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진 목사와 어느 승려
엘렝틱스 대 성취론
WCC 바로알기 29
1. 여러 해 전에 강원도 해안 어느 지역의 목사들과 승려들이 축구시합을 한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서울의 기자가 이 특이한 만남을 취재하려고 그 곳에 찾아갔지만 그 친선경기는 성사되지 않았다.
2. 목사들 측이 친선 축구 경기를 취소시켰다. “어찌 목사가 승려들과 축구시험을 한다는 말인가 ” 신우들의 불평이 높았고 이를 감당할 수 없어서 계획을 취소했다. 나는 그 경기가 성사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인들이 그 정도의 도량과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종교인 간의 친선경기는 대립과 긴장을 해소시킬 수 있다. 친선축구 대회를 기획하고 기자에게 알리는 등의 정황을 보아 아마도 목사들이 타 종교인과 만남, 친목, 대화, 친선경기는 공동의 봉사 목적의 연대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마음이 약한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취소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4. WCC 초대 총무 비셔트 후프트가 정리하는 이 단체의 ‘대화’ 개념 여섯 가지를 다시 점검해 보자. 첫째, 모든 종교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경험의 결과라는 가정에 기초한 대화이다. 절대적인 종교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 모든 역사적 종교들이 하나의 전체에서 파생된 부분들의 나타남(manifestation)이라는 개념의 대화이다. 종교는 본래 하나인데, 역사 안에서 여러 갈래도 나타났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의 보편적 종교를 창설할 시간이 왔다고 보는 시각으로 진행하는 대화이다. 세계종교 통합을 위한 종교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넷째, 타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모르지만 그들도 모두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는 대화이다. 익명의 그리스도 개념의 대화이다. 다섯째는 상호이해와 만남과 친교 목적의 대화이다. 종교인 간의 친목 도모에 필요한 대화이다. 여섯째, 상대방의 관점에서 출발함을 원칙으로 삼는 대화이다. 여러 종교들을 동격, 동가의 신앙공동체로 인정하는 대화이다. 종교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로 발전하는 단계의 대화이다.
5. 비셔트 후프트는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대화를 지지한다. 여섯 번째 ‘대화’를 지지하는 까닭은 타 종교에서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독인이 자연과 삶을 지배하는 힘을 숭배하는 제의와 삶 자체를 숭배하는 종교들에서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비셔트 후프트, <에큐메니칼 운동의 미래>, 79-80). 비셔트 후프트는 이것을 혼합주의가 아니라 원초적인 케리그마 행위라고 한다. 비셔트 후프트가 말하는 케리그마는 바울 사도가 말하는 케리그마(고전 1:21)와 같지 않다.
6. 나는 다섯 번째 종교 간의 대화 곧 연대(cooperation) 목적의 대화에 동의한다. 이 대화 유형은 신앙고백적인 일치 곧 신앙고백에 기초한 교회들의 연합(unity)이 아니다. 목사들과 승려들의 축구 경기와 같은 친목 목적이 만남이다.1919년 삼일 독립기념선언서에 목사들이 승려들과 연대 서명하고 일제를 향해 투쟁했다.
7. 연대 목적의 종교 간의 대화는 다원적인 세상에서 종교인이 의기투합하여 기여할 일이 많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세계의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연대할 수 있다. 세계의 경제구조를 바꾸고, 자연 생명을 오염시키는 환경파괴를 막고, 인권과 착취에 대항하는 연대를 형성하고, 공동의 투쟁 기준을 찾고, 인류의 현실적 과제들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진행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인간화와 해방투쟁을 위해 연대하여 이웃과 사회에 더 잘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8.. 엘렝틱스(Elenctics)는 선교학 과목이다. 엘렝틱스라는 용어는 헬라어 동사 ‘엘렝케인’에서 왔다. ‘부끄럽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명사 엘렝쿠스(elenchus)는 ‘반대 논증’ 또는 ‘논박’을 의미한다.
9. 엘렝틱스는 타종교에 대한 반대논증, 논박 경책하는 태도로 접근한다. 타종교의 구원 부적합성과 허위성을 폭로하고, 기독교 구원의 적합성, 진리성, 절대성을 선언하는 법을 가르친다. 어느 한국인 신학교수는 엘렝틱스를 '종교경책학'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10. 엘렝틱스는 죄의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모든 이교의 가면을 벗고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도록 하는 학과목이다. 성경적 선교 이론을 수립한 네덜란드 선교학자이며 교의학자인 헤르만 바빙크(Johan Herman Bavinck, 1895-1964)가 사용한 용어이다.
11. 신약성경은 엘렝틱스적 표현들을 담고 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 1:15).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12. 엘렝틱스는 이방 세계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책망하여 죄를 깨닫게 하는 복음전도 활동이다. 강력한 회개의 요청이다. 초대교회의 복음전도는 선교의 엘렝틱스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은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되심을 전하며 그를 믿고 회개할 것을 설교했다. 그 결과 삼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열매를 얻게 되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선교현장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강한 교훈을 준다.
13. 복음적인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그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메시지는 엘렝틱스 방식일 수밖에 없다. 선교에는 죄를 깨닫게 하는 복음의 분명한 제시가 필요하다. 전하는 자가 없이 어찌 믿을 수 있으며,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이 없이 어떻게 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 올 수 있겠는가? 복음 제시 없는 전도와 복음 듣는 자의 회개 없는 개종은 이교적이다.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말했다.
14. 엘렝틱스 접근방 식은 타종교에 대한 바울의 관점과 일치한다. 복음전도는 케리그마(고전 1:21) 활동이다. 복음전도나 복음은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정의되지 않는다. 엘렝틱스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탓으로 하나님은 전도(케리그마)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 구원을 받게 한다. 케리그마는 일방적인 선포이다. 변론, 논쟁, 심의를 허락하지 않는다.
13. 예장 통합은 WCC의 “성취론”을 옹호한다(<복음적 에큐메니칼 신앙>(2021). 금주섭 박사는 "종교 간의 대화는 기독교가 소수 종교로서 박해 받는 지역에서 교회와 성도의 신앙의 자유와 보호를 위해 필수적인 선교입니다"라고 하고서 종교다원주의와 직결된 중요한 신학 용어를 등장시킨다. “WCC는 희랍종교의 종교성을 인정한 사도 바울의 아레오파고스 설교를 기초로 성취론적 입장을 취하며, 다른 종교의 신앙을 존중합니다. 신앙의 열정을 타종교에 대한 적대적 배타성이나 공격성으로 표현하는 것은 선교적으로 미성숙한 접근입니다. 자칫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전도의 문을 닫을 수도 있는 지혜롭지 못한 방식입니다”(복음적 에큐메니칼 신앙, 50-51)라고 말한다.
14. 금주섭이 말하는 “성취론적 입장”이란 “타종교의 부족한 부분을 기독교가 완성시켜 준다는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취론적 입장은 타종교 전통을 부분적으로 긍정하고 양자를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는 종교다원주의 관점이다. 종교다원주의자 김경재 박사, 변선환 박사 그리고 토착화 신학자 윤성범 박사, 유동식 박사 등이 ‘성취론적 입장’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15. 토착화 신학은 ‘상황 신학’(contexual theology)이라고도 한다. 유럽 기독교의 교리와 역사 전통 뿐 아니라 동양의 종교와 문화 전통도 신학적 사유의 대상과 내용이 되어야 한다면서,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 사상 사이의 대화를 적극 모색한다.
16. 성취론적 입장은 유럽인들에게 비기독교 종교전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연구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고 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로 직행한다.
17. 바울은 그리스 종교를 긍정적으로 보았는가? 그리스 종교들과 상호동등관계에서 대화를 했는가? 동격 동가로 여겨 대화하고 싶어 했는가? 바울은 그리스 종교의 존중했는가? 그리스 종교를 구원의 길로 보았는가?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성취론적 입장으로 한 것인가 바울은 아테네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예수와 그의 부활의 소식을 전했다. 바울은 엘렝틱스적 복음전도자이다. 비셔트 후프트가 열거하는 WCC의 종교 간의 대화와 불일치하는 태도로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성취론 태도가 아니라 엘렝틱스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8. 사도행전 17장은 바울이 성취론 입장이 아니라 엘렝틱스 태도로 복음을 전했음을 말한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22-31)
19.
20. 엘렝틱스는 기독교 유럽의 문화우월주의, 서구침략주의, 식민지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기독교를 유럽인의 종교로 여기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람들과 타종교인들의 강한 거부감을 자아낸다. 기독교가 식민주의자들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은 유럽 형 복음전도를 가로 막는 아킬레스건이다. WCC가 선교와 전도의 개념을 바꾸고 모든 종교들을 동격 동가로 여기는 종교 간의 대화를 진행하는 것은 반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 타종교인과의 친목와 연대 개념의 대화는 상호 존중과 이해를 전제로 하는 듣기와 말하기이다.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는 의사소통 활동이다. 기독인의 타 종교인과의 대화는 그 자체로 선교 접촉점(contact point)을 만드는 복음화 활동이다.
21. 복음적인 전도자는 타종교인에게 인간적으로 솔직하게 접근한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할 목적과 의도로 대화를 한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공통점과 차이를 알아본다.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무엇과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바를 찾는다. 자기가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만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고 고백하여 그에게 굴복하기를 원한다.
22. 기독인이 타종교인과 대화를 할 경우, 자기의 저의를 숨기지 않는다. 대화 파트너에게 진실을 말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그 복음과 진리를 증언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23. 진정성과 민감성을 가지고 타종교인들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네고,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타종교의 장점을 배우고 싶어 하기도 한다. 종교 간의 대화는 복음을 소개하는 만남과 소통(contact point)의 기회이다.
24. 역사적 기독교는 종교다원주의 형태의 대화를 거부한다. 종교적 자기정체성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근본 도리를 부정하고 모든 종교가 구원의 길이라는 식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전제로 하는 종교 간의 대화를 환영하지 않는다. 종교인 간의 평화, 협동, 격려 중심의 '종교 간의 행동하는 대화'는 환영할만하다.
25. 종교적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종교 간의 대화 방법이 있는가? 종교 간의 갈등은 이데올로기 대립의 피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재앙을 가져온다.
26. 종교가 다르지만 타종교인과 친구로 가깝게 지내는 방식의 ‘대화’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필자는 '종교 간의 행동하는 대화'(Religious Dialogue of Action)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종교 간의 행동하는 대화는 종교인 간의 상호 갈등을 줄이고 화합과 협력으로 평화와 사회 발전을 도모하고 연대감을 가지는 대화를 권한다. 이 대화는 종교 갈등을 잠재우는데 도움을 준다. 종교적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선교 접촉점(point of contact)을 만들 수 있는 대화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유유미션 대표
저작권자 ⓒ 리포르만다, 무단 전재-재배포-출처 밝히지 않는 인용 금지
choicollege@naver.com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