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테온(만신전), 로마
플라비우스 저스틴 1: 제2세기의 박해
예수가 무슨 의미를 지녔기에 왜 기독인들은 그를 자기의 목숨보다 더 귀중하게 여길까? 도대체 예수신앙이 무엇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로마제국 시민들이 갈릴리 촌사람들의 이야기에 사로잡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로마인들은 예수신앙운동 가담자들을 비웃고 눈치를 살피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기독인들의 삶의 고결성, 진실성, 대담성에 감탄했다. 궁금증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기독인들이 당하는 박해 상황을 겪어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단순한 복음진리를 듣자마자 즉시 예수를 구원자로 믿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같은 참극의 행렬에 가담했다.
로마제국은 기독인들을 이방인 또는 이단자로 여겨 박해했다. 지중해 연안 사람들의 종교, 관습, 문화, 철학, 지식과 불일치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의 눈에는 예수신앙인들이 신(神)―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이고, 시민행사―황제숭배에 불참하는 이단자들이고, 나무 위에 달려 처형당한 범죄자를 구원자로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기독인들에 대한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는 300년 동안 지속되었다. 로마는 외국종교에 대체로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유독 기독인들을 가혹하게 박해했다. 탄압은 주로 집권자들의 정치적,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정치인들은 예수신앙이 로마의 통치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부상한다고 생각하여 로마의 옛 신들과 황제를 숭배하여 애국심을 촉진시켜 제국의 통일 유지를 꾀했다. 이교 사제들의 미신, 사리사욕, 로마인들의 편견이 박해에 가세했다.
칼과 십자가, 정치권력과 예수신앙공동체, 황제와 ‘나무 위에 달려 죽은 구원자’의 대결은 생사를 건 싸움이었으면서도 처음부터 불공평했다. 칼을 가진 정치세력과 믿음만을 가진 기독교의 대결은 공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존도 타협도 허락되지 않았다. 관용과 포용이 용납되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굴복해야 했다. 그런데 치열한 전투에서 놀랍게도 칼이 아니라 십자가가 승리했다. 권력이 아니라 믿음이 승전했다. 목숨을 건 전쟁에서 기독인들은 영원한 주(Lord)에게 충절을 바쳤고, 신앙 안에서 공고하게 결속했다. 죽음으로써 자신들이 믿는 진리의 참 됨을 증언했다.
박해가 지속될수록 제국 정부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신도 수가 증가되었다. 첫 3세기 동안에 흘린 기독인들의 ‘피의 세례’는 예수신앙공동체의 로마 정착에 이바지했다.1 베드로, 바울, 예수의 사도들이 가르친 십자가 구원의 복음과 진리는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사람들의 심혼을 사로잡았다. 삶을 변화시키고 내세 소망을 갖게 했다.
순교자 저스틴은 기독교 신앙을 변호한 철학자이다. 그는 성직자도, 교회 직분자도 아니며 일정한 거처도 없었다.2 이곳저곳을 다니며 예수구원, 영생의 복음을 전했다. 유대인, 그리스인, 로마인에게 진리를 전했다. 당시의 감독, 장로, 집사보다 더 유익한 일을 해냈다. 예수신앙을 지적으로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변증했다.
저스틴은 철학자답게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의 만남을 시도했다. 그의 사상 일부는 정통신앙과 불일치한다. 신학의 초보도 알지 못하는 철학자에게 완벽한 신학체계를 기대함은 무리다. 저스틴은 교회에 유익한 사람이었고 선량하고 고귀한 순교자들 가운데서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 순교자 저스틴을 만나면 초대교회의 기독인들이 무엇 때문에 박해와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믿고 고백한 고귀한 신앙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1. 박해, 그 참극
기독인들에 대한 첫 박해는 유대인들이 주도했다. 구원의 복음을 증오한 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고 사도 야고보를 처형했다. 베드로와 요한을 여러 번 감금하고 고통을 주었다. 바울을 거칠게 다루었다. 예수의 친동생 야고보를 살해했다. 예루살렘의 목회자 시므온을 죽음(107)으로 몰아넣었다.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의 화형을 사주했다.3 유대인들은 적개심을 가지고 예수와 예수신앙인들에 대한 지독한 험담을 유포했다.
저명한 교회사가 필립 샤프는 유대인들의 기독교 박해를 언급하면서 그들의 행악과 배은망덕 때문에 거룩한 땅의 토양이 갈아엎어졌다고 지적한다.4 존귀한 땅에 우상숭배 종교가 이식되었다. 로마의 감시관에게 입장료를 주고서야 감람산 위에서 무너진 폐허 예루살렘을 내려다보고 애통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의 수도를 방문하면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고 한다.
로마제국은 초기 예수신앙공동체에 관용정책을 폈다. 억압을 했지만 신앙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정복지 주민들이 믿는 종교에 제국의 안녕과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관용을 베풀었다. 기독교가 만민이 신뢰할 만하고 만인을 구원하는 종교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통치자들은 기독인들이 집단적으로 불법을 저지르고 반역행위를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하여 긴장했다.
주후 64년 경, 황제 네로는 로마의 대 화재의 방화 죄목을 기독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그들을 박해했다. 그는 기독인들을 용의주도하며 잔인하게 죽였다. 십자가에 못 박거나 화형에 처했다. 사나운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 씌워 개들에게 찢겨 죽도록 했다. 십자가에 매달아 불태웠다. 원형경기장에서 열린 경축일 행사의 오락물로 삼았다. 당시 황제와 원로원은 국민들의 애국심을 과시하려고 대중오락을 지원했다. 무사, 권투사, 레슬링선수들, 검객들을 고용하여 죄인들을 고문하는 광경을 보여주었다. 로마인들의 증오심을 한쪽으로 몰아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기독교인들을 원형경기장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하여 사회통제 비용을 줄였다. 로마제국의 기독인들에 대한 박해는 4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제2차 박해는 주후 95년 경 황제 도미티아누스 통치 때 시작되었다. 황제는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보내고 있는 헌금을 자신에게 바치라고 강요한 적이 있다. 엄격한 법률을 만들고 반항하는 유대인들을 처벌했다. 유대교적 풍습과 비슷한 형태를 가진 기독인들도 동일하게 박해했다.
절대 권력자는 자신의 권좌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정신적 불안에 시달린 도미티아누스는 권좌를 강화하고 거대한 로마제국을 일사분란하게 통치하는 수단을 모색했다. 주후 92년에 황제로 즉위하면서 예수신앙공동체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며 모든 시민들이 황제 자신을 ‘주, 하나님’(Dominus et Deus)으로 숭배하라고 지시했다. 황제 우상화가 시작되었다. 로마의 시민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조상(彫像) 앞에서 향을 피우고 “가이사는 주님이시다”(Caesar Kurios) 하고 외쳐야 했다.
다신론 문화사회에서 황제숭배 강요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예수신앙인들에게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가이사를 정치 지도자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경함은 마땅하다. 그러나 ‘주’라고 고백하거나 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내거나 예배하거나 절대 충성 맹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예수신앙에 상충된다. 주는 오직 한분, 구원자 예수뿐이다. 기독인들은 황제도 그분에게 머리를 숙여야 할 때가 오리라 믿었다.
기독인들은 황제의 상에 절을 하지 않았다. 제사를 바치는 공동체 활동을 거부했다. 국가의 경축 행사 때마다 우상숭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로마제국 군대 복무를 기피했다. 황제와 로마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인들의 불순종 행위는 로마사회의 화합을 위협하는 정치적 반역이고, 종교적 이단 집단의 항거이고, 제국 시민의 의무를 저버리는 짓이었다.
기독인들은 세상사보다 영적이고 영원한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형제애로 뭉쳐 자주 모임을 가졌다. 그러자 온갖 가증스런 헛소문이 나돌았다. 예배와 애찬 모임과 관련하여 그들이 근친애자들이며 식인(食人) 인간들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자주 발생하는 재난들을 로마의 신들이 진노로 내린 징벌이며 비, 홍수, 가뭄, 기근, 전념병이 ‘무신론자들’ 곧 예수신앙인들 탓이라는 헛소문이 퍼져나갔다. 우상숭배 활동에서 수익을 올리던 사제들과 마술사들은 정치인들과 상인들과 결탁하여 군중을 선동하고 기독인들을 험담했다. 자기들의 사업에 손해를 끼친 새 종교를 비난하고 공격하도록 획책했다.5
범신론 사상에 젖어 있던 로마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믿지 않고 우상에 절하지 않는 기독인들을 ‘무신론자’로 여겼다. 로마의 옛 신들의 원수로 여기고 혐오했다. 황제는 기독인들의 모임과 결속을 국가전복 음모를 꾀하는 짓이라고 의심했다.6 이 시기의 박해는 일부 지역에서 일어났다. 황제의 친척을 포함한 많은 기독인들이 순교했다.
박해는 도미티아누스가 정적들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예수신앙을 여전히 불법으로 단정했다. 로마의 옛 신들을 예배하게 하고 황제의 상 앞에 절을 하고 향과 포도주를 바치게 했다. 2세기 초에 이르러 황제 트라야누스 통치하에서 제3차 박해가 일어났다. 폴리니는 오늘날의 터키 북부 해안에 자리 잡은 비티니아 지역의 총독이었다. 자기의 통치 관할 지역 안에 살고 있는 다수의 기독인들이 로마가 불법으로 규정하는 예수신앙을 신봉함을 알고 구체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자기 관활 지역 안의 신전들이 거의 폐기되고, 제물을 사는 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총독은 죄상을 자세히 파악한 뒤 ‘기독인’ 또는 ‘기독 신자’라는 것 밖에 다른 범죄 사실이 없음을 간파했다. 해괴하게도 나무에 달려 처형된 죄수를 구원자로 믿고 신처럼 찬양하고 예배하지만, 절도와 간음과 부도덕한 죄를 범하지 않으며, 이웃을 사랑하며 공동식사를 하려고 모이는 특징을 확인했다. 총독은 다만 ‘기독인’이라는 이유가 범죄성립의 근거가 되는지 알고 싶었다. 황제에게 보고서와 질문서를 보내고 답신을 기다렸다. 기독인들에 대한 관용 정책을 기대한 것처럼 보인다.
황제는 답신에서 “고의적으로 기독인들을 색출하여 처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일단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개정의 정이 보이지 않는 한 반드시 처벌하라”고 명했다. 기독인들은 “나쁜 본보기이다. 우리의 시간을 낭비할 가치조차 없는 인간들이다. 죄에 대한 변명을 받아주지 말라”고 했다. 로마의 신들에게 예배하는 공공 행사에 참여하여 예배하는 기독인은 용서하라고 지시했다. 제국의 권위에 충성을 보이는 행동을 표하면 살려주고, 로마의 신 곧 황제에 대한 예절을 거부하는 자들, 국민의례를 하지 않는 자들은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정치 지배층은 예수신앙을 황제숭배―국민의례 거부를 통치권에 대한 항거로, 제국 인민의 정신적인 통일을 꾀하려는 황제의 동화정책을 거부하는 행위로 인식했다.
총독은 기독인들에게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황제의 조상(彫像)에 향불을 피우라고 명했다. 상을 향하여 절을 하면서 외치라고 했다. “가이사는 주님이시다.” 신(神)인 황제의 상에 제물을 바치는 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버리는 자는 석방시켜 주었다. “기독인인가?” 하고 3번 물은 뒤 “그렇다”고 답하면 즉각 처형했다. 통치자들은 예수신앙인들의 완고한 신앙, 굽힐 줄 모르는 고집을 미워했다. 그들도 인간 목숨의 고귀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2. 제2세기의 박해: 저스틴, 익나티우스, 폴리갑
예수신앙인들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개인적 원한을 악용하여 고발하는 자들도 많았다. 기독인에 대한 불공정한 대우를 참지 못하여 불만을 터뜨린 자들도 있었다. 철학자 플라비우스 저스틴이 대표적인 예다. 저스틴과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철학공부를 함께 한 학우(學友)다. 저스틴은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진 황태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로마제국의 법정에서 기독인들이 겪는 부당한 처우를 대담하게 알리는 편지를 써 보냈다.
저스틴은 로마에서 있었던 한 억울한 경우를 예로 들었다. 남편의 지시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하인들과 여러 가지 형태의 성행위를 강요당한 여인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개종 후 부인은 남편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했다. 그들은 이혼에 직면했다. 증오심에 가득 찬 남편은 아내를 고발했다. 재판관은 그녀에게 한 가지만 물었다. “기독인인가?” 그녀가 시인하자 즉각 사형을 선고했다.
법정에서 방청을 하던 한 남자가 재판관에게 도전했다. “이 재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왜 당신은 간통자도 아니고, 밀통자도 아니고, 도둑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며, 이무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이 사람을 다만 기독인이라는 이유로 처벌합니까? 당신의 판결은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도, 철학자인 황제의 아들에게도, 신성한 원로원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자네 역시 기독인가?”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법관은 그에게도 즉시 사형을 선고했다.
저스틴은 개인의 원한이 빚어낸 고발과 그로 말미암은 죽음을 통분히 여겼다. 자신도 언젠가는 모함을 받아 처형되리라고 예상했다. 학문적 경쟁자들, 이교 철학자들, 견유학파(The Cynic) 철학자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7 예상은 적중했다. 로마에 학교를 세워 ‘진정한 철학’을 가르치던 저스틴은 어느 공개토론 마당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친 적이 있었다. 철학자들은 그를 고발(165)했다. 그는 다른 여섯 명의 기독인들과 함께 채찍에 맞았고, 로마에서 참수되었다. 로마는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반국가적 비밀결사와 불법 종교로 단정하여 법으로 금했다.
로마제국 시민권을 가진 기독인들은 법에 따라 로마로 이송되었다. 시민권자는 즉각 처형되었고, 비시민권자는 원형 경기장에서 구경거리가 되어 오랫동안 고문을 받았다. 이 박해 기간에 안디옥의 노령의 감독 익나티우스가 순교했다. 칠십 세가 훨씬 넘은 나이로, 로마시민들의 오락거리로 이용되려고 시리아에서 로마의 순교 형장으로 끌려갔다. 로마로 가는 도중에 에베소, 마그네시아, 트랄레, 로마, 필라델피아, 서머나에 있는 교회들과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에게 보낸 일곱 개의 편지들을 남겼다. 익나티우스의 비난을 받은 이단자나 그를 시기한 이교도가 관리에게 고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익나티우스는 로마의 기독인들이 자신을 구출할 방도를 모색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신이 목숨을 바쳐 예수신앙의 진실성을 증거할 각오가 되어 있으므로 순교를 방해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자기를 구출하려는 방안 모색은 “적합하지 않은 친절”이라고 했다. 인생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으며 증인의 사명을 다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짐승들에게 물리고, 몸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뼈들이 조각나고, 사지가 토막 나고, 몸 전체가 부서지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서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익나티우스는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使者)라고 불렀다. 순교지로 끌려가면서 서머나교회의 주교 폴리갑에게 목사의 의무를 다하고 신앙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했다.
박해는 약 반세기 뒤에 재개되었다. 주후 155년에, 황제는 로마의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황제숭배 의식을 엄격히 시행하라고 했다.
기독인들은 혹심한 고문을 견뎌냈다. 노령의 기독인 게르마니쿠스에게 재판관은 고문과 죽음을 피하고 개심하라고 권면했다. 예수신앙을 버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기독인을 고문하는 이 같이 불의하고 잔인한 세상에 사는 것보다 죽기를 원한다”고 소리쳤다, 짐승들을 향해 자기를 죽이라고 외쳤다. 그의 말에 격분한 로마인 폭도들이 달려들어 그를 죽였다. 그리고 그 예수신앙인을 지도한 목사 폴리갑을 찾았다.
폴리갑은 잠시 숨어 있다가 관원에게 자신을 맡겼다. 로마 관리들은 불복종하는 기독인들에게 사형 처벌 명령을 내려야 하는 달갑지 않은 의무를 지고 있었다. 종종 피고인들을 살리려고 변심을 촉구하고 회심하라고 설득했다. 총독은 폴리갑이 노령이며, 부양할 가족이 있음을 고려하여 황제숭배를 하라고 종용했다.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라고 했다. 그러자 폴리갑은 말했다. “나는 86년 동안 그 분의 종이었소. 그는 한 번도 나를 저버린 적이 없소. 당신이 진정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처럼 가장한다면 간단하게 말하겠으니 들으시오. 나는 기독인이오.”
총독은 경기장에 모인 이교도 군중 앞에서 재판을 진행했다. 폴리갑을 향하여 “수호신을 믿지 않는 자들은 물러가라”고 외치라고 명했다. 폴리갑은 침착한 표정으로 큰 소리로 군중을 향하여 외쳤다. “수호신을 믿는 자들아 물러가라!” 총독이 폴리갑에게 “산채로 너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재판관의 불은 순간이지만 지옥의 불길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고 답했다. 폴리갑은 기둥에 묶여 화형을 기다리는 동안 하늘을 우러러보며 외쳤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 내가 이러한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할 수 있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 안에서 썩지 않을 영혼과 영원한 부활에 참여할 자로 인정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8 주후 155년 2월 23일, 폴리갑은 형장에서 산채로 불타 죽었다.
주후 117년과 161년 사이에, 황제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통치 때 기독인들은 자유를 누렸다. 황제는 특별한 범죄행위가 없는 한 기독인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했다. 법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의 재산 소유도 가능했다.
제4차 박해는 주후 161년에 황제로 등극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에서 일어났다. 이상적인 황제라고 칭송을 받는 새 황제는 미신을 신봉하고 점성가들을 찾아다녔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서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는 기독인들을 증오했다. 계속되는 야만족들의 침략과 홍수와 전염병과 재해들은 로마의 신들이 기독인들 때문에 분노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의 전통적 종교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다. 박해는 177년에 극에 달했다. 스토아주의 철학을 배운 황제는 기독인들을 불건전한 자기 선전가들이라 비난하고 멸시했다.
교회를 열심히 섬기던 과부 펠리시타스는 자기의 일곱 아들들과 함께 순교했다. 시기심 많은 이교 사제들이 정부 당국자에게 그녀를 고발했다. 그녀는 여러 차례 회유와 협박을 받았지만 개심하지 않았다. 담대히 말했다. “내가 살아 있어도 승리할 것이며, 나를 죽이면 죽음을 통해 더욱 더 큰 승리를 거두리라.” 그녀의 아들들도 관리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영원한 도시’ 로마의 별명은 ‘일곱 언덕의 도시’다. 죽은 아들들은 로마 주변의 일곱 개 언덕에서 각각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졌다.
기독인들에 대한 로마사회의 적대감이 점차 증가되었다. 로마인들은 예수신앙인들을 민중의 적으로 취급했다. 공회당, 시장, 목욕탕 등 공공장소 출입을 금지했다. 폭도들은 길거리에서 그들을 공격을 했다.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졌다. 로마는 기독인들을 체포하여 악형 처벌을 서슴지 않았다. 집단 처형의 날을 기다리는 기독인들을 잔인하게 고문했다. 벌겋게 달군 철판 위에 앉혀놓고 인두로 살을 지졌다. 곤봉으로 때려죽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황소 우리에 던져버렸다. 거기서 죽음을 기다리게 했다. 죽은 시체들을 신들에게 제물로 바쳤다.
쌍투스라는 이름의 소년은 고문이 가해질 때마다 “나는 기독인입니다”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갑자기 일어난 혹심한 박해에 마음이 약하여 신앙을 포기한 자도 적지 않았다. 용기 있는 순교를 목격한 자들 가운데는 자기의 배신과 연약한 믿음을 뉘우치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순교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의 지방 장관 사투르니누스는 기독인이라고 고발당한 남자 9명과 여자 3명의 목숨을 살려주려고 했다. 황제숭배―우상숭배를 하라고 권하면서 30일 동안 유예기간을 주었다. “우리도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우리의 종교는 간단하다. 너희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주’이며 ‘수호신’인 황제에게 맹세하고 그의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한 달 동안의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했다. 피고인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30일 뒤 심문이 재개되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선고문은 간단했다. “기독인으로 살아왔다고 스스로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저들에게 로마인의 관습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었지만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으므로 목을 베는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자 피고인들은 외쳤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의 순교자가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나이다.”
최덕성 지음, <위대한이단자들: 종교개혁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2장 1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저작권자 ⓒ 리포르만다, 무단 전재-재배포-출처 밝히지 않는 인용 금지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