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라드인들의 성경사랑
3. 성경사랑
롤라드 신앙운동의 최대의 기여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대중에게 심어주고 확산시킨 것이다. 신앙과 행위의 최고의 권위가 성경이라는 신념을 대중화했다. 종교의 최고 ‘권위’가 교황 또는 로마교회의 조직과 전통에 있지 않으며, 성경이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도록 하는데 이바지했다.8
종교의 최고 권위가 로마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프로테스탄트 원리는 롤라드 신앙운동의 신학적 기초였다. 성경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롤라드인들을 움직였다. 그들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품을 배우고, 영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발견하고 싶어 했다. 물질만능주의, 종교적 교만, 교회라는 조직이 고안해 낸 종교 의식들과 강압적 지배권은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삶과 그의 제자들의 삶과 불일치하며,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9 롤라드 신앙운동의 신학은 성경만이 적합한 기독교적 실천의 기초를 제공한다고 확신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이나 하나님의 법의 이성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으면, 사람들이 우리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며, 우리도 그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우리가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기 때문에 우리를 신뢰한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 지어다."10
저명한 영국의 감독 레지날드 피콕은 롤라드인들을 당대의 가장 큰 대적(大敵)으로 여긴 성직자 가운데 한 명이다. 롤라드 신앙운동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남자만 아니라 감히 여자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또 겸손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고 했다. 교회와 성직자가 지녀야 할 이성적 논증이나 증명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근거로 삼는다고 비판했다. 이 맥락에서 레지날드 피콕은 성경의 권위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신약성경에 토대를 두지 않고서는 기독인들을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묶어두는 어떠한 법령도 존재하지 않는다. […] 성경을 참되게 이해하려는 열망을 가진 심령이 가난한 기독인 남녀는 누구든지 그것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 그 남녀가 언제 읽든지 간에 그리고 그 남녀가 더욱 겸손해지면 질수록, 더 빨리 성경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중략) 성경적 이해를 찾는 사람은 언제든지, […] 그 남녀는 어떤 성직자가 어떤 종류의 이성 또는 성경의 증거, 특히 이성의 증거로 만든 모든 논증이나 증명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서 돌이켜야 하며, 듣고, 읽고, 이해하기를 멈추어야 한다.”11
4. 외침
롤라드 신앙운동이 남긴 저작물들은 당시 교회의 성찬론과 윤리적 결함을 맹렬히 공격한다. 롤라드인들은 화체설을 거부했다. 화체설 거부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반영한 가장 뚜렷한 흔적이다. “성찬의 빵은 성질상 진짜 빵이다. 물질을 먹지만, 이것은 상징적인 하나님의 몸이다. […] 성체는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먹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성품에 속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물질적으로 먹을 수는 없다”12고 했다.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미묘함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광화문 대로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볼 때 그것의 소재가 나무, 철, 구리인지 또 다른 것인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타내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체설을 거부한 어느 롤라드인은 떡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환되지 않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그것들을 꿀과 함께 삼켰다고 한다. 후대의 롤라드인들은 성찬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것일 뿐이라 주장하고 그 예식을 행할 때 임재하는 그리스도의 실재를 부정했다.
롤라드인들은 나머지 성례들도 성경에 비추어 비평적으로 이해했다. 유아세례의 필요성, 성직자의 결혼 가능성, 평신도가 고백을 듣고 죄를 사하는 일의 합법성 여부를 논의했다. 성경이 당시 교회가 규제하고 시행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한다고 생각했다. 성경을 자국어로 읽고 스스로 생각한 결과이다.
롤라드 사람들은 면죄부 판매와 유통을 비판했다. 당시의 성직자들은 교회의 물질적 비용을 감당하려고 사죄의 대가로 돈을 받았다. 롤라드인들은 이 사안과 관련하여 교황을 비난했다. 면죄부를 팔아 교회의 재정을 채우는 일은 백성들을 속이고 조롱하는 짓 아닌가. 연옥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영혼들을 즉각 구해내지 않고서도 교황이 자비로운 지도자일 수 있는가. 어떻게 애원하는 영혼들의 탄원을 외면한단 말인가.13 면죄부에 대한 롤라드인들의 비평적 논증에서 우리는 16세기 인물 마르틴 루터를 만날 수 있다.
롤라드인들은 성인에게 기도를 올리는 종교 행위를 거부했다. 성인들의 성스러움과 기도의 효력은 별개의 사안이라고 생각했다.14 성인들의 그림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고, 로마교회가 소중히 여기며 신성시하던 성인들의 유골과 유물을 파괴했다. 성상파괴주의가 부활한 듯했다. 위클리프가 점화시킨 교회개혁의 불은 롤라드 신앙운동을 거치면서 영국국교회의 비성경적 관습들을 하나씩 불태워나갔다.
롤라드인들은 라틴어 기도에 반감을 가졌다. 그들에게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의 단순한 나열은 무가치한 종교 의식에 지나지 않았다. 삶이 수반되는 믿음의 행위가 효과적인 기도다. 성지순례는 향락과 유흥 행위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이 참다운 순례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롤라드인들은 교회를 택자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가시적 조직체를 교회로 여기는 기존의 교회관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 교회의 참된 구성원은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말한 위클리프의 주장을 따르는 롤라드인들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 자들도 있었다. 교회의 구성원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 “참된 기독인 남녀,” “그리스도가 피 흘려준 의로운 사람들의 회중”15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위클리프의 교회 정의를 확대 해석하여, 교회와 세속권력을 동일시하는 자들을 배교자로 여겼다. “수많은 제후들과 고위 주교들과 그들 아래의 직위를 지닌 자들은 […] 배교자이다. 교회는 참된 신앙과 믿음의 고백을 인정하는 사람들 위에 서 있다”16고 했다.
도덕적으로 순결한 사제만이 양 무리에게 성례를 베풀 수 있는가? 롤라드인들은 세속적 재산을 소유하거나 죄를 짓는 성직자는 영적인 봉사사역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교회는 온전하지 않은 성직자도 성례를 온전히 시행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인간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이 성례를 제정했기 때문이라고 강변했다.17 어거스틴은 성례의 효력이 그것을 집행하는 성직자 개인의 성결성에 달려 있지 않다고 했다. 위클리프와 롤라드인들의 발상에는 성례의 효력을 성직자 개인의 거룩성에서 찾으려고 한 도나투스주의가 희미하게 엿보인다.
위클리프는 도나투스주의를 배격했고 성례를 거행하는 성직자의 타락을 질타했다. 성례의 효력은 그것을 집행하는 성직자 개인의 거룩함에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주장이 성직자의 타락을 조장하거나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억제하는 구실로 이용되는 것은 잘못이다. 도나투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논의가 요청된다.
롤라드인들의 저작물들에는 당시 교회의 상태에 대한 위클리프의 거친 비판이 담겨있다. 정치권력을 획득하려는 교황의 노력에 대한 반감과 교회의 위계질서에 대한 위클리프의 규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가장 높은 영적 지도자는 그리스도의 법을 체현(體現)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매고 푸는 권세를 주신 것은 착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함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계승자라면 착하고 거룩해야 한다. 베드로와 같지 않은 성직자들에게 권세를 주실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18
롤라드인들은 교회에 대한 정의로운 군주의 개입, 곧 정치권력자의 교회개혁을 촉구했다. 군주가 교회 개혁을 자신의 의무로 여겨야 한다는 것은 위클리프의 생각과 일치했다. 그는 군주에게 국가 비상시기에 교회당을 부수고 거기서 나온 돌들로 요새를 만들라고 충고했다.19 어느 롤라드인은 예배가 “일반적으로 하늘 아래 공기 속에서 더 잘 드려진다. 다만 종종 비가 올 경우에는 교회건물이 좋다”20고 빈정거렸다. 후대의 몇몇 롤라드인들은 위클리프의 교회 개혁의 열정을 훨씬 능가하는 주장을 펼쳤다. “만일 국왕이 교회에게서 부(富)을 박탈하는 데 무능하면 그 다음에는 일반 백성이 그 의무를 맡아야 한다”21고 했다.
5. 탄압과 수난
교회가 위클리프의 사상을 추종하는 이단 무리들을 탄압하는 과정에는 굴곡이 심했다. 종교재판소는 1401년까지의 첫 세대 롤라드인들을 엄중하게 재판했다. 위클리프의 교훈이 옳다고 생각한 첫 세대 롤라드인들 가운데는 공포정치가 두려워 지지를 철회한 자들도 있다. 교회의 이단자 재판은 호전적이고 강경했다. 교회는 반체제 성직자가 설교를 할 경우 단호하게 화형 또는 참수형으로 처벌하겠다고 공표했다. 옥스퍼드의 교수 필립 레펑던은 위클리프의 성찬론을 대담하게 지지하다가 1382년에 이르러 철회했다. 철회 덕분에 나중에 옥스퍼드대학교 총장, 링컨의 감독, 추기경 직을 맡을 수 있었다. 철회를 한 비굴함을 인정하고 다시 롤라드인이 된 사람도 있었다.
거칠고 사납던 이단 탄압의 기세가 한 풀 꺾이자, 롤라드인들의 반체제성직주의, 반교황주의, 성경제일주의 사상이 점차 영국 안에 확산되었다. 1390년경부터 1425년까지의 롤라드인들의 연대기 저자들은 길을 가는 사람들 가운데 두 명 가운데 한 사람은 틀림없이 롤라드인들이라고 했다.22 박해는 계속되었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롤라드인들이 순교했다. 국왕 캥커스터의 헨리 4세(재위 1399-1413)는 즉위와 더불어 롤라드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그 무렵, 롤라드인들에 대한 법적 규제(1401)는 절정에 달했다. 영국의회는 자국 역사상 최초의 이단 화형 법안을 통과시켰다. 롤라드인들이 교회의 성례를 가증스럽게 여기고, 하나님과 교회의 법을 무시한 채 스스로 설교자의 직분을 사칭한다고 보았다. 그들의 설교, 학교운영, 집회, 서적 간행을 금지했다. 범법 혐의자들은 감독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교회는 유죄가 확인된 이단자들이 이단교리 철회를 거절하면 세속 관리에게 넘겨 화형에 처하게 했다. 처형 방식은 대중이 공포감을 가질 수 있는 행태였다.
교회는 이단을 무자비하게 징치했다. 강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1410년대에 화형을 당한 자들이 많았다. 재단사 존 배드비는 결박당한 채 통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런던 상인 리처드 터밍과 스미스필드의 존 클레이던은 순교(1415)했다. 사제 윌리엄 테일러가 스미스필드에서(1423), 윌리엄 화이트가 다른 곳에서 순교(1428)했다. 런던 시민 리처드 호브든과 사제 토머스 배글리가 순교(1430)했다. 얀 후스와 서신 교환을 한 적이 있는 리처드 위치가 순교(1440)했다. 옥스퍼드의 세인트 에드먼드 칼리지의 학장 피터 페인은 이단자 처벌을 피하려고 영국을 탈출(1417)했다. 나중에 후스파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노리치 지역에 살던 100명의 롤라드인들이 이단 혐의로 기소(1424-1430)되었다. 링컨의 감독 리처드 플레밍은 롤라드인들에 대항할 목적으로 옥스퍼드에 링컨칼리지를 설립했다. 나중에 감리교회 설립자 존 웨슬리가 이 대학에서 공부했다.
영국 귀족 신분으로 롤라드인들을 환영한 사람도 있었다. 존 올드캐슬 경은 새로운 설교자들에게 켄트 지역의 자기 영지에서 설교하도록 권했다. 그는 로마교회의 미신적인 미사, 비밀고백―고백성사, 화상숭배를 비판했다. 법정이 여러 차례 소환을 해도 불응했다. 교회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실행을 세속 관리에게 넘겼다. 올드캐슬은 런던탑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하여 4년 동안 은신했다. 그는 롤라드인들 2만 명이 국왕에게 항거하여 봉기를 일으킨 자들과 연루되어 고소를 당하자 웨일즈로 도피(1414)했다. 3년 뒤 체포되어 런던에서 반역자, 이단자라는 죄명으로 정죄당하고 교수형과 화형 처벌을 동시에 받았다.23
상당수 롤라드인들은 박해를 피해 스코틀랜드로 이주했다. 새 정착지에서 붙잡힌 자들은 퍼스와 글래스고에서 화형을 당하여 순교자 반열에 올랐다. 세인트앤드류대학교에서 유학을 하던 보헤미아의 학생 파울 크라우는 이단자로 정죄되어 처형을 당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감독들에게 이단자들과 이단 무리인 롤라드인들을 색출하라고 지시(424)했다. 세인트앤드류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전원이 롤라드파에 대항하여 로마교회를 방어하겠다고 맹세(1416)했다.
박해가 가중되자 롤라드인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농촌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1466년에도 몇 사람이 처형을 당했다. 1507년에는 롤라드인 세 명이 화형을 당했다. 여성들 가운데도 롤라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한 자들이 있었다. 1559년에 이르러 롤라드인 처벌법은 폐지되었다.
맺음말: 반딧불이
롤라드인들은 위클리프의 메시지를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확산시켰다. 보헤미아에 건너가 얀 후스를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켰다. 평신도들 중심의 이 신앙운동은 유럽인들에게 성경의 높은 권위를 자각하게 하고, 교회가 지닌 여러 가지 모순과 성경적 근거 없는 불합리한 요소들을 비평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게 했다.
위클리프의 학문적 역량은 15세기에 유럽인들의 신학적 지평 확대에 이바지했다. 위클리프와 롤라드인들과 보헤미아의 후스와 독일의 루터의 비전은 동일하다. 군주의 교회개혁의 의무, 성경에 부합하는 일상적 삶의 중요성, 성경의 높은 권위 강조, 성직자의 권력남용에 대한 저항, 화체설 거부 등 여러 면에서 일치한다. 루터의 업적은 그가 받은 인문교육의 결과다. 위클리프주의와 그의 신학사상은 콘스탄츠공의회(1415)의 위클리프에 대한 정죄 이후에 공식 학계에서는 학문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위클리프와 롤라드인들의 사상이 16세기 종교개혁운동에 정확히 어느 정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롤라드인들은 보헤미아의 교회개혁자 얀 후스를 성원했다. 영국 롤라드 신앙운동 지도자 리처드 위치의 지지 편지에 후스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왕, 여왕, 귀족들 그리고 대중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고 있습니다. 보헤미아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국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안부를 묻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거룩한 믿음을 고백하기를 매우 원합니다.”24 이는 후스가 보헤미아의 국왕과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보헤미아의 얀 후스와 관련되어 있다.25 후스는 위클리프 사상을 하나의 영감(靈感)으로 받아들였다. 루터는 후스의 『교회론』을 읽으면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우리 모두가 후스파다”라고 소리쳤다. 위클리프와 롤라드 신앙운동이 보헤미아의 후스와 독일의 루터가 주도한 교회개혁운동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롤라드인들은 기독교의 중심 진리를 강조하는 복음전도 활동은 하지 않았다. 왈도파 전도자들과 달리 복음전도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그들은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외치고, 성경에 비추어서 잘못된 관습 개선을 촉구하는데 몰두했다. 미신적인 미사, 성지순례, 화상숭배, 비밀고해를 규탄했다. 성경을 자국어로 읽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연옥을 부정하기도 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눅 7:50)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구원의 근거를 믿음에 두는 사람도 있었다.26
롤라드인들은 성례가 구원을 얻는데 필수적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중세후기라는 시대적 한계 안에서 진행되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교회개혁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더라도 롤라드인들이 구원진리 중심의 복음전도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신칭의’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를 명료하게 전파하는 활동에 열성을 다했더라면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이 받은 영예를 그들이 차지했을 수 있다.
롤라드인들은 ‘교회법’보다 ‘하나님의 법’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이 교회 전통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신을 영국인들에게 심어주어 다가오는 영국교회의 개혁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이바지했다. 반딧불이의 반짝임처럼 당대에는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였고, 이단으로 정죄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교회개혁운동의 길을 예비했다. 종교적 사상적 정치적 격변을 맞이할 준비운동, 예비훈련을 시켰다.
최덕성 지음, <위대한이단자들: 종교개혁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7장 2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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