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버드 슈바이처
역사주의 해석학
최덕성 해석학 강의록 14
1. 역사-비평적 텍스트 해석
신학적 해석학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해석학, 초기 기독교 해석학, 어거스틴 해석학, 중세 해석학, 종교개혁해석학, 정통주의 해석학, 계몽주의 해석으로 이어져 왔다. 신학적 해석학에 대한 관심은 20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절정에 달했다. 이 절정은 신학자들과 동 시대의 철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토론과 성경해석 그 자체의 새로운 실천적 출발에 기인했다.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해석학 사상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철학적 성찰이 신학적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 아래서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주석 방법에 대한 모색이 신학적 관심을 주도했다. 텍스트-해석의 원리에 대한 철학적 재성찰의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적 통찰력이 불트만(Bultmann), 에벨링(Ebeling), 그리고 푹스(Fuchs)와 같은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자유주의 신학 전통을 무색하게 만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현상학-실존주의 접근방법을 환영했다. 이것은 확실한 새로운 해석학적 성찰방법으로 여겼다. 19세기에 출현한 자유주의 성경주석과 순전히 역사적인 접근 방법은 급진적인 정치적, 과학적 도전들로 말미암아 혼란스러워진 세상에서 기독교 생활양식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할 수 없음이 입증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텍스트와 종교 문헌을 오로지 역사적으로만 다루는 방법을 초월한 인문학적 토대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촉구했다. 성경 메시지와 이 세상의 재해석된 인간의 현존재(Dasein) 사이의 새로운 창조적인 종합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의 실존적인 요구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동일한 열정으로 이 새로운 방법론적 출발을 공유한 것은 아니다. 스위스계 독일인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해석학을 거부했다.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그는 동료 신학자들이 하이데거의 철학적 해석학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바르트는 신학과 철학 사이의 긴밀한 연합이 신학에 심각한 위험이라고 생각했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처음으로 큰 확신을 갖고 증진시키려 한 신학적 해석학과 철학적 해석학 사이의 관계가 가장 급진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이 대립은 다음 장에서 소개할 바르트와 불트만의 논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개신교의 신학적 사고를 특징 지웠던, 금세기에서 일반적으로 ‘신해석학’이라고 일컬어진 해석학적 논의는 역사주의에 관련되어 있다. 역사주의는 후기 하이데거의 언어철학의 영향에 의해 주도되었고 신학적 사고의 해석학적 기초에 대한 불트만의 통찰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했다. 바르트와 불트만이 거부하고 자신들의 접근방법을 발전시킨 동기를 제공한 것은 해석적 실천과 신학적 틀이었다.
19세기는 텍스트-해석 접근 방식은 신학과 문헌학에서 ‘역사주의’라고 불려진다. 이것은 19세기에 독일을 휩쓴 낭만주의 조류의 한 부류로서 개별성과 민족정신을 강조한 역사주의가 아니다. 영국의 칼 포퍼가 표방한 역사진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움직임, 유형, 법칙, 경향 등을 발견하려는 사회과학적 접근방법으로서의 역사주의도 아니다. 이 맥락의 신학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채택한 실증주의적 역사접근 방법을 뜻한다.
역사주의는 오랜 기간 동안 텍스트-해석을 지배해 오고 많은 성경학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순수한 역사적 접근방법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포하고 있다.
18세기 말과 19세기의 다수의 신학자들은 역사-비평적 성경 본문 연구를 존경할만한 유일한 학문방법으로 여겼다. 유대교-기독교 전통의 고대 텍스트들 곧 구약·신약 성경을 다룰 수 있는 적합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를 신학에 도전하는 계몽주의에 대한 하나의 반응으로 여겼다.
새로운 과학과 그것의 급속한 진보는 성경적 세계관의 기초에 대한 합리적인 비평을 등장시켰다. 이 도전은 신학적 사고의 내용과 방법를 불가피하게 재정의, 정립하게 했다. 근거 없는 모든 권위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계몽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 ‘해방적 성격’은 신학자들로 하여금 자료, 방법, 종교적 제도의 감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들의 권위를 구축하고 그것을 과시하도록 독려했다.
제뮬러 같은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새로 등장하는 비평적 과학의 이상과 각자의 종교적 전통에 대한 충성심 둘 사이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았다. 과연 한 신학자가 비평적 연구의 기초인 이성의 요구와, 자신의 종교적 전통의 기초 텍스트들의 신성함,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석의 옛 방식들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요청하는 교회의 요구 모두에 신실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첨예하게 된 것은 성경 본문을 더 이상 과학적인 정확한 기술(記述)이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신임할 만한 역사적 기록으로 보기도 어렵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과학적 연구가 성경 텍스트와 그것의 해석학적 본질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할 경우, 그리고 복음서가 제시한 예수의 생애에 관한 연대기가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없다고 주장될 경우, 성경에 대한 재평가가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서로 상충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복음서들은 더욱 철저한 비평적 연구를 요청했다. 더 이상 전통적인 교리에 의존하거나, 신적인 영역의 문제를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정신은 더 이상 그러한 것을 수락하지 않는 자아의식의 상태에까지 도달했다. 그래서 한편에서 이른바 역사와 전통이 제시하는 진리들을, 다른 한편에서는 이성이 제시하는 진리들 사이의 상충되는 바를 어떻게 다루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고 설득할만한 답을 요구했다.
2. 역사와 이성 사이의 수렁
고톨트 에브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은 강력하게, 어떻게 우리가 역사의 진리들과 이성의 진리들 사이의 넓은 수렁을 다룰 수 있는가 하고 질문했다. 역사적인 사건들은 필연적인 진리의 운반자가 아니다. 역사적 연구만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진리 구축의 필수적 기준을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
레싱은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의 발전을 부추긴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의 신학적 중요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성경 본문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기독교의 옛 초자연주의적인 주장을 파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 대한 역사적인 취급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 신앙의 토대가 될 수 없으므로 성경해석에 깊은 신학적 활동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레싱과 임마누엘 칸트가 제기한 질문들 모두에 답하려고 했다. 칸트는 종교적 믿음이 형이상학적 기초에 근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반대했으며, 종교의 가치는 도덕적으로 건전한 인간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주창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형이상학이 종교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칸트와는 달리 도덕을 종교의 기초로 보지 않았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신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 경험이며, 종교적인 전통의 문서들이 제공하는 빛을 통한 이 경험의 해석에 기초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슐라이에르마허는 그의 해석학적 성찰을 발전시켜 과학적 이성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결정적인 거리를 좁히려고 했다.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 신실한 새로운 신학 모델을 제시하려고 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적 모델은 어떤 특정 성경 텍스트의 거룩성 또는 영감에 관한 어떠한 선험적인 주장에도 근본적인 비평을 가하며, 텍스트 해석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에도 근본적으로 부정적이었다. 텍스트 해석은 근사치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해석에서 설명활동(문법적 측면)과 개인적인 목표(심리적인 측면)를 결합시켰다. 계속적으로 과학적 연구와 종교적인 텍스트를 개인적으로 자기의 이해로 만들어 나가는 전유(專有, appropriation, 본문을 자신의 이해로 만들어 나감) 활동이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서로를 전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겉으로 보기에는 이 종합이 이성(ratio)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신앙(fides)에 대한 우리의 이해 사이의 유대를 더욱 강화시킴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경학은 그 실제적인 발전과정에서 슐라이에르마허의 방법론적인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성경학’(biblical scholarship)과 ‘성경적 신앙’(biblical faith) 사이의 균열이 증대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성과 신앙의 균열을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이 둘의 종합에 도달하려고 노력한 또 하나의 시도였다. 프리드리히 헤겔(Friedrich Hegel, 1770-1831)은 나름대로 역사적으로 ‘의심스러운’ 성경 자료에 근거한 종교와 비평적인 인간 이성 사이의 이 같은 갈등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료들에서 어떤 종교적인 관념들을 추론하여 그 자료들을 초월하고, 모든 역사 정신을 포함하는 큰 체제 속에 그것들을 종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헤겔은 이 정신을 발전의 원리와 발전의 최종 목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종교적인 관념과 인간 이성 사이의 정신적 화해에 대한 이상(理想)은 일단 매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역사발전 관념은 다가오는 여러 세대 동안 계속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이제 철학적 연구와 신학적 연구의 목표는 더 이상 역사의 진보가 어떻게 궁극적인 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변적 논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정신적 또는 물리적 결과를 야기한 기원과 발전들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역사 연구는 헤겔의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인 개념을 떠나서 인간의 과거에 대한 더욱 더 상세한 연구를 향해 나아갔다. 헤겔에게 ‘역사’는 성경 본문에 대한 철학적인 해석의 특별한 결과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헤겔 이후 ‘역사’는 모든 성경 해석의 골격으로 탈바꿈했다.
과학의 흥기가 신학적 사고의 혁명을 일으켰듯이, 역사의식의 흥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과학적 비평과 역사-비평이라는 두 골격은 모두 기독교의 교리적 전통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했다. 처음에는 교회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과학적 세계관은 고대 기독교 세계관을 흔들어 놓았고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익숙했던 지평들에 도전했다. 이제 역사-비평 의식은 사건들의 순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때로는 성경 텍스트가 언급하는 사건들 그 자체를 문제 삼았다.
해석자의 지평이 먼저 철학적 지평의 도전을 받았다. 신학적 사고 자체의 자료들에 대한 신빙성 곧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대한 성경적인 기초가 문제시 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연히 이 공격을 자신들의 신앙을 해치는 악의 역사로 보았다.
그러나 다수의 신학자들은 이전의 과학적 혁명 덕분에 신학적 사고를 위한 새로운 역사적 주형(鑄型)의 중요성을 포착하고 성경 본문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에 착수했다. 그렇지만 역사-비평적 연구의 결과가 어떻게 신학적 사고 안으로 통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역사 비평적 텍스트-검토(text-examination)는 이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주로 신학적 사고를 따라, 심지어 신학적 사고 밖에서 발전되었다. 성경주석과 조직신학은 다시 한 번 각각 다른 길을 걸었다.
한스-요아킴 클라우스(Hans-Joachim Kraus), 로버트 모르간(Robert Morgan), 존 바톤(John Barton)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성경주석 역사가들은 역사-비평 주석 방식의 성경연구의 진행과정을 기술했다. 역사-비평적 연구의 방향, 강조, 전통, 역사, 종교사, 문학 양식사, 편집사 등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신학적 해석학에 대한 역사-비평적 접근은 무슨 공헌을 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3. 슈바이처, 역사비평주의
현대의 인간 사고는 “역사에로의 복귀”라는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존재에 대한 필연적인 자각이 반드시 인간생활과 인간의 언어적 표현들에 대한 역사주의적인 태도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 본문에 대한 역사적인 분석에는 한계가 있다. 이것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실례는 저 유명한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65-1965)의 「예수의 생애에 관한 연구」(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이다. 슈바이처는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그리고 20세기 초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방법의 기초 위에서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하려고 했다.
슈바이쳐가 그의 연구에서 결론을 내렸듯이 연구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예수의 생애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당시 성경연구에서 역사주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방법론적으로 실패했다. 첫째, 그것은 역사와 신앙을 분리시키고 있는 수렁을 극복할 수 없었다. 둘째, 자신들의 접근방법이 순수하고 객관적인 연구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떠한 독해관점도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모든 독해는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특징들과 더불어 검토되어야 한다.
텍스트-해석에 대한 순전히 역사-비평적 접근 방법의 방법론적 그리고 신학적 한계들은 분명하다. 하나의 텍스트는 그것의 역사적 기원이 비평적으로 분석되었다고 하여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 본문의 역사-비평적 주석이 비평적인 본문 해석 자체와 동일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광범위한 해석활동의 한 측면이다. 그래서 우리는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이 역사-비평적 연구자들에게 연구자 자신들의 주석 방법에 대한 비평적인 검토를 요구한 심정을 공감할 수 있다.
물론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도 성경 본문을 연구할 수 있다. 순전히 역사적 시각을 분문에 적용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텍스트 해석에서 독해의 한 가지 방법이나 한 가지 측면만을 적용하면서도 그것을 우리의 책임성 있는 독해의 총체적 과정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역사-비평적 독해는 텍스트에 대한 총체적 해석 과정의 다만 한 부분 이 독자를 잘 도와 줄 수 있다. 순전히 역사-비평적 독해로 텍스트를 완전히 공정하게 취급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물론 텍스트와 독해는 역사적인 현상이지만(역사적이지 않는 현상이 있겠는가만), 동시에 그것들은 또한, 우리가 앞에서 독해의 다양한 가능성을 논할 때 보았듯이, 실재하는 것들의 다른 측면들에 의해 조건 지워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텍스트에 대한 여타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거부한 것과 같은 동일한 정열을 가지고 이 점에서 역사주의 태도들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 역사주의-실증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반면에 역사의식은 텍스트 해석의 비평적인 태도로 인도할 수 있다. 바르트와 불트만은 성경해석애서 이 역사주의를 극복하려고 어떤 시도를 했는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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