종이다"라는 소제목에서 특별히 고린도후서 5:21을 언급한다. 'ινα ημει? γινωμεθα δικαιοσυνη θεου εν αυτω.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εν αυτω)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εν αυτω(엔 아우토, 저의 안에서)'의 의미는 바로 앞 구절인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에 의하여 명확히 확정된다.

 

 

물론 이 사람은 20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이다. 그가 죄인으로 취급된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였다. 그가 의를 수행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서였다. 그러나 21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와 연합하여 이러한 의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의의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이 의의 참여자가 되고 실제적으로 이 의에 의하여 판단된다. 우리의 정체성이 이 의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의미에서 이 의는 우리의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와 동일시되어 죄를 알지도 못하면서 죄인으로 취급받았듯이, 전적으로 불경건하고 의를 알지도 못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와 동일시되어 하나님의 의가 된다.

 

 

실제로 그 개념은 전가 개념보다 더 풍부하다. 그것은 우리의 것으로 간주 될 뿐 아니라 우리에게 계산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동일시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므로 그의 모든 것은 그와 연합되어 있는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그의 백성과의 연합과 친교를 제외하고 대속적 자격을 가진 그리스도, 이 자격 안에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고린도후서 5:21은 사도 바울이 칭의를 로마서 5:17,18,19에서 의의 선물을 받는 것,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는 것,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의인이 되는 것을 말했던 모든 것을 완전히 표현한다.

 

 

이처럼 존 머레이는 칭의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며, 이것이 전가 개념보다 더 풍부하다고 규정하였다. 이어지는 229쪽의 부록, 칭의와 죄사함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칭의를 죄 사함의 견지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칭의의 은혜와 본질에 편파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 사함이라는 단순한 관념은 칭의를 표현하지 못한다. 칭의는 단지 사람이 무죄라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것도 뜻한다. 그는 의롭다고 선언된다. 사법적인 형성적 의미에서 또한 선언적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

 

 

달리 말하면 칭의의 특별한 성격은 하나님 편에서의 긍정적 판단이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칭의가 이러한 긍정적 성격을 갖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죄 사함은 칭의에 포함되는 것이다. 모든 죄의 사함 없이 칭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칭의는 올바른 모든 요구들이 충족되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사법적 행위이다.

 

 

이처럼 머레이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두 가지 측면으로 죄의 사함과 의의 전가를 논하지 않았다. 능동 수동 순종이 논리적 근거가 되는 행위언약이란 용어 사용도 적절하지 않음을 제시하였다. 그는 그의 피와 연합을 더 강조하였다.

 

 

2. 도날드 맥클라우드

 

 

이제 영국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인 도날드 맥클라우 박사의 견해를 살펴보자. 맥클라우드 박사는 에딘버러에 있는 프리처처칼리지(Free Church of Scotland College)에서 30년 이상을 조직신학을 교수했다.

 

 

그의 저서들이 다수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있다(‘성령세례와 개혁주의 성령론(로이드존스의 성령세례와의 비교),’ ‘그리스도의 위격’, ‘간추린 기독론’). 합동신학교의 이승구 교수는 전환기의 개혁신학에서 맥클라우드 박사를 20세기 후반 영어권의 가장 뛰어난 개혁신학자 중의 한 분으로 밝히며 그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였다.

 

 

서창원 교수는 맥클라우드 박사가 소천한 다음 날 페이스북에 그를 자신의 스승으로 소개하며 그의 강의 방식을 이렇게 표현했다. “신학이 강단에서 선포되지 않으면 신학이 아니라는 일성과 조직신학의 모든 내용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준해서 가르치신 것이었다.”

 

 

맥클라우드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견해는 그의 신학 논문들을 모아 놓은 홈페이지 속죄(Atonement) 부분에 게시되어 있다 (https://donaldmacleod.org.uk/.../christs-active-and.../). 글 제목은 그리스도의 능동, 수동 순종이다. 이 글에서 맥클라우드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로 나누는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명확하게 지속적이고, 흠이 없고, 일관된 순종이었다. 이러한 순종은 단지 죄 없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역동적인 것이다. 모든 순간에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께 기쁨과 독창적인 순종, 완전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바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써 우리의 칭의의 근거가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후 5:21). 우리는 이 의미를 희석시키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악이 그에게 전가되었고, 그의 모든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그는 우리처럼 죄인이 되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의로움이 되었다.

 

 

고린도후서 5:21에 언급된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진지한 생각을 요구한다. 우리는 성자 하나님의 의와 함께 의롭다. 이는 하나님 그분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는 말이다. 혹은 윌리엄 커닝햄이 기억하게 쉽게 설명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그에게 요구하는 의로움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의로움을 가진 사람처럼 의롭다(Hugh Martin, 속죄, p.203).

 

 

후기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세부적으로 조율하여 능동과 수동 순종으로 구분해 놓았다. 이 구분은 종교개혁 시기에 이미 통용되었으며 개혁주의 정통신학자로 알려진 볼레비우스와 프렌시스 투레틴과 같은 기독교 학자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바르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미 능동과 수동이라는 단어가 명확하게 밝혀주듯 수동 순종은 십자가에서의 수난을 가리키고 능동순종은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무에 대한 순종이다.

 

 

그러나 이 구분은 두 가지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1) 이러한 구분은 십자가게 달리신 그리스도를 마치 통제를 포기하고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로 자신을 낮춤으로 모든 것이 그에게 되어 지게 하는 단순한 희생자인 것처럼 순수히 수동적으로 그를 바라보도록 만든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그림이다. 십자가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고난의 절정이 아니었다. 십자가는 그의 순종의 절정 곧 클라이막스였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최고로 능동적이었다.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누구도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가져갈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자기 생명을 내려놓으셨다. 이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10:18).

 

 

이것이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에서 살아있었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한 강도와 그의 육신의 어머니를 돌봤다. 유혹을 물리치며 아버지와 자신을 향한 사랑을 흔들림 없이 지켰다. 그는 죽은 순간에도 살아 있었다. 그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기 전 도도하게 큰 소리로 외치셨다. “그의 죽음은 그가 행한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Hugh Martin, 속죄 p.99).”

 

 

(2) 그리스도의 순종을 수동과 능동으로 나눌 때 발생하는 두 번째 위험성은 마치 우리가 그의 수동적인 순종은 이것을 보장하고, 그의 적극적인 순종은 이것을 보장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대속의 다른 국면들을 그리스도의 순종의 다른 국면들로 배분하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동적인 순종은 우리의 죄 때문에 받으신 형벌로 우리의 죄 용서를 보장하고, 적극적인 순종은 우리의 영생을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프린스턴신학교의 알렉산더 하지(A. A. Hodge)는 그의 믿음의 고백이라는 책 150쪽에서 이러한 구분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표현으로 읽는 것을 시도하였다.  이 신앙고백서 8.5의 표현은 이렇다. “주 예수님은 그의 완벽한 순종과 희생으로 아버지의 의를 완전히 만족시키고 화해 뿐 아니라 천국에서의 영원한 기업을 사주셨다.” 하지는 이렇게 논평을 달았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형벌 면제를 보장하고, 그의 적극적인 순종은 생명의 권리와 영원한 복된 상태를 구입하셨다(purchase).”

 

 

차라리 칼빈의 입장(기독교강요 II.XVI, 5)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안전해 보인다. “그리스도는 순종의 전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켰고 우리의 의로움을 보장하셨다. 그는 종의 형체를 입고 오신 순간부터 우리의 대속을 위하여 죄로부터 해방을 위한 값을 지불하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전 생애가 대속의 행위였다.”

 

 

이것이 투레틴이나 커닝햄과 같은 칼빈 이후의 권위 있는 신학자들이 취한 입장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역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행하시고 당하신 고난은 우리의 죄 용서와 양자됨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그의 수동적이고 적극적인 순종과 같이 구별된 위치나 기능들로 세목화 하지 말고 이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커닝햄, 개혁자들과 개혁 신앙, p.405).

 

 

그리스도의 순종은 많은 결과들을 가져왔다. 그의 순종은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의 순종은 공의를 만족시켰으며 교회를 구속하였다. 이 모든 것들은 개혁 신학에서 마땅히 강조되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중요한 성경적 개념인 승리를 공의보다 덜 강조했다. 성경이 그리스도를 처음 소개할 때 승리가 그 표현 속에 내포되어 있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을 상하게 할 것이다(3:15).”

 

 

승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신약 성경의 중심 개념이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 2:15을 보자.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히브리서 2:14은 이렇게 교훈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요한계시록 20:1-3은 그가 사단을 잡아서 큰 사슬로 결박한 후 무저갱에 던져놓고 결박하고 인봉했음을 증거한다. 사단은 한 때 이방인들을 완전한 영적인 무지가운데 붙잡고 있었으나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 요한복음 12:31 말씀대로,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났기 때문이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보좌에 좌정하셔서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그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

 

 

그의 승리를 보장하는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순종의 개념에는 분명한 매력이 있으나, 거기에는 순종을 두 가지로 나누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하듯 가야하는 위험이 있다. 빌립보서 2:9과 같은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순종에 대한 반응으로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으나, 그 순종은 그 구절 안에서 그의 죽음, 죽기까지 순종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 순종은 적극적인 순종일까, 수동적인 순종일까?

 

 

히브리서 1:3은 그가 승리하시고 높은 곳에 있는 위엄의 우편에 앉아계신 것은 죄를 정결케 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죽음의 권세를 붙잡고 있는 자(마귀)를 멸하신 것은 그의 죽음이었다. 그의 전능함을 드러내는 도구는 바로 십자가였다. 어린양은 그의 피로 정복하셨다.

 

 

맥클라우드는 글의 말미에 이런 경고를 남긴다. "마지막으로 경고의 말을 남기고 싶다. 그리스도가 그의 적극적인 순종으로 우리 대신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 면제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이것은 도덕률폐기론(Antinomianism)자들이 사용하는 논리로 확실히 구덩이에 빠지게 하는 논리다.

 

 

죄는 불법(요일 3:4)이고 율법 없이 사는 것은 죄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불법한 삶을 살게 하려고 섬기시고 순종하신 것이 아니었다. 모든 신학 노선은 자신의 반대편 입장에 있는 자들을 겨누고 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를 그의 아들의 형상, 자신을 부인하며 순종하는 자세를 본받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는 문맥 위에 놓여 있다(8:29). 율법의 의무로부터 면제된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우리의 죄에 대한 정죄를 담당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율법의 의를 만족시켜야 했기 때문이다(8:4). 그의 피 뿌림은 그의 순종과 분리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으며(벧전 1:2). 그의 대속 사역은 우리가 육체의 행위를 만족시켜도 동일하게 성령의 사역과 분리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다(3:14). 이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5:16)."

 

 

결론

 

 

이처럼 미국의 구 프린스턴 신학을 계승한 대표적인 성경신학적 조직신학자 존 머레이 박사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로 나눠온 선배 신학자들과 다른 입장을 개진하였다. 그는 칭의의 근거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더 강조점을 두었으며, 칭의는 단지 사람이 무죄라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것도 함께 포함한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 맥클라우드 박사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로 구분하게 된 책임을 종교개혁 시기의 신학자들의 부주의함으로 돌리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5에 있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희생을 두 가지 순종으로 해석한 최초의 신학자로 하지(A. A. Hodge)를 지목하면서, 그의 해석보다 차라리 순종의 전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켰고 우리의 의로움을 보장하셨다고 말한 칼빈의 해석을 더 높이 평가한 후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로 나누는 위험성을 논증하였다.

 

 

그 역시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로 나눌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음으로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거기에는 그와 견줄 수 없는 위험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빌립보서 2:9과 히브리서 1:3을 제시하며 죽음의 권세를 붙잡고 있는 자(마귀)를 멸하신 것과 그의 전능함을 드러내는 도구가 바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영어권에서 권위 있는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로 나누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그 위험성을 지적하였다면 이 두 분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진정한 개혁주의의 정신, 더 성경적으로 올바른 교리를 세우는 책임을 가진 개혁주의 신학자의 정신이 아닐까?

 

 

참고로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에 대해서도 칼빈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이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도 칼빈의 해석을 따랐으며 찰스 하지 역시 이 해석을 따랐다. 그러나 루이스 벌코프는 이러한 개혁파 선배들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베드로후서 3장 본문을 주해하면서 상징적 해석이 아닌 문맥을 통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렇다고 벌코프가 개혁주의자가 아닐까? 아니다.

 

 

벌코프는 개혁파 선배들이 가르쳐온 전통적인 가르침을 고수하기보다 더 성경적으로 개혁하려고 했다. 이러한 벌코프의 자세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서도 더 개혁주의적으로, 더 성경 중심적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더욱 성경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 아닐까? 이러한 부분에서 존 머레이와 도날드 맥클라우드 박사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

 

 

존 머레이 박사의 <조직신학>의 첫 페이지에 있는 그의 글을 소개함으로 이 글을 마친다.

 

 

진리의 자기주장은 장엄하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이 설립된 이유다. 우리에 대하여 진리의 자기주장이 없다면, 우리는 교직원의 일원으로서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신앙의 싸움은 종종 진리의 자기주장이 요구하는 내적인 영혼의 분투에 초점이 맞춰진다. 진리의 자기주장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은 유혹들은 너무도 많다.

 

 

정신적 태만은 이 유혹들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특정한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익숙해 있다. 그것은 안정된 가족과 사회적 교회적 전통에서 유래하는 신성의 후광을 두르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우리는 쉽사리 이러한 틀과 확신을 진리가 요구하는 기준으로 시험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면 진리의 증거에 의해 그 반대의 것이 옳다고 생각한 후에도, 우리는 편의와 관습을 무너뜨린다는 이유로 쉽사리 진리로 하여금 우리를 인도하게 하지 않는다. 유혹은 반대 방향으로 올 수도 있다. 편의 또는 시류에 따라, 이전의 확신을 포기할 수 있는데, 이 포기는 진리의 자기 요구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편의에 의해서이다. 우리는 그러한 유혹도 경계하여야 한다“(존 머레이의 서류 가운데서 발견된 단편의 글).

 

 

김대운, 현 경성교회 목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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