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면 지옥 가는가?
자살하면 지옥가는가? 이 질문은 하나님의 견인(堅忍)의 은혜 안에 있는 자는 자살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과 자살하면 은혜로 받은 칭의(稱義)가 취소되는가 하는 의문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자살을 신학 주제로 다루는 분들의 이해를 도와 드립니다.
“자살하면 지옥간다”와 “견인을 받은 참된 신자는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같은 말입니다. 전자는 같은 주제를 긍정논리로 표현한 것이고 후자는 부정논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정, 선택, 견인된 자는 자살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정통개혁주의 입장이 아닙니다. 개혁주의 진영 목사들 가운데도 이렇게 간혹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주류 견해는 아닙니다.
칼빈, 바빙크, 벌콥의 조직신학이나 개혁파 신조 어느 곳에서도 자살 문제를 구원 문제로 한 번도 다루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개혁파적 성경해석을 주장하려면 역사성과 공교회적 객관성(신조)이 있어야 합니다. 어거스틴 정도가 이 주제에서 약간 애매한 입장으로 말할 뿐이지 대부분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자살을 윤리론, 성화론으로 다룹니다. 어거스틴은 연옥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표현할 정도로 종말론에서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로마가톨릭은 자살과 연옥을 끌어다가 자살하면 연옥, 지옥 간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입장은 오히려 로마가톨릭의 전통적인 입장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죄와 소죄를 나눕니다.
개혁파 신학은 죄론에서 죄를 대죄와 소죄로 나누지 않습니다. 다만 공적인 죄, 사적인 죄, 죄의 정도나 경중에서 더 심각한 죄, 가벼운 죄 정도는 인정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 15장 4은 “아무리 작은 죄라도 멸망에 해당하지 않는 죄가 없는 것같이, 아무리 큰 죄라도 참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멸망을 가져오는 죄는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 주제가 계속 헷갈리는 이유는 기본 교리 개념에 혼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정, 견인과 관련하여
예정과 견인 교리와 관련하여, 자살이라는 개별적 윤리적 죄에 적용하면 부당합니다. 즉 드러난 몇몇의 윤리적 부족함과 잘못을 예정과 견인의 유무로 판단하면 행위구원, 공로주의가 됩니다.
간혹 개혁주의 진영 목사님들 중 대요리문답 81문 “그러나 성령 하나님이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함께하시고 돌보시기 때문에 참된 신자들은 결코 버려지지 않는다.”의 “완전한 절망”을 ‘자살’로 해석해서 견인된 자들은 자살하지 않는다 하고 주장하지만 객관성이 약합니다. 이 표현 어디에도 자살을 명시하지 않았는데 본인이 자살을 집어넣어 해석한 것입니다.
오히려 위 요리문답 79문은 “문 79. 참된 신자들이 그들의 불완전함과 그들이 빠진 여러 가지 유혹들과 죄들 때문에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할 수 있지 않은가?”의 답은 예정과 구원의 본질을 언급하는 것이지 자살과 같은 특정한 윤리적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라 할지라도 많은 죄들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구원의 본질은 파괴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수백만 명을 죽인 히틀러가 회개하면 용서받고 평생 신앙생활 잘하다가 질병이나 사고나 고통 중에 자살하면 지옥갔다, 견인되지 못한 유기자라고 하면 상식적으로도 죄의 경중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합니다. 또한 일반적인 도덕윤리도 파괴됩니다.
2.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지 않는 것은 맞지만 두 개념은 서로 구별돼야 합니다. 칭의는 단순히 개별적 윤리적 죄의 유무로 평가되지 않고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단회적 법정적으로 확정됩니다. 그리고 이 확인을 최소한 교회적 세례질서를 통해서 드러낼 뿐입니다. 즉 단순한 성화의 몇 가지 열매만 가지고 칭의를 확인하지 않습니다. 은혜적 칭의와 행위적 자살을 묶으면 행위구원, 공로주의, 칭의 취소론이 열립니다.
십자가상의 강도도 그 즉시 회개하여 구원받았는데 자살하는 자가 죽는 순간 회개하면 그래도 지옥 갑니까? 유기된 자여서 참회개가 아닙니까? 이래서 자살론-구원론 구조는 칭의론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자살이란 죄가 이신칭의를 붕괴시키게 됩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도 구원받지 못하는 특별한 행위가 자살이 되면 자살이 이신칭의보다 더 큰 구원기준이 됩니다. 결국 은혜와 믿음 구원이 파괴됩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의미가 얼마나 깊은 지를 살펴야 합니다.
일부 자살론을 주장하는 분들 중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 칭의받은 자는 반드시 성화된다. 그러니까 자살하는 행동은 성화의 부족이기에 구원받지 못했다]라는 표현은 전자만 본질적으로 맞는 표현이고 후자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또한 본질적 내용인 전자도 이 내용을 구체화해서 각론(성화열매)에 적용할 때는 신중해야 합니다. 즉 역으로 그러면 어느 정도 성화의 열매가 있어야 칭의자로 확인되는가? 답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각론의 내용을 본질론의 내용으로 합쳐서 이해하기에 자꾸 헷갈리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성화는 칭의 열매입니다. 하지만 각론(세부론)에서 단순한 성화의 열매나 정도 여부를 단순히 칭의 유무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로마가톨릭이 바로 이 미묘한 차이를 파고들어서 거꾸로 적용시킨 것입니다. 즉 그러니 성화의 열매가 없이, 선행 없이, 자살이라는 큰 죄를 범하는 것을 보니 구원 확증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자살-구원 못 받음, 견인된 자 --자살 못함의 이해는 로마가톨릭의 주장임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개혁파는 이 부분을 구별해 줬습니다. 즉 본질론에서 칭의가 성화를 이끌고, 성화는 반드시 칭의와 맞물려 있습니다. 하지만 성화의 유무와 정도를 판단할 때는 개인적 형태, 교회적 판단, 하나님의 최종 판단 등을 구별하여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지 단지 몇몇의 윤리적 성장이 없다고 바로 유기자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개혁파 조직신학과 신조의 성화론은 단순 도덕적 변화 성장, 유지만을 성화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의 성장을 성화의 본질론으로 주장합니다. 즉, 단순 윤리적 변화자체가 성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이 더 성화된 사람입니다.
자살도 마찬가지로 이 주제만 성화의 유무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십계명 전체에서 우리는 불완전성화를 주장합니다. 즉 삶의 모든 면에서 불완전성과 연약한 성화론을 주장하고 감리교나 로마 가톨릭은 완전성화를 주장하며, 완전성화의 기준으로 몇몇 윤리적 기준을 제시합니다. 복음주의에서 자살을 성화의 유무, 칭의의 유무로 접근하는 것도 바로 로마가톨릭과 같은 신학적 논리구조입니다. 잘 구별해서 보셔야 합니다.
3. 성령훼방죄와 관련하여
성령훼방죄는 단순 배교나 자살과 다른 주제입니다. 후자는 모두 윤리적 성화의 주제입니다. 단순배교나 자살을 마치 성령훼방죄나 히브리서의 유기적 배교자와 동일선상에서 다루면 두 죄만 아니라 다른 죄들도 모두 동일하게 같이 다루어야 합니다. 성령훼방죄와 같은 죄가 무엇이고 누구에게 해당되는지에 대해서 개혁파 신학자들은 매우 신중하게 취급했습니다. 결코 자살과 같은 윤리적 죄를 여기에 대입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요알: 2:19 ).
4. 성경의 자살 예들
성경 어디에도 자살하면 지옥갔다는 표현이 없고, 예정된 자는 자살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가롯유다 “예수님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다"(막 14:21)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많은 개혁파 신학자들이 이 부분의 표현 때문에 유다는 유기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자살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정, 작정에 기초한 하나님의 뜻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자살한 것은 이 표현 후에 나타납니다.
즉 자살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한 것이 아니라 자살 전에 이미 하나님의 뜻 속에서 예수님을 파는 죄인으로 소개됩니다. 또한 이 구절조차도 지옥갔다는 명백한 표현은 아닙니다. 이 표현이 어떤 뜻인지에 대해서 많은 해석들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베드로에게는 배교 때문에 “사탄아”라고 책망합니다. 유다와 베드로 중 누가 더 큰 책망을 받습니까? 표현상으로 유다는 모호하게 비판, 베드로는 명확하게 사탄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극단적 문자주의자들은 베드로가 구원받지 못했고 지옥갔다라고도 주장합니다. 이처럼 성경의 표현은 단순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종합적인 교리 아래서 봐야 합니다.
5. 사울, 사울 부하 사건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삼상31:4-5).
이 성경 본문의 내용도 자사살 사건이지만 어디에도 지옥, 칭의 취소되었다거나, 그가 처음부터 유기된 자라는 평가가 없습니다. 다만 일어난 사실만 언급힙니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동일선상에서 위대한 용사, 하나님의 백성으로 칭송합니다. 다윗은 선지자였기에 그의 평가는 사울의 죽음에 대한 매우 중요한 해석입니다. 다윗의 평가에 그가 지옥 갔다는 말은 없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위대한 자요 영광이라고 극찬합니다.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삼하 1:17-19),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삼하 1: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저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삼하 1:24).
6. 아히도벨 사건: 지옥, 견인 관련 표현이 없음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들었다가 나중에 자살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도 자살만 나오지 어디에도 지옥 갔다거나 그가 유기자라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히도벨의 자살은 하나님의 작정과 뜻에 대한 실현으로 소개합니다. 만약 아히도벨을 지옥 갔다라고 하거나 견인되지 못했다라고 한다면 다윗 역사에서 요압처럼 중요한 측근들은 모두 지옥 갔다라고 극단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정치 환경에 따라서 다윗과 다른 입장을 취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 자체를 구원문제로 성경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아히도벨 보다 더 심각한 죄들을 범했지만 용서받았습니다. 왜 자살만 더 큰 죄로 취급해야 합니까?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삼하 17:14).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삼하 17:23).
7. 의인 중에 자살한 자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요나는 자살을 택합니다. 결과는 살아났지만 그가 선택할 당시는 결과를 모르고 자살을 결정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싸우다 의인이 자기만 남았다고 불평하면서 죽여 달라고 하소연합니다. 이것도 스스로 죽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욥기, 예리미야도 생일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불평합니다. 의지와 행동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행동 죄도 무섭지만 그 행동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의 의지와 죄가 더 근원적이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즉 간음도 죄지만,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어도 죄인 것입니다. 살인도 죄지만 미움으로 살기를 느껴도 죄인 것입니다.
밧세바의 아내 우리야도 성에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분명 죽을 수 있었지만 우리야는 이스라엘의 전투를 위해서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죽었습니다. 이 죽음은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이 외에도 베들레헴의 물을 구해온 세 용사도 비슷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물을 가져옵니다. 그 때문에 다윗은 물을 먹지 않고 하나님께 드립니다. 왜냐하면 이 물은 그들의 생명을 담보하고 가져온 피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볼 때 이 사건은 거의 자살적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 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삼하 23:16-17).
8. 교회사에 나타난 순교자들: 스스로 죽음을 택함
교회 역사에서는 피난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많은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도 모두 피신하라고 권면해서 마지막 피난길을 떠났지만 애양원 환자들을 생각하고 떠날 수 없어서 죽을 것을 알고도 다시 돌아와 잡히시고 순교 당하신 것입니다. 이들의 자살과 자살적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입니까? 또한 전쟁이나 나라와 가정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들은 전부 지옥갔거나 유기된 자들입니까? 일부 목사님들이 이들의 자살은 선한 자살이라고 구별하기도 하지만 그런 구별을 누가하며, 성경과 신조에 그런 구별이 있나요?
9. 자살의 윤리적 성격
자살만 마치 성령훼방죄, 유기죄에 해당하는 것처럼 특정화 하면 안 됩니다. 비록 자살은 엄청나게 심각한 죄이지만 구원의 유무를 판단하는 죄는 아닙니다. 많은 죄 중에 왜 이 자살만 구원유무의 기준으로 사용합니까? 신학적 근거가 거의 없는 형태가 됩니다. 자살의 동기, 형태도 많은 종류가 있고, 또한 질병적 의학적으로 자살에 이르는 경우(우울증, 정신불열, 등등)도 많습니다. 자살막자고 구원론 전체를 망가뜨리면 안 됩니다. 자살은 성화론에서 엄중하게 책망하면 됩니다.
이 주제는 신론(예정, 작정), 구원론(칭의, 믿음, 견인), 교회론(세례, 배교, 권징), 종말론(천국과 지옥-하나님의 뜻)이 유기적으로 이해되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각각의 개념이 개혁파 입장으로 정리가 미흡하면 계속 헷갈리게 됩니다. 최근 견인교리로 자살 문제를 해결하려는 개혁주의 목사들의 주장들이 인터넷에 언급되고 있는 것을 저도 봤지만 논리적 근거가 매우 약한 주장입니다.
최근에 새관점학파와 패더럴비전(새언약파) 등이 칭의 취소론을 주장하여 법정적 은혜적 칭의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 자살 문제도 자칫 예정론이나 구원론, 칭의론에서 다루면 칭의취소론, 예정취소론 등으로 빠질 수 있는 논리적 위험성이 있습니다.
신원균 박사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조직신학), 페이스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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