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교회의 동독사랑, 한국의 분단극복
원제: 원수사랑은 대상이 원수이면 족하다
물론 과거 분단 독일과 오늘의 분단 한국은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역사의 교훈이 없지 않습니다. 동독을 말없이 섬겼던 서독교회의 디아코니아 재단(Das Diakonische Werk)을 통한 활약에서 한국교회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서독교회의 동독을 향한 섬김은 무던 은근했고, 한 번도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독일에서도 ‘공산당을 망하게 해야지 무슨 섬김이냐?’라는 반대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서독교회는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묵묵히 가난한 형제를 섬겼습니다. 어려운 그들의 이웃이 되어 곁에 있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그 여인 곁에 함께 있었던 우리 주님처럼 말입니다.
서독교회는 동독을 섬길 때 복음에 근거한 봉사의 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유대관계(Die besondere Gemeinschaft)를 가지고 섬김의 신학(Die diakonische Theologie)을 실천했습니다. 섬기러 오신 주님의 십자가에 확고히 선 그 신학입니다. 그 어떤 이유와 조건이 주님의 섬김의 사랑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서독교회는 결단코 이념이 복음을 넘어설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서독교회의 동독 지원은 복음의 원리에 서서 가난한 자, 병든 자를 돕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서독교회는 이 사랑을 동서 분단 내내 한 번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이념에, 정권에, 동서의 정치적 냉전 상황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르게는 복음에 확고히 설 때, 이념에 상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랑을 주어야 할 대상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독일교회는 목이 아프도록 통일을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복음의 원리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독일통일이 ‘조용한 개신교 혁명’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 은혜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독일통일이 ‘조용한 개신교 혁명’이었냐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독일교회가 정치적이었고, 이념적이었고, 사회 참여적이지 않았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럼 제가 반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디아코니아가 뭐죠? 과연 그럴 때 성령의 역사로 인한 십자가의 디아코니아(섬김)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적당히 이념적이고, 적당히 정파적이고, 적당히 물질주의적이고, 적당히 세속적이고, 적당히 정치적일 때, 다르게는 적당히 복음적일 때 성령께서 역사할 수 있을까요? 과연 2천 년 교회사에서 교회가 대충 적당히 세속적으로 살고, 좌우 갈지자로 걸으면서 위대한 하나님의 일이 일어났을까요?
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 경건주의가, ‘독일 구세주’라는 히틀러 나치를 대항한 독일 고백교회의 순교적 저항이 가능했을까요? 순교자이자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 칼빈의 종교개혁이 아름다운 결실을 가져올 수 있었을까요? 분단 시절 서독교회의 디아코니아가 적당히 정치적이고, 적당히 인도주의였기에 가능했을까요?
할레-비텐베르크대학교 교수 E. 빈클러는 2004년에 서독교회의 역사적 디아코니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디아코니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응답으로 돕는 행위이며, 디아코니아는 예수를 통해 세상에 오신 성령의 열매다. 이러한 성령의 도움 없이도 남을 돕는 선한 사회사업은 있지만, 디아코니아는 없다.”
서독교회의 동독을 향한 섬김은 디아코니아였지 사회사업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인도주의에 입각한 사회사업을 교회가 어느 정도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요? 강한 반대가 있고, 빨갱이라는 비난이 홍수처럼 넘쳐나는데, 그 일을 어떻게 중단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을까요?
성령의 역사로 일하는 주의 종들이 아니고서 어떻게 북한을 돕는 한국교회의 사역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 대북사업이 어떻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남북관계, 북미 관계가 헝클어지는데, 어떻게 중단하지 않을 수 있을 런지요?
확실한 것은 디아코니아는 성령의 역사로, 성령의 은사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독일교회가 한국교회에 말합니다. 그러니 한국교회가 철저히 복음에 서지 않고선 북한을 위한 사회사업만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코 지속적일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분단을 극복하는 남북통일에 조그만 역할이라도 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복음에 굳건히 서는 회개와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런 후 철저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복음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북한을 대할 때 적당히 이념이나 철학을 가미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통일운동은 일종의 교회 개혁운동이며, 순전한 복음적 운동입니다. 그토록 통일을 목 놓아 외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복음의 요청 ‘원수사랑’에 묵묵히 순종하면 됩니다.
사랑해야 할 원수가 어떤 색깔인지 굳이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원수 사랑의 상대가 원수이면 족합니다. 게다가 원수를 사랑하는 자가 원수와 비슷하지 않을 지라는 의심은 도를 넘은 것입니다. 이는 죄인을 십자가로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죄인으로 의심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주도홍 박사/ 기독교통일학회 명예회장, 전 백석대학교 교회사 교수, 현 총신대학교 통일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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