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항력적 은혜를 거부하다
구원론을 공부하는 목적은 하나님이 어떠한 방법과 위대한 절차로 우리를 구원하였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지식으로 예전의 나처럼 비기독교인인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믿게 하고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전도자로 살아가기 위함이다.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최덕성 교수님의 교의학-구원론을 배우는 동안, 나는 오래 전에 나를 예수 믿게 하려고 노력한 여고동창생 유정이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타이밍을 생각하였다. 이것들을 생각하면서 구원론을 배우니 감회가 한층 더 새로웠다.
구원론의 요체인 칼빈주의는 5대 교리로 구성된다. (1) 인간의 전적 부패와 타락, (2) 무조건적 선택, (3) 제한된 속죄 곧 특별구속, (4) 불가항력적 부르심(은혜), (5) 성도의 견인이다.
이 가운데 하나인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 恩惠)를 내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과정에 대입시켜 생각하면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아무 대가 없이 거저 주어진다. 대가를 요구하거나 보상을 바라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 또는 거래이다. 은혜는 내가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 사실은 구원론이 다루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이해의 관건이다.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찾아와 마음을 두드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도록 한다. 그 분이 마음의 문을 열어 제쳐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은 아담 때부터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선택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 모두는 아담의 범죄의 영향 아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예수님의 대속사역을 통해 이루신 구원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거룩한 부름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의 판단을 신뢰한다. 자신의 이성과 지각으로 판단한다. 믿음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지기에게 납득 되어야 믿을 수 있다.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으로 교회에 갔었다. 친한 친구 손에 이끌려 갔다. 예배는 졸리웠고 찬양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어색한 분위기에 나를 잠시 맞춰준 그 이후로 교회엘 가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그때 처음 그 친구를 통해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 자신이 죄인 것도 몰랐다. 그런 상태로 7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리고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부름에 마음을 열었다. 그때 나는 이것을 나의 의지와 이성의 결단의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전도자를 처음 만난 이후, 7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였다. 하나님의 부름을 거부하였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처럼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권리와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에게 전도하려는 친구에게 “더 이상 나에게 교회 가자고 권하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어리석었다. 나의 단호한 결단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엔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면서, 나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엉뚱한 말을 하였다.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나의 이러한 생각과 태도는 인간에게 복음의 수용과 거절의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는 아르니미우스의 주장과 일치한다. 나는 아르미니우스처럼 하나님이 죄인의 반응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왜 하나님은 열일곱 살의 나를 그 때 그 시점에 강권적으로 예수 믿게 하지 않으셨을까? 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죄인이 저항할 수 없도록 확실하게 부르시지 않았을까?
세월이 흘러 내가 예수를 믿고 나서 스스로 질문해 보았다. 기왕 부르실 것이면 좀 더 일찍 부르시지, 고생 많이 한 이후에 부르시고 그 부름에 응하도록 하셨을까? ‘하나님이 없다’고 우겨대는 나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고 싶었을까? 하나님의 구원이 불가항력적이라면, 왜 처음 전도자를 만났을 때, 단 번에 그리고 확실하게 부르시지 않으셨을까? 왜 뜨뜻미지근하게 부르셨을까?
칼빈주의는 구원과 관련하여 불가항력적 은혜와 하나님은 효력 있는 부름을 강조한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마음 문을 여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부름을 우리가 거부할 없다고 한다.
개혁주의 구원론으로 조망해 보면, 내가 처음 복음을 들은 열일곱 살 당시는 하나님의 계획한 때가 아니었다. 효과적인 부름의 시간은 그로부터 7년 뒤였다. 효력 있는 부르심은 전도자인 친구의 기도, 노력, 성령의 역사, 그리고 전적인 주권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처음 전도를 받고 “지금은 아닙니다” 하고 거부의 손을 흔들었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과 부름의 과정이었다. 불항력적인 은혜의 부름의 일부분이었다. 구원론을 배우면서 깨달은 것은 나의 거부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름의 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타이밍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유효한 보혈의 공로를 가진 예수님,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시려는 성령님이 나를 부르고 계셨다.
여러 해 뒤, 나는 하나님의 부름에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은혜의 하나님은 믿음을 나에게 주입시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나님의 부름은 나에게 항거할 수 없는 은혜로 주어졌다
나는 죄책을 지닌 인간 무리에 속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다. 그러한 나에게 하나님은 불가항력적 은혜로 나에게 다가오셨다. 예수를 믿게 하셨다. 성령 하나님은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나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나를 구원과 영생의 문에 들어서게 하였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는 인간의 선택과 자유의지가 작동할 공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고백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선물이다.” 성경은 말한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미리 정하고 구원을 계획하셨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이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이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이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의 결과이다. 열일곱 나이에 구원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에게도 하나님은 거부할 수 없는 은혜, 저항할 수 없는 구원의 시간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나는 예수를 구원자 곧 그리스도로 믿는다. 하나님의 항거할 수 없는 은혜 덕분이다. 그 믿음과 더불어 구원의 반열에 들어섰다. 하나님은 신실하고 견고하게 나를 붙들고 계신다. 성령의 견인 활동이 나로 하여금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믿음을 견고하에 유지하게 하심을 믿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은 우리의 결단과 책임을 요구한다. 나는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순종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는 자는 그 분의 은혜의 부름에 침묵하지 않는다. 믿음과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 자신의 책임과 결단으로 응답한다.
믿음의 결단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에서 “나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로 바뀌게 한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불러주심에 “이제는 감사합니다”고 고백한다. 나는 그저 받은 불가항력적 은혜에 “이제는 그 은혜를 제가 선포합니다” 하는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싶다.
죄인이었고 이방이었던 나를 예수님에게 접붙임으로 연합(Union)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은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일환이다. 접붙임이 잘 이루어진 가지가 열매를 잘 맺는다. 이처럼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는 것도 불가항력적 그 은혜의 일환이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예수님을 더 많이 알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을 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향한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부름의 일환이다.
나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이다. 나에게 구원과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성령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열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나에게 다가온 구원과 사랑 그리고 그 분이 주신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처음 전도자를 만났을 때 “지금은 아닙니다” 하고 거부했지만 그것조차 나를 향한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은혜의 타이밍을 향한 과정이었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고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여고동창생 유정이, 오늘은 네가 새삼 보고 싶다.
하복연 /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1학년
[편집자] 이 글은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이 2022년 가을학기에 개설한 구원론(최덕성 교수)의 글쓰기 과제로 제출한 학술 에세이이다. 논지는 "처음 전도자를 만났을 때 '지금은 아닙니다' 하고 거부하였지만 그것조차 나를 향한 하나님의 항거할 수 없는 은혜의 타이밍을 향한 과정이었다"이다. 주장(논지)과 논거(주장의 근거)가 일치하는 글이다. 수강한 구원론의 요점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논의를 치밀하게 진행한다. 학술 에세이 쓰기의 모범적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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