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T GPT와 신학교육
1. 즉답인공지능
인류는 즉답인공지능 ChatGPT(Chat Generated Pre-trained Transformer, 사전 훈련된 생성 변환기) 시대로 진입했다. 시간이 갈수록 인공지능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즉답인공지능은 신학교육과 목회현장를 포함한 인간의 거의 모든 영역에 요긴한 정보를 제공한다. 역사·과학·철학·법률·종교 등 거의 모든 영역에 필요한 무궁무진한 정보를 제공한다.
인공지능은 법정 판사의 정확한 판단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변호사와 검사가 정보를 입력하고 인공지능으로 하여금 결과를 내게 한다. 판사는 인공지능의 판단 과정과 귀결의 정확도를 감시하고 그것의 결론을 참고하면 적중도가 높은 판결을 할 수 있다.
브니엘신학교 졸업식 설교에 참고할 목적으로 ChatGPT에게 마태복음 9장 9절을 본문으로 주고 ‘소명’(Calling of God)이라는 주제의 설교문을 작성하라고 했다. 약 15초 만에 A4 용지 한 장 분량의 괜찮은 설교문을 내놓았다.
설교문이 너무 짧아 5,000자짜리 설교를 만들라고 했다. ChatGPT는 정중한 조언을 했다. “미안하지만, 그 정도 길이의 설교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는 너무 깁니다. 5,000자 설교는 전달에 1시간 이상이 걸릴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주의력 집중 길이 보다 훨씬 깁니다. 설교는 간결하고 집중적이어야 메시지가 청중에게 강력한 영향(impact)을 줄 수 있습니다.”
ChatGPT에게 “위대한 신학자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교육, 헌신, 인격적인 성장의 조화, 그리고 필요한 지식, 기술, 관점을 함양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⑴ 정규적인 교육을 이수하라. ⑵ 폭넓은 독서에 매진하라. ⑶ 언어들(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을 배우라. ⑷ 신학적 논의에 참여하라. ⑸ 쓰기와 말하기의 기술을 배양하라. ⑹ 자신의 믿음을 성찰하라. ⑺ 겸손하고 열린 마음을 소유하라“고 했다.
ChatGPT의 역량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이것이 작성한 대학 과정의 리포트라면 평균 B학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기술이 좀 더 향상되면 석사학위 논문과 박사학위 논문을 대필할 수도 있다. 신학 분야의 논술문, 학술 에세이, 단답형 답안 작성도 할 수 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로스쿨과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 경영대학원의 졸업 시험, 미국 의사면허 시험까지 통과할 만큼 성능이 뛰어나다고 한다. 지능이 높은 사람이 쓴 글과 차이가 없거나 더 탁월한 답을 제공할 수 있다.
인류는 즉답인공지능 ChatGPT 시대에 진입했다. 이것은 초연결망정보전달시스템(인터넷), 유비쿼터스, 메타버스와 더불어 교육계에 강력하게 도전한다. 이것을 적극 활용하는 자가 각 분야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니콜라스 카(Nicholas G. Carr)는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초연결망(인터넷) 등장과 함께 인류의 사고 능력이 퇴화하는 슬픈 현실을 지적한다(니콜라스 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최지향 역, 서울: 청림출판, 2011).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뇌의 구조와 사고능력이 부정적으로 바뀌고, 생각하는 기술 능력이 퇴화하고 있다고 한다.
신학교육 종사자들은 카의 지적을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다. 인터넷의 일상화와 더불어 신학도들의 읽기, 쓰기, 말하기, 비평하기, 질문하기, 자기 생각 만들어 내기 등의 능력이 점차 퇴화하는 것을 목격한다.
신학교육은 단순암기와 단순 정보전달 방식의 교육을 필요로 한다. 히브리어 헬라어를 익히고, 성경구절을 외우고, 신학용어와 지식을 백과사전식으로 습득하는 활동을 포함한다.
그러나 신학교육에서 양보할 수 없는 것은 분석, 비평, 종합, 창의적 재생산 능력의 함양이다(최덕성,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서울: 지식산업사, 2013)을 보라). 신학교육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독자적인 연구능력이다. 홀로 강의안과 설교문을 만들어 가르치고 감동적일 설교를 할 수 있는 실력 그리고 사색, 상상, 논리, 창의성을 배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글쓰기와 직결되어 있다.
ChatGPT가 신학교육에 역설적으로 또는 반어법적으로 기여하고 교훈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 신학 고유의 역량 곧 분석, 비판, 종합, 창의적 적용 능력의 중요성이다. 둘째, 자기 나름의 논리와 창의적 사고능력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의 중요성이다. 정보전달과 암기 중심의 교육 수준에 머물 수 없음을 알려 준다. 셋째, 교육 방식과 학점 평가방식의 전환을 재촉한다. 신학교수는 이전보다 더 무거운 감독과 학습 지도의 짐을 지게 되었다. 넷째, 신학도의 글쓰기 곧 논술문 또는 학술 에세이 쓰기 능력의 필요성이다. ChatGPT가 기승을 부릴수록 비판적 사고능력, 창의적 사고력, 정보판별 능력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2. 고민
즉답인공지능 ChatGPT의 등장으로 일반 대학 교수와 마찬가지로 신학교수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일부 학교들은 즉답인공지능 사용을 금지한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저작물 윤리에 저촉된다는 것이다. ChatGPT를 활용해 작성한 텍스트는 인공지능표절(AIgiarism, AI+plagiarism)에 해당한다. 타인이 작성한 텍스트를 자기가 한 것처럼 속이는 행위이다. ChatGPT는 첨단 표절 기술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언어 데이터의 문자들과 규칙성에 기반하여 대필을 한다.
둘째, 인공지능의 필수 구조인 환각(hallucination)은 학업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환각’은 정확하지 않은 오류 데이터까지 정답으로 학습하여 그것을 정답처럼 내놓는 작동방식이다. 현재의 ChatGPT는 2021년까지 생산된 영어 데이터만을 학습한 상태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누구인가?” 하고 물으면 ‘문재인’이라고 답한다. ChatGPT는 전거(典據)나 출처를 밝히지 않으므로, 오류 여부를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학습에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ChatGPT가 작성한 텍스트를 판별하는 새로운 기술은 즉답인공지능을 이용한 글을 가려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방편이거나 무용지물이다. 우회 접속과 학교 밖 사용을 막을 수 없다. 즉답인공지능이 생성한 텍스트를 조금만 수정하면 텍스트 판별 프로그램이 잡아내지 못한다.
ChatGPT를 학습저해 요인으로 여겨 사용을 규제하면 인류의 거대한 변화와 혁신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지게 된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즉답인공지능의 폐해와 독소를 인지하면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 디지털해독능력(digital literacy) 구축은 현대인의 삶의 필수요건이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는 ‘살인 기계’로 불렸다. 면허, 도로, 신호체계 등을 고안 보완한 뒤에는 유용한 교통수단으로 바뀌었다. 즉답인공지능 ChatGPT는 문자의 첫 출현만큼이나 경쟁력과 탁월성을 가진 기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수행과 세계복음화에 요긴하게 이바지할 수 있다.
3. 신학교육과 글쓰기
글쓰기는 사고능력을 배양하는 학습 활동이다. 신학교, 신학대학원의 교육은 글쓰기에서 글쓰기로 이어진다. 입학 논술시험에서 졸업 과제인 석사학위 논문까지, 매 과목마다 글쓰기 과제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글쓰기의 순기능 때문이다.
글쓰기는 개인이 머릿속에 있는 정보들을 일목요연하게 엮어 문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비평적 사고, 논리적 사고, 창의적 사고의 종합이다. 강의를 듣고 학습한 지식, 이해, 정보들이 논리적 사고능력과 더불어 글쓰기에서 종합된다.
글은 사고의 거울인 말의 시각적인 기록이다. 독서는 이 기록을 사고 속으로 회수하기 위한 수단이다. 글을 읽음은 종이에 쏟아진 글쓴이의 사고를 독자가 자기의 머리에 담는 작업이다. 글쓰기는 필자의 생각을 공리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활동이다. 글은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가장 두드러진 의사소통의 도구이다.
인류문명의 발전을 견인해온 창의적 이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오늘날의 목회와 신학 작업에는 암기력이나 지식 또는 정보의 양보다 분석, 비판, 종합, 창의적 적용으로 이어지는 비평적 사고(Critical Thinking) 능력이 더 절실히 요청된다. 목회현장은 신학도를 ‘생각하는 존재’로 훈련시킬 것을 요청한다.
컴퓨터, 빅데이터, 즉답인공지능은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길러낸다. ‘비판적 사고능력’ 곧 ‘생각하기 기술’은 ChatGPT의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생각하기’ 영역의 결실이 아니다. ChatGPT는 ‘암기-학습하기’ 구조의 결과이다. 기계학습에 의한 축적된 데이터를 정리하여 내놓는다. 인터넷 공간에 올라와 있는 자료들을 치밀하게 짜깁기 하는 수준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생각을 온전히 읽어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4. 학문의 총아
학(學: science)이란 자연, 인문, 사회의 여러 법칙을 깊이 탐구하며 밝혀내는 지적인 활동이다. 과학이란 역사적으로 생성된 지식, 객관적 또는 상대적 진리를 담고 있는 자연, 사유(思惟), 사회에 관한 지식 체계이다. 이러한 지식 체계는 개념, 명제(특히 법칙적 명제), 이론, 가설의 형태로 정착된다. 학은 자연의 여러 현상과 사유와 사회의 여러 법칙들을 파악하여 체계적 형태로 전달하는 작업이다. 대학교란 큰 배움터인 동시에 과학 방법을 배우는 곳이다.
어떤 주장이 건전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정당화하는 것은 논리적 형식 덕분이다. 인간은 이 과학적 지식에 힘입어 자연, 사유, 사회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확대해 나간다. 이처럼 과학적 방법으로 지식을 획득하고 소화하는 것은 창조적인 정신활동이며 지적인 노동이다.
학은 일정한 공리 체계(axiomatic system)로 수행된다. 공리 체계란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명제와 공리 따위를 체계화한 집합이다. 이 명제들로부터 그 영역의 다른 명제들이 연역적으로 도출된다. 공리 체계는 무모순성(consistency)을 충족시킨다. 과학적 수법(手法)의 총체적 표현인 논문쓰기는 바로 이 공리 체계에 바탕을 둔다. 어떤 착상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들을 유형별로 분석하고, 비평하며, 독창적으로 생각하고, 그 결과를 체계화하여 독자를 설득시키는 작업이다. 자료, 데이터, 사실들을 수집하여 그 현상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그것들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고 다시 종합하면서 보편적인 특징을 찾아내고 그것을 조리 있게 엮으며 주장하고 전달한다.
논문쓰기, 학술 에세이 쓰기는 학문의 총아이다. 사물의 원인과 결과를 관찰, 비교, 분석, 종합하고 그 가운데서 일정한 법칙이나 패턴을 찾아내며 일반화하고 유추한다.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는 비평 활동을 수반하고 그러한 능력을 키운다. 사물의 개념을 파악하고 정보를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 체계화하며, 논리적으로 판별하고, 상호관계를 따져 옳고 그름을 가리고, 무엇을 예측하거나 구상하거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재창조 능력을 키운다. 고급 인지 능력을 극대화한다.
과학적인 수법은 학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변호사의 논고도 과학적 방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의뢰인을 대신하여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종합하고, 명백한 이론과 증거들을 가지고 변론을 편다. 그 논증은 치밀하고 조직적이다. 설교자의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설교자는 경건한 감정을 조성하고 맹목적인 것을 추구하거나 상식만을 외치는 자가 아니다. 신학의 전제와 목회 원리들을 가지고 탐험자같이 주의를 기울이면서 성경본문과 목회현장의 이모저모를 관찰하며 보화를 찾아낸다. 헤르메스처럼 신의 계획과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해 본문과 현장 사이를 부지런히 왕래하는 봉사자이다. 열린 마음, 지적 욕망, 수용성을 가지고 탐험한 결과를 불붙는 논리로 토해 낸다. 상담, 교육, 전도, 행정 등의 목회활동 그 어느 것 하나도 인문과학의 방법적인 지식과 과학적 기술(skill)을 요구하지 않는 영역이 없다.
학문연구는 지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과 요리를 할 수 있는 도구를 수단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좋은 재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도구가 없거나 요리법을 알지 못하고서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낼 수 없다.
학문을 하는 자가 생각, 사상을 말이나 글로 조리 있게 표현할 줄 모르거나 요리하고 응용하는 기술을 지니지 못하면 창의성 있는 학문 활동을 해 나갈 수 없다. 인문교육의 최대의 목표는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을 말이나 글로 선명하게 표현하는 능력과 기술 연마이다. 이런 점에서 논문쓰기, 학술에세이 쓰기는 학문의 총아인 동시에 하나의 예술(art)이다.
성공적인 본문생산, 논문쓰기는 일정한 노력을 거쳐 습득되는 노련한 기술(craft)이다. 예술적인 능력과 기술은 하루아침에 습득되지 않는다. 아낙네가 베 짜는 기술을 익히듯, 음악도가 피아노, 플루트, 거문고를 연습하듯, 일정한 시간, 에너지, 노력을 투자하면서 연습을 거듭해야 한다. 출생 때부터 기술이나 사고 능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학자는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한 두뇌를 가진 자가 아니다.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는 일정한 훈련을 거쳐 얻어지는 열매이다.
5. 상호보완적 공존
학생들에게 ChatGPT를 사용하지 말라고 함은 실효성이 없다. 사용 금지는 학생들의 광범위한 학업 자유를 침해하는 조치이다. 신학교육과 즉답인공지능이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방법과 지식이 필요하다. ChatGPT를 잘 사용하면 학습 효율을 높일 수도 있다. 어차피 신학생들은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즉답인공지능 ChatGPT는 신학생들의 궁금한 질문에 즉각적인 답을 줄 수 있다. 구원론을 배우는 학생이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라는 생소한 용어를 접할 때, 인공지능에게 즉각 물어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단성론, 양성론, 양태론이 무엇인지, 만인보편구원주의, 유보적 칭의론, 새 관점학파의 바울 이해가 무엇인지 등을 교수에게 일일이 물어보지 않아도 대체로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ChatGPT에게 ‘이 주제의 글을 쓰라’라고 요청하면 고급 답을 얻을 수 없다. 수준 높은 답을 얻으려면 영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일곱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구체적으로 질문한다, 둘째, 명확하고 간결한 언어를 사용한다, 셋째, 맥락 정보를 제공한다, 넷째, 원하는 글쓰기 스타일을 지시한다. 다섯째, 개방형 질문을 사용한다, 여섯째, 원하는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추가 정보를 제공한다. 일곱째, ‘달래기’를 잘 해야 한다. ChatGPT을 살살 달래어 원하는 답을 얻어내는 요령이 필요하다.
글쓰기 인공지능 도구들, 특히 ChatGPT를 효과적으로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있다(이세훈, <챗GPT시대 글쓰기: 오픈AI로 아이디어를 실현하라>, 서울: 매일경제신문사, 2023); 김철수, <챗GPT와 글쓰기: ChatGPT와 함께하는 AI 글쓰기 실전>, 서울: 위키북스, 2023). 글쓰기 목적에 적합한 번역기, 영어 문법 교정과 가독성과 흐름을 개선해주는 그래멀리(Grammarly), 글을 단순화 하고 간결하게 쓰도록 돕은 헤밍웨이(Hemingway) 등도 유익한 글쓰기 도구들이다.
즉답인공지능 ChatGPT는 깊은 사고가 필요하지 않은 질문에는 답을 잘 하지만 독창성을 요구하는 답변을 하지는 못한다. 복잡한 질문에 논리적인 답을 내놓지 못한다. 사회적 편견을 담은 오답을 내놓기도 한다.
6. 교수법
신학교육에서 즉답인공지능 사용을 허락할 경우, 우선적으로 인공지능의 윤리성과 즉답인공지능표절이 무엇인가를 학생들에게 정확히 일러주어야 한다. 인용할 경우 전거를 밝히도록 한다. 그리고 즉답인공지능에 의존하면 이해력, 논리적 사고력, 분석력, 비판력, 종합력, 창의력 등 다양한 인문적 역량이 연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단히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학교육에 다음과 같은 교수법 개선과 적용이 바람직하다. 첫째, 수업방식의 전환이다. 일명 ‘거꾸로 하는 학습’(Flipped Learning)은 집에서 영상 강의를 듣고, 인공지능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강의실에서 교수의 부연 설명을 듣고 복습하는 방식이다. 필자는 2020부터 2023년 현재까지 “거꾸로 하는 학습방식”을 따라 신학교육을 진행해 왔다. 먼저 주제 학과목 영상을 주의 깊게 시청하고, 교실에서 질문과 토론을 하고, 필요한 부연 설명을 해 준다.
둘째, 양질의 소논문 또는 학술 에세이를 쓰게 한다. 학생 자신이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담아 직접 작성하게 한다. 분석, 비평, 종합, 창의적 적용 능력을 향상시킬 목적이다. 학생 자신의 관점, 자기 이야기, 자기가 이해한 것을 진술하는 자기 이야기 형식의 글을 쓰도록 한다. 첨부한 학술 에세이를 참고하라.
이렇게 하면 ‘짜깁기식’ 보고서나 에세이를 요구하는 교육은 배움마당에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셋쩨. 시험문제는 ChatGPT가 답할 수 없는 것으로 출제한다. 강의영상을 충실히 시청하고 그 요점들을 중심으로 자기의 명료한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 쓸 수 있는 문제를 출제한다. 교수가 감독하는 시험 장소에서는 인공지능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넷째, 기말 시험은 교수나 감독자 앞에서 손으로 직접 글을 쓰는 논술형 시험을 치르게 한다. 학술 에세이 쓰기 과제도 강의실에서 교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필로 직접 쓰게 한다. 학생이 교실에 출석하여 시험을 칠 수 없는 형편이면, 전화나 줌이나 화상 채팅으로 구두시험을 치른다. 영상 강의를 충실히 시청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건물 없는 대학-신학교가 유비쿼터스 방식으로 교육을 진행할 경우는 조별로 토론을 하고 함께 과제를 푸는 방식을 도입할 수 있다.
다섯째, 학술 에세이 작성에 ChatGPT 이용을 허용하는 경우는 출처, 전거를 밝히도록 한다. ChatGPT가 생산한 글을 자신이 쓴 것처럼 제출하면 부정행위로 간주하겠다고 공지한다. 자기가 쓴 것인 양 과제물을 내는 것은 속임수이다.
이러한 교육방식은 교수에게는 학생 개개인의 학습 활동을 감독, 감시, 확인할 것을 요구한다. 즉답 로봇을 이용한 부정행위를 적발하는 책임이 추가된다. 이 학습은 학생과 교수의 비율의 폭이 낮을수록 효과적이다.
즉답인공지능의 등장과 더불어 암기력이 존중받고 높이 평가되는 교육 풍토는 사라지고 있다. 단순 암기와 주입식 교육은 사라지고 있다. 지식이나 정보의 양(量)보다 비평적 사고능력이 더 중요한 시대로 바뀌고 있다. 외워서 답안을 쓰던 시대에서 창의력 요구하는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 분석, 비판, 창의적 적용 그리고 논리적 판단 능력이 더 중요해 졌다. 강의 방식과 학생 성적 평가 방식이 획기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7. 사람의 몫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정보의 정확도, 신뢰도를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사람이 인공지능에 의존하면 분별력, 판단력, 창의력 등이 둔해진다. 마음이 판단할 문제를 기계에 맡기면 그 기계가 우상이 된다. 학습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정보가 정확하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필요나 질문에 대한 최상의 응답인지를 분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ChatGPT에 의존하는 형식의 글쓰기는 인간 뇌의 이해력, 분석력, 판단력, 비판력, 그리고 창의력을 점차 감퇴시킬 수 있다. 계속적으로 인공지능 로봇에 의존하여 걷거나 무거운 짐을 옮는 경우, 인간의 근육이 점차 퇴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쉬운 길을 버리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위에서 소개한 몇 가지 교육방법들은 신학도가 평소에 ChatGPT을 사용해도 지적 역량이 감퇴하지 않고 향상시킬 수 있 방편들이다. ChatGPT을 활용하더라도 개인의 지적 근육을 연마하는 훈련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들이다.
기존 검색엔진을 활용하여 자료를 검색하고, 이를 바탕으로 글의 목차와 내용 틀을 구성한 뒤에 ChatGPT을 활용하여 광범위한 정보로 보완할 수도 있다. 과거 학력검증 시험에는 계산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지만, 지금은 허용한다. 신학교육 마당도 즉답인공지능 사용을 허용하는 반면에 학업성취도 평가 시험에는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술 에세이 쓰기의 비중을 줄이라는 요구가 많아 질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ChatGPT는 순수한 글쓰기가 배양하는 고도의 비평력과 판단력을 요구한다. ChatGPT가 작문을 제대로 했는지, 맥락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편향된 내용이 아닌지, 주제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등을 판별. 판단하는 작업은 글쓰기에서 구축된 분석, 비판, 종합, 창의적 적용으로 이어지는 비평적 사고능력을 터득한 자의 몫이다.
즉답인공지능 ChatGPT은 양날의 칼이다. 인간을 노예나 바보로 만들 수 있고, 인간에게 충직히 봉사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신학교육이 제공하는 분석력, 비평력, 종합력, 창의적 응용력, 문제 해결 능력을 구축한 자의 손에서는 유익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학술적인 글쓰기, 깊은 사색, 독서, 활기찬 토론에서 얻어지는 논리성, 비평력, 창의성을 배양하는 방식의 신학 교육이 절실하다.
첨부: 구원론 과제, 샘플 학술 에세이
<리포르만다> 편집자 주: 아래의 글은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이 2022년 가을학기에 개설한 구원론(최덕성 교수)의 글쓰기 과제로 제출한 학술 에세이이다. 논지는 “처음 전도자를 만났을 때 ‘지금은 아닙니다’ 하고 거부하였지만 그것조차 나를 향한 하나님의 항거할 수 없는 은혜의 타이밍을 향한 과정이었다”이다. 주장(논지)과 논거(주장의 근거)가 일치하는 글이다. 수강한 구원론의 요점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논의를 치밀하게 진행한다. 학술 에세이 쓰기의 모범적인 글이다.
제목: 불가항력적 은혜를 거부하다
하복연/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1학년
구원론을 공부하는 목적은 하나님이 어떠한 방법과 위대한 절차로 우리를 구원하였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지식으로 예전의 나처럼 비기독교인인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믿게 하고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전도자로 살아가기 위함이다.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최덕성 교수님의 교의학-구원론을 배우는 동안, 나는 오래 전에 나를 예수 믿게 하려고 노력한 여고동창생 유정이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타이밍을 생각하였다. 이것들을 생각하면서 구원론을 배우니 감회가 한층 더 새로웠다.
구원론의 요체인 칼빈주의는 5대 교리로 구성된다. (1) 인간의 전적 부패와 타락, (2) 무조건적 선택, (3) 제한된 속죄 곧 특별구속, (4) 불가항력적 부르심(은혜), (5) 성도의 견인이다.
이 가운데 하나인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 恩惠)를 내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과정에 대입시켜 생각하면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아무 대가 없이 거저 주어진다. 대가를 요구하거나 보상을 바라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 또는 거래이다. 은혜는 내가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 사실은 구원론이 다루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이해의 관건이다.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찾아와 마음을 두드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도록 한다. 그 분이 마음의 문을 열어 제쳐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은 아담 때부터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선택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 모두는 아담의 범죄의 영향 아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예수님의 대속사역을 통해 이루신 구원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거룩한 부름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의 판단을 신뢰한다. 자신의 이성과 지각으로 판단한다. 믿음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지기에게 납득 되어야 믿을 수 있다.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으로 교회에 갔었다. 친한 친구 손에 이끌려 갔다. 예배는 졸리웠고 찬양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어색한 분위기에 나를 잠시 맞춰준 그 이후로 교회엘 가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그때 처음 그 친구를 통해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 자신이 죄인 것도 몰랐다. 그런 상태로 7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부름에 마음을 열었다. 그때 나는 이것을 나의 의지와 이성의 결단의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전도자를 처음 만난 이후, 7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였다. 하나님의 부름을 거부하였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처럼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권리와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에게 전도하려는 친구에게 “더 이상 나에게 교회 가자고 권하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어리석었다. 나의 단호한 결단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엔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면서, 나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엉뚱한 말을 하였다.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나의 이러한 생각과 태도는 인간에게 복음의 수용과 거절의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는 아르니미우스의 주장과 일치한다. 나는 아르미니우스처럼 하나님이 죄인의 반응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왜 하나님은 열일곱 살의 나를 그 때 그 시점에 강권적으로 예수 믿게 하지 않으셨을까? 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죄인이 저항할 수 없도록 확실하게 부르시지 않았을까?
세월이 흘러 내가 예수를 믿고 나서 스스로 질문해 보았다. 기왕 부르실 것이면 좀 더 일찍 부르시지, 고생 많이 한 이후에 부르시고 그 부름에 응하도록 하셨을까? ‘하나님이 없다’고 우겨대는 나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고 싶었을까? 하나님의 구원이 불가항력적이라면, 왜 처음 전도자를 만났을 때, 단 번에 그리고 확실하게 부르시지 않으셨을까? 왜 뜨뜻미지근하게 부르셨을까?
칼빈주의는 구원과 관련하여 불가항력적 은혜와 하나님은 효력 있는 부름을 강조한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마음 문을 여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부름을 우리가 거부할 없다고 한다.
개혁주의 구원론으로 조망해 보면, 내가 처음 복음을 들은 열일곱 살 당시는 하나님의 계획한 때가 아니었다. 효과적인 부름의 시간은 그로부터 7년 뒤였다. 효력 있는 부르심은 전도자인 친구의 기도, 노력, 성령의 역사, 그리고 전적인 주권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처음 전도를 받고 “지금은 아닙니다” 하고 거부의 손을 흔들었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과 부름의 과정이었다. 불항력적인 은혜의 부름의 일부분이었다. 구원론을 배우면서 깨달은 것은 나의 거부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름의 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타이밍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유효한 보혈의 공로를 가진 예수님,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시려는 성령님이 나를 부르고 계셨다.
여러 해 뒤, 나는 하나님의 부름에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은혜의 하나님은 믿음을 나에게 주입시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나님의 부름은 나에게 항거할 수 없는 은혜로 주어졌다
나는 죄책을 지닌 인간 무리에 속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다. 그러한 나에게 하나님은 불가항력적 은혜로 나에게 다가오셨다. 예수를 믿게 하셨다. 성령 하나님은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나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나를 구원과 영생의 문에 들어서게 하였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는 인간의 선택과 자유의지가 작동할 공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고백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선물이다.” 성경은 말한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미리 정하고 구원을 계획하셨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이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이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이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의 결과이다. 열일곱 나이에 구원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에게도 하나님은 거부할 수 없는 은혜, 저항할 수 없는 구원의 시간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나는 예수를 구원자 곧 그리스도로 믿는다. 하나님의 항거할 수 없는 은혜 덕분이다. 그 믿음과 더불어 구원의 반열에 들어섰다. 하나님은 신실하고 견고하게 나를 붙들고 계신다. 성령의 견인 활동이 나로 하여금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믿음을 견고하에 유지하게 하심을 믿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은 우리의 결단과 책임을 요구한다. 나는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순종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안에 있는 자는 그 분의 은혜의 부름에 침묵하지 않는다. 믿음과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 자신의 책임과 결단으로 응답한다.
믿음의 결단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에서 “나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로 바뀌게 한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불러주심에 “이제는 감사합니다”고 고백한다. 나는 그저 받은 불가항력적 은혜에 “이제는 그 은혜를 제가 선포합니다” 하는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싶다.
죄인이었고 이방이었던 나를 예수님에게 접붙임으로 연합(Union)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은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일환이다. 접붙임이 잘 이루어진 가지가 열매를 잘 맺는다. 이처럼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는 것도 불가항력적 그 은혜의 일환이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예수님을 더 많이 알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을 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향한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부름의 일환이다.
나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이다. 나에게 구원과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성령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열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나에게 다가온 구원과 사랑 그리고 그 분이 주신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처음 전도자를 만났을 때 “지금은 아닙니다” 하고 거부했지만 그것조차 나를 향한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은혜의 타이밍을 향한 과정이었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고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여고동창생 유정이, 오늘은 네가 새삼 보고 싶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개혁신학포럼 발제문(20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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