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교회의 마녀사냥
우리는 교회사에서 위대한 믿음의 거인들을 만나 존경의 무릎을 꿇기도 한다.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 녹스를 공부하다 보면 그들은 우리와 성정이 다르고, 절대 무오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원죄를 가진 인간에 대해 그러한 모습을 강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지어 바울 자신도 그렇게 취급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바나바와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행한 병 고침과 복음전파로 인해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추앙을 받자 당황하여 옷을 찢은 적이 있다. 두 사도는 자신들이 무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라고 외쳤다.
물론 위대한 선조들의 공적을 깎아서는 안 될 것이다. 위대한 선조들의 족적은 우리가 대를 이어 배워야 하고 따라야 할 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항상 양면성이 있는 법이다. 인간인 이상 벗어날 수 없는 한계이다. 가장 잘 개혁되었고 자부한 스코틀랜드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오랫동안 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연구해왔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장로회제도를 이상적인 교회모델로 제시해왔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장로회제도는 2천년 교회사에서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작동가능하고, 지속적인 교회조직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도 용서받기 힘든 과오에 빠진 적이 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스코틀랜드의 마녀사냥에 대해 연구해왔다. 그리고 그 일에 스코틀랜드 교회가 깊숙이 관련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회 교회도 흑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역사적 진실을 마주대하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럽다고 느껴진다.
근대 스코틀랜드는 유럽국가나 잉글랜드와 비교해서 마녀사냥이 극심했던 국가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녀술로 고발당했고, 그 중 상당수가 마녀로 판결 받아 처형되었다. 16세기 중반에서 17세 중반에 최소 4,000명 이상이 기소되었고, 1,000-2,000명 정도가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스코틀랜드 전체의 인구가 1백만 명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이는 상당한 비율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웃의 잉글랜드와 비교할 때 더 분명히 나타난다. 17세기 중엽 잉글랜드의 인구는 약 4백만 명이었고, 1563년과 1685년 사이 마녀로 처형당한 이는 약 50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는 스코틀랜드의 마녀사냥이 잉글랜드보다 12배나 더 극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코틀랜드는 유럽의 주요 마녀사냥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간이 종교개혁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대규모 마녀사냥이 시작된 것은 1580년대 장로회가 조직된 직후였고, 이후 한 세기동안 지속되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역사가들의 연구는 마녀사냥에 스코틀랜드 장로회교회가 적극적으로 관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은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한 경건사회가 구약성경에 근거한 것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구약의 실정법들이 신약시대에도 유효한 것이라고 보았고, 구약성경이 열거한 범죄의 일소가 경건사회 건설의 기초라고 여겼다. 마녀술은 구약성경이 금지한 죄악이었다. “너희는 마녀를 살려주지 말지니라”라는 구절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구약의 무당, 신접한 이들, 소환술사 등이 근대시기의 마녀를 의미하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다. 그러나 마녀라는 용어는 당시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언급하는 마녀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또 다른 요소는 당시 마녀에 대한 관념이 종교개혁이후의 스코틀랜드 교회에 쉽게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직전 유럽에서는 마녀에 대한 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마녀들이 하나님의 대적인 악마와 계약(demonic pact)을 맺은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개념의 등장이었다.
사실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개념은 중세적이고, 대륙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을 처음 체계화하고 전파한 것은 1486년 하인리히 크라머(Heinrich Kramer)의 저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이다. 이 책은 그 동안 마녀가 흑마술(maleficium) 또는 주술을 행하여 농작물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는 자라는 전통적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녀의 망치????에 따르면 마녀는 사탄 또는 악마의 하수인으로서 악마 숭배자이다. 마녀는 사탄과의 계약을 통해 그를 섬기는 대신 그로부터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마녀는 계약의 표시로 신체의 은밀한 곳에 악마의 징표를 지니고 있는 자이다. 마녀는 집단적으로 악마를 숭배하기 위해 사바트(sabbath)라는 집회에 참여한다. 이 집회에서 마녀들은 여러 가지 비도덕적이고 외설적인 행동을 벌이는데, 나체로 춤을 추고, 다른 마녀들과 악마와 함께 난교를 벌이고, 악마를 위해 아기를 희생시키고, 식인 행위 등을 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마녀들의 모임에서는 기독교의 예배 의식을 조롱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녀개념의 변화는 종교개혁이후 스코틀랜드에서 크게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언약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과의 언약에 들어간 행위를 본받아 국민전체가 하나님과 언약에 들어간 민족이었다. 이러한 언약문화를 가진 이들에게 있어, 마녀가 악마와의 계약에 들어간 자라는 개념은 너무나 익숙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논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공동체와 개혁교회를 지키려는 자신들의 언약과는 달리, 악마와 마녀의 계약은 하나님에게 대적하고 개혁교회를 파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17세기 중반 스코틀랜드의 언약운동이 활발할 때 더욱 강화되었는데, 언약도에게 있어 악마와의 계약 개념은 그들이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마녀는 “하나님의 대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녀를 색출해서 처형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로 여겨졌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코틀랜드 장로회 제도 그 자체가 마녀사냥을 용이하게 만든 측면이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장로회제도는 3종류의 회의체, 즉 교구교회(또는 개별교회)의 회의체인 당회(kirk session), 특정 지역의 회의체인 노회(provincial assembly or presbytery), 그리고 전국적 회의체인 총회(general assembly)로 구성된다.
그러면 이 조직이 마녀사냥에 어떻게 기여한 것인가? 이러한 회의체 조직이 1560년 종교개혁과 함께 바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교구와 노회의 경계가 확정된 것은 1581년 총회에서이다. 1581년 총회는 전국의 약 1천 개 교회를 600여 개의 교구(parish)로 나누었고, 이를 다시 50여 개의 노회로 묶었다. 이에 따라 각 노회에는 12개 내외의 교구가 배정되었다.
그러나 노회와 교구조직이 완성된 것은 거의 16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1593년까지 전국적으로 47개의 노회가 세워졌다. 이것은 마녀사냥이 일어난 정확히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면 교회조직은 마녀재판에 어떻게 기여하였을까? 우선, 교구민들과 가장 가까운 것은 당회였다. 당회는 교구민들의 삶을 통제하는 최전선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당회는 교구민들의 예배결석과 비도덕적 행동을 감찰하였고 필요한 경우 당회에 소환하여 훈계 또는 징계를 내리기도 하였다.
당시 당회는 완전히 독립적인 종교재판소로 기능하고 있었다. 당회는 마녀술과 관련하여 교구민의 고발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교구민으로서는 거리상으로 먼 곳이고, 사회적 신분차이로 접근이 어렵고, 법률적 무지로 인해 꺼려지는 지역의 관리보다는 가까이 있고, 매 주일마다 만나고, 자신의 사정을 잘 아는 교구목사에게 마녀술로 의심되는 이웃의 행위를 고변하기가 쉬운 환경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당회는 마녀술 뿐 아니라 교구민의 모든 비도덕적 행위와 범죄행위가 처음으로 공식화되는 곳이었다. 당회는 마녀술 혐의로 어떠한 고발이 들어오면 고발자와 목격자를 불러 의견을 청취한 후 혐의자, 즉 피고소인을 불러 심문을 행하였는데 경미한 위반이나 고의성과 위험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 자체의 권위로 처벌을 행하기도 하였다.
노회 역시 마녀재판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당회가 마녀술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 경우에는 노회에서 다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마녀술 관련 초동 수사기록이 노회의 회의록이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종교개혁 이후부터 1710년까지 마녀사냥이 극심했던 파이프 지역의 마녀재판을 다룬 스튜어트 맥도날드의 연구를 보면 절대다수가 노회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노회도 조사기록, 특히 혐의자의 고백기록을 넘김으로써 마녀재판의 초동수사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당회와 노회의 추동수사 기록은 특별법정이 열리게 되면 중요한 심문자료로 사용되었는데 법정은 주로 지역의 소귀족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소귀족들은 지역 목회자들의 영향아래 있었고, 당회와 노회의 심문기록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 너무나 자명하다. 아픈 역사이다.
16세기 교회의 오류를 오늘날의 교회와 같은 관점에서 비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신학적 이해와 법 관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분명 마녀의 존재를 믿었고 마녀의 물리적 제거가 바른 종교개혁의 정착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믿음이 엄청난 폭력과 불행을 가져온 것이다. 무엇이 반성일까? 오늘날에도 우리가 자명하다고 믿고 있는 것 가운데 잘못은 없는 것일까?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교인을 죽이는 일은 없는 것일까? 역사적 접근과 이해가 아니라 과거를 우상화하는 것은 없는가? 반성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아픈 질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마녀사냥과 같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다.
김중락 교수(경북대)의 글
당회나 노회의 기소와 재판이 분리되지 않았으므로, 재판을 위한 충분한 논리적인 다툼도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한국 장로교회도 당회의 독재적인 기능과 장로의 다수를 방치하고 있다. 당회원인 장로들은 예산편성, 예산을 승인하는 공동의회, 예산을 집행하는 제직회, 집행결과를 감사하는 데까지 관여한다. 당회원인 장로는 당회가 치리회로 전환되는 경우에도 기소와 재판에 모두 참여하고 있고, 당회원의 징계도 당회가 해야 하니, 정상적인 판정이 나오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