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C-WCC 합병, 레슬리 뉴비긴의 실책인가?
국제선교협의회(IMC)는 1961년에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합병했다.합병 후 WCC의 선교전도분과위원회로 존속하고 있다. 이 합병 과정에서 IMC의 총무 레슬리 뉴비긴이 큰 역할을 했다. 이 합병은 오로지 레슬리 뉴비긴의 정책적 실책인가?
레슬리 뉴비긴은 이 합병을 통해 세계복음화가 더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랐다. WCC가 좀 더 선교적이 되기를 바맀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전통적인 선교는 죽어갔다. WCC의 선교 신학은 인간화와 세속화를 흘러갔으며, 급기야는 종교다원주의적 개념의 선교가 WCC의 중심 선교 신학 또는 사상이 된 것 같다.
레슬리 뉴비긴 자신도 이러한 흐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IMC와 WCC의 합병 그리고 WCC 선교 신학의 변질은 레슬리 뉴비긴의 잘못한 결과인가?
뉴기빈의 책임도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IMC의 사무총장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IMC와 WCC의 합병과 그 이후 생겨난 WCC 신학의 변질에는 또 다른 배경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변질은 레슬리 뉴비긴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 선교 운동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시대적 변화의 흐름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IMC와 WCC의 합병 문제는 당시 서구 선교사들과 선교 단체에 의해 탄생한 ‘신생 교회들’과 이 교회들을 탄생시킨 서구 선교사와 선교 단체 사이의 불편한 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로 있던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해방을 하면서 식민 정부와 함께 이들의 앞잡이로 생각될 수도 있었던 선교사와 선교 단체에 대한 거부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피선교지 신자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기독교 사역자로서 사역은 하지만, 선교사와 선교 단체에 대해서는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서구의 식민 정부의 탓만이 아니다. 서구 선교사와 선교지 사역자들과 선교지 교회 사이의 불편한 관계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에 대한 인도에서의 예를 레슬리 뉴비긴의 자서전을 통해서 조금 엿볼 수 있다. 뉴비긴은 서구 선교사들과 인도 사역자들 간의 아주 불편했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 속에서 어떻게 복음의 진리됨을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러한 그의 경험과 고민이 인도의 연합교회를 탄생시키는 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러한 관계의 문제가 단지 인도에만 있었을까? 그래서 WCC 모임에서 신생 교회들은 그들의 선교사와 선교 단체와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이러한 갈등 문제의 해결책으로 IMC를 WCC에 병합시키고, IMC는 이제 WCC의 선교전도위원회(CWME)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일어난 신학적 발전을 충분히 평가하려면 WCC 안에서 전개된 사건들을 다시 주목해야 한다. 1950년대 중후반 경에 이르자 소위 ‘신생교회들’은 그들의 탄생을 도와준 다양한 선교회 구조를 통해 세계교회운동에 연결되는 것에 대해서 점차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신생교회들 가운데 많은 교회가 새롭게 형성된 독립국가와 더불어 민족 교회로 조직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IMC에 쏟아졌고, 그 결과 1958년 가나 대회 때 IMC와 WCC의 합병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뚜렷이 생겼다.
두 기구의 합병은 1961년 WCC 뉴델리 대회 때 IMC를 해체하고 WCC의 ‘세계 선교와 전도분과위원회’(CWME)로 재조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겔더 & 샤일리, 선교적 교회론 동향과 발전, 73)
두 기구가 합병되는 과정에서, 레슬리 뉴비긴이 IMC의 사무총장으로 있었고, 새로 조직된 CWME의 첫 번째 위원장이었다(74).
그런데 이 합병 이후 IMC에 속해 있던 복음주의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그들의 신학과 조직의 본거지를 잃었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WCC를 떠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로잔세계복음화위원회’(LCWE)가 탄생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이로 인해 CWME에서는 복음주의적 목소리가 사라지게 되었다(75).
이러한 변화와 함께 WCC 안에는 신학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 당시 WCC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신학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사람은 레슬리 뉴비긴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선교학자인 호켄다이크였다.
호켄다이크는 칼 하르텐슈타인의 빌링엔 대회에 관한 후속 보고서에 기록된 ‘미시오 데이’(Missio Dei)라는 개념을 자기 것으로 가져온다. 그러나 호켄다이크가 정의한 ‘하나님의 선교’는 칼 하르텐슈타인이 주장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칼 하르텐슈타인은, 그의 보고서에서, “‘미시오 데이’ 안에서 모든 구속 받은 피조세계에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아들의 보내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70). 그는 ‘미시오 데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관련된 주장이었다. ‘
그러나 호켄다이크는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봄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더 넓은 활동,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해하는 일반화된 방식으로 여겨야 한다(71-72)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초점을 ‘샬롬’을 구축하는 쪽으로 옮기는 데 있었다. 그가 말하는 ‘샬롬’은 “기독교 사역의 중심 사상이 되어야만 하며,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 전체의 구속을 워하신다”(72)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선교가 실행되는 일차적인 장소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교회는 선교의 중심부에서 주변으로 밀려났다.
이 변화는 ‘하나님-교회-세계’에서 ‘하나님-세계-교회’로 순서가 바뀐 등식으로 표현되곤 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세상이 교회를 위한 의제를 결정한다는 생각이 생겨났고, 결국 선교는 인간화와 세속화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처럼 WCC 선교 신학의 세속화와 인간화의 길은 레슬리 뉴비긴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 또는 결정에 의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상당히 복잡한 시대적 변화와 그 변화에 대한 대안 모색으로부터 생겨났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흔히 말하는 ‘신생교회’ 지도자들의 서구 선교사와 선교 단체에 대한 불만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식민지 상황이 아닌 변화된 상황 속에서 선교를 접근하는 노력에서 잘못된 신학이 초래한 열매를 현재 WCC가 따먹고 있다.
현재 복음주의 선교학자들이 WCC 선교학자들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점을 찾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결국 아주 중요한 신학적 혹은 신앙고백적 지점에서 일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적 신앙-신학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중심성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선교 곧 그리스도가 빠진 선교와 모든 종류의 영을 포함한 ‘성령’의 역사를 부르짖으며, 종교다원주의적 신학을 계속 고집한다면, 다시 하나 되는 연합과 일치의 역사는 요원할 것이다.
김주만/ 주 태국선교사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