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드 마을
왈도파 신앙운동과 롬바르드파
4. 롬바르드파
리용의 빈자들이 점차 많아지고 명성이 높아지자, 이 운동에 경쟁그룹이 등장했다. 알프스산 동북부의 롬바르디(Lombardy) 지역의 빈자들 곧 롬바르드파 무리였다. 오스카의 두란의 지도를 받는 롬바르디의 빈자들은 겸손파(humiliati)라고 불렸다. 그들은 리용의 빈자들 곧 왈도파 신앙인들과 비슷한 형태의 신앙운동을 펼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19 소박한 옷을 입고 다녔고, 맹세, 거짓말, 법정 소송을 금했다. 로마교회는 롬바르디 빈자들과 리용의 빈자들 곧 왈도파 신앙인들을 동일시했다. 두 그룹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이 롬바르디를 방문한 적이 있다. 호감을 가진 그 지역 사람들이 추종했을 가능성이 크다.
롬바르디 지역은 중세사에서 독특한 정치적 기능을 가진 곳이었다. 교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롬바르디의 빈자들은 카타리파 이단과 로마교회의 비평적 설교자 브레시아의 아놀드(1110-1155)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교회갱신을 주창했다.20
롬바르디의 빈자들은 제국정치와 결탁하지 않았다. 부패한 성직주의와 갈등을 겪지도 않았다. 다만 기독인다운 정신을 가진 삶을 추구했다. 사도적 소명을 설교가 아니라 공동체적 삶으로 표현했다. 시골 지역으로 다니면서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사도처럼 사는 하나의 방법이지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삯을 받지 않고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사도적 삶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리용의 빈자들은 마태복음 10장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선교 메시지에 주목했으며, 롬바르디의 빈자들은 사도행전 1장에서 4장 사이에 나오는 공동체 생활에 역점을 두었다.21
리용의 빈자들과 롬바르디의 빈자들의 두드러진 차이는 노동관이었다. 전자는 노동을 부를 축적하려는 유혹의 굴레로 보았다. 후자는 봉사와 증거(witness)의 수단으로 여겼다. 리용의 빈자들은 여행하며 노래하며 설교하는 것을 좋아했고, 롬바르디의 빈자들 가운데는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 그룹의 지도자 오스카의 두란은 본래 양털 가공 기술자였다가 나중에 롬바르디 빈자들의 정당성을 변증하는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롬바르디의 빈자들은 사회적 연대감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다. 왈도파 신앙인들과 다른 길을 걸으면서, 로마교회와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했다. 왈도파 신앙인들과 로마교회의 관계 단절(1205) 뒤, 롬바르드파와 두란은 로마와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후대에 롬바르디의 빈자들 일부가 수도단을 조직했다. 교황 인노센트 3세의 윤허를 받아 가톨릭 수도단으로 출범했다. 롬바르드파는 가톨릭빈자들(Poor Catholics)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22
롬바르드파 무리는 왈도파 신앙인들이 이교도들에게 성경적인 신앙을 가르쳐 개종시키는 것을 본받아 점차 이교도들의 개종에 관심을 가졌다. 롬바르디 빈자들은 리용 빈자들의 청빈한 삶을 주목했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따랐다. 그러나 왈도파 복음전도자들이 카타리파 사람들과 함께 박해받은 것과 달리, 롬바르디의 빈자들―가톨릭 빈자들은 교회의 보호 아래서 세력을 점차 확산시켰다.
왈도파 사람들의 비판정신은 롬바르드의 빈자들보다 온건했다. 로마교회의 성직과 성례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직자들이 죄 때문에 교회의 권한을 행세할 수 없다거나 영적 권능을 상실했다고 보지 않았다. 또한 성직자가 완벽한 존재이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로마교회 안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으며, 사악한 사제나 고위 성직자들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로마교회의 ‘성체성사’―성찬을 신성화하는 것과 관련하여 성체의 실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변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간음자 또는 행악자의 기도까지도 들으시고 받아주신다고 생각했다.
반면 롬바르드파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비호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이 악한 성직자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악한 사제는 필요하지 않다. 그러한 사제가 올리는 기도와 미사는 효력이 없다. 나쁜 고위 성직자들의 위계(位階)는 무가치하다. 그들의 성례는 무효라고 했다. 롬바르드파의 이 주지들은 카타리파의 주장과 비슷하다. 교회에 대한 롬바르드파의 과격한 반대는 먹구름을 몰고 왔다. 교회법정에 고소되었다가 로마교회와 타협(1210)함으로써 미리 불행을 막았다. 이 대목은 이단정죄와 정치력의 상관성을 보여준다.
그 무렵의 성직자들은 수도사들이 펼치는 왕성한 사회 활동을 혐오했다. 교회에 속한 기사(騎士)들도 그들을 귀찮게 여겼다. 성직자나 기사들은 이단자들을 칼로 해치우는 것이 간단하고 손쉬운 억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이단자들을 교화하고 개종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교황은 가톨릭 빈자들에게 기존 수도원에 가입하라고 명령(1237)했다. 여러 해 뒤에는 이들의 설교 활동을 금했다. 그러자 가톨릭 빈자들 곧 롬바르디의 빈자들은 깡그리 사라졌다. 진리운동과 정치력의 타협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5. 왈도파 전통
사람은 자기 시대의 사회적 제약 안에서 산다. 완전하지 않다. 리용의 빈자들 곧 왈도파 무리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아들딸이었다. 중세기라는 시대와 로마교회라는 구도 안에 살았다. 그들이 신앙한 것들 모두 다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마리아를 믿는다”고 고백했다. 어느 왈도파 독일인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화체설을 수용하기도 했다.23
리용의 빈자들은 자신들을 사도시대의 전통을 잇는 소수파 사람들(dissenters)이라고 생각했다. 왈도파는 단일 전통를 가진 공동체가 아니다. 획일적인 규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 안에는 공통의 요소들과 함께 서로 다른 다양한 전통들이 공존했다. 로마교회의 관할 아래에 있는 자들이 있었고, 밖에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성경적 교리를 신앙하고 복음전도를 하는 것은 동일했다.
일부 왈도파 사람들은 자녀들을 로마교회에 보냈다. 일곱 가지 성례에 거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 리용의 빈자들은 왈도파 운동 초기에는 지극히 제한된 사람들에게 성례를 베풀었다. 교회와 교권을 비판하지 않는 왈도파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성례의 효력이 성직자의 도덕적 상태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점 때문에 리용의 빈자들은 그 공동체 안에서조차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부 왈도파 구성원들은 기득권 세력과 조화를 모색했다. 로마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24 성인을 기념하는 예배와 연옥에 있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예배에도 참석했다. 로마교회 신자처럼 보이려고 그러했을 수도 있고, 기존의 종교행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관습적으로 참석했을 수도 있다.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왈도파는 성모 마리아의 중보하는 능력을 믿었다. 개혁신앙과 정신을 가진 사람들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자들도 섞여 있었다.
왈도파 문학 전반에 복음진리와 윤리적 충고들이 나타난다. 예수를 엄격한 율법의 근원으로 묘사한다. 예수는 모세의 율법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더 완전하기를 원한다고 가르쳤다. 예컨대 음란한 생각과 외모를 금지하고, 이혼을 금지하며, 순결을 장려하고, 모든 종류의 맹세나 복수를 금지하고, 악한 자를 용서하라고 명했다. 교회가 성경이 금하는 맹세를 허용하고 성경적 근거가 없는 연옥설을 가르친다고 비판했다.25
왈도파는 성직자 계급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기존 교회의 지위나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다. 성직자들이 베푸는 성례의 효능이 개인의 거룩성에 좌우된다고 보는 도나투스주의 사상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롬바르드파의 이단적 분위기가 왈도파와 결합되면서 성직제도를 강하게 반대하는 자들로 알려졌다. 롬바르드파는 기생충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마교회에 의존하여 살아가려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왈도파 지도자 그룹에는 학식이 높은 자, 문맹인, 반(半)문맹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했다.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왈도파의 교육, 대량의 성경본문 암기, 교부들의 글 일부를 암기하는 방식은 책 부족이 야기하는 간극을 메웠다.
어느 고상한 독일인은 왈도파 구성원이 되고 싶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7개 조항의 간략한 고백문에 서명을 했다. 평생 독신으로 자선과 설교만하며, 체포되더라도 위증하지 않으며, 파송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기로 했다. 목축업을 하던 어느 젊은이는 25세경 또는 30세경에 왈도파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다. 3-4년 동안 신학수업에 해당하는 가르침을 받고, 도덕성 심사를 받았다. 읽기와 쓰기를 배우고, 신앙의 상당부분을 암기로 습득했다. 복음서와 바울서신을 배웠다. 이 훈련생은 학습과 검증이 끝난 뒤에 파송을 받았다. 복음전도와 설교와 가르치는 일을 하도록 파송 받았다. 상급자와 함께 보냄을 받았다. 이는 왈도파 공동체 안에서 하급자가 상급자의 지도를 받고 따랐음을 시사한다.
왈도파 목사들은 간소한 형태의 예배를 인도했다. 라틴어 주기도문으로 기도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러 차례, 심지어 80번 또는 100번 반복하여 기도했다. 프랑스 동남부 지역의 왈도파 신앙인들은 식사 후에 무릎을 꿇고 벤치에 기대어 오랫동안 기도했다. 이러한 사실은 툴루즈의 종교재판관의 심문조서에 나타난다. 13세기 중반의 프랑스 왈도파 신앙인들은 세족을 하는 목요일에 축사 받은 빵과 물고기를 먹었다. 이것은 1300년대까지 시행되어 온 왈도파 형제자매들의 비밀의식이었다.26 왈도파 신앙운동의 지도자들에게 최고로 중요한 것은 평신도 추종자들에게 설교하는 것과 그들의 죄 고백을 듣는 일이었다. 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의 집이나 지하실에서 설교를 하고 추종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고백성사’와 비슷한 형태의 죄 고백을 들어주었다. 지도자들은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왈도파는 초기에 독자적인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영향력과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로마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헌금을 하고, 사제들에게 죄를 고백하고, 성도들의 교제에 참여했다. 사제들의 설교를 들었고, 교회력에 따라 절기와 금식일을 지켰다. 왈도파 복음전도―설교운동을 주도한 형제단은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기존 교회의 ‘성체성사’를 신성하게 여긴 것도 아니다. 지도자들은 사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설교-복음전도와 봉사에 매진했다.
일부 왈도파 구성원들은 ‘성체성사’를 비판하면서, 성만찬을 신비한 것으로 이해하는 로마교회의 성례 개념을 조롱했다. 알프스 산맥에 정착한 지식인 왈도파 목사들은 “반기독교의 자손들이 성례를 집행한다”라고 말했다. 로마교회의 성례가 합당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성만찬은 왈도파 구성원들 사이의 논쟁의 주제였다.
유럽 중세기 도로
6. 왈도파 교회
리용의 빈자들―왈도파 신앙인들은 이단으로 정죄당한 뒤 독자적인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왈도가 죽은 뒤 여러 지역에 산재한 왈도파 신앙인들은 비공식적인 교류를 갖는 형태의 공동체(Council)를 유지하다가 협회(Societies)라고 하는 교회조직을 탄생시켰다. 매조랄(Majoral)이라는 치리기구를 만들었다.
로마교회 교인들이 교황에게 순종하듯이, 리용의 빈자들은 이 치리기구의 결정에 순종했다. 어떤 지역교회는 집사, 장로, 감독을 세웠다. 신자들은 상급자에게 순종했으며, 강한 형제의식(fraternity)을 가졌다.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불렀고, 설교를 듣는 평범한 사람들을 ‘친구,’ ‘신자’(believer)라고 불렀다. 자기 집에서 지도자에게 죄를 고백하고, 설교를 들었다. 드러나지 않게 비밀리 집회 장소에 숨어들었다. 이곳저곳으로 지도자를 따라다니기도 했다.27
왈도파 교회가 급속히 증가하고 로마교회 신자였다가 왈도파 운동에 가담한 자들이 많아졌다. 이 현상은 그 시대의 사람들의 로마교회에 대한 불만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원시적인 기독교 신앙의 회복, 변화, 개혁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하층계급 대중에게 번졌다. 왈도파 신앙인들의 설교활동, 삶의 방식, 신앙관습은 중세 말기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남부 프랑스에, 그 다음에는 독일, 알프스, 롬바르디 지방으로 퍼졌다.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스페인으로 확산되었다.28
로마교회가 왈도파 전도자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하고 카타리파를 징벌하는 방법으로 신자들을 죽이고 심하게 박해하는 동안 프랑스와 스페인 지역의 왈도파 신도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왈도파 신앙운동에 가담하고 성경에 부합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프랑스 왈도파 신앙운동은 알프스 산 계곡 주민들에게 전도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29 그곳은 지역 특성 때문에 한 동안 박해의 피해를 적게 받고 안전한 신앙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 알프스 지역에서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던 왈도파 신앙인들은 템플(Temple)이라고 일컫는 교회당들을 세웠다. 왈도파 신앙인들이 박해를 피해 군사들의 접근이 어려운 알프스 산 피드몬트 계곡으로 피난하여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통설은 사실과 다르다. 그곳에 거주하는 자들이 전도를 받아 왈도파 구성원이 되었다. 일부 지식인 왈도파 신앙인들이 그곳에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남부의 이단자들은 십자군의 창칼을 피할 수 없었다. 1316년에 이르러 왈도파 신앙인들이 종신형을 언도받았고, 또 다른 신도는 화형을 당했다. 3년 뒤에는 세 명이 종신형에 처해지고, 또 다른 세 명이 화형을 당했다.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때(1545)에는 프로방스 의회의 명령으로 프랑스 왈도파 무리가 거주하는 22개 촌락이 약탈 당하고 화염에 휩싸였다.
왈도파 후손들은 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위스의 산골들은 자주 피로 물들었다. 프랑스에서 피드몬트 산 지역 신앙인들은 한동안 박해를 받지 않고 지내다가 추방(1209)당했다. 벌금형 처벌(1220)을 받았다. 화형 처벌(1312)을 받기도 했다. 교황은 십자군 군사 1만 8천 명을 피드몬트 산에 파송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왈도파 신앙인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더 안전한 지대를 찾아 더 높은 알프스 산 계곡으로 올라갔다.
영국의 저명한 시인 존 밀턴(1608-1674)은 그 시기에 교회가 자행한 왈도파 기독인들에 대한 극악무도한 박해를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주여 학살당하는 당신의 성도들을 위해 복수하소서.
저들의 뼈가 추운 알프스 산맥에 널려 있나이다.30
왈도파 신앙인들이 순교하는 영광스런 장면은 오스트리아 지방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다. 적어도 50개의 왈도파 공동체가 거기에 있었고, 많은 학교들이 있었다. 왈도파 교회 감독 노이 마이스터는 많은 신도들과 함께 처형(1315)당했다. 왈도파 신앙인들은 8만 명이 넘었다. 도미니크수도단과 프랜시스코수도단은 종교재판관을 보헤미아와 폴란드로 파견하여 그 지역 교회 당국자들을 도와 왈도파를 진압(1318)했다. 당시 보헤미아는 왈도파의 중심 지역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시인 존 휘티어가 쓴 “왈도파 교사”라는 시는 14세기 파사우의 익명의 저자가 남긴 글을 토대로 지은 것이다. 휘티어는 왈도파 신앙인들이 귀족의 저택을 찾아다니면서 최상급 보석들과 좋은 물건들을 내민 다음,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보석을 보여주겠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왈도파 사람들은 정직하고 근면하고 냉철했고, 맹세하지 않았고, 거짓이 없었다고 한다.31
왈도파 후예들은 나폴레옹의 통치 이후에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16세기에 독일과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자 개혁교회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남부 독일의 종교개혁운동과 스위스의 종교개혁운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로마가톨릭교회를 거부하고, 예정론 교리를 포함한 프로테스탄트 신앙고백을 받아들였다. 설교자―전도자의 결혼생활을 인정했다.
중세시대의 끝자락에 태동한 리용의 빈자들 곧 왈도파 신앙운동은 상당히 큰 영향력을 지녔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형태의 신앙운동을 받아들였다. 독일 지역의 왈도파 사람들은 교회의 박해에 강력히 저항한 것으로 유명하다. 보헤미아 지역 사람들은 얀 후스의 추종자 일파인 후스파 사람들과 친분을 가졌다. 후스파 신학자들에게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신학서적을 읽고, 번역하고, 요약하여 산재한 리용의 빈자들, 왈도파 공동체에 보급했다. 그 안에는 연옥교리와 결혼에 대한 로마교회의 그릇된 가르침을 교정하는 내용과 타볼파 사람들의 신앙고백에 관한 긍정적 설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헤미아 지역의 왈도파 신앙인들과 후스파는 15세기에 이르러 ‘왈도파-후스파 연합’ 기구를 탄생시켰다. 1555년에서 1560년 사이에 알프스 산맥에 있던 공동체는 제네바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합류했다. 프랑스 왈도파 신앙인들은 위그노파의 일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독일의 왈도파 신앙인들은 보헤미아의 독일어권 공동체로 유입되었다가 1420년대에 발생한 후스의 종교개혁과 겹치면서 점차 사라졌다. 독일 왈도파 신앙인들은 순교자 얀 후스의 신앙 후예들인 타볼파 형제단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520년대 후반에 알프스 산맥의 왈도파 신앙인들은 개혁교회 전통에 관심을 보였다. 초기 종교개혁신학자들은 왈도파 교회를 모범적인 프로테스탄트교회로 간주했다.
왈도파 교회는 기독교 역사의 분수령인 16세기 종교개혁을 넘어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현재 약 2만 명이 왈도파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왈도파 교회의 색깔도 변했다. 안타깝게도 초기 공동체의 철저한 정통신앙, 개혁정신 그리고 열정적인 복음전도, 설교활동을 찾아볼 수 없다.
왈도파 신앙운동이 기독교 역사에 미친 영향은 고귀하다. 첫째,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교회의 독립성을 적극 변증했다. 성경과 일상행위로 자신들의 활동이 옳음을 판단하도록 했다. 둘째, 성경의 권위와 평신도 대상의 성경교육은 성경을 살아 있는 책이 되게 했다. 자국어 성경 번역운동을 자극했다. 성경보급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성경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우게 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전체를 완전히 암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셋째, 평신도들이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고자 했다. 교회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굽히지 않고 길거리, 집, 교회에서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넷째, 여자들도 가르치고 전도했다. “늙은 여자로 […]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게 하라”(딛 2:3)를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사역은 공식적인 설교가 아니라 가르치는 일이라고 답변했다. 다섯째, 이 땅에서 매고 풀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은 교회라는 조직체가 아니라 복음전도자라고 확신했다. 범죄한 사제가 세례를 베푸는 것을 부당하게 보는 반면, 경건한 왈도파 평신도의 성찬 집례를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카타리파는 왈도파 시대에 알려진 이단이다. 종종 알비파로 알려진다. 알비파는 이원론적 사상에 기초한 카타리파의 다른 명칭이다. 그들 가운데 알비-카타르파는 시간이 지나면서 왈도파로 개종했다고 알려진다. 이 주장은 프랑스 학계가 알비파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프랑스 개혁교회가 그들을 자신들의 신앙 선조로 수용한다는 것을 근거를 삼는다.
맺음말: 고귀한 교훈에 귀 기울이라
교회사가 필립 샤프는 아씨시의 프랜시스가 이탈리아의 북부의 잘 밝혀지지 않은 왈도파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32 이는 도미니크와 프랜시스가 롬바르디의 빈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각각 독자적인 탁발수도단을 설립했다는 통설을 뒤집는다. 당시에 사도적 빈곤의 실천이라는 이상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리용의 빈자들과 이탈리아의 왈도파 신앙인들이 사실상 반세기 전부터 그러한 정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프랜시스의 제자들이 이 사실 곧 프랜시스가 왈도파의 제자였다는 것을 알았어도 자신들의 탁발수도 사역의 의미가 반감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왈도파 신앙운동이 13세기에 남긴 문헌들 가운데 성경 프랑스어 번역판 다음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479행으로 구성된 종교 시(Nola Leyczon)이다. “형제들이여 고귀한 교훈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시는 세상 종말이 가까웠고, 인간 타락이 극에 달했고, 노아가 건짐을 받았음을 읊조린다. 또한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떠났고, 이스라엘이 애급으로 내려간 뒤에 모세에 의해 구출되었다는 내용을 언급하고, 그리스도께서 더 나은 율법을 가르쳤으며 가난한 자의 길을 걸었고 십자가에 못 박혔고 다시 살아났음을 말한다. 이 시는 최후심판, 정경, 회개에 대한 권고로 마감한다.33
수도원운동의 열기와 맥박은 용사들의 시대에 이르러 수도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리용의 빈자들, 왈도파 신앙운동은 가난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는 갈망을 가난한 자들의 방법으로 세상에 표출시켰다. 이 갈망은 교회개혁을 향한 영적인 빛이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중세기판 선지자들의 외침이었다.
진리의 기둥인 교회의 권좌에는 정죄 당해야 할 자들이 앉아 있었다. 죄인의 자리에 앉아야 할 자들, 재(災) 위에 앉아 눈물로 회개해야 할 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고 심문관의 자리에 앉아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심문하고 이단 정죄를 하고 있었다. 성경적 신앙을 가진 선량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교회의 적반하장, 패륜아적 행패는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새 신앙운동은 수직적 서열과 위계 의식에 기초한 봉건적 사회 구조에 대한 항거였다. 서로를 평등하게 결합시킨 수평적 연대의식의 발현이었다. 용사들의 시대가 제공한 비평적 분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 안의 계급주의와 교권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했다. 새로운 신앙운동이 일어나거나 이단이 극성을 부리는 것은, 교회가 활기를 상실했거나, 복음진리를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았거나, 교회답지 않은 상태였음을 뜻한다. 교회가 부패하면 이단과 사이비기독교가 성행한다.
교회는 칼을 쥐고 있었다. 용사들의 시대정신에 걸맞게 종교재판이라는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신앙 표현을 뿌리 채 뽑고자 했다. 복음적 기독교 신앙을 가진 왈도파 신앙인들까지 이단으로 몰아 처단했다. 서방교회는 이단들을 진압하고 외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역사가는 이것을 진정한 승리라고 기술하지 않는다.
사도시대 유형의 기독교를 회복하려고 시도한 왈도파 신앙운동은 유럽인들에게 순수한 신앙을 갈망하게 했다. 교회개혁을 촉구하는 성경적 신앙운동에 불멸의 귀감이 되었다. 왈도파 신앙인들의 존재, 주장, 활동은 중세 유럽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자극했다. 리용의 빈자들이 펼친 신앙운동이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여명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역사가는 없을 듯하다.
최덕성 지음, <위대한이단자들: 종교개혁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5장 2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저작권자 ⓒ 리포르만다, 무단 전재-재배포-출처 밝히지 않는 인용 금지
choicollege@naver.com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