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 은총론과 칼빈주의 구원론
브니엘신학교의 총장 최덕성 교수의 ‘구원론’ 강의(2020 가을)는 시종 ‘어거스틴의 은총론’과 관련되면서 진행되었다. 어거스틴의 은총론과 칼빈주의 구원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강의의 초점은 인간의 원죄, 하나님의 구원,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인간 구원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은혜의 선물인가 아니면 인간의 노력의 결과인가, 인간의 선행과 하나님의 은총의 결합 곧 신인(神人)협동의 결과인가 하는 질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아래의 글은 최덕성 교수가 강의한 내용을 어거스틴의 사상과 칼빈주의 구원론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최덕성 교수의 명저 <쌍두마차시대>(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2)의 제4장 “어거스틴의 은총론"(pp. 83-110)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구원론 강의를 성실하게 들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어거스틴의 은총론과 칼빈주의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강의의 요점을 알기 쉽게 엮어 소개하고자 한다.
구원론 강의의 핵심은 '인간의 구원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한가‘ 하는 것과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는가' 하는 질문에 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구원의 열쇠를 쥐고 계신가 아니면 인간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최덕성 교수는 구원론 주제들을 둘러싸고 어거스틴의 사상과 칼빈주의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했다. 생명, 권세, 지성, 평화, 아름다움, 감동, 빛, 유쾌함, 기억, 안전, 부피 등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그 크기나 형태의 차이를 막론하고, 또 영적, 물질적, 비물질적 양태를 막론하고 모두 다 그에게서 왔다. “세상 만물은 선하게 지음을 받았으며,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것들은 선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거스틴에게 “악은 무엇인가? 악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어거스틴은 “악은 자연의 일부도 아니며 피조물도 아니고, 이성으로만 존재하는 이론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며, 악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인 사람과 천사의 자유의지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천사에게 자율권을 주신 것을 뜻한다.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부여하셨다. 자유 의지는 선과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선물이다. 불행하게도 첫 인간 아담은 악을 택하였고 그 이유로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하였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라는 완전한 선물을 주셨지만 우리 인간은 그 자유의지로 선이 아니라 악을 택하였다. 그 이유로 악이 세상에 유입되었다. 그것에 대한 모든 책임은 자유를 누린 인간에게 있다.
자유의지와 악의 기원은 인간의 원죄와 직결된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의 상태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한다. 아담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류 전체가 죄에 오염되었으며, 악의 침해를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인류전체가 정죄 받고, 불경스런 배반에 대해 충분하고도 합당한 형벌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한 분이어서 인류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인류는 아담에게서 원죄를 상속받았다. 자유의지를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으나,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원을 가져다주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 의지,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기능은 마비되었다.
인간은 원죄의 결과로 저주의 덩어리로 전락했다. 사망과 무지와 정욕 그리고 현세에 얽매이는 현상에 빠지게 되었다. 저주의 덩어리로 전락한 인간에게 유일한 선택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이다.
원죄는 유전되는가? 서방교회 안에는 오래 전부터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성경 구절(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를 근거로 죄의 유전이 사실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라틴 신학자 터툴리안의 ‘영혼 유전설’을 기피했다. 그는 각 개인의 영혼들 하나하나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았다. 그 영혼들이 하나님이 직접 창조했다면 어떻게 원죄가 유전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영혼 유전 이론은 조금 불합리해 보인다. 최덕성 교수는 그러한 연고로 어거스틴이 일평생 ‘영혼창조론’과 ‘원죄 유전론’ 사이에서 방황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의지를 자유롭게 하며,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의지가 신적 도움을 받아들이도록 예비시킨다.” 하나님의 은총은 의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도록 인간의 의지를 치유하는 능력을 부여했다.
우리 인간의 의지가 고무되거나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 은총의 결과이며 우리 안에 영적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였기에 우리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은총은 불가항력적인가?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백성에게 주어질 때 인간은 그것을 배격할 수 있는가?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을 배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공로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들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다. 최덕성 교수는 이 점이 어거스틴의 은총론의 핵심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자유로운 주권활동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과 은총의 선물을 받을 사람을 스스로 결정하신다. 어거스틴의 하나님 예정 사상은 구원론 논의의 열매이며, 하나님의 전지성을 사색하고 체계화한 결과가 아니다. 그는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전지성을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조화시키려 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어거스틴의 접근은 16세기의 종교개혁학자들과 17세기 칼빈주의자들의 예정론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 최덕성 교수는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정론은 “고도의 유신론적 논리적 논의의 결과”인 반면,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증명하는 노력의 결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견인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지면 신앙이 생기는 동시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며, 이 선행이 공로가 되어 최종적 구원으로 인도된다고 보았다.
여기서도 어거스틴의 사상과 칼빈주의자들의 신념의 차이가 드러난다. 어거스틴은 선행을 구원의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 칼빈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어거스틴은 선행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곧 구원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선행은 무엇인가? 어거스틴에 따르면 선행은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때 생기는 결과물이다. 신앙과 선행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선물이다. 이 이론은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전 과정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임을 이야기한다.
어거스틴의 은총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 안에서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면 믿음이라는 씨앗이 우리 가운데 생기며 그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그 구원과 함께 우리 안에 선행을 행할 능력이 생긴다. 우리는 그 선을 행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유동적 흐름이며, 한편의 파노라마이다.
반면, 칼빈주의 체계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십자가 사역을 통해 공의를 만족시키시며 죄인을 용서하신다. 우리가 그를 믿을 때 의롭게 여기시며, 양자 삼아 주신다. 이 경우 하나님의 은총은 공의로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취하시는 태도이다. 어거스틴이 우리 안에 주입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본 그것을 칼빈주의자들은 마치 법관이 죄를 항하여 가지는 태도로 본다.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확정한 도르트대회(Synod of Dort, 1618)는 반펠라기우스와 비슷한 신념을 가진 알미니우스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주어진다고 결론을 내렸다. 총회는 인간의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된 구속,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으로 요약되는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천명했다. 이것을 일컬어 칼빈주의 구원론이라고 한다. 이 구원론의 요점은 어거스틴의 구원론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사역이 구원에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구원론과 칼빈주의자의 구원론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어거스틴의 구원론은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중요하게 여긴다.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선행의 공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그 선행의 공적으로 우리가 구원으로 인도된다고 한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예정을 구원론에 대한 논의의 결과로 얻은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관점과 구도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성령 사역을 이해했다.
반면, 칼빈주의자들에 따르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인간의 선행과는 무관하다. 칼빈주의 예정론은 고도의 유신론적 논의의 결과이다. 건축가가 설계도를 가지고 건물을 지어 올리듯이, 하나님은 고도의 지혜로 세상만사를 예정했다.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유기될 것인지조차 그 전지한 하나님의 청사진 안에 담겨 있다고 보았다.
칼빈주의자들은 어거스틴의 신학전통에 따라 인간의 죄악을 매우 심각하게 여기며,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강조한다. 죄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하는데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는 이 확신은 바울과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 그리고 칼빈주의와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어거스틴 추종자들과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데 일치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본성 곧 사람의 이성, 의지, 육체 어느 부분도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영역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죄성을 가진 인간의 선행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 즉,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 교리는 어거스틴의 신념 체계 곧 은총론 안에서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의 죄는 심각하며 구원을 얻는 데는 인간의 행위 또는 선행이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구원과 관련된 것이 아닌 자연은총적이고 일반적인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무능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속죄물로 희생 시키면서까지 우리 인간과 화해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우리의 중보자가 되게 하셨다. 이것으로 볼 때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 은혜의 최고의 사랑이며 그 사랑의 극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죄가 가득한 이 세상을 심판으로 멸하시기보다는 구원자를 통해서 은총을 베푸신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했으며,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는 큰 역사였다.
예수의 십자가 달림만 바라본다면 예수의 패배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가 부활하심으로 마귀를 정복하여 이긴 사건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속죄사역이 절대 필요하다는 뜻이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도르트총회를 거쳐 아르미니우스주의로 부활했다. 펠라기우스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영생을 주시는 유일한 구원자이며 대속물이라는 것을 지나쳐버린다. 성경이 가르치는 십자가의 도리와 구원의 복음과 많은 부분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장기간의 논의를 거쳐 교회 안에서 권위 있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제자들과 반대자들은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여러 종류로 나누고 여러 갈래의 사상체계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논의는 어거스틴이 예상하지 못했던 신학의 사변성과 경직성을 가져오는 쟁점이 되기도 했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의 사상과 어거스틴의 사상을 절충한다. 그들은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배격하고 어거스틴의 이론도 온전하게 수용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의 사상을 대폭 수용한 점에서 반어거스틴주의라고 일컬어야 할 것이지만 교회사는 통상 반펠라기우스주의라고 일컫는다.
어거스틴의 은총론과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둘러싼 논의는 프랑스 남부고을 지방에서 열린 오랑쥬 대회(529)에서 일단락되었다. 이 대회는 인간이 구원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보는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배격했다. 하나님의 인간구원과 예정론 교리는 이 종교 회의와 계속된 신학논쟁을 거쳐 서방교회의 ‘정통신학’이 되었고 오늘날에서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으로 전수되고 있다.
도르트대회는 반펠라기우스주의와 비슷한 신념을 가진 알미니우스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구원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주어진다고 천명하였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을 기억해 보면 정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우리 자신의 공로나 신분이나 기여도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 성령 중심의 구원론을 역설한 어거스틴의 사상과 하나님에 대한 유신론적 논의의 결과로 예정론을 강조한 칼빈주의는 서로 간의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개혁교회의 신학적 유산이며 신앙의 핵심이다.
오순남 (브니엘신학교 신학원 1학년)
편집자 주: 브니엘신학교 신학원 목회학 석사(Master of Divinity) 과정, 최덕성 교수의 <구원론> 과제로 제출한 '학술 에세이'이다. 하나의 명료한 주장-논지를 가지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차례 차례 제시한다. 브니엘신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학수업, 비평적 사고훈련, 학술 에세이 쓰기, 목사후보생 교육의 단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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