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석과 그의 시대' 추천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초원교회(목사 신재철)의 홈페이지 '목양수필'은 아래에서 소개하는 글을 담고 있다. 이상규 편, <송상석과 그의 시대>(2021)의 ,발간 배경에 관한 글이다. 이 책에 실린 정판술 목사의 추천를 화두로 삼고 있다. 정판술을 3인칭으로 설정한 것을 보아 글의 앞부분은 초원교회 목사 신재철이 쓰고 뒷 부분에 정판술의 추천사를 첨부한 것으로 보인다.
신재철은 자신이 이 책의 출간에 상당히 이바지했음을 밝히고, 이 책의 출간 배경에 대한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이 책이 출간되면 송상석 목사의 가문이 영적으로 부활할 것이다. 나아가 경남노회의 역사가 제대로 회복이 된다. 고신교단은 바른 역사도 정립이 된다. 이상규 교수는 균형 잡힌 공정한 사가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의 제자인 나도 바른 역사기술에 도구로 사용을 받았음이 드러날 것이다"라고 한다.
신재철의 이 글은 <송상석과 그의 시대>라는 제목의 책이 '한파'(한상동파)에 대한 '송파'(송상석파)의 한이 서린 작품임을 시사한다. 이 책이 저술된 배후에 짙은 한이 깔려 있음을 암시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상규가 편찬한 위 책이 송파의 '한'을 담고 있는 바 예장 고신교단 안의 '송파' 계보에 속한 인사들의 한풀이 마당이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신재철의 이 글은 이 책이 '송파'의 한풀이 마당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배경설명을 하고 있다.
송상석 목사가 끗빨을 날린 시점은 반세기 전이다. 그러나 한파와 송파의 알력과 역사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송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안목을 가진 '한파' 구성원들은 아직도 상당수 생존해 있다. 몇 해 전 이들은 송상석을 출옥성도로 기술한 고신 경남노회록을 역사날조라고 비난해 왔다.
역사기술에는 다분히 감정이 깃든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고 보는 실증주의가 망상임이다. 신재철은 "균형 잡힌 공정한 사가"라든지, "바른 역사기술"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역사'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바른역사기술, 객관적인 역사기술이 가능한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송상석 목사를 추종해 온 손상률 목사는 위 책 출간기념회 설교에서 “송 목사님은 근현대사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특히 한국교회 역사에 잊혀선 안 될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분의 업적이 간혹 왜곡되어 본인과 가족에 깊은 상처를 남긴 채 반 세기 묻혀 있었다”며 “한국교회와 역사연구소의 역작으로, 잊힌 인물을 다시 찾은 역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했다.
위 책은 신국판 560면으로 만들어졌다. 이상규의 글, 송상석 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11장의 글, 송상석과 그의 시대에 관한 9장의 글, 그리고 부록 3편으로 엮어져 있다. ‘송상석 목사의 사역과 공헌, 절제운동, 법정소송, 역사의식, 출판과 문서운동, 고신교회 변론, 새찬송가 편찬 업적 등 긍정적인 면들을 소개하고 있다.
송상석과 그의 시대 출판에 정판술 목사가 추천사를 적었다/ 신재철/ 2021/1/20
이 책이 출간되면 송상석 목사의 가문이 영적으로 부활할 것이다. 나아가 경남노회의 역사가 제대로 회복이 된다. 고신교단은 바른 역사가 정립된다. 이상규 교수는...
’송상석과 그의 시대‘가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상규 교수가 2년여의 수고 한 결과 이제 마무리를 하는 단계이다. 이 교수는 기고자들을 선정하여 원고를 수렴했다. 송상석 목사는 고신교단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 원로여서 기고자에 제한이 따랐다.
한상동 목사를 지지하거나 그에게 치우친 인사들에게는 글을 요청할 수도 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여러 기고자의 글을 교정함에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일들이 늘 밀려 있는 이 교수를 생각하여 교정을 자청했다. 제자의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목회자여서 시간의 여유는 없다. 그리하여 아내가 교정을 도맡았다. 이를 마친 후 각주에 대한 교정은 아들인 상훈 전도사가 감당했다. 이 교수에게 교정본을 송고했다. 이 교수는 이를 읽고는 “상훈이가 수고했고 잘했네요.”라고 시작하여 감사를 돌렸다.
이 교수는 상훈이가 결혼할 때 주례를 섰다. 고려신학대학원에는 고신대학 출신들이 상당수가 입학한다. 상훈이는 이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이상규 교수에 대해 더욱더 알게 되었다. 그간은 단순하게 자신의 아빠 스승 정도로 또한 훌륭한 사가로서의 스승 정도로만 알았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만난 동료들을 통해 이 교수의 진가를 더 알게 되었다. 동료들은 이 교수가 상훈이의 주례자였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모두 부러워했단다.
상훈이가 각주 교정을 볼 때 다소 어려움이 있었음을 토로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것 등을 찾아 교정함에 애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도 애초에 이를 감지했다. 이를 알기에 이 교수는 결국 교정이 잘 되었음에 대해 이 교수는 안심이 된 것이다.
이어 이 교수는 강종환 장로의 기고에 대해 격찬했다. 연구를 잘했고 이번 책에 크게 유익한 기고를 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점을 감지하고 진즉 강 장로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강 장로는 경남노회를 대표하는 장로 사가이다.
사실 목사들이 이 노회에 적지 않게 소속되어 있지만, 강 장로의 역사적인 식견을 따를 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강 장로의 역할을 중요한 것이다. 송상석 목사가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을 했기에 경남노회에 속한 목사와 장로들은 일정 부분 송 목사의 혜택을 입었거나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박윤섭 장로는 내가 송상석 목사와 관련된 소송문제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밝혔을 때 대단히 기뻐했다. 이미 박 장로는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뒤를 이어 다음 세대인 강종환 장로가 미진한 역사연구에 참여하고 있으니 참으로 귀한 장로이다.
이상규 교수는 이 책이 나오기 전에 박병식 목사와 정판술 목사에게 추천사를 받기원했다. 합신교단과 고신교단에서 각각 총회장을 역임한 비중이 있고 신학적인 안목이 탁월한 목사들이다. 이런 의중을 나에게 전하여 바로 두 목사에게 청을 드렸다.
박 목사는 제자인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로 승낙했다. 나의 연구를 통해 이미 송상석 목사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쉽게 허락을 한 것이다. 박 목사는 이미 류윤욱 목사가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를 출간할 때 추천사를 써준 일이 있다.
정 목사도 나의 청에 바로 승낙을 했다. 정 목사는 내가 박사학위 논문 연구 중에 만나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자신은 ’한파‘가 아니라 ’송파‘라고 힘을 주어 강조했었다. 이런 마음은 그의 추천사를 정독하면 쉽게 읽혀 진다.
고신교단의 한상동과 송상석이란 지도자 중 자신은 송상석을 따르고 지지한다는 의미였다. 이런 정 목사였기에 ’송상석과 그의 시대‘의 출간을 알리고 청을 한 것이다. 정 목사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이미 90세가 넘었으니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 것이다.
약속한 대로 정 목사는 추천사를 잘 기술해 전달해주었다. 이를 이 교수에게 전송하니 자신이 청을 했을 때는 정중하게 거절을 했는데 역시 신 목사는 대단하다는 격려를 돌렸다. 이 교수의 청에 부담이 있었으나 수일 후 내가 다시 청하니 마음을 돌린 것으로 생각한다.
이 책이 출간되면 송상석 목사의 가문이 영적으로 부활할 것이다. 나아가 경남노회의 역사가 제대로 회복이 된다. 고신교단은 바른 역사도 정립이 된다. 이상규 교수는 균형 잡힌 공정한 사가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의 제자인 나도 바른 역사기술에 도구로 사용을 받았음이 드러날 것이다.
정판술 목사의 추천사는 다음과 같다.
“먼저 ‘송상석과 그의 시대’ 가 출간되는 일에 대해 축하를 드립니다. 우리나라에 장로교 총회가 결성된 것은 1912년이었습니다. 1884년에 알렌 선교사의 입국 이후 여러 나라 선교부에서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의 복음 선교는 진실했고 열성적이었습니다. 1910년에 일제의 식민지가 시작된 것은 자연스럽게 한국교회가 민족교회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제 36년 어간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강요를 받는 기막힌 일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순교자가 배출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운동을 통해 계속하여 한국복음화를 원하셨습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하도록 한상동 목사님과 같은 분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 동역자들을 세워 고려신학교가 설립되게 하셨습니다. 이때가 1946년이었고 이어 1952년에 고신교단의 독노회가 결성되고 1956년에는 고신총회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 초에 기존총회에서는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뭉친 신앙의 동지들에게 예배당 명도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는 분명한 아픈 역사였습니다. 우리 고신교단은 형성 초기부터 난관을 맞은 것입니다. 당시 고신의 지도자인 한상동 목사님은 시무하시던 초량교회를 떠나 삼일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옥고까지 치른 분인 한 목사님이 여전히 성경에 입각한 처신을 보임으로 고신교단이 한국교회의 본이 되는 교단으로 출발하게 함에 큰 의미를 더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신앙의 동지들이 교회의 재산권을 다 포기한다면 고신교단의 형성에는 큰 산이 막힌 길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또 다른 지도자이신 송상석 목사님은 교파가 다르다는 점을 들어 예배당 명도소송을 제기한 기존총회 측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셨습니다. 이때 고려신학교 교수였던 박윤선 박사님은 교단이 같거나 다른가에 관계없이 성경에 입각하여 성도 간의 불신법정 소송은 불가하다는 주장을 전개하셨습니다. 박 박사님의 지론은 원리상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단이 다른 경우엔 적용하기가 어려운 점이 현실이었습니다.
이때 한상동 목사님께서 어떤 원리를 가지고 대응하시는가는 고신교단 향방에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지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당시 한 목사님은 송상석 목사님의 법적 대응을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송 목사님을 비난 내지 비판하지도 않았습니다.
송 목사님께서 한 목사님의 신앙과 그 지도력을 존중하여 주셨습니다. 고신교단의 출발 자체가 신사참배를 반대한 지도자들과 이를 따르는 목사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송 목사님은 자신이 궂은일을 도맡아 감당하더라도 한상동 목사님의 고귀한 신앙 정신을 지켜드려 고신교단의 확장에 자신은 통로가 되기를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1950년대 초에는 법적 소송이 내재 된 상황에서 고신교단이 진로를 헤쳐나가야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인정하는 고신교단으로 자리를 잡아간 배경에는 한상동 목사님께서 전면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서 교단의 행정적인 뒷받침을 하신 송 목사님의 수고를 결코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를 중시하는 사가들이 규명해 가고 있는 바이지만 고신교단의 초기역사에 있어 송 목사님께서 공헌한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1960년에 박윤선 박사님이 고신교단을 떠나셨지만 남은 한상동 목사님과 송상석 목사님의 협력으로 교단은 부단히 성장해갔습니다.
이런 모습이 1970년대에 와서 얼룩진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두 분을 보좌하는 목사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이때는 한 목사님이나 송 목사님께서 모두 천국을 목전에 두고 있을 연세에 들었을 때입니다. 따라서 두 분 모두 협력으로 자신들에게 맡겨진 교단을 이끄시는 사명을 잘 마무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지금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결국 송상석 목사님께서 1974년 12월에 면직되심으로 교단은 큰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때 송 목사님께서 속한 경남노회와 추종 인사들은 표류하다가 송 목사님의 별세 후 고신교단으로 합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 목사님의 별세 후 교단의 운영은 주로 한상동 목사님을 지지하던 분들을 통해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송상석 목사님께서 면직을 당할 당시 경남노회 소속으로 제 24회 총회에서 3년간(1974.9.23.-1977.9.23.)총회 총대 피선거권을 박탈당하고 노회의 임원선거권을 정지당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부산 사직동 교회로 1981년에 청빙 및 위임을 받아 사역하다가 1997년 은퇴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저는 송상석 목사님과 한상동 목사님을 가까이서 뵈고 배우는 복을 누렸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을 존경하면서도 못지않게 송 목사님도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면서 목회했고 교단도 섬겼습니다.
사실 한상동 목사님은 우리 교단을 넘어 한국교회에서 존경을 받을만한 귀한 분이십니다. 지금도 이는 고신교단의 긍지가 됩니다. 하지만 송상석 목사님 역시 우리 고신교단에서는 귀중한 지도자셨습니다. 송 목사님에 대해 뒤늦었지만 2008년 제 58회 총회에서 면직을 취소하고 복권을 시켜드렸습니다. 그분이 별세하셨고 또 한참 뒤의 일이어서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이는 대단히 잘한 일이라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한 일이라 보았습니다. 2010년에 ‘한상동의 생애와 사상’ 이 출간되었을 때 교단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저로서 대단히 기뻤습니다. 그의 신앙 정신을 잘 계승해야 한다는 재다짐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송 목사님에 대한 연구는 미흡했기에 마음속에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이번에 고신 역사 연구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이상규 교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여럿의 사가들이 기고하여 ‘송상석과 그의 시대’가 한 권의 책으로 빛을 보게 되니 이는 교단 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고 또 큰 선물이 된다고 여깁니다.
이를 계기로 송 목사님에 대한 연구를 더해 가다 보면 평생을 교회와 교단을 위해서만 사셨던 송 목사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어른의 신앙과 행위가 일치된 고결한 삶에 대해 이해하게 될 것이라 봅니다. 나아가 우리 교단을 위해 얼마나 큰 헌신을 하셨는가까지 접하게 될 것입니다. 한 목사님께서 한 가정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셨다면 송 목사님은 어머니의 역할을 부족함이 없이 감당하신 분이십니다.
고신교단의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중심이 되어 성도들까지 이 책을 잘 읽고 앞 선 지도자들을 통해 남겨진 역사를 잘 수렴하여 그분들의 장점을 계승하여 교회의 세속화가 가속화된 이 시기에 고신의 정체성을 잘 유지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기쁜 마음으로 추천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고신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가들이 역사기술을 할 때 사실에 기초한 균형이 잡힌 역사를 기술하여 후대의 교훈으로 남겨가길 기대합니다.
2021년 1월 15일 정판술 (사직동 교회 원로목사, 제 41대 고신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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