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변화와 복음주의 선교학

by reformanda posted Jan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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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변화와 복음주의 선교학

 

 

변화하고 있는 선교에 대한 복음주의 선교학의 대응과 변화

 

 

침신대 이현모 교수 발표

 

 

지난 7월 초 한국세계선교협의회(대표회장 강승삼, 이하 KWMA)와 한인세계선교사회(KWMF) 주최로 열린 제5차 세계선교전략회의(NCOWE V)가 개최 됐습니다. 본지는 이번 대회 분야별 전략회의에서 논의된 발표들을 발표자들의 동의를 얻어 계속해서 게재합니다. 다음은 이현모 교수(침례신학대학교 선교학)가 발표한 "변화하고 있는 선교에 대한 복음주의 선교학의 대응과 변화"(Responses and Changes of Evangelical Missiology to Transforming Mission) 발표 전문입니다. (NCOWE V 관련기사)

들어가는 말

 

 

교회는 언제나 본질상 선교적인 존재였다. 그러므로 선교에 대한 신학적 주제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들이었다. 앤드류 월스(Andrew Walls)는 기독교는 항상 변화하는 존재였고 다만 이것이 상호 연관되는 것은 역사적 연결과 일련의 연속성의 상징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 두 요소는 토착원리(the 'indigenizing' principle)순례원리(the 'pilgrim' principle)의 창조적 긴장 가운데서 변화와 보존의 균형을 이루어간다고 했다. 그러므로 선교신학은 무엇이 교회와 선교의 본질인가에 대해 창조적 긴장 가운데서 계속 변해가고 있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1974년 로잔 선언문 이후로 복음주의는 선교신학에서 근본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은 듯 하지만 저변에서는 조용하게 상당한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인다.

 

 

지난 30여 년 동안에 데이빗 보쉬(David Bosch)의 선교신학이 한국 복음주의 선교학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던 것 같다. 보쉬는 복음주의 선교학자라고 볼 수도 있고 온건한 에큐메니칼 학자로 볼 수도 있는 경계선 상에 자신의 입장을 잡았었다. 보쉬를 복음주의 선교신학자로 정의한다면 이는 복음주의의 폭이 상당히 넓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데이빗 보쉬의 신학을 더 발전시킨 듯 한 스티브 베반스(Stephen Bevans)의 선교신학 저술이 한국에 소개되면서 한국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전을 당하고 있다고 필자는 느껴진다. 베반스는 보쉬 신학의 연장선상에 존재하지만 가톨릭 신학을 중심에 놓고 보쉬보다 좀 더 급진적인 성향을 은연 중 지지하고 있다.

 

 

한국 복음주의의 선교신학은 몇 가지 분명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교회 중심, 그리스도 중심, 칭의론 중심, 영적 중심, 개인 중심 등이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복음주의 신학에서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충분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다만 중심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중심은 잘못 강조되면 그 대칭되는 개념과 구분을 이루는 정도가 아니라 균형을 잃게 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중심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중심주의가 되는 다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이런 면에서 대두되는 다른 대칭 개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자기 성찰의 과정을 계속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학 작업은 끊임없는 창조적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 복음주의 선교학은 더 이상 세계 선교학계의 변두리 위치에 자족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최근의 사조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면서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자리 매김에 동참해야 한다. 본고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논쟁의 주제로 부상되고 있는 몇몇 주제들을 비평해 보고 한국 복음주의 입장에서 필자의 반응을 피력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Missio Dei하나님의 나라개념에 대한 반응

 

 

Missio Dei라는 용어가 등장한 지 거의 80년이 되어간다. 그간 missio Dei 개념의 수용여부가 에큐메니칼 선교신학과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구분선이 되었다. missio Dei를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은 ,” “아니오의 단답형으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다. 이전의 missiones ecclesiae는 지상위임령을 위임받은 교회를 너무 강조하다가 선교의 주체 세력이 하나님이심을 간과하는 가능성이 있었다.

 

 

Missio Dei 개념은 모든 인간의 행동에 선재 하는 actio Dei를 강조하면서 선교를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의 동참으로 규정하여 당시의 다른 세속적 근거와 단절시키려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변증법적 신학에서 근거한 것이다. 이를 이어 받아서 칼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은 선교를 삼위 일체적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선교를 순수한 인간 활동의 영역에서 근본적으로 제거시켜서 하나님 계시의 양도할 수 없는 지침인 하나님의 뜻과 행동으로 규정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르트의 선교신학이 미친 영향력의 절정은 IMC의 빌링겐 대회(Willingen, 1952)였다.

 

 

이 대회를 거치면서 선교는 교회론이나 구원론의 개념을 벗어나서 삼위일체의 맥락 속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이는 선교를 철저히 하나님의 본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교회론이나 구원론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를 보내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낸다는 삼위일체적 개념으로서의 선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교회를 세상에 파송한다는 개념과 연결이 되었다. 또한 exitus로서의 삼위일체적 선교개념은 성육신하고 죽으신 그리스도와의 연대로서의 선교와 밀접한 관계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빌링겐 대회는 missio Dei의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교회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움직임이 등장했다고 보인다. 그래서 요하네스 아하르드(Johannes Aagaard)는 빌링겐이 선교 사상에 대한 바르트의 영향의 완성으로 간주되면서 동시에 결정적, 통일시키는 힘으로서의 바르트 영향의 종식의 시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호켄다이크(J.C. Hoekendijk)가 등장하면서 missio Dei는 점차 교회를 완전히 배제하는 개념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호켄다이크에게 missio Dei는 하나님이 그 자신을 표명하는데 있어서 아무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심지어 호켄다이크는 missio Dei와 인간의 선교를 동일한 개념으로 주장하고 교회 안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하나님은 비신자들까지를 포함해서 당신의 일을 하므로 세상의 모든 인간의 노력과 활동이 결국 하나님의 선교라는 주장이다.

 

 

호켄다이크는 기독교 신앙은 오늘날의 사회적인 도전과 현실의 목표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구원은 마침내 세상 역사 자체 안에 나타나는 샬롬이라고 정의했다. 이 샬롬은 하나님과 또 이웃과의 관계에서 발견되고 성취되는 것이며 이 샬롬이 구원이고 이 샬롬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곧 선교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missio Dei를 중심으로 하는 선교 개념은 더 확대되면서 극단적인 정치투쟁의 참여에서, 연대성을 중심에 두고 확대하려는 코이노니아 개념,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적 구원론을 벗어나려는 시도, 교회를 배제하려는 그룹과 교회를 제한적 참여의 수준에 머물게 하는 그룹 간의 문제, 인권 문제, 생태계 신학과 반세계화 운동까지가 모두 missio Dei를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missio Dei 개념의 흐름들을 분석해 보고 복음주의 선교학의 수용 여부를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우선 교회를 배제하거나 소극적 역할로 보는 저 교회론을 근거로 하는 선교개념은 교회를 본질상 선교적이라고 보는 에밀 부르너(Emil Bruner)나 가톨릭 Ad Gentes의 개념에 영향을 주었고 반대로 영향을 받기도 했다고 보인다.

 

 

베반스는 그의 저서에서 교회는 궁극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언급으로 교회와 선교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교회의 중심은 교회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죄악된 세상에서 피난처를 예비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언급한다. “결국 죽음의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서 구원의 작은 널빤지 역할을 하는 곳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Lumen Gentium을 해석하는 오토 세멜로스(Otto Semmelroth)교회는 일시적이고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교회관은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표현들이다. 이런 저 교회론은 본질상 선교적이라는 개념에서 유래된다.

 

 

본질상 선교적이라는 개념은 조심스러운 분석을 요한다. 우선 교회가 선교적 사역을 감당할 때 비로소 탄생하는 존재라는 논증은 유효하다. 다만 선교적이라는 말의 의미에서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한다. 복음주의에서 의미하는 선교적이라는 말은 교회의 궁극적 사명과 목적이 복음전파를 통한 영혼 구원이라는 선교 사명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에 위임된 사명(mission)이다. 교회는 복음 전파를 중심으로 한 이 사명을 위임받은 주체라고 본다.

 

 

단순히 교회를 구원받은 자들의 예배 공동체로만 인식하고 선교는 이 예배 공동체를 확장시키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복음주의 교회관은 구약의 성전 개념과 교회를 혼동하고 있는 부족한 교회관이다. 그러나 missio Dei를 지지하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에큐메니칼 그룹에게 본질상 선교적이라는 말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인다. 과도히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이는 영혼을 구원시켜서 교회로 데려오는 활동이 교회론의 중심이 되는 것을 반대하거나 큰 비중을 두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서는 안 되며 교회는 단지 세상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도구라는 면에 유일한 강조점을 두거나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하는 존재라는 주장이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일은 많은 경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 참여할 뿐이지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 들이는 존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순례자로서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동안만 필요한 존재이지 목적지에 도착하면 더 이상 순례자는 없는 것처럼 불필요한 존재라고 보기 때문에 교회는 궁극적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되므로 웁살라 보고서에서는 타자를 위한 교회,” 혹은 세계를 위한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적으로 현 세상에서의 성취로 보는 견해에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마태복음을 근거로 많은 학자들이 현세적 하나님의 나라를 주장하지만 마태복음에서 핵심적으로 천국 개념을 진술하는 13장을 살펴보면 현세적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적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이중 현세적 천국 개념은 씨뿌리는 비유(13:3-9)와 겨자 씨 비유(13:31-32), 누룩의 비유(13:33) 3개이고 종말론적 심판을 포함하는 천국 개념은 가라지 비유(13:24-30)와 물고기 그물의 비유(13:47-50)이며 부분적으로 밭에 감추인 보화(13:44)와 좋은 진주의 비유(13:45-46)라고 하겠다.

 

 

예수의 천국 개념은 현세적인 측면과 종말론적 측면, 분명한 악에 대한 심판의 개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는 극단적인 에큐메니칼 그룹과 근본주의 그룹 양자를 향한 교훈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소멸되는 존재가 아니라 완성되는 존재이다. 요한계시록 79절의 무리를 완성된 교회로 보는 것이다.

 

 

에큐메니칼의 missio Dei가 영혼을 구원시켜서 교회로 데려오는 활동에 반대하는 핵심 이유는 이럴 경우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동일한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애버리 둘레스(Avery Dulles)교회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아니지만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되지도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선교적 교회론을 강조하는 콜롬비아 신학교의 석좌교수인 데릴 구더(Darrell L. Guder)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는 본질적 missio Dei와의 관계에서 교회를 증인으로 정의했다. 증인이라는 개념은 구속적 메시지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두 개념을 연결해 주는 열쇠가 된다. 복음주의 교회는 증인이라는 사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구속사의 존재를 세속사와 구분해서 보느냐 아니면 구속사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에큐메니칼 신학은 철저히 구속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성경의 이야기는 세속사의 유대 지역 이야기가 아니라 이는 구분된 구속사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사실 검증의 대상이 되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구분된 구속사를 부인할 경우 어거스틴과 안셀름, 마틴 루터를 근거로 내려온 복음주의 신학의 근본은 폐기되지 않을 수 없으며 다음에 언급하게 될 다원주의 문제를 포함한 종교신학의 문제와 문화에 대한 문제 등에 전혀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가장 심각한 것은 구원의 개념이 전혀 다른 장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구원이란 점차 하나님의 나라 구현이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인간의 성취를 기대하는 이레니우스의 신학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인간은 타락하여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가 아니며 스스로 발전 개혁을 할 능력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기까지 성장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물질과 영을 구분하는 이원론 개념은 없어진다. 물질과 영이 구분되지 않으므로 영혼의 구원이라는 개념도 당연히 의미를 잃게 된다. 또한 인간을 창조의 중심이라고 보기보다는 창조의 한 구성요소로 이해하게 되므로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생태계 관심 혹은 생태적 정의(eco-justice) 또한 구원의 영역에서 다루어야 하는 주제가 된다.

 

 

복음주의 교회관은 양 측면을 가진다. 교회를 구원받은 자들의 자발적 공동체라고 볼 때 이는 저 교회론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실 복음주의에서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의미하지 교회와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가톨릭은 고 교회론이었다. 그러나 선교의 관점에서 에큐메니칼의 missio Dei 주장에 비교해 볼 때는 교회의 역할과 존재를 높게 보는 고 교회론을 지지한다. 구속사관을 견지하는 한 구속의 역사에서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대리인 혹은 증인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구속의 역사를 제외한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의 보존에서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해야 하지만 대리인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삼위일체적 개념,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본질상 선교적 성격은 복음주의 선교론이나 교회론이 지지하는 바이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교회론과 구속론, 기독론의 삼중대화를 중심으로 한 선교의 정의를 견지하면서 동시에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에 기인한다는 측면의 삼위일체론과 보냄 받은 타자로서의 교회론을 위의 대화의 범주 안에서 제한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보쉬는 자신의 저서에서 우리가 다시 좁고 교회중심적인 선교 견해로 되돌아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라고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우리의 교회론이 넓어져야 할 필요는 긍정하지만 전적으로 보쉬의 교회개념을 수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복음주의의 교회관은 구원받은 자들의 예배공동체만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타자성이나 선교적 본질을 약화시키거나 무의식중 배제시킴으로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교회가 가지는 공적 측면을 너무 간과하고 신앙의 사유화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가 비판한 개신교 교회론은 일리가 있다. 판넨베르크는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이라는 책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주로 그 자신과 경건과 그 지체들의 구원에 관심을 둔다면 이는 대부분 왜곡된 개념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 참된 의미가 종교적 연합의 사유화된 관념을 피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74년 로쟌 선언문 발표 이후로 꾸준히 이런 약점을 보강하고 있지만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았을 때 교회의 선교적 본질 회복은 아직 약하다고 평가한다. 짧은 시간 내에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국가가 된 한국교회의 선교적 본질이 약하다는 말은 모순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제 한국교회 선교는 이런 교회론의 약점으로 인해 기초가 허약하다고 본다. 다만 교회를 배제하지 않는 신학의 고수는 강점으로 보인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도 구속사적 차원에서의 교회의 위임령을 인정하면서 어느 정도 교회의 타자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신학적 근거가 한국교회 선교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는 이미 로쟌 선언문에 포함되어있는 것이고 1989년 마닐라 선언문에서 재확인된 사실이다. Missio Dei라는 용어를 사용하던 사용하지 않던 간에 복음주의 신학에서 교회와 구속 중심의 제한적 missio Dei 개념은 이미 인정되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보쉬가 자신의 변화하고 있는 선교의 마지막 페이지에 사용한 표현이 우리의 의도를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선교는 그 안에 missiones ecclesiae를 흡수하기를 추구하는 missio Dei이다.” 혹은 선교는  그 안에 mission Dei를 흡수하기를 추구하는 missiones ecclesiae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한국 복음주의 교회는 아직도 이런 교회론이 부족함을 느낀다. 신학은 신학대학교의 강의실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고 교회의 현장 즉 지역교회의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야 한다. 또한 최근 missio Dei 신학이 확장되면서 등장하는 생태계 신학이라든지 인권이나 문화에 대한 신학 등에서 복음주의도 건강한 신학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선교 신학의 삼위일체적 접근 문제에 대한 반응

 

 

점차 서구 신학에서 삼위일체적 접근이라는 용어가 인기를 끌고 있다. 필자가 복음주의 계열이 아닌 다른 신학을 이해하려 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 삼위일체적이라는 개념인 듯하다. 점차 이 삼위일체적 개념은 초기 사용자인 칼 바르트나 하르텐슈타인, 복음주의적 개신교의 이해와는 점차 거리가 있는 방법으로 이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 다양한 비복음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이 삼위일체적 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날 복음주의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에큐메니칼 개신교 간의 긴장에는 항상 이 삼위일체적이라는 개념의 이해 차이가 있다. 긴 개념은 오히려 초점을 흐리게 하므로 필자는 과도히 단순화시킨 이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로마 가톨릭이나 에큐메니칼 개신교의 일부에서 주장하는 삼위일체적이라는 의미는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라는 요구로 보인다. 즉 구세주로서 십자가에서의 죄 용서와 회개를 요구하는 복음주의의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세상에서의 섬김과 관계를 더 중시하는 방향을 표현한 것이 삼위일체적이라는 개념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과도히 단순화한 해석은 취약한 부분이 있다. 모든 가톨릭이 이런 관점의 삼위일체적 개념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missio Dei 개념의 바탕을 이루는 이런 삼위일체적 접근 개념은 선교의 방향과 목표, 정의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섬김을 위한 삼위일체적 개념은 교회론에서도 코이노니아라는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코이노니아론은 교회를 기독론적 측면에서 보는 것에서 방향을 돌리게 하려는 missio Dei 적 시도로 보인다. 몰트만(Juergen Moltman)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론을 주장할 때 이는 교회를 기독론의 입장에서 벗어나서 창조론에 근거해서 보게 하는 변화라고 보인다즉 삼위일체적 이해와 병행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코이노니아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교회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논리적 지적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상치되는 개념조차도 코이노니아라는 이름 하에서 수용하는 것을 에큐메니칼의 일치 모형으로 주장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교회의 특징은 점차 코이노니아를 확대시켜가면서 다원주의적 차이점에서 까지도 포용적 태도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보여진다. 때로 논리를 넘어서는 상황에서는 신비주의가 주목 받게 되는데 최근의 에큐메니칼 그룹의 삼위일체적 접근 주장들은  정교회의 신학에서 영감을 받아 온 듯하다. 정교회는 공동체에서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근거로 성부와 성자, 성자와 성령, 성령과 성부 간의 상호개방성을 지지하고 있다.

 

 

오늘날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적사고와 삼위일체적사고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요소는 대립이기도 하지만 각기 신학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바라기는 이것이 상호 배타적인 주제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두 개념이 다른 방향을 지향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견해에서 이 두 개념이 중복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립만을 보지 않는 온건한 측면에서의 신학적 절충도 필요하리라고 본다.

 

 

복음주의가 지나칠 정도로 그리스도 중심성을 붙잡은 결과 실제 삼위 하나님의 개념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이라는 측면은 간과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십자가의 대속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개념을 버리지 않는 면에서 초기에 사용되었던 삼위일체적 개념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이지만 삼위일체 개념을 생각해야 하는 좀 더 실제적인 이유는 복음주의 자체에서도 세상에 대한 책임을 좀 더 강조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굳이 삼위일체적 이란 표현을 사용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으나 타자성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파송하는 자와 파송 받는 자로서의 삼위일체적 개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제삼세계 행동신학에 대한 반응

 

 

일부에서는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해방신학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반대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한다. 베반스는 오늘날 해방신학의 필요는 더 커졌다고 주장한다. 해방신학을 중심으로 한 행동신학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막스주의 신학자라고 자처하는 빠블로 리처드(Pablo Richard)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해방신학의 위대한 예언자들의 시대는 지났으나 이제는 묵시 문학의 시대라고 주장한다. 즉 거대한 체제 변화를 추구하는 해방에 대한 부름보다는 그 부름이 민초들로부터, 작은 저항의 행동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에 따라서 행동신학의 관심이 거대한 정치적 변화보다는 여성의 지위 문제, 인권 문제, 문화에 대한 인식의 문제,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관심 등으로 변화되고 있다. 물론 행동신학의 특성인 사회분석의 방법과 신학적 방법론, 해방 중심의 해법 등은 여전하지만 이들의 관심 주제가 변했다는 것은 새로운 반응을 필요로 한다. 정당한 폭력을 지향하던 해방신학에서 이런 문제로 흐름이 변화되자 복음주의 진영과의 사이에 존재하던 간격의 폭이 훨씬 좁아지고 있다고 보인다. 복음주의 신학도 이런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차원에서 이 주제들에 대한 상호의 신학적 방법론에 대하여 긍정, 부정적 입장의 비판적 연구들이 필요하게 되었다.복음주의도 점차 기능주의를 중심으로 하던 사회분석의 방법을 좀 더 구조주의 쪽으로 확대하면서 방법론에서 약간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특히 지나친 교리 중심의 신학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늘어나고 있다. 복음주의적 프락시스 개념이 개발되어야 하며 이는 주권과 성화, 영화, 사회적 책임 등의 개념과 연관되어서 더 연구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오순절 운동을 하나의 프락시스로 보는 것도 새로운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복음주의의 장점인 성경적 근거와 행동신학의 장점인 프락시스가 건설적인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발전된다면 제삼세계 행동신학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원주의 및 포괄주의에 대한 반응

 

 

점차 교회를 배제시키는 missio Dei가 강조되자 하나님의 활동은 교회 밖에서의 일이 되고 그러자 타종교 내에서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개념은 힘을 얻어가게 되었다. 즉 타종교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찾기 위한 대화 내지는 관계 설정으로서 다원주의나 포괄주의가 부각되었다.

 

 

복음주의 종교 신학에서도 뉴비긴 등이 타종교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으려는 시도를 제시했다. 뉴비긴은 그리스도 이외의 구원의 가능성을 타종교에서 찾으려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이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교회에만 국한되어있다고 보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우주적 하나님이시라면 당연히 소위 이방국가들의 기독교 이전시대의 문화와 역사에 참여하셨고 그 흔적을 찾는 시도는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수긍이 가는 것이지만 이를 일반계시의 영역을 넘어서는 성령의 역사의 흔적으로 보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베반스는 tabula rasa의 접근을 부인하면서 타종교의 사람들도 이미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 비밀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성령의 역사는 성부 하나님만이 아닌 성자의 사역과 연계되어있어야 한다.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하는 포괄주의에서는 모든 문화에 성령의 흔적을 인정할 수 있지만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부인하는 복음주의에서 이는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점차 온건한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는 포괄주의가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포괄주의는 가톨릭의 칼 라너 등에 의해 주창되었고 오늘날 가톨릭의 거의 공식적 입장이 되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던 가톨릭이 교회 밖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성취론적 성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칼 라너는 기독론 중심의 포괄주의라고 하겠다. 가톨릭 사제로서 라너는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기독교 명제를 따르지만 동시에 모든 종교에 그리스도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두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했다.

 

 

인간에게 근본적인 초자연적 실존(supernatural existential)이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은 로마서 119절의 주장을 따르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는 모든 종교가 구원의 통로라는 다원주의와는 분명한 구분을 하고 있다. 절대성을 부인하고 상대적 진리와 공존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포괄주의는 유일주의보다 더 합리적으로 보이고 있다. 필자의 평가로는 정교회나 영국 국교회 등도 포괄주의적 성향을 보인다고 하겠다. 정교회는 성령의 신비를 강조하면서 이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그룹에서는 마치 성령론 중심의 포괄주의를 주장하는 듯 한 인상을 받는다. 정교회는 전통적으로 신비의 영역을 교회로 한정하여 왔지만 이 한계가 불투명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와중에서 중도적 성향의 영국 국교회는 성례전적 포괄주의 성향을 보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만약 이런 필자의 평가가 사실이라고 인정된다면 현재 소위 기독교라고 하는 그룹 중에서 약 2/3 정도가 포괄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기독교 사회에서의 포괄주의 지지를 포함시킨다면 사실 유일주의가 소수 보수적 견해라는 현실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어야 한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이 이 문제를 더 이상 방관하고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고 눈을 돌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이번 3차 로잔 대회에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중심 주제가 되는 것은 필연적 과제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막연히 유일주의가 수비적 태도를 취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포괄주의이던 다원주의이던 그들의 논리적 전제도 증명 가능하지 않은 논제들이다. 그들의 논증 자체도 유일주의 만큼이나 비약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편견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뉴비긴은 존 힉(John Hick)이 자신의 주장을 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혁이라고 주장한 것을 지적하면 결국 모든 타종교와의 논쟁은 필연적으로 이런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천동설과 지동설은 대상이 태양과 지구이므로 검증 가능하고 관찰 가능한 대상이지만 종교 논쟁에서의 기독교 중심이냐 신 중심이냐는 검증이나 관찰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결국 자신이 인식하는 신과 타종교가 인식하는 신 개념을 두 개의 실체로 볼 때 결국 모든 주장은 자신이 인식하는 신을 모든 종교의 핵심적 실체로 주장하는 것으로 배타주의라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모든 논리는 자신의 주장을 초월적 존재(Transcendent Being)라고 하던 신적 실체(Divine Reality)라고 부르던 상관없이 모두 배타주의라는 지적은 옳다. 결국은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라는 출발점의 논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그곳에서 필연적으로 신앙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이성이 신앙적 선택을 대체할 것처럼 말하지만 지난 20세기의 역사를 통해서 이성이 게시를 평가할 기준이 되지 못함이 증명되었다고 하겠다. 이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도 결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적 선택에 불과하다.

 

 

복음주의가 타종교에 대한 논쟁에서 변화할 것은 없지만 부딪히는 문제는 종교간 대화(interreligious dialogue)의 문제라고 하겠다. 오늘날 점차 대화는 선한 것이고 대화를 회피하는 것은 좁은 마음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비난당하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가 대화에 소극적인 것은 타종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적개심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대화라는 개념이 불투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에릭 샤프(Eric Sharpe)가 종교간 대화의 정의를 4가지로 나눈 것은 유용해 보인다.

 

 

논증적 대화(discursive dialogue)와 인격적 대화(human dialogue), 세속적 대화(secular dialogue), 심층적 대화(interior dialogue)이다. 이를 다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필자는 복음주의 교회가 논증적 대화와 세속적 대화에는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논증적 대화는 타종교의 종교적 전통에 대한 이해를 강화시키는 것이 목적이고 세속적 대화는 주로 이 세상적 관심, 즉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정의와 기아에 대한 투쟁 등에 공통 관심사를 키워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격적 대화는 타종교에 대한 단순한 지식과 실제적 지식을 구분하면서 타종교인의 신앙에 들어가서 나와 너’(I-Thou)의 관계를 형성하려는 시도인데 조심스러운 접근방법이다.

 

 

World Christianity의 등장과 기독교의 오순절화(Pentecostalization)에 대한 반응

 

 

20세기 후반부에 가장 두드러진 복음주의 선교의 특징은 기독교가 남반구로 무게 중심의 이동을 하면서 World Christianity 혹은 Global Christianity가 등장한 것과 범세계적인 오순절화(pentecostalization) 현상을 빼놓을 수 없다. 전통적 북반구 신학은 말씀에 대한 해석과 적용, 순종에 강조점을 두어왔고 말씀 해석보다는 체험과 감정 표현에 강조점이 있는 오순절 운동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보였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등이 나서서 제삼의 물결을 주장하게 되었고 기존 교단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오순절적 체험을 수용하는 일도 일어났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전략적 차원의 영적 전쟁(SLSW: Strategic Level of Spiritual Warfare)으로 발전하게 되자 이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남반구로의 기독교 이동을 다른 관점에서 보는 학자들이 등장하였다. 필립 젠킨스(Philip Jenkins)는 오히려 오순절적 신앙을 보이는 남반구 기독교는 서구 교회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잊어왔던 신앙의 열정을 회복시켜주는 긍정적인 신앙이라고 지지하고 있다. 젠킨스는 남반구 기독교는 치유와 예언 등 그동안 희석되어온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시키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약속한 구원과 치유와 축복을 가져다주기를 원하고 있다고 하며 새로운 가치관이 북반구 기독교의 가치관을 뒤집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티모디 테넌트는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World Christianity3가지 공헌을 해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는 교파중심의 분파주의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20세기에 개신교회는 교파 교회의 한계를 부딪치면서 독립교회의 탄생을 지켜보았었다. 하비 콕스(Harvie Cox)는 오순절 주의가 등장하여서 교회분열,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 개신교 교회(혹은 교파) 간의 분열, 교회 내의 인종차별주의와 같은 문제를 극복하는 모델을 보여주었다고 지적한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역사(theopraxis)를 중심에 두면서 교파적 벽을 넘어서서 범세계적 기독교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콕스는 오순절주의는 하나의 제도적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는 하나의 종교적 운동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또한 오순절 운동이 한 국가에 머물지 않고 그 지경을 세계로 넓히려는 강력한 글로벌 지향적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세 번째는 선교 전략에서 동질 집단 원리(homogeneous unit principle)를 넘어서는 일을 가능케 해주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세 번째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순절 주의 자체가 지리적 인종적 언어적 동질집단은 아닐지라도 또 다른 형태의 강력한 동질 집단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맥가브란의 동질집단 원리가 반드시 인종 언어적 혹은 지리적 개념일 필요는 없다고 볼 때 오순절 운동을 다른 형태의 동질집단 운동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오순절주의는 전 세계적 운동이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뿐 아니라 스페인, 일부 이탈리아, 우크라이나를 포함하는 동유럽 지역, 인도, 기타 아시아 국가들에서 오순절 교회의 성장은 주목할 만하다. 현재 전 세계 기독교의 1/4이 오순절 계통이라는 주장도 있다. 동시에 이 성장은 상당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콕스는 오순절 운동이 계속 성장하지 못할 이유를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도 빠른 범세계적 기독교의 오순절화는 경계해야 할 측면도 보여주고 있다. 오순절 주의는 점차 신앙을 개인주의화시켜 나가고 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개인적 관계에 집중하면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공적 가치에 대한 개념은 약화되고 있다. 신앙이 사유화(privatization) 혹은 사적 영역의 가치로 변질되면서 기독교의 본질이 변화되고 있다는 염려가 있다. 최근 북반구 신학에서 공적 신학(public theology)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 하나의 반증이다. 신앙의 개인주의 성향은 구원론에서도 칭의론에 너무 비중을 두면서 균형을 잃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기독교가 남반구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이 되면서 복음의 깊이는 얕아지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하겠다.

두 번째 문제는 신앙의 신비주의적 성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성이 점차 하나님과의 개인적 측면에서만 고려되어지자 내적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혹은 주관주의 성향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비주의 성향에 빠지는 기독교는 쉽게 부패할 수 있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위험성을 후기 경건주의 시간에 이미 경험하였다.

 

 

오늘날 World Christianity의 상황에서 오순절주의가 범세계적 신학(global theology)과 범세계적 선교학(global missiology)에 점차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를 균형 있게 수용하되 범세계적 신학이나 범세계적 선교학이 좀 더 성경 신학 중심의 방향을 잡도록 인도해야 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북반구 기독교가 가진 건강한 전통과 남반구 기독교의 새로운 긍정적 전통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된다. 이는 양쪽에서의 접근을 필요로 한다. 서로 자기 영역을 고수하면서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태도는 갈등을 더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제 남반구 교회는 더 이상 북반구 교회의 통제권 아래 있지 않음을 북반구 지도자들이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 또한 남반구 지도자들은 스스로 독립된 존재라면 철저한 책임감을 하나님 앞에서 지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지속적인 대화와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 에큐메니칼 그룹과의 대화만큼이나 남북 기독교 간의 대화가 필요하다. 최근 티모디 테넌트가 Theology in the context of World Christianity라는 상당히 도전적인 책을 출간한 것은 이런 측면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

 

 

맺는 말

 

 

필자는 교회는 본질상 선교적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동시에 그 말이 내포하는 교회를 배제하는 missio Dei 개념에 단호히 반대한다. 교회는 증인으로서 선교 공동체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구현에 참여하는 것은 분명한 교회의 사명이고 선교이다. 복음의 하나님 나라적 측면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 구원은 아니다. 이 둘 사이의 구분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복음주의 교회는 좀 더 타자적 성격을 포함해야 하지만 동시에 중요하지 않은 존재는 아니다. 증거하는 선교 공동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은 교회의 존재 자체이다.

 

 

그러나 복음주의 교회가 은연중에 하나님의 나라 성장(Kingdom Growth)보다는 자기 교회 성장을 중심으로 선교를 생각하는 교회론은 배제되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혼동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신약의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거나 구약의 성전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는 겸손히 선교하기 위해 존재하는 선교적 공동체일 뿐이다.

 

 

삼위일체적 접근은 선교의 근원을 분명히 해주는 이점이 있지만 결코 그리스도 중심성을 배제하는 삼위일체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삼위일체적 접근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제삼세계 행동신학은 현재 변신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원래 행동신학이란 변하는 것이 정상적 과정이다. 현재의 상황은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공유할 수 있는 주제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복음주의 선교신학도 동일한 주제에 대한 복음주의적 행동신학의 발전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 특히 한국 복음주의 신학이 좀 더 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포괄주의는 21세기에 복음주의 선교신학이 예의 주시해야 하는 사조이다. 유일주의는 결코 논리적성이 부족한 체험적 주장만은 아니다.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통일된 주장이라는 것들은 모두 배타주의적 주장일 뿐이다. 공격이 때로는 최선의 방어임을 기억하고 다른 사조에 대한 적극적 대화의 장에 참여하되 대화의 목표와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한 무조건적 배격보다는 세속적 영역에서의 발전적 대화도 권장해야 할 것이다.

 

 

오순절주의의 세계화는 현재로서는 긍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북반구 학자들에게 오순절 운동은 새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오순절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미 이런 위험성들이 표면에 드러나고 있다고 평가된다.

 

 

21세기에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분주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재해 있는 도전들이 더 깊은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신학 자체가 창조적 긴장의 연속선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은 지속적인 작업이며 동시에 매번 새로운 시작이다.

 

 

이현모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선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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