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을 경계하라
최덕성 교수의 방언 강의를 듣고
나는 방언이 기독인이 성령의 불과 함께 받은 체험적 은사라고 알고 있었다. 모태 신앙인으로 자라 오면서 목격하고 이해해 온 바가 그러하다. 방언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드리는 영의 기도라고 생각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기도할 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서 입과 혀가 나 자신의 언어가 아닌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생각과 의도와 무관하게 발성기관이 움직여 드려지는 기도 정도로 이해했다.
내가 방언을 처음 받았을 때 내뱉고 있는 말은 우리나라 말이 아닌 이상한 언어었다. 의도적으로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저절로 이상한 발음이 쏟아져 나왔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는 그 기도하는 내용을 알지 못한다. 방언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이러한 방언 기도가 정상적인 것인지 비정상적인 것인지 고민했다. 조언자는 통변의 은사를 받지 않으면 방언을 할 때 그 내용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상당히 오랜 신앙생활 동안에 방언과 그에 관한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다. 방언이란 그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하는 기도로 여기고 살아왔다. 이를 자세하게 알고 싶어 하거나,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궁금했던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방언이 그런 종류의 신비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방언에 대하여 그냥 교회가 가르쳐 주는 대로 받아들였고, 이야기를 들은 만큼만 알고 있었다.
브니엘신학교 대학원 2학년 과정에 개설된 성령론(최덕성 교수 강의)을 수업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접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방언의 다양한 측면을 배우고 주의 깊게 생각히는 기회를 가졌다. 신학과 교회 현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공급받은 귀하고 뜻 깊고 유익한 강의였다.
우리는 '방언'이라고 하면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을 떠올린다. 하나님은 하늘에 닿을 목적으로 바벨탑을 짓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들을 수 없게 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초자연적인 방언이 주어졌다. 기독교 진리의 진정성을 확인시킨 표적 방언이 있었다. 예수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애 대한 주의를 주고있다. 방언은 이를 알아듣는 자가 없으면 통역을 대동하고 그렇지 않는 경우는 하지 말라고 한다.
오늘날 방언을 환영하고 찬성하는 사람들과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방언 즉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생각한다. 한편, 1900년대 초에 등장한 현대 방언을 가짜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현대 방언이 악령에 이끌림을 받는 증거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방언에 대한 다양한 견해는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모든 사람들이 방언을 내가 이해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론 방언 강의를 들으면서, 방언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고 요점들을 생각을 해 보면서, 처음으로 방언에 대한 여러 가지 논쟁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방언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들과 견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경은‘방언’을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언급한다. 그런데 성경이 언급하는 방언은 오늘날의 방언과 같지 않다고 한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다. 복음을 증거하고 알아듣고 믿음을 가지게 하려고 주어진 성령의 은사이다. 현대 방언은 방언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방언 현상이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것이고 교회에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언 강의를 듣다가 이 언어일탈 현상이 기독교 뿐 아니라 불교, 힌두교 등 모든 종교의 신비주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이단, 사이비 집단에서도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요즘 이단들이나 사이비 종교들은 자주 텔레비전이나 미디어 채널들을 이용하여 자파의 교리를 선전한다. 나는 그 집단이 방언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이 방언 연기를 하거나 귀신들려 그런 방언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눈에는 기독인들의 방언이 이들의 방언과 같은 것으로 인식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방언을 성령의 은사이며 기독인이 꼭 받아 누려야 할 신앙요소라고 배웠고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다. 그래서 모든 교회들이 방언을 권장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최덕성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서 그리고 이 글쓰기 연습 과정에서 방언의 정체를 세밀히 공부하였다. 방언이 놀랄 정도로 다양한 국면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의 방언과 방언기도에 헛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방언에 관한 인터넷 글 이것저것들을 읽어보니 기독교 안에서는 개혁교회와 보수적인 신자들이 방언을 경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늘날의 방언이 초대교회에 부어진 방언과 같지 않으며, 아떤이들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가 아니라면서 배척한다.
방언이 성령의 은사라고 생각하며 살아 온 나에게 이러한 견해는 충격적이다. 방언을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영의 언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최덕성 교수님께서는 성경이 현대 방언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대 방언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성경구절은 성경전체에서 딱 한 구절 있다고 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이라”(고전 14:2).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발성으로 신에게 무엇을 아뢰는 말이다.
최덕성 교수님은 바울이 방언을 제한적으로 허용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그 방언은 외국어 말하기라고 한다. 언어의 벽이 높은 고린도지역의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성령의 능력 덧입힘으로 방언을 말하는 현상이 있었다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 신전들에서 오늘날의 방언과 같은 황홀한 체험 현상을 금하는 방언에 관한 가르침 도입 부분에서 이교풍 방언을 하지 말라는 반어법적 꾸짖음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고전 14:2).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하는 방언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고, 상대방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완벽히 알아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방언은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비밀스러운 기도라고 생각해 왔다.
성령론 방언 강의를 들고서 비로소 고린도전서 14장 2절이 고린도교회 일부 신자들이 영으로 '신에게' 비밀(신비)을 말한다고 했고, 바울이 그것 즉 자신과 타인도 모르는 말을 하는 것을 질책하고 꾸중하고 경계하는 반어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
초자연적인 현상의 방언은 처음으로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처음 나타났다. 사도행전 2장 4절은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한다. 그런데 오순절 날의 방언과 구약시대의 바벨탑 사건 때 일어난 언어 혼동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왜 방언 반대자들은 방언이 끝났고 오늘날의 방언이 가짜라고 말하는가? 사도행전의 방언 기록 이후에 방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근거 삼는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를 근거로 제시한다. 사도 시대 이후로 성경은 사도행전과 동일한 방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현대 방언은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아니라고 한다.
오늘날에 성행하는 방언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이 방언이 심리적으로 유도된 현상이거나 악령(귀신)의 역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언의 배후에 악령이 있다는 말이다. 방언에 악령을 대입하는 것은 나에게 충격이다. 내가 하고 있는 방언이 마귀 활동일 수도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방언은 그쳤는가? "그쳤다"라는 한 구절만으로 성령이 주시는 방언 은사가 완전히 종식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성령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시대는 오늘날까지 말세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방언이 그쳤다고 하는 성경 구절 하나만으로 이미 방언이 끝났다고 판단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어 보인다. 예수님의 부활이후 오늘날까지 말세가 이어지고 있듯이 성령시대인 오늘날에 여전히 빙안 은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최덕성 교수님의 성령론 11강과 12강 강의는 오늘날의 방언이 오순절 날의 방언과 같다면 그 방언의 내용이 하나님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 복음을 듣는 자들이 그 복음을 환하게 알아듣고 일련의 반응을 보여야 마땅하다고 한다. 방언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방언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믿음이 약하거나 성숙하지 못한 단계에서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방언 강의 중 가장 인상이 깊은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체험과 선 이해에 따라 판단하는 문제점에 관한 언급이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최종적인 권위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우리의 체험을 가지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말이다.
성령론의 강의를 듣기 전, 나는 방언이란 그냥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은사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령론 수업에서 그리고 이 글쓰기를 훈련 과정에서 방언이 무엇인지 소상히 배웠고, 나의 생각 또한 하나의 견해에 치우친 것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의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것이거나 사탄의 역사이거나 아니면 그냥 가짜 방언 또는 심리적인 현상일 수 있다. 현대 방언을 경계해야 할 까닭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나는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단정짓기엔 지혜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 성행하는 현대 방언의 성경적 토대가 부실하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성령론은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간구해야 하지만 치우치거나 성경이 모범으로 보여주지 않는 현상에 깊이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방언이나 방언기도를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생활과 실천의 최종적인 권위로 여겨 그것을 기준 삼으면, 성령께서 같은 배움이라도 더 옳고 더 귀한 깨달음을 주실 것이다.
김염미/ 브니엘신학교 신학원 2학년
편집자 주: 이 글은 브니엘신학교 신학원 목회학 석사(Master of Divinity) 과정 <성령론> 과제로 제출한 '학술 에세이'이다. 하나의 명료한 주장-논지를 가지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차례 차례 제시한다. 최덕성 교수의 지도를 받아 이루어지고 있는 신학수업, 비평적 사고훈련, 학술 에세이 쓰기, 목사후보생 교육의 단면을 보여준다.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