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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환 목시의 고별사

 

박창환 목사(1924-2020)는 장로회신학교(1948)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1989년까지 41년 동안 헬라어와 신약신학 교수로 봉직했다. 1924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박경구 목사의 장남이며, 한국장로교회 최초 중국 파견 선교사인 박태선 목사의 손자이다. 부친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고, 슬하에 아들(박호진 목사)와 손자(박범 목사)가 있다. ‘5대 목사 가족으로도 유명하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채필근신학교, 1940설립) 4회로 입학했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와 고려신학교(현 고신대, 고려신학대학원)에 이어 장로회신학교(1948년 서울 남산, 현 장로회신학대학교 전신) 1회 졸업생이다. 고려신학교에서 옮겨와 장로회신학교에서 한 달 공부하고 졸업했다.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사역했다. 재직 중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휘트워스대학교에서 모종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목사, 신학교수, 헬라어학자로 저명한 박창환이 남긴 글(유서)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한국교회에 주는 고별사이다.

 

 

박창환의 유서

 

나의 육신의 목숨이 어느 순간에 끊어질지 모른다.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 땅 여러 곳에서 살게 하셨다. 나의 지난날들을 회고해 보면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차고도 넘치는 삶이었다. 여한이 조금도 없다.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나의 육체가 점점 약해지고, 어느 순간에 목숨이 끊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남겨두어야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 컴퓨터 자판 앞에 앉았다.

 

하나님과 나 하나님께는 내가 죽는 순간, 곧바로 그 앞에 면대하고 설 것이기에, 여기서 할 말이 없고 할 필요도 없다.

 

자연과 나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아왔다. 강산도 많이 변하고 나도 따라서 변해왔다. 자연 속에 나를 두신 하나님은 자연에 대한 모종의 책임을 나에게 맡기시지 않았겠는가.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고 가꾸고 발전시키고 보다 더 아름답고 바람직한 상태로 변화시켜야 하는 책임이 주어진 것인데, 과연 나는 자연에 대한 나의 책무를 다 했는가? 아쉽다. 적극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그 의무를 감당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하며 하나님과 자연 앞에 뉘우친다. 나는 자연을 사랑한다. 가능한 한 자연을 보살피려고 노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알지 못했고,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지하여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하나님 앞에 서면 나의 이 모자람에 대한 추궁을 당할 것이라는 예감을 가진다.

 

이웃과 나 이웃에 대해서는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19:18)을 알고 또 그래야 한다고 남을 가르치면서도 너무나 무성의하였던 것을 고백한다. 바리새인들의 태도였다고 할까? 남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면서도 나 스스로는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자백한다. 남을 미워한 적은 없다. 일부러 손해를 주려는 생각을 해 본적은 더더욱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한 일은 별로 없었다는 말이다. World Vision을 통하여 에디오피아와 엘 살바도르 어린이들 몇을 돕는 일을 수십 년 해 왔다. 먼저 간 나의 처 수삼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준 것을 내가 알고 있다. 나는 그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을 하지 못한 것을 뉘우친다. 전 세계 특히 북한의 굶주리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 그들을 위해 기도는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기도뿐이었으니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이다.

 

목사와 신학교수로서의 나 나는 스스로 목사가 될 재질이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 제 4학년 때(1941) 가족회의 결의로 나에게 목사가 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일단 항거를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위압적인 책망과 권면에 굴복하고, 타의에 의해서 목사 수련의 길로 들어섰다. 성실한 목사, 목사다운 목사가 되려는 마음을 먹었다. 적어도 음악을 아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 동경 유학을 하며 음악공부를 하기도 했다. 참으로 목사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면서. 더없이 존경스러운 부친을 모시는 부목사가 되려는 것이 내가 처음 가졌던 이상(理想)이었다.

 

그러나 부친을 닮는 목사가 되어 그를 돕는 목회를 하려던 꿈은,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순교하신 부친의 서거(逝去)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목사가 되는 일은 황해노회 목사 후보생이었던 나에게 자연적으로 오는 절차였다. 1952년 봄(6.25 동란 때) 부산에서 모인 피난 황해노회에서 부친의 친구인 김정묵(金晶默) 목사의 안수기도를 받으면서 정식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의 길은 주어지지 않았다. 꿈도 꾸지 않았던 신학교수의 길이 나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은 한국장로교회 과도기(1938-1960)에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시려고 나를 부르신 것으로 생각된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기 때문에 무자격자인 내가 나름대로 사용되어야 하는 처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호동중이작호(無虎洞中狸作虎) 격이었다고나 할까. 대용품 격으로나마 사용하시려고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셨다. 학문이 학문을 낳는 법이다. 초창기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학자들이 아니었기에 학자를 길러낼 수 없었다. 나도 자각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학문의 씨를 내 속에 뿌리기 시작하신 것이다. 성경 원어를 익히고 역사비평학을 공부하는 것이 신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인데, 하나님은 남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성경원어 공부에 대한 열정을 나에게 주셨다. 나는 왜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성경원어 공부에 몰두하였다. 특별히 잘 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운동이 거의 없는 시대에 초보적인 나에게 의욕을 주셨고, 다소나마 한국 신학교육과 교회에 이바지 할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한국에서는 최초로 히브리어 교본(등사본, 1952) 헬라어 교본(1962)과 헬라어 사전(1965)을 만들었고, 그것들이 한국의 많은 신학교들의 교재로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쾌거라고 생각하며 감사한다. 1961년에 대한성서공회 위촉으로 신약성경 번역 초역 책임을 맡고 그 결실이 1967년 신약성서 새번역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고, 이어서 신약공동번역 작업에 참여하여 1971년 부활절을 기하여 나타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신학교 교재가 전무하던 시기에 신약성서 개론(1964), 신약성서신학(1963) 공저(共著) 작업에 참여했고, 성경형성사(1969)를 집필하여, TEF(Theological Education Fund)의 후원으로 출간하게 된 것 역시 과도기적 결실로서 의미 있는 일들이다. 그 작업에 내가 사용된 영예를 가졌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장로회 총회 교육부가 교단 장년부 성경교제 저술 작업을 1982년에 나에게 맡겼고, 그 결실이 2007년에 22권 총서로 나왔다. 한국교회를 위하여 미력이나 공헌할 수 있는 영광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들어서 하신 일 세 가지를 잊을 수 없다 조국 광복과 함께 요구된 성경 새번역 작업에 하나님께서 나를 써 주셨다. 1961년에 대한성서공회 주관으로 시작된 신약 새 번역 작업에 내가 초역자로 선발되었고, 신약새번역이 1967년에 출판되어 빛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위원회의 작업이었고, 외부의 많은 간섭 특히 보수 교단들의 간섭 때문에 초역자인 나의 의견이 무시된 채 괴이한 번역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 홀로의 사역 작업을 통하여 2007년에 나의 사역이 출판되었다.

 

1982년에 내가 속한 통합 측 장로교회가 장년들을 위한 성경 교재를 만들기로 작정하고 그 작업을 나에게 위촉하였기 때문에 그 작업을 오랫동안 하여 2016년에 끝냈다. 구약 14권 신약 8권으로 된 평신도 성경교재이다.

 

내가 1991년부터 미국 L.A.에서 장로회신학교 대학원 책임을 지고 가르치던 중 1994년에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일성이 죽었으니 38선이 곳 열리지 않을까 하는 성급한 생각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고향(황해도)에 가고 싶은 생각을 하면서 다짜고짜 서울로 나갔다. 38선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남한에서 무언가 교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설교하는 목사들을 돕는 작업을 해보기로 하고 한국성경연구원을 조직하였다. 내가 본 입장에서 한국교회의 문제는 설교자들이 성경에서 벗어난 설교를 하고 있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교회주의에 빠진 많은 목사들이 바쁘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할 짬이 없었다. 그리고 성경해석 방법론을 신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그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마구 해석하고 설교하는 것 때문에 참된 설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그런 형편을 타개하기 위해서 설교본문들을 학자들로 하여금 연구하게 하고 그것을 모아 잡지에 실어서 설교자들에게 제공하는 작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방대한 양의 성경을 다 해석할 도리가 없기에 성경 일과표(日課表 lectionary)에 들어있는 것만이라도 하기로 하였다. 그것만도 12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199411월에 시작한 그 작업이 2007년에 끝났다. 이렇게 해서 나에게 맡겨진 숙제 세 가지를 마친 셈이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로회신학대학에서의 가르치는 사역은 1948년 즉 그 학교를 졸업하는 즉시에 시작되었다. 그것도 전혀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이고 과분한 일이었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나의 최고의 희망은 존경하는 아버지의 부목사로 일하겠다는 것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했지만(194879) 38선은 막혀 있고, 어디서도 나를 부르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박형룡 교장께서 신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치라는 명령을 하기에, 졸지에 신학교 전임 교사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그저 하나님께 고마울 뿐이다. 그렇게 시작된 장신대 교수 생활이 1988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동안에 미국 유학 생활 3, 1971-74년에 걸친 Indonesia 선교 3년을 빼면 정미(正味) 34년의 교수 생활이었다. 은퇴 후에도 약 4년간 객원교수로 가르친 일을 합하면 도합 38년의 장신대 교수생활을 한 셈이다. 아마도 누구보다도 가장 긴 신학교수 생활을 한 사람일 것이다.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들어 써 주셨다고 믿고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은 나를 여러 번 선교지로 보내시어 일하게 하셨다. 전술한 대로 인도네시아 선교사로서 Bangka SungailiatOra et Labora 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선교에 임했고, 1996-2001에 걸쳐 러시아 모스크바 장로회신학대학 학장으로 만 5년간 봉사했고, 2009-2011에는 중미 Nicaragua의 수도 Managua의 신학교 학장으로 만 3년 봉사하는 영광을 가졌다. 남들이 별로 가지지 못한 경험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이렇게 다양한 기회를 주셨고, 그 여러 곳에서 즐겁게 일하면서 이 시점에 이르렀다. 조금도 여한이 없는 만족 또 만족의 생활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헤아릴 도리가 없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가는 일 만이 남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의 친 할아버지가 가신 죽음의 길을 나에게도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분에 넘치는 욕심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돌아가실 날을 하나님께로부터 듣고 계시다가 그 작정된 날 (1946년 봄, 어떤 주일) 가족과 친지들을 다 불러 모으시고, 제 부친(박경구)의 임종설교가 끝나자 숨을 거두셨다. 지병(持病)도 없이 건강한 몸을 가지신 채 70세 일기로 하늘로 불려가셨다. 광복과 함께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토지개혁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시점이었다. 정직하게, 성실하게 일하여 자수성가하며 마련한 농토(農土)를 공산국가에게 강제 몰수당하는 더러운 꼴을 보기 전에, 깨끗하게, 천사처럼 소천(召天)되셨다. ! 참 부러운 죽음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죽음을 죽는 축복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은 몸은 곧 썩어져 없어진다. 아무 가치도 없는 분토 같은 나의 시체 때문에 울고불고 할 필요가 없다. 화장을 해서 날려 보내고 더 이상 죽은 시체 때문에 자손이나 친지들이 어떤 수고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의 이 마지막 시간들을 막내아들 선진 목사 가정과 그의 교회의 사랑을 받으면서 평안히 지낼 수 있으니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우리 가족과 친지들이여! 먼저 하늘나라에 가 있는 나의 영화로운 몸을 거기서 다시 만날 소망을 가지고, 나날의 삶에 충성하기를 바란다.

 

(소기천 페북에서 옮겨옴,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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