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만두와 서울
WCC 바로알기 30
1. 우리는 종교다원성 사회에서 살고 있다. 종교가 다른 사람끼리 가깝게 지내는 것이 가능하다. 타종교인과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 각자의 종교정체성을 부정하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으면서, 상호 연대하고 친목을 가지는 만남과 대화는 가능하다. 나는 이것을 “종교인 간의 행동하는 대화”라고 일컫는다. 이 경우의 종교인 간의 만남과 대화는 신앙고백적인 연합이나 일치가 아니다. 공동의 봉사와 선을 추구하는 협력, 사귐, 친교, 연합이다.
2. 한국과 네팔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지진 피해이다. 두 나라 다 지진 피해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한국인들은 2016년 가을에 발생한 강진으로 불안에 떨었다. 학교 수업이 중단되었다. 대규모 회의가 갑자기 중단되기도 했다. 네팔의 카트만두와 그 인근 지역은 2015년 봄 지진으로 시달렸다. 서울에서 카트만두로 달려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한국인이 있었다. 그러나 지원의 폭이 크지는 않았다. 신속한 지원 방법과 정보를 가지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3. 인간의 삶에는 친구의 역할이 중요하다. 참화, 불행, 비극을 만날 때 친구가 필요하다. 친구는 슬픔을 당했을 때 희망을 주고 용기를 가지게 한다. 환란을 당할 때 친구의 위로는 큰 선물이다. 잦은 왕래, 서로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 평소에 구축된 친분, 열린 대화, 협력 시스템이 위기 때 신속한 지원을 가능하게 한다.
4. 네팔의 소설, 수필, 문학작품, 시, 미술, 공예, 춤, 노래, 등 여러 예술과 문학 분야는 대부분 힌두교와 불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종교는 세계관과 정신 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문화와 예술의 창의적 뿌리는 종교이다. 민속 춤은 대부분 제의적(祭儀的) 성격을 지니고 있다.
5. 아시아는 종교들의 고향이며 텃밭이다. 인류의 가장 중요한 종교 사상들의 발상지이다. 역사적 종교들은 아시아의 정신적 개방성의 종교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다. 아시아라는 토양에서 자라왔다. 아시아인들의 종교적 만남과 대화의 폭, 깊이, 질에 세계의 평화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종교들의 텃밭인 아시아가 자비, 평화, 조화, 협력의 모델이 되면 세상이 편안해 질 수 있다.
6. 네팔 정부의 2011년 발표에 따르면, 네팔 인구는 약 2천 6백만 명이다. 한국 인구수의 절반이다. 네팔 국민 약 80퍼센트가 힌두교인이고, 약 9퍼센트가 불교 신자이다. 석가모니 탄생지 아름다운 룸비니 동산이 네팔에 있는 점을 고려하면, 네팔의 불자 수가 많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슬람 신도가 인구의 4퍼센트, 기독교 신자는 1.4퍼센트이다. 네팔 국민 10명 가운데 8명은 힌두교인이고, 1명은 불자인 셈이다. 두 종교의 영향 아래서 네팔인 절대 다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영혼이 불멸하며, 끝없이 윤회하며, 전생의 업보에 따라 다른 존재 형태로 계속 옮겨간다고 믿는다.
7. 2015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인구는 5천만 명에 육박한다. 기독교인 약 9천 700만 명, 불교도 약 7천 600명, 로마가톨릭교회 신자 약 3천 900만 명이라고 한다. 소수의 원불교, 유교, 천도교, 대종교, 무속신앙인들도 있다. 한국 국민 5명 가운데 1명이 기독교 곧 개신교 신자인 셈이다.
8. 한반대륙에는 아주 오랫동안 비폭력과 자비정신을 천명하는 불교가 강세(强勢)였다. 불교가 약 1500년 동안, 한국사회의 종교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반세기 전까지도 한국이 불교국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이 땅에는 불교 신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근년에는 기독교 신도 수가 다수이다. 교회당들이 불교 사원수보다 더 많다.
9.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다. 불교가 4세기에 들어왔다. 유학은 15세기에 유입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1770년대 말에, 기독교 개신교회는 1880년대 초에 들어왔다. 첫 개신교회는 한국인 스스로 세웠다. 뒤를 이어서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의 선교사들이 찾아와 외세 침략과 부패한 정부에 의해 삶이 피폐해 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학교와 병원과 고아원을 세우는 등 사회복지에 이바지했다. 한국인들은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이 전하는 종교 진리를 환영했다.
10. 한반대륙의 북쪽에는 약 2천 500만 명의 동족이 살고 있다. 공산주의 무신론 국가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가르친다. 모든 종교를 억압하지만 유독 기독교에 대한 억압이 심하다. 북한은 핵무기로 미국과 한국을 위협하고 있다. 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극빈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1. 한국은 현재 5천년 민족 역사 가운데서 가장 풍요로운 경제적 문화적 삶을 누리고 있다. 교육수준의 향상, 사회복지의 발달, 체육의 증진, 문화의 도약, 의술의 발전을 경험하고 있다. 신장(身長)과 평균 수명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12. 한국이 경제와 삶의 질을 포함한 여러 면에서 발전한 시기와 기독교인 인구가 증가된 시기가 일치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나라의 발전과 복지 향상이 자신들이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 덕분이라고 믿는다. 나는 한국이 이족침략, 동족상잔의 전쟁, 천연자원 부족이라는 악조건을 딛고 용감하게 일어나 윤택한 나라로 발전한 것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자살률과 이혼률이 높고, 국민행복지수가 낮은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한다.
13. WCC는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신자들에게 “예수 믿으라,” “개종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리를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인 상당수는 유럽기독교에 ‘백인 전용’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전용 화장실이나 공원시설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이 모든 인류에게 필요하다고 믿는다.
14. 한국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이 기독교인보다 더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을 알고 있다. 불교신자들이 만물의 생명에 대한 깊은 자비심을 갖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께서 힌두교도, 불자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는가?” 하고 물으면, 한국기독교의 일부의 사람들은 답변을 회피하거나, 주저하거나, “잘 모르겠다”고 말할 것이다. 다수는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15. 한국기독교는 모든 종교가 동등한 종류의 구원의 길이라고 보는 종교다원주의를 환영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가 궁극적 진리를 계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과 능력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교회연합운동을 경계한다. 진리의 배타적, 독립적 소유 주장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대화 곧 종교적 자아 정체성을 포기하는 종교 간의 대화를 거부한다.
16. 진보계 기독교가 표방하는 종교다원주의는 다양한 각 종교의 의례, 상징, 교리체계, 성직제도, 윤리 계명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의 내면의 가치는 동일하다고 본다. 기독교 신앙과 행위의 절대 규범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한다. 주관주의·상대주의 관점으로 접근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역사적 기독교 진리를 신앙하는 한국기독교인들을 한 가지 진리에만 몰두하는 편협성과 광신성(being fanatical)의 소유자들이라고 본다. 실체가 없는 절대적 것에 연연한다고 본다.
17.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탁(神託, oracle) 곧 특별계시를 주었다. 성경은 유대인들의 종교경험 기록 이상이다.
18.. 역사적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한국기독교는 자기 정체성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 그럼에도 타종교들과 큰 갈등 없이 조화롭게 지내고 있다. 불교, 유교, 로마가톨릭교회 등 타 종교인들과 일상생활에서 평화롭게 더불어 지내는 법을 알고 있다. 같은 교실에서 함께 배우고, 같은 사무실과 노동 현장에서 함께 일하고, 정치무대에서 함께 정치활동을 한다. 타종교와 대화를 희망하고, 조화, 협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19. 한국기독교는 전체로 보아 기독교 진리가 바깥 세계로부터 온,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만이 이 한계를 뛰어넘는다. 기독교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인간 구원 지식을 담고 있다. 참 진리는 배타적이며, 유일하며, 불변하다고 믿는다.
20. 이러한 종교 인식론적 전제 하에서 한국기독교는 역사적 인물 예수를 그리스도 곧 구원자라고 믿는다. 그 분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고백한다(요 14:6; 행 4:12; 딤전 2:5). 그리스도 예수 밖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가 없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은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서 주어진다. 인간이 예수를 믿어야 할 까닭이 있다. 예수 그분이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 놓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분은 십자가에 달려 대속제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진리는 배타적이다. 참과 거짓은 배타적일 때 드러난다.
21.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다운 통치를 받으며 사는 데 있다. 기독인이 되는 목적을 간단히 말하면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zoe) 취득과 천국시민의 삶이다. 한국기독교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함께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윤리적, 도덕적, 정신적 측면에서만 아니라 인권침해, 폭력, 고문, 불평등 등에 맞섬, 평화와 조화를 향해 종교 간의 행동하는 대화, 종교의 사회를 향한 예언자적 제언 기능을 중요하게 여긴다.
22. 종교 간의 갈등은 끔찍한 참화를 가져온다. 이데올로기 충돌보다 더 심하다. 한국의 기독인들은 종교적 자아 정체성을 포기하도록 하는 대화를 환영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이해, 인간관계의 위기 해소, 환경 개선, 핵 억제, 인권신장 등의 주제에 종교 간의 상호신뢰와 협력을 위한 대화의 필요성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민의 비참한 빈곤, 퇴폐, 억압적인 지배, 정부의 타락, 많은 사람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천민사상, 여성차별, 노동자에 대한 착취행위 등이 인간 사회의 조화를 깨뜨리고 있다. 종교인들이 연대하여 이에 항거함이 마땅하다.
23. 한국기독교는 타종교인과의 만남, 상호신뢰, 좋은 관계를 희망한다. 서로 도움을 주는 높은 가치와 풍부한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대화공동체, 마음 공동체(community of heart and mind) 구축을 원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와 사회정의 실현에 이바지하고 싶어 한다. 근원적으로는 타종교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지만, 이를 무례하게 앞세우지 않는다.
24. 종교 간의 상호존중과 대화는 종교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려면 행동하는 대화(dialogue of action)가 필요하다. 타종교인과의 행동하는 연대활동이 필요하다. 협력, 공동사역, 연대가 절실하다. 앞에서 언급한 종교 간의 협력 주제들만이 아니라 기아, 자연재해, 지진, 피해 지역에 대한 긴급 원조를 하고 그것을 할 수 있는 행동하는 대화문화 증진과 협력 시스템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25. WCC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리는 분리시키고 봉사는 일치시킨다”(doctrine divides, but service unites)고 한다. 이 슬로건은 종교다원 상황에 있는 기독교의 단합에 적합하지 않다. 이 구호는 종교 간의 대화 관계에만 적합하다. 반면에 행동하는 대화 곧 연대활동은 다른 신조, 신념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친밀함을 형성하고 상호 협력의 기회를 제공한다.
26. 사람 간의 사귐은 상호 신뢰를 구축한다. 신뢰가 조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조화가 상호 협력을 만들어 낸다. 재난을 당한 이웃에 대한 도움과 원조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려면 평소에 적극적인 대화, 신뢰, 친교 관계 구축이 필요하다. 국가, 기업, 학교가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국가와 국가 간에 상부상조할 수 있는 대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아시아인에게는 물질적 도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정(情), 사랑이다. 친구가 되고, 친구와 함께 함이 중요하다. 친구 됨은 사귐 시스템이 구축되고 작동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27. ‘행동하는 대화’는 종교인들의 관계를 조화롭게 만든다. 긴급한 도움의 필요를 알게 하는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이 목표에 도달하는 선결 과제는 행동하는 대화문화의 증진이다. ‘행동하는 대화’는 종교다원성(religious plurality)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타인의 종교적 자기 정체성을 버리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상호 존중하는 범위 안에서 조화롭고도 적극적인 도움을 주고받는 협력한다.
28. 대화는 고립에서 벗어나게 한다. 종교인 간의 대화는 서로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상호 신뢰한다. 서로에게 자신의 진실을 감추지 않는다. 타종교인과 연대하여 공동의 선행과 구체적 실행을 위해 협력함이 옳다. 행동하는 대화 시스템 구축은 종교 간의 평화와 협력과 조화를 보장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참고: 이 글은 한국과 네팔 두 정부가 후원하는 문화대회(KOREA-NEPAL INTERNATIONAL CULTURE CONFERENCE, 2017)가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발표한 것이다. 이 대회는 불교 신학자, 힌두교 신학자, 기독교 신학자를 한 명 씩 초대하여 연구물을 발표하게 했다. 이 글의 제목은 “종교적 자아 정체성과 행동하는 대화: 카트만두와 서울의 상호 협력을 향한 종교적 기초”이다. 영문과 한글로 작성한 것이다, 종교적 자기 정체성 포기를 강요하지 않는 '종교인 간의 행동하는 만남'(dialogue of action of religious people) 곧 평소의 협력, 친교, 연대 시스템 구축이 필요성을 강조한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유유미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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