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목사 장립의 근거,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파)
예장 고신교단의 자매 교회인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파, 속칭 31조파)는 여성 목사, 여성장로, 여성 집사 안수 제도를 도입했다. 이 교회의 여성안수 곧 여성 목사 장립에 대한 2011년 보고서는 그들이 여성목사 제도를 찬성하기까지, 성경 본문을 어떻게 바라보며 해석하는지를 유추케 한다. 아래는 이 보고서의 영문본 한글 번역이다.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들은 허순길, 이보민, 유해무, 변종길, 김재윤 등은 해방파 교회가 운영하는 캄펜신학대학에서 수학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신교단의 자매교회인 네덜란드개혁교회(해방파)가 여성안수를 성경적이라고 하고 시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의미심장한다. 여성안수에 대한 찬반논의의 마침표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네덜란드 해방파 개혁교회의 2011년 보고서
가. 여성 직분자 문제와 관련된 성경본문
1. 고전 11:3-16
만일에 누구든지 이 주제에 대하여 논의를 하고 싶다면, 우리는 다른 실천 규례가 없으며(no other practice)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여자의 머리인 남자, 이것은 전통 계승(the succession)의 일부이다. ‘여자 – 남자 – 그리스도 – 하나님’이라는, 이러한 연속성은 바울이 사도 입장에서 본 질서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로마 사회(Greco-Roman society)의 수직적 질서를 반영힌다.
남자와 여자는 이 사회의 위계 안에서 각자의 위치[혹은 지위, place]를 가지고 있다. 이 지위(ranking)에는 어느 정도의 차등이 있다. 여기서 바울은 ‘머리’(사람의 눈에 보이는 부분, 말하자면 불거진 부분)라는 표현에 대해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남자는 그리스도를 맡은 것이 아닐 수 있다. 여성의 경우에는 결혼 후에 공적으로 입는 면사포[혹은 수건, wedding veil]가 그녀의 머리를 덮는다. 바울은 이것을 고대의 중요한 개념인 영예와 수치(honour and shame)의 틀 안에서 제시한다. 여자는 배우자[남편]의 영예이다. 여자가 (그녀의 정절과 순결의 상징) 머리에 쓴 면사포를 벗는 것은 남편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남자와 여자 사이를 구별(distinction)하는 것이다. 남자의 배우자의 행동은 그의 공적인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그녀는 하나님의 형상(image)과 영광에 수치를 가져온다. 이 원리는 다시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정적으로 반영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한다. 여자와 남자여(그 단어의 두 의미에서) 너의 머리를 존중하라!
2. 고전 14:34-35
이 본문은 직전 본문 곧 고전 14:26-33절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에서는 적어도 여자가 그들의 머리를 가렸다고한다면, 말하고 예언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이제 이 본문에서는, 그들[그녀들]이 말하는 것을 금한다. 이 본문이 [여자의] 말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하는 것으로 읽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집회(the assembly)에서 예언(prophecy)을 논하는 동안에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기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바울의 주장은, 남편에 대한 여성의 복종 또는 순종(여기서 그리스어에는 동사 ‘ὑποτασσειν’이 있음)에 대한 주장이다. 남자는 가정의 머리인 가장(paterfamilias)이다. 바울은 이르기를 집 안에서뿐만 아니라 집 밖에서도, 모든 사람은 사회의 지위에 따라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율법의 가르침도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토라에 대한 구두 해석(oral interpretation)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 있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영광과 수치(honour and shame)라는 주제를 접하게 된다. 공적으로, (결혼한) 여성이 회집에서 토론을 이어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게다가 바울은 교회에서 선한 질서(40절)와 성도들의 모든 회중에 같은 규칙이 적용됨(33절)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또한 선교적 동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 결국, 기독교 집회 모임(assembly)은 공적인 성격(14:23)을 가지고 있다.
3. 고전 2:11-14
바울은 회중이 모일 때, 교리를 가르치는 동안에, 여자들은 순종하는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서 그렇게 한다. 그들은 절차를 지배하기보다는 조용하고 겸손한 복종(그리스어 동사 ‘ὑποτασσειν’을 사용함)으로 그렇게 한다. 여자는 지시를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녀 자신이 지시하지는 않아야 힌디/ 왜냐하면 그것은 권위의 행사에 있어서, 불안(unrest)을 야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을 그 머리 위로 돌려놓는 것이다.
바울은 최초의 인간 부부의 역사를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창조 순서는 동시에 순위(rank)의 순서임을 설명한다. 비록 하와(Eve)는 두 번째로 창조되었지만, 그녀는 낙원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첫 번째로 위반했다.
결론적으로, 놀랍게도 신약성경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관련하여 분명한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귀중히 여겨야 한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일관되고 분명한 메시지이다. 동시에, 이러한 상호 관계를 다루지 않는 본문은 더욱 큰 상이함을 지니고 있다.
바울이 여자에게 과도한 장식과 다스리는 태도를 금힌 것은 분명하다. 여자는 겸손하고 조용히 행동해야만 한다.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가르치거나 권위를 행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는 전혀 명확하지 않다. 여자는 기도하고 예언할 수는 있지만, 예언을 해석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의미는 정확히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각 처방의 이면에 있는 논의들(arguments)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널리 행해진 기독교의 생활양식(‘이것이 우리의 실천관습(practice)이다’)……남편(남자)과 아내(여자) 사이의 관계,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의 관계를 반영한다. ...구약성경: 창조, 죄로의 타락, 율법의 필요요건… 일반적으로 명예롭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 세상에서의 복음의 진보, 또는 오류에 대항함으로서의 교회의 보호 등이다.
클러크(Myriam Klinker-De Klerck)는 소책자 Als vrouwen het woord doen의 끝부분에서, 이러한 주장들 간의 상호 작용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1) 핵심적인 주장은 남자 (남편)와 관련하여 여자(아내)에게 요구되는 것은 복종이다. (2) 이것은 명예와 부끄러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 구약에 대한 언급, 그리고 이 복종의 매력과 같은 개념의 관점에서 동기가 부여되었다. 바울에게 이러한 모든 동기는 일관성 있는 전체를 형성한다. (3) 아내가 그녀의 남편을 욕되게 하는 태도(manner)는 당시의 문화적 풍습에 의해 결정된다. 기존의 질서를 따르는 것은 문외한들 사이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나. 당시의 상황과의 연결성과 내용
성경 본문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특정한 방식으로 그 본문들의 시간과 장소의 문화와 연결되며, 또 그것들이 서로 부딪칠 때에도 비판적으로 연결된다. 여성의 종속적인 위치를 확인하면서, 바울은 이를 지배적인 도덕 표준들과 연결한다. 그는 여성들에게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가정을 돌보라고 권고한다(딤전 5:14; 딛 2 : 4-5 참조). 아내들의 과도한 치장과 덕스러운 절제 사이의 바울의 대조는 드물지 않다(딤전 2:9-10절 비교).
동시에 바울은 자신의 주장에서 일반적인 기독교적 개념을 사용하는데,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 구약성경에 대한 참고(창조, 타락과 율법), 문외한들의 불필요한 비판을 방지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복음의 진전에 대한 조망에에서 중심적인 주장(남자(남편)에 대한 여자(아내)의 필수적인 종속성이 지배적인 문화적 패턴들을 기독교적으로 실현하는 것임을 바울이 뚜렷이 제시한다고 본다.
다. 해석학적 고려
1. 본문, 독자, 상황
'해석학적 인식’(hermeneutical awareness)이라고 표현은 우리가 성경을 읽는 구체적 방식을 알거나 의식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기술적인 용어이다. 우리는 명확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성경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이 아니다. 의미의 탐색에 대한 성찰은 항상 있어왔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런 일이 덜 명백하게 일어났다. 현재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 자체를 검토하고 설명함을 가리켜서 우리는 ‘해석학’이라 부른다. 물론, 위원회의 보고서 a Deputies’ report가 다루는 이 진행절차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모두 논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포괄적인 개요만 제시한다.
위의 그림은, 기독교인이 성경을 읽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개략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첫 시선은 본문의 원래의 상황과 1차 독자를 나타낸다. 두 번째 시선에서 본문은 여전히 중심에 있으나, 그러나 다른 상황 가운데 있다. 우리들 또한 독자들로서, 본문은 항상 우리의 상황 가운데서 기능한다. 이러한 더 큰 그림의 예(루터 시대, 1950년의 네덜란드, 오늘날의 케냐 등)는 많이 있다. [위의] 그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문(a text) 읽기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위의 그림에서] 눈의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더 큰 눈에서의 의미에 도달하기 전에, 작은 눈 가운데서의 본문의 의미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따라서 둘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경우에는 독자가 두 시선[1차 독자와 2차 독자의 시선]이 일치하도록 허용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할 경우에는 두 가지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첫 번째 오류는 작은 시선(원래 상황에서의 텍스트의 의미)을 우리의 상황(context)에 직접 적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 오류는 더 큰 시선(우리의 상황에서의 본문의 의미)으로 시작하여 이를 이전의 환경(situation)으로 다시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지 않았으며(예를 들자면 고전 7:12 및 40에서 그는 종종 그렇게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글을 썼다(고전 14:36-37). 하지만 우리의 상황과 바울의 상황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현재 주제(topic)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래에 설명한 적어도 다섯 가지 다른 측면에서 나타난다.
A. 남자와 여자의 행동에 관한 디모데전서 2장에서의 바울의 처방(prescription)은 남성-여성(male-female)의 관계의 틀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범주가 처음에는 별개로, 그리고 다음으로는 상호 관계에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바울이 그의 상황에서 남성에 대해 여성이 다스리는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는 반면, 우리 문화에서는 남성에 의해 여성이 다스려지는 것에 대해 경고할 가능성이 더 높다.
B. 바울의 처방은 교회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가 교회에서 추구하는 것은 그의 시대의 선도적인 도덕 철학자들이 변호했던 것과 실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회에서 여자가 잠잠해야 한다는 규정은(로마에서 들어오는 자유주의적 여성운동과는 달리) 그의 시대에 일관되게 용인되고 지배적이었던 사회적 상황과 일치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 명령은 받아들여진 사회적 상황과 반대된다.
C. 신약시대의 문화와 우리의 문화의 크게 다른 점은 그 때의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생각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개인주의에 훨씬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상황의 범위에 참여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서 더욱 강력하게 [참여하여] 살았다. 오늘날 우리들은 모든 종류의 상황에서 훨씬 더 쉽게 스스로 결정을 내리며, 이미 확립된 도덕적 전통에 의해 이끌릴 가능성이 훨씬 적다.
D. 신약시대 안에서의 지중해 문화(그리고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까지)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명예와 불명예의 양극단에 의해 각인되었다. 우리의 문화에서는, 평등(equality)이 우선이다(갈 3:28절 비교). 그러므로 특별히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난잡하게’ 태도(manner)를 보이는 사람은 전체 공동체에 불명예를 안겨준다. 이는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 안에서도 진실로 마찬가지다.
E.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 이후로, 교회는 공적인 영역에서 곁으로 밀려났다. 주후 1세기 가운데서의 바울의 처방들은 여전히 비기독교적인 환경과도 연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이와 같은 처방으로 우리는 불필요하게 복음 선포의 진행을 방해할 수 있는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만들거나 강화한다.
바울은 자신의 처방에 동기를 부여하는 두 가지 추진력을 보이는 듯한데, 한편으로 그는 창세기 1~3장의 역사를 분명하게 가리키면서 창조의 보고를 그린다. 우리는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와 사회 모두에서, 확립된 질서를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바울은 교회를 마치 하나님의 선한 질서가 사회의 실제 삶에서 배우고 실천되는 왕국으로서의 이상적인 사회, 선구적인 전초기지인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또한 보다 암묵적인 역할을 하는 실용적인 주장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는 교회의 내부 구조(평화와 질서)는 물론이고, 교회의 외적이며 선교적인 영향(그것의 공적인 이미지, 명예로운 것/불명예스러운 것)까지도 주의했다. 그러므로 두 종류의 동기가 구별될 수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들(contexts) 가운데서 바울의 명령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 무엇이 그를 움직이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분명히 바울은 그의 생각함에 있어서(목회적으로, 수사적이면서 또한 신학적으로) 충분히 유연했기 때문에, 그에게 다양한 동기는 서로 간에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지지하고 보완하는 것이었다. 우리들 가운데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크게 변경된) 것으로 여기는 상황에서, 이러한 동기들은 서로에게 쉽게 방해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복종’(그리스어: ὑποτασσειν)이라는 성경적 개념과 더불어서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바울은 이 용어를 사회의 특정한 질서의 틀 안에서 이해했지만, 오늘날에 그것은 문외한들(outsiders) 사이에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주요한 읽을거리: 자신의 교회와 신앙형편(faith situation)의 상황(context) 가운데서 본문을 직접 읽는 것. 이것은 우리의 용어에서 두 시선보다 먼저 나온다.
첫 번째 다시 읽기: 본문이 처음 쓰인 (문학적 및 역사적) 문맥 안에서 본문을 읽는 것. 이것은 우리의 용어에서 첫 번째 시선[1차 독자의 시선]에 해당한다.
두 번째 다시 읽기: 독자의 현재 상황으로의 관점에서 본문 읽기. 이것은 우리의 용어에서 두 번째 시선[2차 독자의 시선]에 해당한다. 첫 번째 다시 읽기에서 발견한 것을 주의하고, 성령님의 깨우침을 위해 변함없이 기도하면서, 우리들은 오늘에 대한 본문의 의미를 찾아 나가야 한다.
“본문의 현재 의미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맥락 사이에서 끊임없는 앞뒤로 변화해 나아간 결과물로서, 주어진 본문의 어느 것에는 독자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서 그것의 우선권을 내포하며, 또한 성령께서 우리에게 점차로 가르쳐 주시는 것 가운데,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가 있다.”(p.62).
2.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가? 바울의 문맥과 문화는 우리와는 다른 것이었다. 여자가 예배드릴 때에 머리를 가려야만 한다는 바울의 처방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우리의 문화에서는 그처럼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GKv 내에서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 이유는 무엇인가? 초정통주의 집단(ultraorthodox circles)에서 여성들은 적어도 예배에서는 머리를 가리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이 항구적인 성경적 명령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이 이 명령을 예배를 향하여서만 제한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상황과 문화의 차이를 읽고, 확인하고 또한 논의하여야만 하는데, 이것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아주 잘 이해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우마J Douma, 1931- 박사는 다섯 번째 계명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이미 성경이 부모-자식, 남편과 아내, 주인-종, 통치자-대상의 권위 관계의 범위 사이에서 ‘순종[혹은 복종]하다’(ὑποτασσειν)라는 한 단어를 사용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용법은 유사한 관계가 일찍이 동일한 수준에 놓였음을 의미하며, 아마도 그러한 방식으로 취급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가 않다.”고 기록했다. 바우마는 그 때에 바빙크(H. Bavinck, 1854-1921)를 가리켰다. 결혼 관계와 관련하여, 바우마는 “아내가 그녀의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는’ 대신에, 우리는 아내에 대해 ‘그녀의 남편이 이끄는 대로 따라 간다’고 말하게 되었다. 후자의 표현은 현대 해방 운동과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 모두에 있어서 성경에 입각하여 묘사하는 좋은 결실을 거두었다.”고 기록했다.
2001년에, 판 부르흔(J van Bruggen) 박사는 ‘~의 대상이 되다’라는 표현에 대해 말했다. 바울의 상황에서 아내는 그녀의 배우자에게 신실해야만 한다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종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시대와 서양 문화에서 ‘종속’(subjection)이라는 단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성경에 기초하여, 여자가 그들의 남편에게 신실해야 할 뿐 아니라, ‘순종’(submission)으로 특징지어지는 결혼 생활에서의 역할을 하도록 선택해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반 뷔르겐에 따르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결혼 안에서 그 자리를 내어주도록 하려는 바울의 단순한 의도였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 실행(practice)에 있어서, 다우마와 반 뷔르겐 모두가 한편으로는 바울의 시대와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시대 사이의 공간과 거리를 고려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우리의 보고서에서 따르는 선이다. (끝)
원본 출처: "네덜란드 해방파 개혁교회의 2011년 보고서" ( Pre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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