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마르소, 파리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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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는 "하나님의 구원에 제한이 없다"고 한다.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있다"고 한다. WCC의 여러 개 문서들이 이 진술을 담고 있다. 제10차 총회(부산, 2013)가 일방적으로 선포한 "선교-전도선언서 ‘함께 생명을 향하여: 지형변화 속의 선교와 전도(2013)’도 이 진술을 담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핵심은 예수 밖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고 하는 사상이다.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한다. WCC의 종교다원주의를 이해하려면 급진적인 신학자들이 말하는 종교다원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아래의 글은 필자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2004)>에서 옮긴 것이다, <신학충돌(2012)>의 내용을 일부 덧붙였다.
서론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는 현대판 자유주의 신학의 한 사상 흐름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밖에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가 있고,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을 기독교에 제한하지 않아야 하며,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고 하는 신학사상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진보게 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 세계교회협의회(WCC) 신학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탈구조주의, 진리 상대주의, 혼합주의, 민족문화, 종교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성향과 맞물려 폭넓게 파급되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 안에도 강력하게 침투하고 있다. WCC 제10차 부산총회를 계기로 종교다원주의가 한국교회에 물밀 듯 몰려오고 있다.
1. 핵심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이 똑같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론을 펼친다.
첫째, 역사적인 종교들은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구원의 길’이다. 각 종교인들은 각각 다른 길을 거쳐 구원을 받는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기중심의 존재에서 실재 중심 또는 생명 중심의 존재로 삶의 지향성이 변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기심과 자기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전체 생명과 더 높은 진리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두려움을 극복하여 삶과 죽음, 차안과 피안을 하나로 꿰뚫어본다. 사랑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며, 하나님의 나라(神國), 불국(佛國), 대동 세계 실현에 힘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가 다양한 문화와 종교 전통을 가진 인류를 위한 유일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종교와 모든 문화 속에 차별 없이 관대하게 역사하고 있으므로 특정 종교가 인류의 하나 됨의 구심점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없다.
셋째, 각 종교의 배후에는 궁극적 신적 실재(Ultimate Divine Reality)가 있다. 모든 종교는 같은 신적 실재에 바탕을 두고 있고, 동등한 가치의 종교 경험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도교, 힌두교 등은 인간이 각각의 문화 조건하에서 신적 실재를 그린 서로 다른 그림이다. 진정한 진리는 각 종교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새롭게 발견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종교들 안에 자신을 계시한다. 각 종교의 신앙인들은 자기들의 신앙전통을 따라 신과 관계하고 구원을 받는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다 구원의 길이다. 선교는 더 이상 비기독교 신자를 기독교로 회심시키려 하지 않아야 한다. 신실한 ‘이웃 종교인(타종교인)’을 교회 안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은 잘못이다. 기독교만이 구원의 종교라고 보는 서구 제국주의 발상과 그러한 종류의 종교 이데올로기를 과감히 버리고 모든 종교가 ‘보편적 구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종교 간의 대화로 서로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와 사회정의 실현에 이바지해야 한다.
넷째, 각 종교는 자기의 고유한 것을 유지하면서 타종교를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는 기독교답고, 불교는 불교답고, 이슬람교는 이슬람교답게 각각의 고유한 색깔과 독특한 향기를 발해야 한다. 각자 자기가 귀의(歸依)하는 종교에 헌신하면서 종교 간의 대화와 협동을 모색하여 세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다섯째, 다른 종교를 자기가 믿는 종교의 잣대로 평가는 것은 잘못이다. 특정 종교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불멸의 진리 체계를 독점할 수 없다. 수백만, 수천만, 수억 명의 경건한 신도를 가진 종교를 어찌 참 종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진리 담론(談論)은 역사, 문화,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 왔으므로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섯째, 인간이 궁극의 신적 실재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실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제한된 이성으로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종교의 가치는 경험에 있고, 그 경험은 다양할 수 있다. 인간 역사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계시란 항상 현재적이다. 성경에 담겨 있는 계시는 진리를 보여주기에 불충분하다. 기독교의 계시는 다른 종교가 가진 계시와 동동한 차원에 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기독교와 타종교와 관계에 대한 대응 유형을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는 여부에 따라 ‘배타주의’(Exclusivism), ‘포용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로 구분한다.
‘배타주의’는 역사적 인물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으며, 그분 외에는 세상의 구원자가 없다고 보는 견해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포용주의’는 기독교의 정당성을 기정사실로 보면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각을 뜻한다. 모든 종교가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부분 혹은 과정의 진리를 갖고 있다고 보면서 타종교 안에 있는 모든 진리는 본래 기독교의 것이라고 본다. 다양한 고등종교는 하나의 궁극의 신적 실재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라고 본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와 더불어 서로 배우며 이해하고 상호 보충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고 한다.
‘다원주의’는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종교를 동등한 선상에 두고서 상호 인정하고 협조하고 대화하는 태도이다.
진정한 진리는 배타적이다. 참과 거짓은 배타적일 때 드러난다. 이런 면에서 ‘배타주의’는 자랑스러운 명칭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일반 정서는 이 용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종교적 관용(tolerance)이 우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포용주의나 다원주의가 겸손하고 긍정적이며 도량이 넓은 것으로 인식되는 반면, 배타주의는 절대 진리에 연연하거나 한 가지 진리에만 몰두하는 광신성(being fanatical)의 이미지를 갖는다.
따라서, ‘배타주의’라는 단어보다는 ‘그리스도 유일주의’라는 용어가 바람직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며, 구원의 유일의 길이라고 믿고 고백하며 구원은 오직 그의 대속사역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유서 깊은 기독교 신앙을 일컫는다.
2. 김경재의 등정로(登頂路) 이론
고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어느 학생이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어느 날 급우들과 함께 교정에 있는 이 학교의 조직신학 교수 집을 방문했다. 그 교수는 학생에게 보수계 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사람이 진보계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 수업을 하는 까닭을 물었다. 그 학생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답했다. 그 교수는 “그렇다면 예수 믿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교수는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자네 선조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물었다. 학생이 머뭇거리자 그 교수는 벌컥 화를 내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 후레자식아, 조상들은 지옥에 두고 네 혼자 천당에 가겠다는 말이냐?” 이 이야기는 그 학생이 나에게 직접 들려주었다.
김경재 박사(1942-)는 종교다원주의자이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35년 동안 가르치고 은퇴했다. 김경재는 「이름 없는 하느님」(2002)에서, 배타적이며 이기적인 기독교가 우리 조상이 기독교를 모르고 예수 이름을 듣지 못했다고 하여 모두 지옥에 갔다고 가르친다고 질타한다. 그러한 가르침이 조상을 구원받지 못한 자리로 내몰고 만다고 혹평한다. 종교다원론을 적대시하거나 비진리로 규정하는 신학이야말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을 아주 편협하고 공격적이고 무자비하고 인정사정 없는 신으로 소개하고 만다고 한다. 한국의 신학자와 목회자 상당수가 종교다원론을 성도들에게 가르칠 용기가 없는 탓으로, 한국교회 안에 무지와 혼란이 거듭되고 있다고 한다.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경영자 최고위 과정(2004. 5. 12)에서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이 알려졌을 때, 김경재는 “조용기 목사 같은 지도자가 자신의 생각을 뒤늦게나마 솔직하게 표현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 한국의 종교 간의 협동에 큰 디딤돌을 마련한 것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큰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다”고 말했다.
김경재는 기독교인들이 지구라는 행성과 수천억 대은하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을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고 자신들만 사랑하는 옹졸한 신으로 제약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모든 종교를 합한 것보다 더 크고 높고 영원하며 신비한 분이므로,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그를 독점하고 있다고 하는 망상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한다. 기독교가 일신론적(一神論的) 유일신관을 버리고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김경재에 따르면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강렬하고도 배타적 유일신 신앙”을 수용하는 “지독한 종교적 이기심”에 젖어 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역사적 종교들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형성되고 고백된 ‘구원의 길’이다. 불교,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어떤 종교도 자기 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종교 간의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기독교의 배타성이다. 이 배타성은 기독교 목회자들과 신도들의 편협성, 보수성, 근본주의 신학, 성경무오설, 성경권위의 절대화 등으로 나타난다.
김경재는 타종교에 대한 열린 마음과 존경심을 갖되,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깊이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자세라고 본다. 유일신 신앙을 신이 한 분이라는 숫자에 사로잡힌 일신론적 신화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든 역사적인 것들과 유한한 것들에서 드러나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진리 자체를 증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는 존재이다. 신의 이름은 인간이 자신들의 살아온 역사, 문화, 풍토,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적실한 언어로 붙인 것이다. 하나님, 알라, 비로자나불, 브라만, 한울님, 로고스, 도, 태극 등으로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김경재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일신 사상이 강한 셈족계 종교(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에서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가를 검토한다. 한국의 전통 속에 등장한 불교, 유교, 동학, 원불교 등의 하느님 신앙과 그 존재 의의가 무엇인가를 논한다. 노자가 갈파한 ‘절대적 진리 자체’나 ‘유일하신 하느님’ 또는 ‘참 도(道)’는 인간 역사 속에서 형성된 문자나 발음에 매여 있는 제한된 하느님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 나타난 다양한 유일신의 이름들은 절대 포괄자이다. 이 이름들은 궁극의 신적 실재가 구체적인 인간 공동체들의 삶의 자리에서 계시된 형태의 해석학적 반응이다. 「도덕경」의 “명가명 비상명”(名可名非常名: 이름 할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이라는 말은 ‘유일하신 참 신은 이름 없는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김경재에 따르면 유일신에서 ‘일’(一)이라는 단어는 ‘하나’라는 숫자 개념이 아니라 무한 궁극의 실재, 우주적 초월성을 나타내는 원(圓) 또는 존재의 시원(始原), 순환, 지고선(至高善)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야훼(여호와)를 포함한 어느 한 신이 다른 신들보다 우월하거나 지존의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유대교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유태 민족의 신이며, 한국 민족의 하느님과 내재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김경재는 ‘궁극의 신적 실재’라는 철학개념을 바탕으로 각 종교의 신들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을 종교철학의 실험관 속에서 풀이한다. 성경이 말하는 신은 존재의 시원(始源)이나 지고의 선, 무한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야훼 하나님은 무속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신이 아니다. 김경재의 ‘이름 없는 하느님’은 관념에 지나지 않는, 속성 없는 신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여호와 신은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이고, 인격적인 동시에 역사적이며, 지존의 존재인 동시에 비천한 인간의 형태로 역사 안에 찾아왔다. 김경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종교철학의 시험관 속에서 완전히 분석되는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김경재는 한국의 보수계 기독교인들이 외래 신, 수입된 신, 배타적 종파의 신을 믿고 있다고 질타한다. 예수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했는데, 그가 자신만을 통한 구원 진리를 선포한 것은 매우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주장이라고 한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한 열린 마음이나 포용적 태도”를 가지지 않는 것은 “성경이 주장하는 강렬한 배타적 유일신 신앙의 색깔 때문이다”고 한다.
김경재는 다양한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본다. 마치 산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등정(登頂)하듯이, 각각의 종교를 거쳐 모든 인간은 동일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길이 다를 뿐이지 궁극의 신적 실재에 이르는 것은 다 마찬가지라고 한다. 등정로마다 산의 풍광이 다르고 산세나 기후 변화도 다르지만 일단 정상에 오르면 호연지기가 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종교를 통하든지 절대자를 만날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김경재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1970년부터 현재까지 장로교 목회자들을 양성해 왔다. 유서 깊은 기독교가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거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으로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른 구원의 길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한다.
김경재의 종교다원주의와 종교다원론은 서양세계의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을 모자이크한 것이다.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론,’ ‘신은 이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존 힉의 ‘신중심주의,’ 파니카의 ‘보편적 그리스도론,’ 폴 니터의 ‘신중심주의 그리스도론’ 등을 엮은 것이다. 현대신학의 신론과 기독론 그리고 자유주의 기독교가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가를 알아 볼 겸,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이론을 살펴보자.
3.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론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교의 로마가톨릭 신학부에서 가르친 당대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 꼽힌 인물이다. 예수회 회원이었고, WCC와 마찬가지로 로마가톨릭교회의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라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익명의 그리스도론(Anonymous Christology)’을 주창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지만,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라고 본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총 아래 있다는 관점에서 기독교의 구원과 일반종교의 보편 개념의 구원을 연계시킨다. 타종교들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이 자유롭게 주시는 선물인 초자연적 은총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종교들 안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라너에 따르면 인류는 ‘익명의 그리스도’를 거쳐 저 나름대로 구원을 받는다. 타종교인들은 ‘익명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다. 하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능가하는 크고 위대한 분이며, 그의 구원은 기독교인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구원의 보편적 가능성을 창조행위 속에 존재론적으로 부여해 놓았다.
라너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타종교인들에게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딱지를 함부로 붙인다. 그가 ‘익명의 그리스도’ 등의 표현을 쓰면서 의도한 것은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을 연결시키고,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일이다. ‘하나님은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본다. 라너는 초자연적으로 고양되어 있는 인류의 실존론적 처지를 밝혀 종파를 초월한 인간 본래의 고귀함을 드러내고 모든 인간이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각 종교의 독특성을 무시하지 말고 기독교의 폭을 넓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자는 것이었다.
라너는 그리스도를 거쳐 주어지는 은혜와 특별 은총을 하나님의 보편은총 안에 용해시킨다.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익명의 우주적 그리스도로 변형시킨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타종교인들에게도 주어지는 보편은총, 일반은총으로 격하시킨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자 한스 큉(Hans Kung)은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론’과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을 ‘신학적 기만’이라고 혹평했다. 기독교의 역사성은 전부 어디로 갔느냐고 질타했다.
4. 라이문도 파니카의 보편적 그리스도론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1918-2010)는 스페인 출신 로마가톨릭교회 신자 어머니와 인도의 힌두교 신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마가톨릭교회 사제이며, 세계교회협의회를 위해 활약하고 있다. WCC의 탈기독교적 신학 방향 설정에 이바지했다. 힌두교에서 로마가톨릭교회로 다시 힌두교로 돌아갔다.
파니카는 두 종교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종교 간의 대화를 주창한다. 초기 작품인 「힌두교의 익명의 그리스도」(1964)에서는 계시의 완성이 역사적 예수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17년 뒤에 같은 제목으로 출간한 책에서는 그리스도의 절대 우월성을 대폭 수정하여 ‘보편적 그리스도론’을 천명한다. 그리스도가 기독교와 관계없이 힌두교 안에 이미 현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파니카에 따르면 각 종교가 서로 다른 교리와 실천과 강조점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종교는 인간 안에 내재하는 ‘로고스’를 반영한다. 인간은 누구나 ‘우주의 이법,’ ‘신적 빛,’ ‘이성의 빛’인 로고스의 종자를 가지고 있다. 이 로고스는 특정 지역이나 특정 인물에 제한되지 않으며, 구체적인 역사 사건과 인물 속에서 그 순수성과 투명성을 달리하면서 드러난다. 다양한 종교들은 로고스의 현존이다. 예수·석가·공자는 로고스의 구체적인 성육화(成肉化)의 결과이다.
파니카는 ‘보편적 그리스도’와 ‘특수한 예수’를 나눈다. 그리스도가 예수 안에서만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종교의 구원하는 인물에서도 그리스도성이 드러난다. 그리스도는 실재, 곧 신, 인간, 우주에 대한 살아있는 상징이다. 시원적(始源的)인 신인(神人) 양성의 실재이다. 신, 인간, 세계 사이의 역동적인 통일의 상징이며, 그 본질이다. 보편적 로고스는 예수 안에서 성육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발생이 아니고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지만 예수만이 그리스도인 것은 아니다. ‘보편적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예수 이외에도 힌두교의 라마(Rama), 크리쉬나(Krishna), 불교의 석가(Buddha), 이슬람교의 마호메드(Muhammad) 등 역사적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타종교를 적대시하거나 흡수하려는 배타주의와 포용주의 종교는 용납될 수 없다고 한다.
파니카는 이러한 포용주의 태도(기독교의 정당성을 기정사실로 보면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각)가 기독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여 이를 거부한다. 그는 각 종교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인이 나사렛 예수를 거쳐 실현된 기독교 신앙을 성실하게 가질 뿐 아니라, 타종교인들과 대화하여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면 불행과 갈등을 제거할 수 있다고 본다. 사랑의 하나님을 예수가 독점할 수는 없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를 이해하고 함께 인간 구원의 길로 달려가야 한다고 말한다.
파니카는 무지개를 가지고 이를 설명한다. “인류가 갖고 있는 다양한 종교 전통은 신적 실재라는 순백의 광선이 인간 경험이라는 프리즘에 투과되어 나타난 무수한 색깔과 같다. 그 광선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통, 교리, 종교를 통해 굴절된다.” 일곱 가지 다양한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룬다. 백색 광선은 ‘궁극적 실재’이고, 일곱 가지 색깔을 띠고 나타나는 무지개의 색상은 구체적인 역사적 종교들이다. 세계의 각 종교는 한 개의 ‘신적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문화, 역사의 반응이다. 역사적 종교는 그것이 불교든, 이슬람교든, 신도교든, 기독교든 간에 빛이 스펙트럼을 통과하면서 발생시킨 파장들에 지나지 않는다. 각 종교의 고유소(固有素)는 타종교의 그것들과 더불어 신적 실재를 더욱 완전에 가깝게 드러낸다.
파니카는 특정 종교의 유형적 특성을 타종교를 판단하는 규범 또는 잣대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타종교에는 ‘우리가’ 믿는 구원의 내용이 없으므로 참 종교로 인정할 수 없다든지, 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 그 까닭은 구원에 대한 실질적 이해와 체험이 개별 종교마다 나름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무지개 색상의 하나인 빨강색이 보라색에게 너는 색깔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무궁화가 들국화를 향하여 너는 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한다.
파니카의 이러한 유비(類比)는 구도 설정이 잘못되어 있다. 백만 송이의 가짜 장미는 한 송이의 진짜 장미와 질적으로 대조될 수 없다. 진짜 꽃과 진짜 꽃을, 가짜 꽃과 가짜 꽃을 견주어 보는 것은 구도를 잘못 설정한 것이다. 진짜 꽃과 가짜 꽃을 견주어야 비로소 그 차이가 드러난다. 진짜 장미는 인조장미를 향하여 “너는 꽃의 모양은 갖고 있지만 살아 있는 꽃이 아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특별계시를 바탕으로 둔 생명의 종교는 죄성을 가진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만들어낸 종교와 견줄 수 없는 차이를 갖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각 종교의 의례, 상징, 교리체계, 성직제도, 윤리 계명이 다양하고 서로 다르지만 추구하는 내면의 가치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규범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는 주관주의·상대주의의 결과이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받는 초자연적 신탁(神託, oracle)을 유태인의 종교경험에 지나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은 오늘날에 이르러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종교다원주의로 발전했다.
5. 존 힉의 신중심주의
존 힉(John Hick, 1922-2012)은 영국에서 태어난 종교철학자이자 신학자이다. 미국 클레아몬트신학교와 영국 버밍엄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존 힉은 ‘신중심주의 신학’이라는 종교다원론을 주창한다. 그는 칼 라너가 타종교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는 교조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탄한다. 그에 따르면 ‘배타주의’를 벗어나기는 했으나 ‘포용주의’를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본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예수 중심의 모델에서 신 중심 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어야 위대한 세계종교들이 하나의 신적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 환경에서 형성되고 서로 다른 자각들이 구체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세계사 속에 출현한 다양한 종교는 ‘하나의 신적 실재’를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르게 응답한 결과이다. 그것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식의 상이하고도 구체적인 표현이다.
힉의 관심은 모든 종교가 제각기 다른 신을 섬기는가, 아니면 같은 신을 섬기는가, 여호와·알라·라마 등은 별개의 신의 이름인가, 아니면 같은 존재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인가에 있다. 그는 모든 종교가 같은 신을 섬긴다고 주장한다. 여호와, 알라, 하늘님 등은 같은 신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종교적 우주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이 있으며, 예수는 신과의 만남을 위한 중재자이지만, 유일의 중재자는 아니라고 본다.
힉의 저서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God has Many Names, 1982)의 핵심은 이명동일신론(異名同一神論)이다. ‘우주적 실재’는 한 분이지만 그 분은 문화마다 서로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다. 다른 언어 구조가 다양한 하나님의 이름을 만들어 냈다. 헬라인은 하나님을 ‘로고스’라고 하고, 유태인은 ‘야훼’(여호와), ‘엘로힘’이라고 한다. 고대 인도인은 ‘아트만’ 또는 ‘달마’ 또는 ‘비로자나불’이라고 부른다. 중국인은 도(道), 천리(天理), 천명(天命), 아랍인은 ‘알라,’ 한국인은 ‘하늘님’이라고 부른다. 이름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신이다.
힉의 종교다원론은 우리가 다양하고 상이한 종교 속에 있는 신의 다양한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힉은 신의 본질적인 실체와 그 실체에 대한 경험을 구분한다. 인간은 신 자체를 경험할 수 없다. 인간의 경험은 실체에 대한 하나의 상(像)일뿐이다. 이 상은 세계의 여러 종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바 없다. 그는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했으며,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지만,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라고 한다.
종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종교를 저마다 세계사의 중심에 놓고 다른 종교는 자기 주위를 도는 행성(行星)처럼 생각해 왔다. 기독교는 자기를 절대화하고 자기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과오를 범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이나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할 근거는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예수 중심 모델’에서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앙 모델인 ‘신 중심 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한다.
역사 속에 출현한 다양한 종교들은 마치 태양 주위를 도는 아홉 개의 행성과 같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 인간이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특수한 전통과 종교인식이 낳은 ‘우주적 실재’에 대한 반응이다. 인간의 사유(思惟)는 역사적·문화적 상대성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해석학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진리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작은 붓 대롱으로 본 하늘이 하늘의 전부라고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한다.
힉은 그리스도 중심의 배타적인 패러다임에서 신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한다. 과거의 기독교 중심 또는 예수 중심의 모델에서 타종교와 대화하기에 적합한 모델, 곧 신앙의 보편 모델인 신중심 모델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한다.
힉은 ‘궁극의 신적 실재’가 과연 존재하며,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 힉의 사상은 칸트의 인식론에 바탕을 둔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의 ‘역사적 상대주의’를 반영한다. 역사 속에 출현한 모든 이념, 가치, 조직체계는 상대성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붓 대롱으로 본 하늘(진리) 또한 하늘인 것은 틀림없다. 붓 대롱이 하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그것을 거쳐 보는 하늘은 인간이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힉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영적 암매(暗昧)에 빠졌다. 사람은 하늘을 정확히 볼 수 있는 붓 대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여 특별계시라는 수단, 곧 인간이 하늘을 볼 수 있는 통로를 거쳐 진리를 보여주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삶과 사상과 입술을 거쳐 진리를 말씀했다. 특별계시는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붓 대롱이다. 인간은 이것을 거쳐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만 성령으로 거듭났는가 아닌가 하는 바가 관건이다.
6. 폴 니터의 신중심주의 그리스도론
종교다원주의자 폴 니터(Paul F. Knitter, 1939-)는 2007년부터 뉴욕 유니언신학교 명예교수이다. 28년 동안 미국 신시내티 주 사비에르대햑교에서 가르쳤으며 현재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니터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사비에르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사제직을 중단하도록 허락을 받았고, 불교 명상교사인 캐티 코넬과 1984년에 결혼했다.
니터는 종교다원주의자이며, 두 개의 종교를 믿고 있다. 불교와 기독교이다.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이던 변선환 교수의 종교사상은 주로 존 힉과 폴 니터의 사상을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터의 주저는 <다른 이름은 없다 >(No Other Name , 1985)이다. 니터는 WCC의 ‘바아르선언문’(1990) 작성자 중 한 명이다.
니터는 언젠가 한국을 방문하여 왜 한국교회가 통일교하고 싸우느냐고 비난하고, 궁극의 신적 실재(Ultimate Divine Reality)만을 강조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그는 기독교가 종교다원사회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타종교와 대화하자면 교회가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관에서 신 중심 세계관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한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따위의 발상을 버리고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한다고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니터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예수의 선교활동은 하나님 왕국의 실현에 목표가 있었다. ‘당신의 왕국이 이루어지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고 기도한 것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자신을 신적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신 중심, 왕국 중심의 메시지를 전했다. 예수가 ‘그리스도 중심의 모델’로 바뀐 것은 그가 죽은 뒤였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부각(浮刻)시킨 것은 초대교회였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말한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해석학적으로 풀이해야 한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인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진리가 확실하고 하나이며 불변하다고 믿는 고전주의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유태교의 종말론적이고 묵시문학적인 전승의 맥락이 지배하고 있었다. 또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므로 강력한 배타적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이러한 바탕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기독교인들의 ‘고백’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민주주의적인 다원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적 유일성을 고백하지 않더라도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살 수 있다. 고백 언어는 다른 구원자의 실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예수 외에도 하나님께 이르는 다양한 길들이 있다. 보편적인 하나님과 기독교의 하나님은 구분된다.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이 예수를 거쳐서만 계시된 것은 아니다.
니터는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의 관심을 예수의 삶을 본받는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옮겨야 하며, 참 인간이 되는 길과 참 평화를 실현하는 관점을 가지고 종교 간 대화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믿는 종교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종교해방신학’의 관점으로 인간의 복지와 평화 실천을 위한 종교 간의 대화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 대화는 자기 종교의 교리를 중심으로 할 것이 아니라, 대화 속에서 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해야 한다. 모든 종교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것, 곧 하나님의 뜻, 인간복지, 인류평화, 전쟁억제, 빈민구제 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활동의 모범을 보였다.
니터는 예수를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신 개념에 바탕을 둔 신 중심 신앙의 현현(顯現)으로 본다. 예수는 배타적이거나 규범적인 인물이 아니었다고 한다. 니터가 제시하는 보편적 그리스도, 곧 신 중심의 그리스도는 유서 깊은 기독교가 믿어온 그리스도가 아니다. 성육하시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어주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과 영원한 저주 상태에 처한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
7. 예수 세미나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전 유니온신학교 교수)는 문화와 종교의 긴밀한 상호관계를 깊이 생각하면서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이 여러 종교 안에 작용하므로 기독교인은 타종교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일본 종교계를 둘러보면서 어느 신도(神道) 사제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내가 만약 일본에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신도사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서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당신은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신도사제가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기독교나 신도교가 외형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같다고 본다.
윌프레드 스미스(Wilfred C. Smith, 1916-)는 경전, 제도. 의례, 교리 체계, 관습 등 과거로부터 전승되고 축적된 신앙전통과 ‘주의’로 명명된 종교의 물상화(物像化: Reification) 현상을 제거하고, 종교를 사랑·경외심·헌신과 같은 ‘신앙’(faith)이라는 관점으로 고찰하면 각 종교인들이 각각 자기의 종교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탠리 사마르타(Stanly Samartha)는 WCC 종교간의 대화국에 5년 이상 재직한 유급신학자였다. 웨슬리 아리라라자의 선임자였다. 타종교와 대화를 강조하면서 기독교인이 헌신을 바쳐야 할 대상은 기독교라는 문화유산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어 인간을 해방시키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이끌어 주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존 캅(John Cobb)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견지하면서도 타종교와 만나 상호 변혁할 것을 주장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변혁적 다원주의(Transformational Pluralism)’를 주창한다.
근년에 신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는 ‘예수세미나’는 미국의 신약신학자 125명으로 구성된 학회이다. 1985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조직되어 한 해에 두 차례 학술발표회를 가지며,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를 종교다원주의 운동에 적용한다.
‘예수 세미나’를 창설한 로버트 펑크(Robert Funk)는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로 고백된 과정은 최소한 네 단계를 거친 것으로 본다. 첫 번 째 단계는 예수가 다니엘서 7장이 말하는 아담의 아들, 곧 역사의 끝에 구름을 타고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인물로 묘사된 사건(Exaltation Christology)이다.
두 번 째 단계는 예수가 가까운 장래에 메시아로 재림할 것을 기대했던 희망이 허물어지자 초대 기독교인들이 그에 관한 기억을 회상한 단계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한 양자론(Adoptionist Christology)이 그 예이다. 세 번 째 단계는 1세기 사람들이 그의 출생 때 확정한 예수의 메시아론이다. 예수를 메시아, 그리스도로 추켜세우는 작업은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에서 서서히 진행되었다.
펑크에 따르면 예수의 메시아화 작업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열망’과 ‘관심’의 열매이다. (1) 예수의 메시아적 위치를 더욱 믿을 만한 것이 되도록 만들려는 ‘열망’과 (2) 그의 비범한 생애와 그의 고상한 죽음을 다른 유명한 인물들과 견주어 더욱 높이려는 ‘관심’이 예수를 메시아로 바꾸어 놓았다. (3) 요한복음의 서문과 빌립보서 2장은 예수께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으며 그의 본성이 하나님이라고 묘사한다. 이 단계에서 우상파괴자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성상(聖像)으로 탈바꿈되었다.
예수 세미나를 주도하는 학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이러한 확신을 토대로 종교 간의 대화를 권장한다. 펑크는 예수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스도’라는 교리는 예수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에게 덧붙은 것이며, 예수를 종교시장에 팔기 위한 초대 기독교인들의 마케팅 전략의 결과라고 한다. 예수 상품화의 최종단계는 니케아공의회에서 칼케돈공의회에 이르기까지 발전된 기독론이라고 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종말론적 예언자 예수상은 예수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 부활절 이후 몇 십 년이 지나서 만들어진 예수 추종자들의 창작물이며 상품이라고 한다.
펑크는 기독교 시대가 끝남과 더불어 유럽 세계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도 끝난 것으로 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서유럽 기독교의 관점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뜻했던 선교 시대가 끝났으므로 이제는 예수를 석가·노자·공자·간디 그 밖의 다른 종교 인물들과 나란히 두어야 한다고 한다.
예수 세미나의 존 도미닉 크로산은 “모든 종교는… 다른 종교인들이 이와 같은 유일무이성을 경험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인들은… 그 어느 종교도 거룩한 것, 신성한 것, 또는 신적인 것을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고 한다. 이러한 독점적 주장 속에 종족 살생의 충동이 배태되어 있다고 하면서 자신만이 홀로 절대 옳다고 하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발상이라고 본다.
성공회대학교 구약신학 교수 김은규 박사는 기독교가 우상숭배 금지규정을 가진 것에 대해 자성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근거는 구약의 ‘우상숭배 금지’ 규정이고, 이는 기독교인에게 거대한 절벽이며 넘을 수 없는 산이다’고 하면서 ‘종교간 대화를 위해서는 기독교가 먼저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은규는 우상숭배 금지 규정이 기원전 12세기 이스라엘이 가나안 지역에 정착할 때 주변의 강대국에 맞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만든 것이라고 본다. 가나안의 토착종교 바알교의 음행, 방종, 기복주의를 거부하고 메소포타미아 제국과 이집트 등에 둘러싸인 형국에서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위한 전략으로 우상숭배를 금한 것이라고 한다. 대한성공회 사제 김은규의 이러한 주장은 예수 세미나의 지도자들의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종교다원주의는 종교의 목적이 교리(Dogma)를 전하는 데 있지 않다고 하는 자유주의 신학 관점에서 출발한다. “교리는 신앙심을 북돋우기 위하여 동시대가 만들어 놓은 신학적 산물일 뿐이요, 신앙심을 두텁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교리 그 자체는 진리도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다”고 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신앙인들이 자기 종교의 교리만을 신봉한다고 지탄한다. “교리에 눈이 가려서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못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교리를 초월하는 말씀이다. 믿음과 소망까지도 초월하여 사랑의 단계에 이르는 길이다”고 말한다.
8. WCC의 종교다원주의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한다. 7개의 공식 문서들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이를 공식 서술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without setting limits to the saving grace of God)”. 창조주 하나님은 어느 때와 어느 장소에서도 자신을 증언하지 않은 적이 없다.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분명한 개인적 헌신에 제한하는 신학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구원의 신비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양떼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유용하다. 성령 하나님은 ‘살아 있는 신앙인들’(the people of living faith, 타종교인들)의 삶과 전통 안에서도 활동한다고 솔직하게 확언한다고 말한다.
이상의 선언들은 WCC가 종교 간의 대화 마당과 구원론 논의에서 줄기차게 표방한 이단 사설(邪說)이다. 기독교 밖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믿고 고백해야 할 당위성이 없다.
WCC의 홈페이지에 지금도 실려 있는 ‘바아르 선언문(1990)’은 종교다원주의를 분명하게 선언한다. WCC 제7차 총회(캔버라, 1991)가 보고를 받은 공식문서이다. WCC가 지향하는 만인보편주의 구원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에 대한 종교다원주의를 아래와 같이 분명하게 선언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게 된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서도 나타나지만, 이제 이 제한들은 초극(超克)되었다. (우리는) 구원이 보편적이며, 타종교 신앙인들 곧 살아 있는 신앙인들의 삶과 종교 전통 안에도 성령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다고 선언한다. 전 인류가 우주적 그리스도 곧 다양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부산총회가 선포한 WCC의 선교-전도 선언서 “함께 생명을 향하여: 지형변화 속의 선교와 전도”(2013)도 종교다원주의를 선언한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신앙인들’ 곧 이슬람, 불교, 힌두교, 도교 신봉자의 삶과 전통 안에서 활동하며, 그 하나님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우리보다 앞서 가서 계시며, 하나님은 피선교지에 우리보다 앞서 가서 계시며, 따라서 우리의 과업은 그곳에 이미 존재하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구도에서, WCC는 기독교와 역사적 종교들의 통합 또는 종교혼합주의를 지향한다. WCC 캔버라 총회(1991) 개회식에서 정현경 박사가 펼친 초혼제 푸닥거리 한마당은, WCC의 종교혼합주의를 예술적 퍼포먼스로 정교하게 표현한, 계획된 행사였다. 이 행사는 WCC의 종교혼합주의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WCC는 초혼제에 대한 해명 성명을 발표한 적이 없다. 초혼제는 WCC 신학 흐름과 방향성을 정확하게 제시하려고 치밀하게 계획하여 연출한 행사였다.
WCC는 기독교 공동체를 넘어서는 종교 신학을 모색한다. “우리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 인격적 위임에만 국한시키는 신학을 넘어서야 할 필요를 인식한다”고 한다. WCC는 기독교 공동체를 넘어서는 ‘폭넓은 에큐메니즘’(wider ecumenism)과 ‘거대 에큐메니즘’(macro-ecumenism)을 모색한다. 종교혼합주의 맥락에서 모든 역사적 종교를 아우르고 일치시키고 싶어 한다. 세계 종교 예큐메니칼 운동을 지향한다.
맺음말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는 WCC 신학에 따르면, 꼭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까닭이 없다. 기독교 선교와 선교사의 과제는 불교인에게 성불(成佛)에 전념하라고 권하고, 힌두교인에게 자기가 섬기는 신들에게 더 충성하라고 격려하고, 무슬림에게 ‘알라’에게 더욱 매달리라고 충고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선교’ 곧 인간화, 인권운동, 혁명투쟁, 환경보호, 인도주의 활동만 하면 된다.
종교다원주의는 상대주의 진리관, 만인보편구원주의, 종교혼합주의와 얽혀 있다. 종교대화주의는 기독교의 진리를 양보하거나 포기할 각오를 가지고 대화에 임하는 상대주의 인식론에 기초해 있다. 기독교의 진리의 상대적 가치만 인정하는 계몽주의 철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종교다원성에 대한 논의는 성경관으로 귀착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나 특별한 방법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에 관한 하나님의 권위 있는 계시가 아니라 주관적인 종교 경험과 이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모아놓은 문서라고 본다. 성경은 각 기록자 또는 기록자 그룹들의 어떤 의도나 목적을 따라 기술되고 편집된 문서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성경에 기록된 타종교에 대한 강경한 배타적 표현들은 타종교와의 대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한다.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종교가 동등한 구원의 길이라고 보는 종교다원주의는 이단이다. 기독교를 괴멸시키려고 덤벼드는 적(敵)이다. 종교다원주의자는 거짓교사이며 이단자이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과 능력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종교단체는 이단이다. WCC를 추종하던 유럽, 북미, 대양주 교회들의 퇴락과 조종(弔鐘) 소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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