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용의 빈자들 1
1. 순회설교자 무리
리용의 빈자들(Poors of Lyon)이 펼친 왈도파 신앙운동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외형적 교회조직 밖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인 권위를 다만 제도화된 외형의 교회가 아닌 오직 성경에서 찾았다. 이는 다가오고 있는 교회개혁운동의 여명이었다. 당대의 성직자들은 전도 활동을 하는 순회설교자들을 푸대접했다. 그리스도의 생명력 있는 복음이 단순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왈도파 신앙운동이 부패한 자신들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리용의 빈자들―왈도파 신앙인들은 복음진리를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설교했다. 원시 기독인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을 재현하고 싶어 했다. 단순한 것은 언제나 강렬하다. 왈도파 신앙인들의 설교는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단순한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참회, 선행, 자발적인 윤리적 삶, 헌신을 추구했다. 또한 성직자들의 방종, 타락, 교회의 부패 그리고 이단 카타리파 사상을 질타했다.
리용의 빈자들은 신성하지 않거나 모독적이거나 경박스런 말을 피했다. 독일어권의 왈도파 사람들은 ‘진실로,’ ‘참으로,’ ‘진정으로,’ ‘솔직히 말해서’ 따위의 표현을 삼갔다. 자신들이 하는 말 모두가 진실하고 정확함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 무렵, 로마교회의 신자들은 의도적으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험악한 언어를 자주 사용했다. 왈도파 무리의 일원으로 낙인찍히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일부 리용의 빈자들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윤리, 사회 활동, 언어를 거부하여 로마교회의 신자와 같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결혼 대상자를 왈도파 신앙공동체 안에서만 찾았다. 구성원들 가운데는 자아의식이 높고 우월감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자파의 신앙운동에 대한 자긍심, 우월감, 배타적 의식을 갖기도 했다. 왈도파 교회가 사도 바울의 스페인 여행길에 세워졌다고 하고, 기독교가 로마화 되기 전에 왈도파가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존 교회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낸 알프스 지역의 왈도파 사람들은 우월감을 가지고 주변 지역 사람들을 얕잡아 보았다고 전해진다.
로마교회는, 교황과 감독이 사도직의 직통 계승자라고 하는 배타적 교리를 근거로, 평신도 무리의 설교 곧 복음전도 사역을 금했다. 설교를 유효한 사도권을 전수받은 성직자의 고유한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왈도파 신앙인들은 달리 생각했다. 예수의 사도들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설교하라고 했고, 왈도파 사람들은 그러한 사도적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했다.1
리용의 빈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복음증거와 말씀 사역을 하라고 부름 받았다는 강한 소명의식을 가졌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사도직을 계승한 자들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발상은 교계(敎階)를 절대시하고 교황과 감독만이 사도직을 계승했다고 하는 로마교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왈도파 무리를 검열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은 웨일즈 출신의 영국인이며, 한 때 영국 왕의 대리자였던 월터 맵이었다. 왈도와 그의 동료들은 수도사이며 신학자인 맵의 성가신 질문을 받았다. 당시의 로마교회 구성원 다수는 왈도파 사람들이 무식하다고 조롱했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사도직을 우습게 여기는 하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2
맵은 왈도파 사람들이 신학 훈련을 받지 않은 무식한 자들이라고 단정하고서 쉬운 질문부터 시작했다.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가?” “과연 삼위일체의 위격들을 믿는가?”라고 물었다. 왈도파 사람들은 “믿습니다”라고 답했다. 맵은 여러 가지 기독교 기본 교리들을 질문했다. 그들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믿는가?”(Do you believe in the Mother of Christ?)라는 질문에 “예”하고 답했다.3 위원들은 그들의 무지에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아를 믿는다가 아니라 마리아에 관해서 믿는다(believe on)라고 말해야 옳기 때문이었다. 왈도파 사람들은 자신들을 옭아매려는 올무나 그물망을 인식하지 못하는 참새처럼, 고의적으로 넘어뜨리려고 묻는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고 있었다.
위원회는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이면 우리들이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는 결론을 내렸다.4 왈도파 무리를 억제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지위와 교회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리용의 빈자들의 전도활동을 금했다. 교황청은 왈도파 사람들의 자발적인 빈곤서약은 용인했지만 사제의 초청 없이 설교활동을 하지 못하게 했다. 설교는 성직자의 고유권한이라는 신념을 드러냈다. 위 결정은 새로운 복음전도운동에 대한 사제들의 불만의 반영이었다. 로마교회는 새 신앙운동이 배타적 사도직과 기득권과 교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5
리용의 빈자들은 복음전도와 설교 활동이 교회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교는 신적 소명이다. 이단 카타리파에 속한 자들을 가르쳐 귀정(歸正)시키는 일이 시급하다. 복음전도와 설교활동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명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를 금함은 옳지 않다. 교황, 교계(敎階), 교권보다 하나님의 말씀 전파의 사명 수행이 더 우선적이다. 복음전도와 설교 활동을 중단하라는 교회의 요구는 하나님의 소명에 역행한다. 왈도파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거나 위배되는 무엇을 감독이 명령하면 불복해야 한다. 만약 그 성직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경에 부합하는 어떤 것을 명령하면 ‘비록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지시, 명령에 복종한다”6고 했다.
교회가 왈도파 신앙인들의 활동을 강력하게 제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추종자 수는 증가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도 수는 점차 많아졌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앞장에서 지적했듯이, 왈도파 신앙인들이 성경 애독, 설교, 복음전도만이 아니라 스스로 빈곤을 선언하고 같은 시대에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7 왈도파 기독인들은 수도사처럼 청빈하게 살았다. 성직자나 수도사가 아닌 자들이 마치 성직자나 수도사처럼 사도적 빈곤을 실천하면서 복음전도에 전념했다. 이는 당시의 교회제도와 수도원제도와 일치하지 않았다. 왈도파 사람들의 사도적 청빈과 순결 이미지는 대중만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리용 빈자들의 청빈한 삶은 당시 성직자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었다. 사려 깊은 사람들은 세상적인 부를 소유하고 있는 성직자들을 참 목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패한 성직자는 주의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여우들에게 맡길 까닭이 없다. 순결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순결을 지도할 수 없다. 천국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자가 어찌 타인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그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8
교회가 왈도파 무리를 박해하자 이 새 신앙운동의 지도자들은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항소했다. 로마는 항소를 기각했다. 교회의 사도직 개념과 성직주의 제도에 익숙하거나 충실한 신학자들이 거부했다. 그들은 왈도파 신앙인들이 신학을 공부한 바 없고 무식하며 따라서 항소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교회는 왈도파 무리의 주장에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리용의 빈자들은 베로나공의회(1184)의 이단정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설교활동을 계속했다. 왈도가 리용에서 추방당하는 데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가르치고 복음전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르본의 감독은 왈도파 신앙운동을 이단으로 규정(1190)했다. 왈도파 사람들이 교회 당국자들의 지시와 가르침에 거역하고, 평신도들이면서도 감히 설교한다는 까닭을 앞세웠다.
토울의 감독은 리용의 빈자들을 체포하라고 명했다. 교황 루시우스 3세는 카타리파와 왈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십자가 표시를 두른 ‘신앙의 용사들’을 동원하여 추종자들을 검거했다. 교회가 왈도파 신앙운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강력히 대응한 까닭은 이 무리의 ‘단순한 복음적 신앙’이 기존의 교회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왈도파 신앙
신학자 버나드 구이(Bernard Gui)가 취조하고 기록한 “이단심문조서”9는 리용의 빈자들―왈도파 무리의 신앙고백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적용했다. 살인을 거부했다. 법적인 살인이든 복지를 위한 살인이든 간에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반대했다. 기존 교회의 금식일과 축제일 규례를 거부했다. 교부들의 가르침 일부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사제에게 하는 고백성사는 옳지 않으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있다고 했다. 왈도파 신기독인들은 자파의 지도자 곧 ‘완전자’에게만 죄를 고백했다.
왈도파는 죽은 성인에게 기도하는 관습을 거부했다. 성인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함은 터무니없는 주장이고 성인축일, 성모축일, 사도축일은 지킬 필요가 없다. 참된 회개와 죄 사함은 이 세상에서만 이루어진다. 죽으면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와 즉각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 연옥교리는 옳지 않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10
왈도파는 금요일에 금식을 했다. 로마교회가 정한 금식일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았다. 사순절에 육고기를 먹지 않는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모범을 보이지 않았고, 금하지도 않았다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습은 따르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했다.
왈도파는 마리아에게 올리는 기도문을 외우지 않는 반면, 주기도문을 자주 외웠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히거나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했다. 주기도문을 30-40차례 조용히 반복 암송했다. 이른 아침, 매일 점심식사 시간과 저녁식사 시간 전후, 취침 시간, 그리고 오전과 오후에 기도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마리아나 성자들을 향하여 기도하지 않고 오로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직접 기도했다.
왈도파는 세 가지 교회계급이 있다고 보았다. 감독, 사제, 집사이다. 이 계급의 힘은 로마교회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직임 자체에 기인한다고 여겼다. 제도화 된 기존 교회의 질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이는 인간들이 만들어 냈다. 사제가 아니라도 성찬을 베풀 수 있다. 성인숭배, 성인유품숭배, 성상숭배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왈도파 무리는 이러한 복음적 신앙 때문에 로마교회와 중세 사회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 무렵, 이단 심문자들은 수상쩍은 사람에게 “사도신경을 외워 보라”고 했다. 외우지 못하면 왈도파 사람으로 간주했다. 왈도파가 사도신경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도신경을 그리스도께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왈도파 전도자들과 설교자들의 신앙고백은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고도의 신학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심문관이 “거룩한 보편교회(Holy Catholic Church)를 믿는가?” 하고 물으면, 그들은 “예”라고 답했다. 그러나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거룩한 보편교회(Holy Catholic Church of Rome)를 믿는가?”라고 물으면, 대답을 주저했다.
왈도파 교회는 분리주의 집단인가? 교계(敎階)를 본질로 보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시각과 기득권자의 관점으로 보면 그러하다. 그러나 성경, 성경적 진리성, 프로테스탄트 관점으로 보면 왈도파 교회야말로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신앙공동체다.11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사도성은 감독좌가 아니라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진리, 교리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왈도파는 구성원을 ‘신자’와 ‘완전자’로 구분했다. 카타리파와 같은 사회적 계층 구조를 지니지는 않았다. 완전자는 집이나 재물을 소유하지 않았다. 결혼한 사람이 ‘완전자’가 될 경우는 아내를 떠나야 했다. 완전자가 어느 지역에 가면 그곳의 왈도파 신자들은 사람들을 모아 참석시키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했다. 완전자들이 “온갖 좋은 것들을 먹고 마시면서”12 설교사역에 전념한다는 비난이 나돌기도 했다.
왈도파는 맹세를 거부했다.13 교회는 그들을 “맹세하지 않는 죄인들”로 규정했다. 이단 여부를 가리는 종교재판 심문자는 어려움을 겪었다. 심문조서 끝부분은 사제가 그들을 심문할 때 겪는 어려움을 열거한다. 맹세로 시작하는 종교재판에서도 그들은 맹세를 거부했다. 강압적으로 맹세를 하라고 하면 “심문관이 맹세할 것을 명하므로 그 명령에 기꺼이 따르겠지만 자의로 맹세를 하지는 않겠다”고 답했다. 강압에 따라 한 맹세는 무효이다. 그래서 신문관은 맹세를 하지 않는 자들을 심문하느라 곤혹을 치렀다. 당시의 맹세 거부는 종교적 의무 거부로 간주되었다. 교회는 맹세를 “사도들이 교훈하고 교회의 박사들과 거룩한 가톨릭교회의 전통과 로마교회의 법(decree)이 지시한 것”14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왈도파 무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과 승천의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했다. 이단심문 조서는 그들이 “이단의 덫에 걸리지 않으려고 마치 로마교회가 믿는 것을 다 믿는 것처럼 답하기 때문에” 이단자로 정죄하기가 아주 어려웠다고 기록한다. “너는 무엇 때문에 종교재판대에 서게 되었는지 아는가?” 하고 물으면,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주인님, 나는 그 까닭을 당신으로부터 기꺼이 듣고 알고 싶습니다.”15
3. 오스카의 두란
오스카의 두란(Durand de Osca)은 리용의 빈자들이 펼친 왈도파 신앙운동을 옹호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왈도 경을 선택하여 당시 고위 성직자들의 탐욕, 성직매매, 교만, 허욕, 과식, 음란, 여러 가지 수치스런 행동과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를 하게 했다고 설파했다. 두란은 하나님이 왈도에게 사도적 임무를 맡기셨다고 했다. 왈도파의 최우선 과제는 이단 카타리파 반박이고, 그 다음은 왈도를 헐뜯는 로마교회 측 비판자들을 물리치는 일이라고 말했다.
두란은 왈도파 신앙운동의 신학적 주지의 정당성을 논하면서 그들의 신앙고백 요점들이 로마교회가 믿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삼위일체 하나님, 세례요한의 신적 소명, 예수의 신성과 인성, 하나의 교회, 일곱 가지 성례, 거룩에 이르는 다양한 길, 육식의 합법성, 카타리파가 허용한 고리대금업의 비합법성, 최후 심판, 영혼의 공로 심판, 죽은 자의 영혼이 타인의 육체로 옮겨갈 수 없음 등을 논의했다.
두란은 이단 카타리파의 뿌리가 영지주의, 마니교, 초기 이단,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공유한 풀라톤주의 이원론임을 밝혀냈다. 반면, 왈도파는 정통신앙을 고백한다고 했다. 만물을 창조한 분이 한 분 하나님이며, 하나님을 배역한 천사는 영원히 저주를 받았고, 모세의 율법은 사탄의 작품이 아니라 신성한 하나님의 법이며, 부활의 날에 모든 사람들이 육체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16
두란은 왈도파 신앙운동을 논리적으로 변증하고, 카타리파를 명확하게 비판했다. 이는 왈도파 무리가 성경과 교부들의 글과 교회법에 충실했음을 의미한다. 두란이 교회를 위협하는 카타리파를 비판했으므로, 기득권을 가진 교회가 환영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까닭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글은 난해한 문체, 복잡한 어법,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 문구로 지면을 채우는 오늘날의 일련의 신학자들 글과 같았다. 두란의 글은 복잡한 구도를 가진 라틴어로 쓰여 졌다. 프랑스의 대중은 라틴어를 읽지 못했고, 두란의 글을 읽을 수 없었다. 지식인들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글은 현학적이었으며, 세련되지 않았고, 어순이 뒤틀렸다. 외국어 특히 그리스어를 많이 사용했다.17
왈도파의 변호인 두란은 1207년 어느 날 갑자기 로마교회 편으로 돌아섰다. 왈도파 형제들을 로마교회로 되돌아가도록 이끌었다. 두란은 교황 인노센트 3세의 조심스런 비호 아래 약 40년 동안 ‘가톨릭 빈자들’이라고 불리는 롬바르드파 무리를 권면하고 가르쳤다. 반(反)카타리파 사상을 담은 작품들을 저술하고, 비판적 논쟁에 투신했다. 두란이 저술한 책은 왈도파의 신앙과 로마교회의 고백이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증명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왈도파 신앙운동은 정치적으로 점차 카타리파와 동일시되었다. 왈도파 구성원들의 겉모습과 삶의 형태가 점차 카타리파가 추구하는 완전자(perfecti)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순결하고 거룩하며 정통적인 신앙을 가진 왈도파는 ‘신학자’ 두란을 잃은 뒤 정치적으로 힘없는 소수 그룹이 흔히 겪는 오해와 핍박을 받았다. 이단이라는 누명을 피하지 못했다. 비평적 능력을 가진 신학자 한 사람이 다수의 전도자들, 구성원들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할 때가 있다.
그 무렵 일각에서는 용사들의 시대에 걸맞게 교회를 비판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 풍토는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카타리파만이 아니라 대중도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혐오하고 질타했다. ‘파트리아’(Patria)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성직의 정치적 오리엔테이션과 성직자들의 부패가 증대하고 있음을 질타했다. 왈도파 신앙인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파트리아의 정신’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교회와 세속의 타협에 더욱 비판적이었다.18
최덕성 지음, <위대한이단자들: 종교개혁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5장 1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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