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방언(glossolalia)을 지지하는가? 편집 중이나 옮기지 마십시오.
첫번째 글: 사도행전의 방언
1. 한국교회에 성행하는 방언(glossolalia)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하버드대학교 인류학자 니콜라스 하크네스 교수는 최근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를 거쳐 교파, 교단을 넘어 확산되고 있는 오순절주의 방언 현상을 탐색한 책을 펴냈다. 방언의 인기가 경쟁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서 종교-기독교 유산으로 정착되고 있다. 제도화된 대규모 교회들에 의해 증폭되고 있다. 방언이 한편에서는 영적 욕구를 채우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 강한 반대를 유발하고 있다. 수수께끼같은 방언은 찬반 교차점에 놓여 있다고 한다.
2. 하크네스는 방언을 사람의 정상적인 언어 능력의 제한성과 인간 언어의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넘어서는 “충만신학(theology of fullness)의 표현”이라고 정의한다. 인류학-사회학-언어학 관점으로 접근한다. 성경적 근거나 역사적 모범을 탐색하지는 않는다(Nicholas Harkness, Glossolalia and the Problem of Languag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0).
3. 보츠와나대학교의 종교학-신학 교수 제임스 아만즈는 방언 현상을 심리학적 임상실험으로 분석하고서, 방언을 '신성한 언어'(divine language)인 동시에 시끄러운 악기소리와 고성(高聲) 기도와 더불어 감정적으로 고조된 사람들이 영적인 것을 체험하고 싶어 하고 그런 것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결과라고 결론짓는다. 불안한 정서 상태에서 학습된(taught) 말하기이며, 신자가 방언을 할 때 성령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고 한다. 방언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언어(man-made language)이고, 타 종교에서도 나타나며 논쟁이 되고 있다고 한다(James N. Amanze, "Glossolalia: Divine Speech or man-made language? A psychological analysis of the gift of speaking in tongues in the Pentecostal Churches in Botswana," Studia Historiae Ecclesiasticae, vol. 41, no. 2, Pretora 2015).
4. 오순절주의의 상표처럼 여겨지는 방언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위 제임스 아만즈의 주장과 대동소이하다. 방언 반대자들은 이를 저주받은 마법적 기호 발음(semiotic alchemy)이라고 한다. 사탄이 궤계를 부려 신자들을 유혹하는 수단이라고 한다. 방언 또는 방언기도는 이교의 진언(眞言, 만트라)과 비슷하다. 방언 기도자는 신비롭고 감미로운 황홀경-엑스타시 또는 무아지경에 빠지게 한다. 집단적 무아지경에 이르게도 한다. 일체의 번뇌를 해탈한 최고의 경지인 열반(涅槃, 니르바나) 상태에 들어가게 한다.
5. 오늘날의 방언은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신사도주의 공동체들의 영성에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상야릇한 방언을 ‘하늘의 언어,’ ‘천사의 언어,’ ‘하나님께 올리는 영적인 기도'로 여기며 나아가서는 성령세례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6. 방언은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신사도주 공동체의 최대공약수이다. 배타적 영성, 정통성, 영적 성숙을 측정하는 보편적 기준이다. 이들은 대부분 사도행전의 방언과 자신들의 방언 또는 방언기도를 동일시한다. 방언을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으로 여기며, 특히 마귀가 알아들을 수 없도록 따돌리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장치라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신도 타인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7. 방언 지지자들은 방언이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고 영적인 활기로 충만해 진다고 한다. 자신들의 방언은 성령이 말세에 교회에 부어주는 광범위하고 새로운 능력이며, 그 은사를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고, 영이 새로워지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방언이 신자에게 주어진 은사와 능력을 활성화 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방언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태도를 ‘성령훼방죄’로 여기면 그런 사람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고 단정한기도 한다.
8. 교회는 영적은사들을 분별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다. 바울은 방언과 예언과 관련하여 “영들 분별”(고전 12:10)의 중요성을 말한다.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면서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고전 14:29)이라고 한다. 정상적인 교회는 두 사람 이상의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쳐 영적 은사라는 것들을 인정한다.
9. 성경은 오늘날의 방언을 지지하는가? 방언주의자들의 주장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는 성경적 합리적 신학적 근거가 있는가? 오늘날의 방언이 오순절 날의 방언 사건과 동일한가?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함인가? 방언은 영의 기도인가?
10. 방언을 일컫는 학문 용어는 글로쏘랄리아(glossolalia)이다. 방언(glosso)과 말하기(laleo)의 합성어이다. 방언은 본래 혀(tongue)를 뜻한다(막 7:33; 행 2:11). 신약성경은 이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말하기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영어권에서는 지금도 모국어를 '마더텅'(mother tongue)이라고 한다.
11. 신약성경 시대의 방언은 로마제국 안에서 사용되는 각 족속과 각 나라의 언어들이었다. 로마제국의 '내국어'는 오늘날 개념의 외국어였다. 언어는 문법 체계를 지니고 있다. 단어들과 문법으로 구성된 언어는 통역이 가능하다.
12. 방언은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었다(창 11:7,9). 바벨탑 사건 때 언어는 각 민족들과 나라들의 다양한 방언들로 나뉘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로 방언이 생기고,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다.
13.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 사건 때 예루살렘에 주어진 방언은 언어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풀고 되돌리는 사건이었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장벽이었다. 장벽이 초자연적으로 극복됨은 새 언약 시대의 시작과 기독교 공동체의 출범을 알리는 표적이었다.
14. 예수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를 것이니 새 방언들(glossais, 막 16:17)을 말할 것”이라고 했다. 이 유언은 그가 승천한 뒤 약 열흘 후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이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일어나게 될 초자연적 방언 현상을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새 방언들"을 말할 것이라고 했다. 새 방언으로 기도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15. 구약성경 시대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 같은 방언이 없었다. 오순절날의 성령강림과 더불어 나타난 방언 사건은 인류 구성원 일부가 최초로 경험한 특이한 언어 현상이었다. 단어와 문법체계를 가진 각 나라의 언어들을 학습하지 않은 상태에서 초자연적으로 말하고 알아들은 사건이었다.
16. 사도행전의 성령강림과 방언 사건의 초점은 "하나님의 일" 선포였다. 방언 그 자체나 수천 명이 개종하여 세례를 받은 일이 아니라 "예수 그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행 2:21)라는 복음 메시지이다. 이 사건은 예수복음 메시지의 진정성과 교회의 출발을 알리는데 표적이었다. 성령강림과 방언은 그 이후 시대에 반복될 규범으로 주어지 않았다.
17. 오순절 날 초자연적으로 나타난 방언, 방언들을 듣는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나라의 언어, 살고 있는 곳의 지방어, 오늘날의 외국어로 알아들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들(glossais, 복수)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4절).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dialecto, 단수)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6절)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dialecto, 단수)로 듣게 됨이 어찌됨이냐"(8절).
18. 오순절 날의 방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초자연적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사도들은 단어와 문법으로 구성된 방언들(glossais, 복수)을 말했고 디아스포라들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배운 언어(dialecto, 단수)로 알아들었다. 제자들은 아람어로 복음을 전했고, 여러 지방에서 모인 사람들은 그 복음 메시지를 초자연적 능력으로 자기나라 언어로 알아듣고 이해했다. 다양한 방언들을 듣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또렷이 알아듣고 선명하게 이해했다.
19. 예루살렘의 기독인들은 ‘방언기도’를 하지 않았다. 신에게 비밀스런 무엇을 고하는 진언(眞言, 신 18:11; 사 42:12)이나, 이상야릇한 상태의 알 수 없는 소리, 황홀함에 도취하는 형태의 소리현상이 아니고, 남도 모르고 자기도 그 뜻을 알지 못하는 무의식과 무아지경의 중얼거림이 아니었다.
20. 얼마 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주어진 것과 동일한 “방언들”(glossais)이 가이샤라에 주둔한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주어졌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께서 나무에 달려 죽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과 그의 이름을 믿는 자가 죄 사함 받음 등의 핵심 교리를 그들에게 전했을 때였다(행 10:34-43).
21. 예루살렘에 주어진 표적 방언을 목격한 베드로와 동행자들은 성령이 '방언들'을 이방인들에게도 부어주심을 목격했다(행 10:46). 그들은 가이샤라에 주어진 '방언들'을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 주어짐을 증명하는 표적“(행 11:15)이라고 했다. 베드로가 예수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그 말씀을 듣는 이방인들에게 임했고, 그들이 '방언들'을 했다. 베드로와 동행한 할례 받은 유대인 기독인들이 이방인들의 성령 받음과 예루살렘에서 주어진 것과 동일한 '방언들'이 주어짐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라고 말하며 놀라워했다.
22. 약 20년 뒤, 에베소에 있는 12명가량의 ‘어떤 제자들’이 '방언들'을 했다. 바울이 만난 세례요한 추종자들(Mandeans)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성령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세례요한이 고백한 것을 알려주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자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바울이 머리에 손을 얹자 그들은 '방언들'(행 19:6)을 하고 예언을 했다.
23. 에베소의 '방언들'은 바울의 복음전도와 그 복음을 들은 어떤 제자들의 세례 이후에 주어졌다. 왜 그들은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바울과 소통하지 않았는가? 중국 연변 조선족 동포들 가운데 중국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미국 교포들 가운데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가 에베소의 방언 사건에 다른 언급을 하지 않음을 보아 예루살렘, 가이샤라의 방언과 동일한 현상과 목적의 초자연적 언어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베소에는 당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보여주는 표적 방언이었을 수도 있다.
24. 사도행전 2장, 10장, 19장의 '방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다. 성령 하나님이 개입하여 상대방의 언어 곧 학습하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거나 명료하게 알아듣는 신비한 초자연적 언어 현상이었다. 사도행전의 방언들은 그 언어를 말하는 자가 말하는 내용을 알지도 못하거나 혀가 말려들거나 뒤틀리면서 나오는 이상야릇한 중얼거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일이 아니었다. 맑은 정신으로, 언어체계를 가진, 번역이나 통역이 가능한 또렷한 말하기였다. 당일에만 나타난 초자연적 외국어 방언이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리포르만다(기독교사상연구원) 제14회 학술회 발표 논문,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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