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고신 제72회 총회(2022), 포도원교회
예장 고신, '그리스도의 능동 순종' 천명
예장 고신 제71회에 상정된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 순종에 대한 총회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요청의 건”에 대하여 총회 신학위원회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그리고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회는 1년간 연구한 끝에 제72회 총회(2022)에 보고를 했다. 총회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회심준비론에 대한 총회의 신학적 입장’을 1년 정도 추가 연구하기로 했다.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총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풍성하게 이해하게 하고, 칭의에 대한 보다 강력한 확신을 준다는 점에서 유익한 교리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 아래의 제4항은 더 치밀한 논의의 주제로 남아 있다. 총회가 받아들인 이 주제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연구 보고서는 아래와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신학적 입장 (2022)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1.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구원을 얻는데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대속하는 구원의 사역이며 그리스도의 피는 구약의 희생제물의 피보다 훨씬 더 탁월한 속량의 가치를 지닌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가 하나님의 뜻과 의를 이루고 순종의 삶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마 3:15, 20:28, 26:42, 요 4:34, 5:30, 6:38, 롬 5:19, 갈 4: 4-5, 빌 2:7-8 등).
2.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주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으로, 그리고 영원하신 성령으로 하나님께 단번에 바친 자기 자신의 희생제사로 성부 하나님의 공의를 충분하게 만족시키셨다”(제8장 5항).
“이는 그들에게 의를 주입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롭게 간주하시고 용납하심으로써 이루어지며, 그들 안에서 이루어졌거나 그들이 행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다. 또한 믿음 자체나 믿는 행위 혹은 다른 어떤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전가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하심으로써 이루어지며, 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한다. 이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제11장 1항).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순종하심과 죽으심으로 그와 같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모든 자들의 빚을 모두 갚아 주셨고, 그들을 대신하여 성부 하나님의 공 의를 합당하고, 실재적이고, 완전하게 만족시키셨다”(제11장 3)..
제8장은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순종과 희생제사(죽음)가 우리의 구원에 왜 필수적인지 설명한다. 죄인인 인간이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가 반드시 만족되어야 하는데 그 유일한 방식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제사이다. 그리스도께 성취하신 이 사역이 믿음으로 죄인들에게 값없이 전가됨으로 죄인을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속량과 이신칭의의 교리는 모두 복음의 정수이다.
3.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빌립보서에 따르면 십자가는 순종의 최고 정점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십자가도 순종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4. 비록 그리스도의 순종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순종이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희생제사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능동적 순종이라고 하고 후자를 수동적인 순종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모든 순종은 자발적 순종이며 수동적 순종을 마지못한 순종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십자가의 구속 사역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을 오직 수동적 순종인 십자가에만 적용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5.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한 성경과 고백서의 가르침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친 바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로 확정된 그의 의(그의 능동적 순종과 그의 피동적 순종으로 성립된 의로움)로만 성립된다.” “그의 고난은 벌을 담당하는 것과 동시에 율법의 완성이며, 그의 행위도 율법의 완성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것의 벌을 담당함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의 언약을 신실히 지키심으로 얻으신 의를 신실히 지키심으로 얻으신 의를 그가 대표하는 그의 언약 백성에게 다 돌려주십니다. 여기에는 그의 ‘적극적 순종’으로 얻으신 의와, 그의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으로 얻으신 의, 그리고 부활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의의 인정,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6. 능동적/수동적 순종의 구분은 행위언약을 통해서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 은 아담 및 그의 후손과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제7장 2항). 하지만 우리의 조상 아담은 순종하는 데 실패하였고 그 결과 율법의 심판과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죄인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율법의 형벌을 다 받아야 하고, 또한 율법이 요구하는 의무를 다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다 성취하셨다.
6.1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이며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 3:18).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 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범한 죄악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으신 일을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라 고 한다. 이 순종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될 때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
6.2. 만약 그리스도의 순종이 순전히 수동적인 측면만 있다면 우리는 단순히 아담의 상태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 상태에서 구원받은 신자가 죄를 짓는다면 다시 율법의 형벌을 또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무를 완전히 순 종하였다. 예수님은 율법을 단지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마 5:17). 그는 나셔서 죽으실 때까지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우리에게 의가 되셨다(고전 1:30). 이 완전한 순종이 믿음으로 우리가 전가가 될 때 우리는 완전한 의를 소유하게 된다. 이 순종을 수동적 순종과 구분하기 위해서 능동적 순종이라고 한다.
7.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량 사역을 더 정확 하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비록 두 용어 자체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개념 자체는 성경에 분명히 있으며 무엇보다 개혁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행위언약 개념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수동적 순종의 구분을 다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구분에 모든 이들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고 극소수 개혁파 신학자들은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고 지속적으로 여러 방식으로 도전을 받고 있다.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반대하는 대표적인 몇 가지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능동적/수동적 순종의 구분은 스콜라주의가 만들어 낸 사변적인 개념이다.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라는 말은 주의해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스콜라주의란 중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에도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이 방법은 단어의 개념을 분명히 하여 혼동을 방지하고 올바른 신학을 변증하는데 매우 유용한 방법이었다. 물론 로마교회 신학자들도 이 방법을 사용하여 거짓된 교리를 옹호하였으나 그것은 방법 자체가 아니라 방법의 사용이 문제이다.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은 탁월한 인문주의(humanism) 교육을 받아서 성경 원어에 매우 해박하였고 성경 주석에 매우 탁월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활에 있어서도 매우 경건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스콜라주의에 빠져서 사변적인 신학을 추구하였다는 것은 (일부 그런 신학자가 있을 수 있으나)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이다. 수동적 순종은 사변적 신학 작업의 결과가 아니라 성경에 대한 깊은 연구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2) 능동적 순종은 회중파 신학의 산물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17세기 중엽 잉글랜드의 노회파 신학자들과 회중파 신학자들은 교회정치에 대해서 극심하게 대립하였지만 그 외의 다른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놀라운 보편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능동적/수동적 순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회중파 지도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약간 수정한 사보이 선언(1658년)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수종이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이 회중파 신학자들만 이 구분을 사용하였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10년 뒤에 작성된 사보이 선언이 이 주제에 대해서 보다 명확하게 정리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3) 능동적 순종을 반율법주의에 빠지게 만들 위험이 있다.
이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이 단순히 율법의 형벌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도 완전히 순종하셨다는 주장에 따르면 중생한 신자들은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반율법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주장을 반대로 적용하면, 예수님의 수동적 순종만 인정하면 우리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모든 율법의 형벌을 짊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 대신 모든 율법의 의무를 완전히 순종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전가 받은 그리스도의 의가 완전하며 불변한다는 확신을 준다. 이와 같은 확신은 신자들로 하여금 율법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순종하게 한다. 신자들은 더 이상 영생을 얻기 위해 억지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확보된 영생을 확신하고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기 위해서 순종하게 된다. 능동적 순종이 반율법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 반율법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이며, 이 잘못된 적용의 책임을 능동 적 순종에 돌려서는 안 된다.
4) 칼빈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주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만 의존하고 있다. 칼빈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강요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엄청난 주석도 참고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그의 설교문이나 신학논문도 살펴야 한다. 칼빈에게서 능동적/수동적 순종의 용어는 나타나지 않으나 그 개념은 나타난다. 칼빈과 칼빈 이후의 개혁파 신학자들의 차이를 너무 강조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칼빈 이후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칼빈의 개념을 보다 발전시켜서 보다 정교하게 개혁신학을 변증하였는데 능동적/수동적 순종의 구분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6세기 칼빈의 시대보다 17세기 중엽에는 이 전에 보지 못했던 여러 교묘한 이단들이 많이 생겼고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들에 대해서 신학적인 응전을 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결론
능동적 순종이란 용어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고, 개념에 있어서도 수동적 수동에 비해서 비교적 적게 성경에 나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같은 논리라면 능동적 순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행위언약도 마찬가지로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능동적 순종을 거부하는 이들은 대부분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인 행위언약의 개념도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을 제외하면 구원의 풍성함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서 나신 이유를(갈 4:5) 단지 수동적 순종을 위해서라고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만약 그 목적이 오직 율법에 대한 수동적 순종이었다면 죄인인 인간이 구속받아 의인은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명분을 얻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아들의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선포하였다(삼상 15장 22절). 이것은 제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고 순종과 제사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제사를 분리하기 쉽다.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훨씬 더 풍성하게 이해하게 하고, 칭의에 대한 보다 강력한 확신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교리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정리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문맥에서 보았을 때 능동적 순종은 신앙고백에 암시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신실한 개혁파 신학자들이 가르쳤으며 총회의 신학교에서도 가르친 교훈이기 때문에 계속 소중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