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 바로알기 6, 7
에큐메니칼은 에반젤리칼인가?
1. 채수일 박사
한국에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논법을 근거로 WCC를 변호하는 에큐메니스트 신학자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한신학대학교의 채수일 박사,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이형기 박사, 영남신학대학교의 박성원 박사이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에큐메니칼이야말로 진정한 에반젤리칼”이라고 말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곧 복음적 운동이다. 진실로 에큐메니칼 하면 에반젤리칼 하고, 진실로 에반젤리칼 하면 에큐메니칼하다”고 한다, 가상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역설을 WCC라고 하는 현실세계에서 실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WCC 제10차 부산총회(2013)를 앞두고서 한국교회 안에 “에큐메니칼이야말로 진정한 에반젤리칼이다”라고 말이 유행했다. =WCC의 신학적 정체성을 논의하는 학술 마당에서 “에큐메니칼이야 말로 진정한 에반젤리칼이다”라고 말했다. 출간된 글로 주장하기도 했다.
에반젤리칼은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일치운동 곧 예수 구원의 복음 중심의 신앙을 지향하는 자들이나 구릅이나 선교활동을 일컫는다. ‘에반젤리칼’(evangelical)은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뜻하는 ‘에반겔리온’(evangelion)이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에큐메니칼은 연합일치운동을 지칭하는 일반적 명사이다. 교회연합과 일치 운동은 모두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이 용어는 WCC 중심의 진보계 교회연합일치운동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편의상 에반젤리칼에 상반되는 사고방식, 신학, 활동을 펼치고 있는 진보계 교회연합일치 활동을 일컬어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일컫는다.
채수일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선교신학-에큐메니칼 신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에큐메니칼 신학자이다. WCC 부산총회(2013)을 앞둔 시점에 서울 종로 소재 기독교100주년기념홀에서 열린 어느 학술모임에서 “에큐메니칼이 진정 에반젤리칼”이라고 주장했다.
채수일의 이 말은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므로 두 진영의 구분을 없애고 하나로 묶어 통합해야 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에큐메니칼 선교와 에반젤리칼 선교가 다르지 않다는 가정에 근거한 주장이다.
채수일은 2010년에 “에큐메니칼 신학: 선교, 사회윤리를 중심으로”(<베리타스>, 2010.04.27)라는 글이 발표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신앙과직제위원회 에큐메니칼 신학에 대한 대 토론회” 발제문으로 쓴 글이다.
채수일에 따르면 에큐메니칼 신학과 에반젤리칼 신학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날카롭게 대립되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두 진영 사이의 대립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시기는 WCC 방콕 선교대회(1973년)가 ‘오늘의 구원’을 주제로 모이고 이듬해 복음주의자들이 스위스 로잔에서 제1차 세계복음주의국제대회(1974)를 가지면서 맞불을 지필 때였다.
채수일은 에반젤리칼들의 로잔대회는 제3세계의 구조적 빈곤에 대한 인식을 확대했다. WCC도 영혼구원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두 진영이 더 이상 도식적인 형태의 구분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한다. ‘영혼구원 대 사회구원’, ‘복음화 대 인간화’라는 대립구도가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WCC가 영혼구원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이 단체는 2020년대에 들어선 현 시점에서 이를 간과하고 있다.
채수일은 에큐메니칼 선교가 종교 간의 대화 쪽으로 기울어진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선교는 살아있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 설정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한다. “살아 있는 다른 신앙”이란 불교 이슬람 힌두교 등 기독교가 아닌 종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배타적인 뉘앙스를 가진 ‘타종교’ 대신 ‘이웃종교’ ‘이웃종교의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일컫는다.
채수일은 에큐메니칼 사회윤리가 제도개혁을 지향하고 에반젤리칼 윤리가 개인의 변화를 지향한다는 도식적 차이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시하는 근거들이 흥미롭다. -에반젤리칼 진영이 큰 규모의 물적 기반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에큐메니칼이 주 활동인 사회봉사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채수일은 에반젤리칼 그룹에 해당하는 예장 고신의 구성원인 손봉호 박사가 이끄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1987 창립)의 등장과 활동이 그 증거이라고 한다. 에반젤리칼 진영의 기독교시민운동으로 출범한 이 단체는 에큐메니칼 그룹의 주 관심과 활동인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충실하다고 한다.
채수일이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 진영 사이의 대립의 시기가 이미 지나갔고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하는 주장은 지나치게 피상적이다. 수박 겉핥기식의 식의 오판이다.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은 여전히 자유주의 신학과 궤를 같이 한다. 2020년대에 진입한 현재에도 여전히 십자가 구원의 복음이 없는 선교, ‘미시오 데이’, 하나님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일을 하나에 교회의 에너지를 소진하게 한다. 진리를 이해하는 진리 패러다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의 구분이 필요하지 않는가?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한국교회들이 외친 WCC 반대 움직임은 무엇을 말하는가? 유튜브 채널에 올라오는 WCC 반대 목소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2. 이형기 박사, 박성원 박사
이형기와 박성원도 에큐메니칼 운동이 에반젤리칼 운동이라고 하면서 두 진영의 대립 구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곧 복음적 운동이다. 에큐메니칼 비전을 반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비전을 반대한다는 말과 같다. (중략) 진실로 에큐메니칼 하면 에반젤리칼 하고, 진실로 에반젤리칼 하면 에큐메니칼 해야 한다. 에반젤리칼과 에큐메니칼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이형기 박성원 공저, <WCC 바로 알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 서울: WCC부산총회한국준비위원회, 2013).
“에큐메니칼은 에반젤리칼이다”라고 하는 주장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논법이다. 이 고양이는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WCC는 현실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화신이다. 이형기, 박성원의 주장도 WCC 반대운동이 거칠게 일어나는 마당에서 궁지에 몰려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위기를 모면하려고 내뱉은 말로 보인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가 2013년 말경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회집했을 때 나는 “WCC 부산총회의 선교와 전도 선언서 분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날 좌장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이 모 교수가 맡았다. 논평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권 모 교수가 했다.
논문의 요지는 WCC 신학과 역사적 기독교의 신학의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에큐메니칼 진영의 위 학자들이 “진정한 에큐메니칼은 에반젤리칼이다”는 주장의 모순을 지적했다. 어]
나는 좌장에게 이형기, 박성원의 앙시론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어떻게 그러한 사고가 가능하냐고 했다. 예장 통합 교단 구성원이고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현직 교수이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까닭을 알고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좌장은 논문발표를 마무리할 때 하겠다고 했다. 논평이 끝나자 그는 아주 간단하지만 영리한 답을 했다. “최 교수님도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하여 예장 통합 교단의 목사가 되고,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교수가 되었으면 이형기 교수와 박성원 교수와 똑 같은 답을 할 것이다”라고 했다. 참석한 학자들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 공동체의 사고 패러다임을 짐작하게 하는 답변에 한바탕 웃었다.
채수일, 이형기, 박성원의 주장을 접하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생각이 뒤틀리고, 어지럽다. 방향 감각을 유지할 수 없다. 아래가 위이고 위가 아래이며, 우편이 좌편이고 좌편이 우편이고, 내부가 외부이고 외부가 내부이며, 음이 양이고 양이 음이며, 음양이 하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양자중첩의 역설에 등장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가상 세계의 가상 동물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죽은 고양이인 동시에 살아 있는 고양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이라는 양극을 하나로 묶는 것은 가상 세계에서 가능할지 모르나 현실 세계에서, 진리를 다루는 신학마당에서는 불가능하다.
3. WCC의 12가지 특징들
사도, 감독, 기독인은 화평케 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 서로에게 마음을 넓히고 다른 점들을 용납하는 태도를 가짐이 마땅하다. 같은 것 중심으로 일치연합을 도모함이 옳다. 그러나 그 다른 것이 기독교의 본질에 속하고, 근본진리에 해당하는 것이면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옳다.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더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느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랴”(고후 6:14-15)고 말한다.
나는 2010년에 WCC의 위험성을 12가지로 간추려 발표했다. 이 성명은 WCC가 기독교 복음 전파에 역행하고 교회 건설 사명을 방해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을 약화시키는 반성경적, 비기독교적 단체라는 말로 시작한다.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의 구성원으로 WCC의 위험을 지적한다.
① WCC는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최종적 규범이라는 것과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② WCC는 성경의 기본 교리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과 일치를 추구하며, 이단과 적그리스도와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규제하지 않고, 교회의 변증적 사명을 무시한다.
③ WCC는 개신교회의 토대인 전통적인 구원관, 특히 이신칭의의 신앙을 약화시키거나 상대화 하며, 인간해방과 혁명을 구원 행위로 본다.
④ WCC는 다른 종교에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있다고 하며,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유일성을 부정한다. 결과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할 당위성을 포기하였다.
⑤ WCC는 성령을 정령(精靈)과 동일시하는 초혼제(招魂祭)를 용납하고, 성령을 물활론(物活論)적으로 해석하는 비기독교적 사상을 방조하였다.
⑥ WCC는 ‘하나님의 선교’(misso Dei)라는 개념을 선교에 도입하여 인간화, 화해, 사회참여 등을 선교의 지상과제로 보며,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는 전도의 긴박성과 구령사업을 저해한다.
⑦ WCC는 ‘통전적 선교’를 말하면서도 실상은 빈곤퇴치와 사회활동과 구조악 철폐 등에 치우친 선교를 하고 있다.
⑧ WCC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일치를 추구하고 정교회를 회원으로 가입시켜 선교 유예(moratorium)를 시행하도록 하여 성경적 복음 진리 전파를 방해한다.
⑨ WCC는 마르크스주의와 해방신학과 궤를 같이하는 좌파 성향의 용공주의 태도를 지녀왔고, 공산권 안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 생명박탈, 신앙의 억압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⑩ WCC는 ‘교회’의 연합체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성찬 중심의 교제 단체이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 교회의 첫 번째 표지인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실상 교회의 본질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포기하였다.
⑪ WCC는 신학적 다원주의와 신앙무차별주의(indifferentism)을 지향하며, ‘교리는 분열시킨다’고 하면서 기독교 교리의 중요성을 폄하하고 교회의 생명력을 쇠퇴시킨다.
⑫ WCC의 외형적 기구 일치운동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진리 안에서 일치된 신앙고백공동체, 곧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분열시킨다.
이것들은 종교다원주의, 종교대화주의, 종교혼합주의, 사회구원 지상주의, 용공주의, 개종전도 금지주의, 로마가톨릭주의, 가시적교회 일치주의, 신앙고백형식주의, 성경불신주의로 정리된다. 나는 10가지 항목의 글을 담은 <에큐메니칼 아이덴티티>(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0)을 출간했다. 어느 그룹이 이 책을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채 위 성명문을 담아 <WCC 무엇이 문제인가?>(서울: 총회출판국, 2010)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는 해프닝도 있었다.
나는앞서 저술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이어 WCC의 신학과 특징들을 세밀히 연구한 <신학충돌>, <신학충돌 II>, <교황 신드롬>을 출간했다. 모두 이 단체의 신학적 정체성을 규명한 책들이다.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의 차이는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는 정도인가? 아니면 성별(聖別)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가?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은 융합할 수 없는 두 지평을 달라고 있다. 중심축이 다르다. 왼쪽으로 도는 팔랑개비와 오른쪽으로 도는 팔랑개비의 방향이 다르듯이 다르게 돌아간다. 지구의 북반부 욕탕 배수구 방향과 남반부의 방향이 다른 것과 같다. 자유주의 신학과 역사적 기독교의 정통신학이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 영지주의와 정통 기독교가 다르듯이,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4. 진리 패러다임의 차이
역사적 기독교의 정통신학은 규범신학에 해당한다.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인 규범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담인 영원한 진리라고 믿는다.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과 에반젤리칼 진영의 가장 큰 차이는 진리 패러다임의 차이이다. 전자는 이성주의, 합리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 칸트의 인식론, 그리고 이 인식론이 가져온 진리상대주의, 주관주의, 나아가 절대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직결되어 있다. 성경적 진리에는 등을 돌리고 탈기독교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진리는 불변하는 것인가 가변적인 것인가? 상황, 맥락에 따라 바뀌는가 고정되어 있는가? 어제 진리이면 오늘도 진리이고 내일도 진리인가? 하나의 진리가 단수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다수 또는 복수로 존재하는가? 진리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것인가?
진보계 신학자들, 에큐메니칼 신학은 진리를 상대적이고 주관적이고 가변적이라고 이해한다. 진리의 불가변성(immutability)를 거부한다. 진리는 단수(one)가 아니라 복수(plural)로 존재하고, 절대적이거나 고정되어 않으며, 상대적이며 주관적이고 맥락에 따라 변한다고 본다.
에반젤리칼 사고는 진리는 불변하고 하나이며, 객관적이리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하다고 믿는다.
에반젤리칼 그룹은 역사적 기독교 전통을 따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성경이 하나님이 영원한 진리를 인간의 이해 채널에 맞게 계시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특별 계시라는 채널을 거쳐 우리에게 준 진리는 상대적이거나 주관적이거나 가변적이지 않으며, 절대적이며 불변하며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영원하다고 믿는다.
에큐메니칼 신학과 에반젤리칼 신학은 조화, 융합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지평을 달리고 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서로 다르다. 조화, 융합, 병합, 일치할 수 없는 가장 큰 까달은 서로 다른 진리 패러다임이다. 성경에 토대를 둔 ‘규범신학’과 다수가 동의하는 것(integrally)을 진리로 여기는 ‘정합신학’은 융합, 일치할 수 없는 지평을 유지하고 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BREAD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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