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교역 문제에 대하여

by reformanda posted Jul 2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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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교역 문제에 대하여

 

<차례>

 

1. 서론 

2. 남녀 질서의 의미와 중요성

3. 다양성과 구별성, 상이성

4. 동질성과 동등성

5. 종속성

6. 협력 보완의 관계

7. 머리됨, 권위의 의미

8. 하나됨

9. 확장성

10. 교회 내에서의 남녀 질서

11. 남녀 질서의 한시성, 잠정성

12. 여성교역의 한계

13. 하나 됨의 의미

 

 

1. 서 론

 

 

우선 저로서는 왜 이런 토론이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제 생각에는 너무나 분명한 문제인데 왜 다른 이견이 생겨야 하는지 이해를 못해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여성 교역을 찬동하는 사람의 이유들을 먼저 듣기를 원했어요. 어떤 근거에서 찬동을 하시는지 들었으면 제가 좀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찬동하는 분의 입장을 세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근거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는 자연히 상대 없이 휘두르는 것처럼 조금은 장황한 말씀이 될 것 같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약에 나타난 성경 구절들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니까 그것을 일일이 해석할 수 없겠어요. 시간이 너무 가니까. 그것은 또 신약 교수님들이 계시니까. 여기 박형용 교수님도 계시는데 저보다 더 강하게 반대하시는 분이니까. 그리고 지난번 개교기념 행사 때 여성교역에 관한 강사의 말씀을 들었는데 대개 문제가 되는 것이 남녀관계에 있어서 동등성과 종속성, 이 두 성격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자꾸 설왕설래가 되고 이 동등성과 종속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이 문제를 푸는데 어떤 열쇠가 된다고 생각해서 저는 오늘 이 문제를 좀 포괄적으로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우선 요즘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의 지위와 권익 향상에 매우 우호적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남녀 평등, 심지어 여성 우위론까지 적극적인 여성들과 남성 우위 사회에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여성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는 남성들(흔히 feminist라고 하는데)에 의해서 거론되고 있으되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수용되고 있고 정치인들도 요즈음 여성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이고 호위적인 태도를 표명하고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교회에서도 교회내의 여성의 지위, 사역, 오늘의 문제가 되겠습니다만 설교권, 강도권, 목사안수 가능성이 오래 전부터 거론되어 왔고 흔히 자유주의 신학진영으로 분류되는 교단에서는 국 내외를 막론하고 장로 목사 안수가 허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상당히 보수적 성향을 띠고 있다고 믿어져 온 통합측에서도 여성 목사 안수안이 한 두표 차이로 부결될 만큼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사역문제는 작금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적어도 보수진영 내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한 이론이나 거론의 여지가 없다고, 안정지대라고 믿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학내에서 여성교역,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성 강도권 내지 설교권 주장이 학우들의 상당한 호응을 얻어서 공개강좌 형식으로 지난 개교 기념 행사의 한 순서로 채택됨으로서 공식화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사전에 알려져서 교수회의에서 거론이 되었고 찬반의 격론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 문제가 학교내에서 아니 학교 뿐만아니라 학 내외적으로 공식화 된 지금에 와서는 이 문제를 덮어두는 것보다 공개적으로 토론해서 공식적 결론을 맺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저는 생각해 왔으며 우여 곡절 끝에 이런 자리가 마련된 줄 압니다.

 

 

우선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성교역의 문제는 비단 오늘 현대사회에서만 생길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미 초대교회시대 즉 고린도 교회에서 예언과 기도 사역과 관련해서 제기된 문제요 특히 고전 11:16 ‘변론 즉 이의가 있어서 논쟁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하는 이런 표현이나 고전 14:36절 이하의 말씀 등은 여성 교역 문제가 논쟁의 소지가 많은, 말하자면 열띤 논쟁으로 비화할 소지가 많은 문제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 내에서 논쟁이 있는 것보다는 논쟁이 없는 것이 모두가 동일하게 진리를 깨닫고 한마음으로 주는 섬기는 것이 이상적이요 바람직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옳지 않은 견해를 묵인하고 수용하기보다는 각기 다른 의견들을 분명히 밝히고 개진하여서 옳은 것이, 참된 것이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고전 11:19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남녀문제와도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중요한 교리들이 교회 논쟁을 통해서 밝혀지고 분명해진 경우들을 볼 수 있고 이처럼 그 교회 내에서의 논쟁은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논쟁을 반드시 부정적 시각에서만 볼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논쟁의 부작용, 교회사상 이견으로 말미암은 교회분열의 고통스러운 결과를 우리가 유념해서 파당이나 편견이나 미움이 생겨나는 것은 극도로 경계해야 할 것이요 여성 교역 문제와 관련해서도 논쟁을 통해서 오직 옳고 참된 것이 밝히 드러나는 긍정적 결과가 나타나도록 우리가 기대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시비판단을 하거나 원칙을 제시하려 할 때 적어도 교회 내에서는 그 근거와 근원 또 판단 기준과 규범이 오직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굳이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조문을 들추지 않더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 백성됨의 의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의 모임, 또한 영역이란 뜻이요 하나님의 통치는 구체적으로 그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에 대한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우리가 아는 만큼 교회에서의 모든 일은 성경의 규범, 기준 교훈에 따라서 판단되고 결정되고 행해져야 함이 마땅한 줄 압니다.

 

혹자는 성경은 구원에 관계된 부문에서만 규범성을 갖는다고 말해서 성경 적용 범위의 제한성과 아울러서 성경 규범 외에 다른 무엇이 우리의 판단 결정 그 행동의 어떤 규범성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러나 과연 신자의 전 삶의 영역에 있어서 어느 부분이 구원과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 여성 교역 문제에 대한 성경 교훈의 불명료성을 언급하면서 adiapora의 문제로 취급하려고 합니다. 성경의 여성 교역에 대해서 서로 상충되는 다양한 견해들을 제시하고 있으니 그저 경우에 따라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합니다.

 

 

물론 성경은 부분에 따라 그 명료성이 다른 경우가 있고 어떤 문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불명료할 때 우리는 확실한 판단과 결론에 여지를 두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그러나 과연 여성 교역문제와 관련한 성경 교훈이 불명료한지는 우리가 차후에 따져볼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녀 문제 내지 여성교역 문제는 현 사회 분위기를 감안할 때 별로 큰 중요성을 갖지 못하니 이런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까지 성경의 엄격한 원칙을 따를 필요가 있는가 하고 반문합니다. 저로서는 남녀 질서의 문제가 대수롭지 않은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자체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혹 이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라 할지라도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타락한 세상 사회 분위기에 감염이 되어서 중요한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라면 더욱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점은 이 문제에 대한 접근 순서입니다. 여성 교역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갖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 중 중요한 것이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현실적 비중입니다. 수적으로 우세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은사들 즉 열심과 봉사, 능력 경건에 있어서까지 그들은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현실적 이유를 들어서 또 여성 특유의 긍적적 자질들을 들어서 여성 교역의 또 교역자의 필요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떤 원칙을 정립함에 있어서 그 출발점이 현실 인식이 될 경우 현실에 대한 집착과 관심 등에 의해서 원칙 자체가 왜곡되거나 상대화 내지 모호해져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분명히 남녀 관계에 있어서 동등성과 종속성, 둘을 다 말을 하는데 남녀 평등주의자는 이 평등성만을 발견하려고 하고 종속성에 관한 말씀은 무시 내지 간과해 버리려고 합니다. 오히려 교회에서의 모든 원칙 정립은 성경을 객관적 근원으로 삼아서 이루어져야 하며 일단 원칙이 정립된 다음 원칙의 허용 한도 내에서 현실 적용의 구체적 안들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칙에 의해서 현실 판단하고 원칙에 위배되는 현실과 관행은 점진적으로 수정 개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순서를 무시하고 현실 인식 내지 현실 수정이 원칙에 선행할 경우 예외적인 상황이 - 우리가 구체적으로 예를 들기 뭐합니다만 불가피하게 목사님이 남자가 할 수 없는 경우, 예외적인 상황이 생길 수 있겠죠. - 정상적인 상황으로 인정되고 원칙화 내지 교회 전통으로 굳어버리면 나중에 시정하려 할 경우 매우 큰 진통과 부작용이 초래될 것이요 더한 경우는 영영 시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오류를 Roman Chatholic에서 중요한 교리와 관련해서 보고 있습니다.

 

 

반면 원칙이 분명히 정립, 제시되어 있으면 예외적인 상황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경우로 인식되어서 가능한 한 속히 정상적인 상황으로 개선, 회복하려고 하는 노력이 있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사족으로 덧붙인다면 만일 여성에게 훌륭한 은사와 능력이 주어진 경우라고 하면 어디까지나 성경의 원칙,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칙과 질서를 따라서 사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남녀 질서의 의미와 중요성

 

 

이제 본론에 들어가서, 우선 남녀 질서의 의미와 중요성입니다. 여성교역 문제를 취급하면서 먼저 남녀 질서의 의미와 중요성을 거론하는 이유는 여성교역 내지 설교의 문제는 결국 남녀 질서의 문제로 환원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남녀 질서가 유효한가?’라고 하는 질문으로 환원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남녀 질서의 전체적 의미에 대한 포괄적 이해는 여성교역 문제와 관련된 성경 구절들을 개별적으로 취급할 때 초래되기 쉬운 단점, 즉 서로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다양한 내용들을 서로 긴밀히 연결된 하나의 원칙체계로 볼 수 있게 하는 통일적 시각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녀 질서에 관한 기본 본문을 창 1:27, 2:18-25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 2장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그를 에덴동산에 두사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며 또한 땅을, 피조계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특히 피조계에 대한 인간의 다스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능력을 사용하는 창조적 일을 통해서 피조계를 개발하고 건사하는, 즉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복된 다스림을 대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피조계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인 축복을 전달하는 자, 실현하는 대리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산 중앙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를 두셔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자라는 사실과 생명의 삶은 바로 이 순종의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생각케 하셨습니다. 이처럼 창세기 2:1-17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땅의 관계를 다룬 반면에 창 2:18이하에서는 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즉 인간관게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부수적으로 동물과 인간관계를 취급하고 있습니다만 주된 목적은 바로 인간관계의 취급입니다. 그리고 이 인간관계는 부부관계가, 남녀관계가 그 기초요 출발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18을 보면 우선 하나님께서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담이 무언가 부족한 점 잘못됨이 있었거나 그가 홀로 있어서 외롭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깊은 뜻, 본래 의도하셨던 원대한 계획과 관련된 말씀이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단 하나의 하나님 형상 단 하나의 인간만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간, 거대한 하나의 인간 공동체를 원하셨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보여주는 말씀이 창 1:28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즉 남자와 여자를 축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에 충만할 만큼 번성한 인간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이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함께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인간 공동체 사회의 가장 기본적 단위요 인간 사회의 전형 내지 원형이며 더 나아가서 가정 제도에 관한 창 2:18이하의 말씀은 가정의 원리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공동체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원리, 그리고 그 공동체 구성원간의 관계, 즉 이웃 관계 또는 인간관계의 전형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다양성과 구별성, 상이성

 

온 땅에 충만한 인간사회를 형성하시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유의할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시기 위해서 꼭 같은 복제인간 아담과 꼭 같은 존재를 여럿 만들지 않으시고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다른 존재를,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모든 인간을 Identical한 존재, 동일한 존재로 보려고 하는, 모든 면에서 동등하고 동일하게 보려고 하는 형태의 사고에 대해서 그것이 극단적인 민주주의든 아니면 극단적인 남녀 평등주의, 계급 평등주의든지 간에 이런 모든 인간을 동일 동등한 존재로 보려고 하는 형태의 사고에 대해서 명백한 경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사회를 다양한 구성원, 여러가지 면에서 구별되는 상이한 존재들로 형성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구별성에 가장 명확한 예가 바로 남녀의 구별입니다. 생리적으로 인체의 기관이나 모습까지도 남녀는 서로 다릅니다. 물론 기능은 말할 것도 없고요. 더 나아가서 남녀의 구별과 질서는 인류 구성원의 다양성과 구별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분명한 구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다양성은 남녀로만 표현되지 않고 남녀 노소 신분의 차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는데 그중 하나인 노소의 차이, 나이 많고 적음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겪는 과정의 일부요 기간이 지남에 따라 말하자면 사람이 태어나면 아이가 되었다가 크고 자라서 청년이 되었다가 노인 되어서 죽지요. 이런 과정을 공통적으로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노소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가변적이예요. 오늘은 내가 어린아이지만 내일은 노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대적이예요. 내가 내 아이에 대해서는 어른이지만 나보다 윗사람에 대해서는 어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차이입니다.

 

 

그러나 남녀의 구별 만큼은 현 창조질서 안에서 -이 세상에서 - 사는 한 한번 태어날 때 정해지면 죽을 때까지 불변의 구별입니다. 유사한 예로 남녀 질서에 근거한 부부의 역할, 어머니 아버지 역할은 평생 불변입니다. 한번 남편이면 성전환 수술하기까지는 아내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와는 달리 노소의 질서에 근거한 부모 자식의 관계는 어린아이가 자라서 부모가 되고 또 자식을 낳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므로 가변적이요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빈부의 차이나 신분 계층의 차이 등도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것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부자가 내일 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남녀의 구별이야말로 현 창조질서 가운데 가장 명확하고 불변의 질서요 따라서 가장 근본적인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보면 부모 자식의 관계보다 부부의 관계가 선행하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 이해가 될 줄 압니다. 이 구별된 남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가 서로 구별되는 관계를 가리켜 창 2:18은 세 단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번역이 썩 명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여하튼 이 세 단어는 아담을 위해서/ 돕는자/ 배필 - 배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아담에 필적할 만한이라는 형용사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각 세 단어는 동등성과 종속성, 이 협력 보완성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배필이라고 하는 말은 아담의 탁월함과 동일한 아담 앞에 필적할 만한 그런 존재란 뜻이요 그를 위해서라고 하는 말은 여자가 아담을 위한 존재란 뜻이요 - 고전 11장 같은 데서는 아담 때문에 지으졌다고 표현하고 있죠 - 돕는자라고 하는 것은 이 협력자 보완자라고 하는 그런 뜻이 될 것입니다.

 

 

4. 동질성과 동등성

 

 

남녀 관계에 있어서 동질성과 동등성이 우선 취급되어야 하는 근거는 창 1:27에서 발견됩니다. 왜냐하면 그 성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먼저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해놓고 그 다음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남자와 여자의 구별 이전에 이들은 다 같이 인간, 즉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사실이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즉 남자와 여자는 인간됨의 본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데에는 어떤 차등 차이가 없이 완전히 동질이요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남녀의 동등성을 2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담에 필적할 만한 조력자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꼭같이 흙으로 빚으신 동물들을 아담 앞에 데려오셔서 어떻게 이름 짓는가 보려고 했습니다. 어떤 대상의 이름을 붙인다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의 본질을 규정짓는 것인 만큼 이름 짓는다고 하는 행위는 그 대상에 대해 모종의 권위를 가졌음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담이 제멋대로 이름을 붙였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각 동물을 창조하신 목적과 의도를 잘 파악해서 그에 부합하는 명칭을 붙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름 짓는 행위가 함축하는 이 권위적 요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데려온 모든 동물 가운데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조력자를 찾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여자를 낮추어서 동물과 비교하라는 것이 아니요 여자를 피조계의 상층부에 속하는 동물보다 더 뛰어난 존재이며 남자 자신의 일부, 남자 몸과 동일한 재질로 만들어진 존재요 그 탁월함에 있어서 남자에 조금도 못지않는 동등한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는 인간됨의 본질,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질과 동등이요 차등 차이가 없고 땅과 그 안에 있느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권세도 꼭 같이 소유하였음을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남녀의 동등성을 본질적인 동질성과 동등성 쉽게 말하면 거시적인 동질성 동등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종속성

 

 

다음, 종속성에 관해서입니다. 그러나 남녀가 다 함께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라고 하는 거시적 동질성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다고 하는 미시적 구별 내지 상이성을 배제하지 않듯이 인간됨의 본질, 즉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는 남녀가 완전히 동등하다고 하는 이 거시적 동등성이 남녀 상호 관계와 지위 역학에 있어서의 미시적 차등성 종속성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함축하고 있습니다.

 

 

남녀의 동등성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남자를 위해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는 그 사실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담을 위하여라고 하는 이것이 무의미한 허사가 아니고 남자의 권위와 여자의 종속성을 함의하는 표현임을 고전 11:9에서 밝히되 여자를 위해서 남자가 지음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그리고 이 사실을 남자의 머리됨, 권위의 근거로 제시함으로써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남자의 갈비뼈 즉 남자의 신체의 일부로 여자를 지으셨다고 하는 사실은 남자와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며 남자와 동등함을 상징하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자가 남자로부터 취하여졌다고 하는 의미에서 여자의 종속성을 분명히 뜻합니다.

 

 

고전 11:9-12에서는 이 사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남녀를 같이 창조하셨으므로 인간 존재의 궁극적, 절대적 근원은 하나님이시요 이런 의미에서 남녀는 동등하지만 동시에 남자로부터 취하여진고로 제한적인, 2차적인 의미에서 여자의 존재 근원은 남자라고 말함으로써 여자의 종속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딤전 2:13에서는 이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해서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그 다음에 여자가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름 지음 행위도 (여자라 하리라) 남자의 권위와 여자의 종속성을 함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남녀 관계는 동등성과 아울러 종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핏보면 상반 개념으로 동시에 수용될 수 없는 듯한 동등성과 종속성이 실은 인간의 본질에서의 동등성과 지위 역학에 있어서의 종속성이란 의미에서 남녀관계라고 하는 하나의 관계 속에 통일 결합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간명하게 표현하면 남녀질서는 거시적 동등성과 미시적 종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전 11:3에 보면 여자에 대한 남자의 머리됨, 권위를 성자에 대한 성부의 권위에 비교되고 있는데 혹자는 이에서 추론하기를 성자와 성부는 동등이시니 따라서 남자의 헤드쉽도 반드시 여자의 종속성을 함의하지 않는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성삼위께서는 신적 본질, 하나님 되심에 있어서는 그 능력과 신성과 영광 권세 등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등하시지만 사역을 포함한 존재 방식에 있어서는 성자께서는 성부에게서 영원적으로 발생하시고 성부께 복종 종속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녀 관계에 있어서 이 거시적인 동질성과 동등성, 또 미시적인 다양성 내지 종속성에 신비한 하나의 원형을 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협력 보완의 관계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여자를 조력자로 주셨다고 하는 것은 남녀의 관계가 협력 보완의 관계임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의 협력 보완 관계가 아니라 여자는 남자의 권위 아래 있는 종속적 협력의 관계임을 분명히 합니다.

 

 

혹자를 말하기를 남녀 관계가 타락 전에는 대등한 협력 보완 관계였으나 타락 후 저주와 심판으로 (3장에 나오는대로) 종속적 관계가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타락 전 종속성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딤전 2:13에서는 여자의 종속성과 남자의 권위의 근거가 이중 근거 즉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된 것, 여자가 남자에게서 취해진 사실과 여자가 먼저 범죄한 사실 두 가지를 함께 제시함으로서 여자의 종속성이 타락 전에도 분명히 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굳이 그 차이를 말하라고 한다면 타락 전에는 종속적 협력관계이던 것이 타락 후에는 종속적 지배 관계로 변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7. 머리됨, 권위의 의미

 

 

이처럼 남녀 관계는 동등성과 협력 보완성을 갖는 동시에 종속성 또한 분명히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종속성은 남자에게서는 머리됨, 권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남자의 이런 권위를 여자의 대한 부당한 태도로 보고 분개하는 여성 못지않게 남자쪽에서도 이 권위를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 타락한 인간은 이 권위라고 하는 것을 이기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나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나를 위한 권위로 생각합니다. 특히 다스린다고 하는 말은 일반 사회 내지 정치 사회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우등한 자가 열등한 자를 지배하여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의미로 통용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권위 내지 다스림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피조계 통치는 피조계를 축복하는 다스림이요 인간의 자연계 통치는 자연계를 번창케 하고 창달케 하는 다스림입니다.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 착취하는 다스림이 아니라 축복을 베푸는 다스림입니다.

 

 

5:2이하에서 남자의 머리됨, 권위의 의미를 설명하기를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남편의 머리됨, 권위는 아내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는 희생적 사랑의 다스림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벧전 3:7에서는 아내를 더 연약한 존재로 여겨서 여자의 연약함을 배려하면서 동거하라, 함께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권위는 자기를 위해 상대방을 희생시키는 권위가 아니요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섬기기 위한 권위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정하신 남녀 질서에 따라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남자는 권위와 리더쉽을 발휘하되, 즉 남자답되 (남자답다고 하는 것의 대명사가 힘입니다.) 사나움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을 억누르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폭력배의 남성다움입니다. 오히려 남자의 힘은 어떤 식으로 발휘가 되어야 하는가? 관용과 너그러움, 약자를 돕고 돌보는 것 그리고 용기와 담대함 자기 희생적 사랑으로 행하실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고 오히려 남자가 남자답지 못할 때 마땅히 용기를 내어서 자기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 주저하거나 나약할 때 이를 수치스럽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드보라가 바락더러 가라고 할 때 주저주저하니까 책망한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자에 대해 종속적 위치에 있는 여자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여자다워야 하는데 여자라고 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들어오는 것이 아름다움인데 여자의 아름다움을 성경은 말하기를 (요즘 도깨비같이 화장하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남자 위에 나서는 이것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순복하는 자세를 아름답다고 합니다.

 

 

여자가 남자에 대해 순복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두고 성경은 노예적인 비굴함이라고 낮추어 보지 않고 오히려 여자다움의 상징인 단정한 긴 머리가 여자에게 있어서 영광이요 남편에 순종하는 자세는 내면적인 단장, 아름다움이라고 벧전 3:5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자세에 부합하는 겸손과 조용한 태도가 여자에게 있어서는 비굴함이 아니요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여인의 진정한 내적 영적 아름다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자기를 가리우는 여자다움의 상징인 베일이 고대 헬라 사회에서는 여인의 기풍과 위엄을 상징했다고 하는 램세이의 말을 우리가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여자다움 태도를 버리고 남자처럼 행동하는 것 마땅히 공중앞에서 자기를 가리울 줄, 숨길 줄 모르고 나서는 이를 가리켜 수치스러운 일이요 괴악한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그런 예가 없다. 그런 파행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만사를 그때에 따라 아름답게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니 그의 뜻, 그가 세우신 질서를 따라 행하는 것이 가장 선하고 아름다울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종속적 위치, 물론 본질적 동등성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여자의 순종하는 위치에서 벗어나서 남자와 대등하게 행동하기를 부추기는 사람들은 첫째로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요 둘째로는 여성의 지위를 향상하고 영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여성으로 하여금 수치스럽고 욕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8. 하나 됨

 

 

이때까지 남녀 질서의 동일성, 다양성, 동등성, 종속성 협력 보완성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만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하나 됨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2:24에 보면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남녀의 구별성은 상호간의 단절을 초래해서 공동체로 함께 존재할 수 없게 하는 것 같지만 여자가 남자의 신체 일부, 남자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하나 됨에 의해서 함께 살 수 있게 되고 종속적 불평등 관계는 알력과 갈등을 일으킬 것 같지만 하나됨에 의해서 해소가 됩니다.

 

 

내 손이 내 머리의 지시대로 따르지만 결코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손과 머리는 한 몸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몸의 각 지체가 다칠새라 염려하고 보호하지만 자기가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내 머리요 내 손이요 내 발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됨은 동질성, 동등성, 협력성 만이 아니고 다양성과 종속성을 내포하는 유기적 하나됨 입니다.

 

 

9. 확장성

 

 

온 땅에 충만한 인류 공동체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남녀는 가정을 이루어서 자식을 낳음으로서 그 공동체를 확장 시키며 이 과정을 따라서 공동체 내의 인간 관계는 부모 자식의 관계, 형제의 관계, 가정 사회 전 인류의 관계로 폭이 넓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인간 공동체와 그 속에서의 인간관계의 폭이 아무리 넓어지더라도 그 기본 성격과 원리는 남녀 부부 즉 가정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그 성격과 정도가 그리고 그 표현양식이 달라지지만 남녀질서의 기본 원칙들은 모든 종류의 인간 공동체에게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녀 질서의 기본원칙을 다양한 공동체에 적용 가능한 일반화시켜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본질적 동질성과 동등성을 소유하지만 똑같은 복제인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서로 구별된 전혀 다른 존재들, 다양한 모습과 재능을 가진 다양한 기능을 가진 사람들로서 공동체를 형성하십니다.

 

 

둘째로,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 그 직무를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각 구성원이 그 독자적인 존재 의미를 갖는다는 것과 동시에 각 사람은 다른 위치의 사람과 그 직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아내가 남편의 직무와 지위를 존중하고 남편이 마음으로부터 아내의 지위와 하는 일을 귀하게 여긴다면 부부간에 그다지 불평이 없을 것입니다. 다 부엌일은 천하게 여기니까 여자가 억울하죠. 참으로 귀하게 여긴다면, 그것이 겉으로 나타난다고 하면 여자들이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는 다스림과 순종의 상하 질서일 수도 있고 상호 협력 보완의 질서일 수도 있으나 그 어느 구성원도 부당한 위치에 처하거나 불평등 대우를 받는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전체가 하나의 몸을 이루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즉 온 구성원이 합력해서 하나의 몸을 세우는 것인데 이런 공동체를 가리켜 흔히 유기적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기적 공동체의 존재 원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랑으로 다스리고 사랑으로 협력하고 사랑으로 순종하는 원리요,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서로를 통해 도움받고 힘을 합해서 한 몸을 세우는 원리입니다.

 

 

한 조상 아담의 살과 혈육에 참여함으로서 육적으로 한 몸된 인류 공동체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이상적 공동체의 실현은 불가능해져 버렸고 다만 바람직한 하나의 이상적 원리로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상실한 인류 공동체의 참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공동체,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함으로서 한 혈육 한 몸이 된 공동체, 즉 교회를 통해 회복하시고 완성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각각 한 성령으로 세례 받아 한 영적 공동체를 이루었고 이 영적 공동체는 유기적 공동체요 이 공동체의 존재원리는 사랑의 원리라고 하는 고전 12-13장의 말씀에서 남녀질서의 기본원칙이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도 적용됨을 우리가 알 수 있고 더우기 부부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에 비유하는 엡 5:32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고전 12-13장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 대해 다음의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한 성령으로 세례받아 새로운 영적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 근본적 동질성과 동등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거시적 동질성과 동등성에 있어서는 모든 육적 구별이나 종속의 질서, 영적 구별이나 종속의 질서가 다 해소가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는 사도와 선지자와 치리자와 평신도와 또 남녀노소와 신분의 모든 구별과 차이가 거시적 동질성과 동등성 속에 해소돼 버려서 하나의 몸, 하나의 영적 동공체를 형성한다고 말씀합니다(고전 12:13).

 

 

그러나 이 거시적 동질성과 동등성이 미시적 구별과 종속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이 영적 공동체가 유기적 공동체요 그 하나됨이 유기적 하나됨임을 밝히는 바로 그 다음 말씀들에 의해서 확인이 됩니다.

 

이 하나 됨은 영적 구별과 종속의 질서뿐만 아니라(사도 선지자 치리자) 육적 구별과 종속의 질서(남녀 노소 신분)를 포함하는 유기적 하나 됨 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육적 구별과 차이 질서가 영적 공동체인 교회 내에서도 한시적으로나마 지켜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현 창조질서를 사는 동안에는 우리가 영적 새 생명도 현 창조질서의 형식을 통해 표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녀 질서의 함의된 공동체 원리가 새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도 유효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한 성령으로 세례받는 것, 이런 근본적 본질적 은혜에 있어서는 모두가 동질이요 동등하지만 미시적 은혜, 즉 직분과 다양은사와 직분 역할에 있어서는 다양성과 종속성이 존재합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이러한 거시적 동질 동등성과 그 미시적 다양성 종속성을 내포하는, 그 자체 안에 통일 시키는 유기적 하나됨인 것입니다.

 

 

10. 교회 안에서의 남녀 질서

 

 

앞에서는 남녀 질서의 기본원칙이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도 적용된다고 말했습니다만 여기서는 우리는 문제, 여성교역의 문제와 좀더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남녀질서 그 자체가 교회 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우선 여성 교역을 찬동하는 사람들, 남녀 평등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제시하는 성경구절이 바로 행 2:16-21의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순절날 성령께서 다락방에 모인 각 사람에게 임하신 후에 이들에게 각국 방언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 구원의 복음에 대해 증거한 일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 일을 요엘 3:1-5의 예언의 성취로 보고 이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여성교역의 근거를 발견하는 사람들은 이 은혜가 아들과 딸들, 남종과 여종 등 남녀 구별없이 평등하게 임하리라고 예언한 사실에 주의해서 여기서 추론하기를 극단적인 경우는 교회내에서는 남녀의 구별이나 질서가 무의미하거나 철폐되었다고 주장하고 좀 나은 경우는 적어도 이 은혜 받음에 있어서 성령을 받아 예언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남녀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여기서 우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오순절에 임한 은혜의 포괄성입니다. 오순절 사건을 요엘 3:1-5의 성취로 볼 때 성령께서 임하여 예언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표현은 고전 11장이나 고전 14장에서 말하는 성령님의 계시로 예언하는 것, 공예배에서 예언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이며 특수한 형태의 예언이 아니고 일차적으로는 오순절 사건 그대로 방언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증거하는 것을 가리키고 더 나아가서 행 1:5,8절에서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오순절의 성령오심은 성령 세례 즉 성령으로 새 존재가 됨을 의미하고 예언한다고 하는 것은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을 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증인 사역은 사도적 증언, 선포 가르침 등 이 다양한 형태 또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을 뜻하는 포괄적 형식의 그런 증언을 뜻하는 것이지 고전11, 14장에서 말하는 공예배에서의 예언의 그런 특수한 경우를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세례도 그리스도안에서 새 존재가 됨을 뜻하는 매우 포괄적인 은혜입니다. 사실 오순절 사건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만유의 권세를 받으신 후 성령님을 보내사 그의 왕적 통치를 즉 성령님으로 새 존재가 되게 하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사역을 시작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오순절의 은혜 특히 성령 세례의 포괄성은 그 은혜의 보편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등의 표현은 남녀질서 철폐와 관련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남녀 노소, 종 자유자 신분 등 모든 계층의 사람, 문자 그대로 모든 육체에 이 은혜가 임한다는, 개방되어 있다는 은혜의 보편성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남녀노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구애됨 없이라는 이 표현은 항상 성령 세례 즉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질적으로 보편적인 은혜와 관련해서 나타납니다.

 

 

10:44에 보면 오순절과 동일한 동질의 성령 세례가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임함으로서 이 은혜 받음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방인도 교회 안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흔히 인용하는 갈3:27-28에서도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은혜와 관련해서 보편성을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성구 들은 한결같이 한 성령으로 세례 받아 한 몸 안으로 속하게 되었다고 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포괄적인 은혜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 됨의 본질에 있어서는 남녀노소 신분의 차이가 있을 수 없으며 동일합니다. 여기서는 육적 차이 뿐만 아니라 영적 차이도 해소되어 버립니다. 선지자 사도 교회의 어떤 직분도 차이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공동체의 원리 중 거시적 본질적 동질성이 영적 공동체에도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벧전3:7에 생명의 은혜의 공동 상속자라고 부르는 것이 이런 의미입니다.

 

 

11. 남녀 질서의 한시성, 잠정성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천사와 방불해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을 것을 말씀함으로서 부활 후에는 남녀질서가 무의미 내지는 철폐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남녀질서는 현 창조질서 내에 살 때만 적용되는 한시적인 것이요 궁극적 차이가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 7:29에는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시적이요 잠정적이라고 해서 이런 육적 질서를 무시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로 부모질서도 한시적인데 부모에게 함부로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궁극적 질서가 남녀 질서입니다.

 

 

이런 한시성에도 불구하고 남녀질서는 교회내에서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에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자에게 주의 계명에 대해 다른 말을 하지 말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이처럼 근본적인 동등성이 한시적이고 미시적인 종속성을 배제하지 않음을 남녀 동등성을 얘기한 벧전 3:7이 동시에 말합니다. 생명의 은혜를 상속함에는 동등하나 동시에 여자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여자는 남녀질서를 따라 여자답게 행할 것입니다. 겸손과 종용함과 복종하는 자세로 행할 것을 명하고 이것이 수치나 비굴함이 아니요 진정한 내면적 아름다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행하지 않는 것이 수치스러움이라고 말합니다. 영육이 통일체로 존재는 한 영적 새 생명도 현 창조질서대로 표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2. 여성교역의 한계

 

 

현 창조질서 내에서 남녀질서를 존종하라는 일반적 명령을 구체적으로 명하는 명령이 있습니다. 특히 공 예배에서는 여자가 말하는 것까지 - 이것은 예언하는 것보다 포괄적입니다. 저 자신도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합니다 - 공석상에 질문하는 것까지도 허용 안된다고 합니다. 고전 11에서는 공 예배에서 남자는 남자답게 권위를 가지고 행할 것이요 여자는 순종하여 배우는 자세로 행할 것을 말합니다. 공예배를 벗어난 좀더 일반적 상황에서도 여자가 여자를 대상으로 여자에게 친숙한 일들 특히 가정사 등을 가르칠 수 있으나 남자의 권위를 무시하는 가르침을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딤전2).

 

 

여타 다양한 은사와 직분 수행에 있어서도 남성의 권위를 존중하며 여성다운 겸손과 순종의 자세에 합당한 형식으로 수행할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등이 여자에게 있었으나 - 공석상에서 금하라고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은사를 행함에서도 원칙을 지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녀질서를 허물지 않는 방식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최대한으로 말할 경우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여자에게 합당한 태도에서 벗어나 남자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어떤 형태의 행위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직 여자는 겸손과 순종과 종용함로 행하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귀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구체적으로 최소한으로 축소해서 말한다 할지라도 성인 남녀가 합석한 공석상에서 특히 예배시에 말하는 것은 예언이나 기도 설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특별한 사적 인간 관계, 가족 관계 내에서 어머니가 아들을 훈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에서도 사적으로 연장자가 어린 남자를 교훈할 수 있으나 불특정 다수의 공중 앞에서는 여자는 자신을 가리우는 것이 여자다운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일학교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원칙적으로는 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데 그러나 남녀의 질서 권위 문제가 어머니가 아들을 가르친다는 것에 의해서 over rule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에 유추해서 성인 여자가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 설교하는 것은 안되고-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3. 하나 됨의 의미

 

 

그러나 이러한 권위와 종속성의 관계가 자연스럽고 어느 구성원에게도 부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스림과 순종이 궁극적으로는 서로를 섬겨서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사랑의 형태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이기 때문이요 이 질서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질서를 무시하는 것을 향해서 괴악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극언 하는 것은 남녀의 질서가 인간 공동체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 구별의 질서요 가정과 사회 교회 등 모든 제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주의 계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외의 개별적 사례는 원칙에 따라서 판단되어야 할 것이며 예외적 상황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김성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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