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도널드 매클로드의 스캔들
스코틀랜드 신학자 도널드 매클로드(Donald Macleod, 1940-2023)가 2023년 5월 21일 일요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이다.
매클로드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가 운영하는 자그마한 신학대학의 교수로 봉사했다. 글래스고대학교와 자유교회 대학을 졸업했다. 글래스고에 있는 어느 교회의 목사로 봉사하다가 특별한 학문적 재능은 인정받아 1978년 5월에 에든버러에 있는 '자유교회 대학'의 조직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박사학위 과정 수학에 대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매클로드는 ‘카리스마’를 가진 설교자이며, 영국 왕실의 마약문제 자문위원으로도 봉사했다.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 1999년부터 '자유교회 대학'의 교장으로 봉사했다. 2011년에 교수직에서 은퇴했다. 30년 동안 가르쳤다. 40년 이상에 걸친 여러 권의 꾸준한 출판물들로 저명한 신학자로 국제적 명성을 날렸다.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위격』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1)으로 한국교회에도 잘 알려진 신학자이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중요성을 논한다. 매클로드는 여러 권의 책으로 세계적인 명망을 얻었다. 다양한 신학 주제에 대한 통찰력 있는 저술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매클로드가 속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는 역사적인 장로교회를 계승하는 교회이다. 1843년에 다른 교회와 합동을 할 때, 이를 반대하고 칼빈주의 신앙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남아서 따로 교회를 형성했다. 자신들이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계승, 유지한다는 이유로 국가법정에 소송을 제기하여 기존의 거대한 교회 재산과 에든버러의 '프리처치대학'을 차지했다. 성경대로 믿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여 시편 찬송만을 부르고, 악기사용을 반대해 오다가 최근에는 악기사용을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한국의 예장 고신교회와 자매교회이며 국제개혁교회연합회(ICRC: International Council of Reformed Churches)의 회원 교회이다.
이 교회는 2000년에 분열을 겪었다. 목사 24명과 1,000여 명의 구성원들이 이탈하여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계승파(The Free Church of Scotland-Continued)를 조직했다. 교회를 이탈한 사람들은 남아 있는 교회들을 ‘잔류파’라고 부르면서 그리고 기존 교회가 참 교회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하면서, 150여 년 전 그들의 선배들처럼 기존 교회의 재산과 대학을 명도하라고 소송을 국가법정에 제기했다.
이 교회 분열 사건은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가 운영하는 프리처치대학의 교장 도날드 매클로드의 스캔들과 직결되어 있다.
매클로드는 1990년 무렵부터 동료 목사들과 교수들로부터 이단자, 맹세 파괴자, 성추행자라고 하는 비난을 받았다. 교회 갈등의 중심인물 곧 ‘트러블메이커’(trouble maker)라고 조롱당했다. 매클로드 한 사람만 물러나면 교회가 평화롭게 되고 조용하게 된다고 했다. 그를 ‘주의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라고 비판했다.
매클로드는 종종 교계 신문에 칼럼들을 실었다. 여성이 교회 안에서 모자를 쓰거나 쓰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자신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을 때 그곳의 오페라하우스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청교도들처럼 신자가 극장에 출입하는 것을 죄로 여겼다. 그는 '자유교회 대학' 강당을 로마가톨릭교회에 빌려주기도 했다. 예배를 드릴 때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시편찬송만을 부르지 않고 가끔 일반 찬송도 부를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사상이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신학, 경건, 전통에 위배된다고 비난했다.
매클로드는 1996년(당시 55세)에 이단자로 몰려 교회법정에 섰다. 교회법정은 조사 후에 그가 이단자가 아니라고 판단, 결론을 내렸다. 자유주의 신학자도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그를 교회법정에 제소한 자들이 매클로드를 음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명성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꾸며낸 짓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네 명의 여인들이 매클로드를 성추행 죄로 세속법정에 고소했다. 이 사건은 스코틀랜드와 영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다. 모 대학 강사였던 한 여성은 법정에서 매클로드가 '자유교회 대학'(프리처치칼리지)의 연구실과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증언했다. 연구실의 문을 잠그고 ‘당신은 매력적인 여자’라고 말하면서 손을 스커트 밑에 넣고 가슴을 쓰다듬었다고 했다. 얼마 뒤에는 수퍼마켓 주차장에서 손을 브래지어 안에 넣어 가슴을 만졌다고 증언했다.
다른 어느 여성(28세)은 법정에서 매클로드가 오래 전에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증언했다. 7세 때 에든버러에 있는 그의 집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데 그가 다가와 자신의 두 무릎 사이에 몸을 밀착시키고 키스를 하고 혀를 입에 넣었다고 했다. 초인종이 울리자 그 짓을 그쳤으며, 겨우 몇 분 동안 일어난 일이지만 일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에든버러 법정은 치밀한 공판 심리 끝에 매클로드에게 무죄를 선언했다. 일군의 음해 공모자들이 배후에서 증언을 한 여인들을 지휘했으며, 매클로드가 오히려 그들의 음해 음모의 희생자라고 판결했다. 신학자 도널드 매클로드 스캔들 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한 사람은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 연구가로 알려져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마틴 로이드존스의 전기를 썼으며, 개혁신학 관련 고전서적을 다수 출판한 어느 유명한 기독교 출판사 편집자라고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기 집필로 유명한 분이다.
매클로드 스캔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여성은 자신이 매클로드와 간음을 했다고 시동생과 담임목사에게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다. 매클로드는 그 담임목사의 편지를 받고서 자신이 마음으로 범죄한 것은 사실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간음죄나 그것에 준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했다. 매클로드가 시인한 것은 심리적인 것 곧 마음에 음욕을 품은 죄였다. 그러나 그가 간음한 사실을 자인했다고 하는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국가법정이 매클로드의 무죄를 선언하고, 또 교회법정이 그가 이단자가 아니라고 판명하자, 일부 목사들은 이에 불복하여 매클로드를 교회법정에 상소했다. 세 명의 목사들은 (1) 총회가 ‘자유주의자’ 매클로드를 자신들이 음해했다고 판단한 건과 (2) 매클로드의 성추행과 간음죄 건을 전면 재조사해 달라고 진정했다. 세상 법정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교회가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헌법이 보장하는 ‘계속 프로테스트 할 수 있는 권리’에 저촉된다고 했다.
그러자 교회법정은 매클로드 스캔들 음해사건 공모자가 존 매클로드 목사, 안구스 스미스 목사(매클로드의 처남 또는 매형), 휴 카트라이트 교수(총회 부서기)의 목사직을 면직시켰다. 사람들은 공모자가 이 세 사람 외에도 더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어느 목사가 매클로드 음해 사건을 지휘했다고 생각했다. 음해 사건 지휘자는 누구인가?
교회의 총회가 상소를 받아주지 않자, 이안 머레이(Ian Murray)를 포함한 22명의 목사들은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이탈했다. 머레이는 여러 권의 저서들을 쓴 개혁주의 신학자이다. 이들은 진정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계승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위프리즈’(Wee Frees)라는 별명을 가진 새 교회를 만들었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계승파’를 출범시켰다.
저술가 이안 머레이 목사 중심으로 기존 교회에서 이탈한 목사들은 자신들이 충실한 칼빈주의자이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신자들인데도 총회가 교회헌법이 보장하는 ‘프로테스트’할 권리를 거절했다는 것을 이탈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2000년 1월에 목사 100여 명 가운데서 24명이, 세례교인 11,000명 가운데서 약 1,000명이 따라 나갔다.
새로운 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2003년 10월에 ‘잔류파’가 칼빈주의에 충실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기본 원리를 깨뜨렸고, 그 때로부터 162년 전에 설정된 교회의 근본 원리에서 벗어났으므로, 더 이상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재산을 소유할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국가법정에 교회재산 양도요청 소송을 제기했다. 교회당, 교육관, 연금, '자유교회 대학'(프리처치칼리지)의 소유권을 내놓으라고 제소했다. 150여 년 전에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가 이와 비슷한 법정투쟁으로 거대한 교회 재산을 차지한 전례를 따랐다.
그러나 에딘버러 지방법원은 2005년 3월 24일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잔류파가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근본 교리, 신조를 버리거나 위반한 증거를 찾을 수 없고, 계승파가 말하는 계속 ‘프로테스트할 수 있는 권리’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근본 원리에 해당하지 않으며, 잔류파가 더 이상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가 아니라고 할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판사 앤 패톤(Lady Paton, 1952-)은 교회갈등의 도화선이 된 1996년의 맥클로드 기소사건 곧 4명의 여성들이 성추행 죄로 그를 고소한 것과 그가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 여성들을 배후에서 지휘한 사람이 이번 사건에 가담한 22명의 목사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글라스고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여성 판사 패톤은 매클로드가 공동공모 사건의 희생자이며, 교회분열과 교회재산을 둘러싼 소송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계승파는 정든 교회당들과 사택들과 시설들을 내어주고 떠났다.
이 사건은 한국의 예장 고신교회 출범기에 있었던 법정소송 문제와 비슷하다. 교회당 재산 소유권 관련 법정투쟁, 신자 간의 소송 문제로 말미암아 일어난 신학논쟁과 교회분열, 고려신학대학 교수회와 고신교회가 신학적으로 변질되었다고 하는 ‘반고소 고려측’의 비방, 신학교수 목사직 무기정직 사건 등과 흡사하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와 한국의 예장 고신교회의 사건의 다른 점은 짧은 기간에 순서가 거꾸로 진행된 것이다. 이 사건에서 개혁파 정통신학을 지향하는 보수적인 이 교회가 재산권 문제를 세상 법정에 가져가서 판가름 받고, 또 재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법적으로 대응한 것이 눈여겨 볼만하다.
신학자 도널드 매클로드 스캔들 사건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사건은 성경대로 믿고, 경건하게 살고, 시편 찬송만 부르고, 악기 사용을 반대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다. 동료 목사들과 동료 신학 교수들은 경쟁 상대자 매클로드를 이단자, 맹세 파괴자, 성추행자라고 비난했다. 교회 갈등의 중심인물 곧 ‘트러블메이커’(trouble maker)라고 조롱했다. 그를 드러불메이커라고 비난하던 자들이 진짜 트러블메이커였다. 그를 ‘주의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라고 비판하는 자들이 교회를 허무는 자들이었다. 매클로드 한 사람만 물러나면 교회가 평화롭게 되고 조용하게 된다고 하던 자들이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세상의 조롱을 받게 하는 자들이었다.
신학자 도널드 매클로드의 스캔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로이드존스의 전기 작가, 개혁주의 신학, 정통 칼빈주의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신자, 교회헌법이 보장하는 ‘프로테스트’할 권리를 생각하게 한다. 기독교인의 세상 법정 송사, 기독인들의 법정 거짓증언, 음모, 시기, 질투, 목사들의 공모, 교회 재산을 둘러싼 세상 법정 소송, 재산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응소 등이다.
신학자 스캔들 사건을 조작하고 조정하는 자는 저명한 신학자, 전기 작가로 추정된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설득하여 매클로드를 사법부에 고소하게 했다. 그들로 하여금 법정에서 거짓증거를 하게 했다.
탁월한 신학 저서들로 유명해 지고 인기를 끄는 매클로드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의 죽음의 화살을 용케 잘 피해 나갔다. 매클로드는 스코틀랜드 법정의 정직성 덕분에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법정이라면 불가능했을 수 있다. 대한민국 법정은 진실을 가리는 곳인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법조인들이 있다. 법정은 권력, 인맥, 돈, 여론, 언론조작, 정치 등 거의 모든 것에 열려 있다. 신학자, 목사들도 시기와 질투심의 포로일 수 있다. 신학자의 세계는 천사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사탄의 소굴일 수 있다.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했다. “당신이 어느 공동체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죽음의 화살이 날아든다. 그러므로 머리를 들기 전에 먼저 방패를 마련하라.”
맥틀로드의 위 스캔들에 대한 소식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Austlan Cramb, “Wee Frees face new threat over heresy charge,” by Scotland Correspondent, UK news Elecronic Telegraph (Friday, 4 October 1996); Shirtly English, “Wee Free rebels los fight over Church‘s millions,” The Time, (25 March 2005); “John Robertson Law Correspondent,” Scotsman (2005.3.25.).
위 글의 중심 부분은 졸저 <정통신학과 경건: 고신교회 역사와 삶>(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6), 547-551에도 실려 있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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