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위클리프: 교회개혁의 새벽별

by reformanda posted Jul 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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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에 대한 이단심문 상상도


존 위클리프: 교회개혁의 새벽별

 

 

종교개혁의 새벽별, 영국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c. 1330-1384)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대조적이다. 한 편에서는 중세후기 사회와 교회 체제를 변혁시킨 이단자로 여기고 그의 학문적 업적을 교회분열운동,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단운동의 서막으로 본다. 다른 한 편에서는 그를 유럽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이끈 주체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선구자로 평가한다. 기득권, 힘의 논리, 로마가톨릭교회의 관점으로 보면 전자의 판단이 옳고, 성경, 성경적 진리성, 프로테스탄트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후자의 평가가 옳다.


위클리프는 중세기에서 현대 초기로 바뀌는 전환기에 살았다. 아퀴나스주의와 스코투스주의 체계가 몰락하고, 오캄주의를 둘러싼 현대적 사상운동이 흥기하던 시기였다.1 옥스퍼드에서 약동하던 어거스틴주의는 위클리프에게 성경에 충실한 신학적 통찰을 하는 눈을 제공했다. 교회가 당면한 현안들을 심도 있게 비평적으로 논의하게 했다.


위클리프는 학자형 이단자이다. 사도적 형태의 교회 회복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철학자로 등단하여 신학자로 생을 마쳤다. 사후 20년 뒤에, 교회는 그의 시체를 꺼내어 이단자로 정죄하고, 화형에 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의 이단 정죄는 위클리프를 역사의 거성(巨星)으로, 정통신앙의 불멸의 증인으로 등장시켰다. 그에게 항구적인 영광을 안겨주었다.


독립적인 발상, 비평적 사고 능력을 가진 신학자 위클리프는 마지막 10년 동안에 정적들을 놀라게 한 탁월한 글들을 썼다. 방대한 학문적 업적과 탁월성은 후학들의 머리를 숙이게 한다. 초기 저작들은 철학적인 주제들을 다루었으며, 후기 저작들은 신앙고백공동체가 당면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련된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었다.


위클리프는 자기 시대의 교회에 필요한 신학적 답을 제공했다. 그의 주장은 대부분 성경적이며 합리적이었다. 불의한 교회 권력과 무지한 종교 관습에 맞서는 용기를 가진 한 명의 신학자가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며, 왜 그토록 소중하며, 어떤 종류의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알려준다.

 

1. 신학자 위클리프

 

요크셔 지방 출신 위클리프는 로마교회 독실한 신자였다. 1340년 초가을에 옥스퍼드의 발리올칼리지에 입학했다. 옥스퍼드에 6개의 단과대학이 있었을 때였다. 그는 대학에서 기독교사상사, 아퀴나스주의, 스코투스주의를 포함한 역사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라틴어 텍스트들과 씨름을 했다. 라틴어로 강의를 듣고 설교를 했다. 법학, 수학, 천문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문학석사 학위(1361)를 받고, 8년을 더 수학하여 박사학위(1372)를 받았다. 옥스퍼드에서 15년 동안 인문학, 철학, 신학을 공부했다.


당시 옥스퍼드의 학생들과 성직자들은 한 종류의 가운을 입고 생활했다. 학교에는 학생들보다 수도사들과 사제들이 더 많았다. 어느 교회사가는 위클리프가 목격한 수도원과 같은 당시 옥스퍼드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위클리프는 돌아다니는 수많은 성직자들을 보고서 놀랐다. 어떤 사람은 연구도 하지 않고 직업도 구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방랑자들을 보고 놀랐다. 성인들의 유골을 팔고, 위조된 무용지물의 교황의 교서들을 팔아먹는 면죄부 판매자들도 보았다. 그는 탁발수도사들이 작은 간이용 제단을 들고 다니면서 지역 성직자들과 경쟁하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말씀이 전파될 때면 천민들과 함께 가치 없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모든 방랑자들이 밤에 주막에 모일 때마다 농촌 사람들과 도시인들은 무슨 소식이라도 들으려고 함께 모였다. 탁발수도사들과 행상인들이 그 당시에 우편물과 소식을 전달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2

 

위클리프의 학업기간이 상당히 길었던 까닭은 형편없는 위생조건과 흑사병 그리고 지속되는 교내 갈등과 관련되어 있다. 함량미달의 술에 불만을 가진 옥스퍼드 대학생들이 지역 관계자들에게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대학생 63명이 죽었다. 탁발 수도사 신분으로 가르치던 교수들은 학교를 떠났다. 상급 과정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옥스퍼드의 수도사들과 지역 사제들 간의 계속되는 주도권 다툼 때문에 연구에 전념할 수 없었다. 위클리프는 학부과정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에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오랜 기간의 옥스퍼드 학업에 필요한 학비와 생활비의 큰 몫은 영지를 가진 위클리프의 부친이 보낸 것으로 보인다. 위클리프는 사제였지만 교회가 주는 녹봉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교황청이 그의 사상을 달가워하지 않은 탓이다. 위클리프는 사제 없는 여러 교회들을 한꺼번에 맡아 돌보아주고 그 사역에서 생긴 돈으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했다. 학비와 생활비는 학생의 행동의 폭을 결정한다.


사제 위클리프는 1370년에 옥스퍼드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중세신학의 표준 교과서이며 필수과목인 피터 롬바르드의 문장론을 가르쳤다. 그리고 신학과 철학 연구에 매진, 몰두했다.3 유머감각은 없었지만 뛰어난 화술과 엄격한 논리로 명성을 얻었다.


위클리프는 철학자로 등단했다. 옥스퍼드의 사상 풍조가 자연 지식과 초자연 지식을 구분하면서 회의주의에 기울어지자 그것에 반대하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오랫 동안 겪은 쓰라린 고통과 소외와 고독한 씨름을 거쳐 발전했고 어거스틴의 신학전통에 서 있었다.4 위클리프의 신학사상은 옥스퍼드의 어거스틴주의 지식인들에게도 빚을 지고 있었다. 로버트 그로스테스트 교수는 교황 비판으로 유명했다. 위클리프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그의 주장을 인상 깊게 받아들였다.


옥스퍼드 머튼칼리지 학장이며 교수인 토머스 브래드워딘은 펠라기우스주의와 마니교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선행의 관계를 은혜의 필요성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냈다. 은혜와 자유의지를 연속적으로 강의했다. 강의한 것을 토대로 저술한 책에서 당시의 영국교회가 펠라기우스의 뒤를 따라 흘러가고 있다고 지적했다.5 철학 강의실에서조차 은혜에 관한 한 마디 말도 듣지 못했고, 종일 듣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의 주인이라는 주장뿐이라고 말했다. 브래드워딘은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논설로 명성을 얻었다. 1366년에 두각을 나타낸 위클리프의 사상은 브래드워딘의 은혜교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발리올칼리지 학장이며 교수인 리차드 피쯔랄프는 프랜시스수도단 수도사들 비판으로 유명했다. 신자의 죄의 고백을 듣는 권한과 죽은 자들을 땅에 묻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수도사들의 주장을 공격했다. 피쯔랄프는 학문 논의에서 통치(dominion)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은총에 기반을 둔 통치14세기 중엽 옥스퍼드 학풍의 주요 개념이었다.6


위클리프는 이 용어를 수용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국가의 주권에 대해 논의를 하면서 종종 피쯔랄프를 인용했다. 프랑스와 전쟁으로 영국인의 애국심이 한참 고조될 때 두 편의 방대한 논문에서, 군주가 자기 영토에 있는 교회의 세속적 문제들, 심지어 세속 재산에까지 주권을 지닌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위클리프보다 앞선 시대에 살았던 파두아의 말시글리오와 안둔의 존은 제한적 교황권 이론을 제시하고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위클리프는 교황권에 도전한 선배들의 책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 내용을 접했을 가능성은 크다. 어느 위클리프 연구가는 그가 오캄의 윌리엄의 작품을 접하면서 말시글리오의 견해를 배웠을 수 있다고 한다. 위클리프가 반세기 전 학자들의 사상을 수정하여 자신의 주장으로 천명했을 것으로 추정한다.7


학자의 지식은 다른 학자와 타인 작품과의 상호작용으로 풍요로워진다. 위클리프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는 독자적인 발상, 비평적인 사고 능력을 가졌다.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거대하고 견고한 교황제도에 용감히 도전했다. 여기저기서 얻은 정보들을 토대로 책을 저술했다. 그의 작품들은 통상적인 추측을 뛰어넘는다. 독창적이고 풍요로운 내용들을 담고 있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성경과 어거스틴의 작품에서 강한 힘을 공급받았다. 독창성과 비평적 능력을 가진 이 지성인은 신학, 철학 분야의 방대하고 탁월한 저작물들을 남겼다.


위클리프의 학문성은 스콜라주의 학풍과 관련이 있다. 스콜라주의는 유명론과 실재론을 둘러싸고 과격하리만큼 활기찬 논쟁을 펼쳤다. 비평적 지식인들은 유명론을 지지했고,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실재론을 지지했다. 본질이 개체 또는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면 그 개체가 속한 더 넓고 전체적인 것은 무엇인가? 유명론은 개별적인 것들만 실재하고, 보편적인 것들은 지식인들이 꾸며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실재론은 보편적인 것만이 실재하며, 인간 마음의 관념과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했다.8 유명론과 실재론은 로마교회와 교황의 존재와 권위 그리고 성찬론 이해에 직결되어 있다.


위클리프는 실재론자였다. 둔스 스코투스와 옥캄의 윌리엄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명론을 거부했다. 위클리프 철학의 핵심은 개인이 우주적인 계급을 거쳐 왔으며, 본질적으로 불변하고 파괴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실재주의를 반영한 위클리프의 철학은 초기부터 종교적 색채를 가졌으며, 회의주의와 영적 불임증에 도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9


위클리프가 교황청을 향하여 도전장을 낸 직접적인 동기는 영국 왕실 봉사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아들 곤트의 존은 위클리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궁정에서 일하도록 초빙했다. 1381년에 부왕이 죽자 미성년자로 왕위를 계승한 존은 리차드 2세가 등장할 때까지 영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렸다. 위클리프는 1376년에서 1378년까지 왕실의 외교가, 논쟁가로 봉사했다.


위클리프는 교황청과의 협상에서 교회의 음모와 교황의 정치 책략으로 이루어진 협약에 환멸을 느꼈다. 이 사건은 그에게 교회개혁의 각오를 다지게 하여 고위 성직자들의 부귀와 교회의 세속화를 공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인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주권(Lordship)과 청직이직(Stewardship)에 대한 세 권의 책을 저술하는 동기였다. 위클리프는 왕실에서 일한 덕분에 영국인들에게 애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위클리프에 대한 18가지 죄목을 발표했다. 교황 덕분에 위클리프는 국제적인 인물로 부상되었다. 위기는 기회로 다가왔다.


위클리프는 왕실 봉사를 시작한 직후 자신의 관심을 형이상학에서 실천적인 문제로 전환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능력에 따라 내 생의 나머지를 보다 실천적인 사색에 바쳐야 할 때가 되었다”10고 했다. 그는 자기 시대의 과제와 그것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하고 싶어 했다.


영국 대주교 윌리엄 코트니는 위클리프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1377년에 영국의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위클리프에 대한 열 가지 죄목을 확정지었다. 이단자로 처형할 죄목에는 성찬론, 교황청, 고백, 주권, 연보에 대한 그의 비판적 논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중의 반발로 말미암아 이단정죄는 좌절되었다. 코트니는 또 다시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정죄할 24개조 항의 죄목을 들이밀면서 도미니크수도단에 굴복하라고 했다.


이 때 랭카스트의 공작이 위클리프를 보호하고 안전을 확보해 주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위클리프는 영국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과 애국심을 가진 평민들의 지지로 몇 차례에 걸쳐 교황과 교회가 쳐놓은 죽음의 덫에서 벗어났다. 교회의 제재와 위협이 증가하자 후원자가 줄어들고, 후원금이 중단되었다. 탁발수도사 친구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2. 공의회운동, 공의회주의

 

위클리프의 신학사상은 14세기에 교황좌를 둘러싸고 일어난 정치적 갈등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 과정에서 태동하고 제시되었다. 위클리프가 제도, 교회의식, 교리의 개혁 곧 교회론, 교황제, 성찬론 등을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근본적으로 새롭게 이해하고 혁신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한 배후에는 교황청의 비극적인 역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교회는 교황청의 권위가 극도로 약화되자, 개혁을 꾀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전체 공의회에 눈길을 돌렸다. 여러 명의 교황들이 동시에 정통성을 주장할 때, 누가 합법적인 교황인가를 판단할 권위를 가졌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공의회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공의회운동은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확산시켰다.


로마인들은 로마의 교황이 프랑스의 노리개가 됨을 걱정했다. 교황을 선출하려고 모인 추기경들을 건물 안에 가두고 이탈리아인을 교황으로 선출하라고 요구했다. 프랑스 출신 추기경이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보다 훨씬 많았다. 그들은 프랑스 아비뇽에 있는 교황청을 선호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탈리아인 대감독 바리가 1378년 부활절에 우르반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등극했다.


우르반은 조심성이 결여된 인물이었다. 자기의 신념을 실행할 상황에 대한 심도 있는 고려 없이 기득권을 가진 추기경들을 비난했다.11 우르반을 경계하는 추기경들은 그가 정신이상자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친척을 요직에 임명하는 족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우르반은 자기를 지지하는 이탈리아인 26명을 추기경에 추가 임명하려고 했다. 추기경들은 우르반이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이 포위된 상태에서 강제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르반을 교황으로 선출한 추기경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다 새 교황을 선출하려고 비공개회의에 참석했다. 그들은 여러 달 동안 우르반이 부여한 임무를 군소리 하지 않고 수행하던 자들이다. 이탈리아인 추기경들도 그 자리에 참석했지만 이 주제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클레멘트 7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동일한 추기경들이 두 명의 교황을 뽑은 전대미문의 모순을 연출했다.


유럽 사회는 두 명의 교황을 둘러싸고 전전긍긍했다. 교황 클레멘트 7세는 군대를 일으켜 교황 우르반 6세를 제거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우르반은 로마 바티칸에서, 클레멘트는 프랑스 아비뇽에서 유럽 각지의 교회들과 세속정부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다.12


두 교황이 사망한 뒤에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각각 다른 후계자 교황들은 자신들의 권좌를 계속 유지하고 대적에게 대항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모으려고 성직매매를 일삼았다.


위클리프의 신학과 그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회개혁운동의 등장을 이해하려면 이와 관련된 교회사 지식이 필요하다. 위클리프 생전과 사후에 진행된 교황직을 둘러싼 교회 갈등의 역사는 신앙과 행위의 최고의 권위에 대한 대중의 인식변화를 가져왔다. 신행의 최종의 권위가 교황에서 공의회운동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두 교황을 모두 사퇴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교회의 모습을 지켜본 신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공의회운동과 공의회주의(Conciliarism)가 모습을 드러냈다.13 4차 라테란공의회(1215)는 이러한 맥락에서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실제적인 살과 피로 바뀐다는 화체설(化體說)을 공식교리로 채택했다. 그리고 모든 신자가 1년에 최소한 한 번의 참회고백을 하도록 의무화했다. 새로운 수도단 설립을 금지하고, 대교회당 설교 규칙을 정했다. 감독들이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도록 했다.


그 무렵, 최대의 관건은 교황의 정통성 논란을 종결지을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을 누가 가졌는가 하는 것이었다. 감독들은 1409년에 피사에서 합동공의회를 열었다. 온건한 개혁 성향을 가진 추기경들이 모임을 주도했다. 아비뇽에 있는 교황과 로마에 있는 교황은 공의회 소집을 방해했다. 피사공의회는 누가 합법적인 교황인지 따지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비합법적으로 선출되었다고 선언했다. 3의 인물인 알렉산더 5세를 교황좌에 앉혔다.


은둔해 있는 두 명의 교황들은 피사공의회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한꺼번에 세 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5세는 교황좌에 오른 지 1년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추기경들은 교황 존 23세를 선출했다. 존은 보호를 요청할 목적으로 적수 교황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치적 분쟁이 심한 이탈리아를 떠나 독일의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찾아갔다.


황제는 또 다른 공의회 소집에 합의한다는 조건으로 그를 보호했다. 1414년에 콘스탄츠공의회가 모였을 때 교황 존 23세는 자신이 교황으로 추인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맹목적인 야망과 생활태도를 싫어한 추기경들은 사임을 요구했다. 존은 도주했고, 우여곡절 끝에 사로잡혀 강제로 퇴위 당했다.


로마에 있던 교황 그레고리 12세가 사임하자 그곳 추기경들은 공의회가 지명한 위원들과 규합하여 마틴 5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아비뇽에 머물던 또 다른 교황 베네딕트 13세는 성채로 도주하여 머물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는 선출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교황은 한 명으로 좁혀졌다. 마틴 5세가 유일한 교황이었다. 콘스탄츠공의회는 교황으로 말미암아 생긴 교회분열을 종식시키고 이단을 척결하고 부정부패를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성직매매, 성직중임제, 궐석성직제에 대한 칙령을 반포하는 등 도덕적, 제도적 개혁에 그쳤다. 절실한 것은 교리개혁이었다. 공의회는 이단 박멸에 열을 올리면서, 죽어 매장된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위클리프의 추종자인 보헤미아 지방의 교회개혁자 얀 후스도 화형에 처했다.

교황 마틴 5세의 후계자 유게네 4세는 공의회를 못마땅하게 여겨 해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공의회의 힘이 너무 막강했다.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의회는 두 개로 분열되고, 교황도 두 명이 존재했다. 교황들의 권력이 강성해지면서 공의회는 점차 교황청의 정책을 수행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공의회운동은 교회의 윤리적 타락과 무질서를 개혁하려고 했다.14 운동은 부분적인 목적을 달성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 자신들이 부정부패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개혁을 단행해야 할 자들이 개혁을 싫어했다. 그들은 성직궐석제, 성직중임제, 성직매매에 개입되어 있었다.


공의회운동과 공의회주의는 교황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그럴 경우에 교황이 물러나야 한다는 인식을 널리 확산시켰다. “공의회는 권위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여받았으며, 교황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계급과 조건을 막론하고, 공의회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며, []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처벌을 받게 된다”15고 선언했다. 공의회는 교황의 퇴위를 결정할 수 있었다. 누가 올바른 교황인지 판단하는 권위를 지녔다.16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어떤 실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유럽 전역에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틈바구니에서 교회개혁을 향한 꿈틀거림은 시작되었다. 교황, 주교, 신학자,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반면에 평신도일지라도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합리적으로 사고(思考)하면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신념이 널리 퍼졌다. 지식인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신앙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의 권위와 그것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위클리프의 개혁신학은 공의회운동이 가져온 신앙과 교회의 최종 권위에 대한 새로운 신념 형성 과정에서 제시되었다.


최덕성 지음, <위대한이단자들: 종교개혁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6장 1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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