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태평천국

by reformanda posted May 0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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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과 태평천국 이야기

 

1. 아편전쟁(1840--1842) 인류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었다.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부터다. 청나라는 18세기에 들어 3대의 황금기가 끝나고 혼란으로 빠지면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질 때였기 때문에,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아편을 피우게 되어 그 수요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아편은 마약이기 때문에 한면 중독이 되면 끊을 수 없게 되어 죽을 때까지 피울 수밖에 없었다. 아편에 중독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아편은 더욱 많이 팔렸다.

 

아편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세기 초 연간 약 4천여 상자에 이르던 것이 30여년이 지난 1830년대에 이르면 연간 약 4만여상자로 10배 가량 늘어났다. 이것은 무게로 하면 거의 300만 톤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고위관료, 군인 등 지위가 좊은 사람들에서 일반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아편을 피웠다. 아편이 들어오는 것은 곧 그 가격만큼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은은 당시 청나라의 화폐호 사용되었기 때문에 은이 부족해지면 경제적으로 많은 문제점이 생기게 된다.

 

아편이 많이 팔린다는 것은 아편 중독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편수요의 증가는 심각한 사회문제와 경제문제를 유발했다. 아편에 중독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심각한 사회문제가 디었으며, 아편의 대금으로 은을 지불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이었다.

 

중국에서는 아편을 피우는 것을 인정할 것인가 금지시킬 것인가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으며, 마침내 금지시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윽고 1836년부터 아편을 금지시킴과 아울러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개항장인 광동에서 아편 매매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은 계속 아편무역을 하고 있었다.

 

청나라 황제는 임칙서라는 관리를 특사(흠차대신)로 파견하여 광동의 아편거래를 막게 했다. 임칙서는 1839년 광동에 내려가 아편 무역을 금지시키고, 영국상인들로부터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웠다. 당시 광동에는 자기 나라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인 엘리어트가 군함 3척을 이끌고 들어와 있었다.

 

청나라의 아편무역 금지조치에 대해 영국의회에서는 아편 밀수출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편 밀수출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했다. 장시 영국은 휘그당과 토리 당의 양당에 의한 의회정치가 자리잡고 있었던시기다. 휘그 당은 아편판매를 중국무역의 기회를 확대시킬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토리 당은 아편무역이 영국의 주요한 무역품목인 면포시장을 위촉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아편거래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영국의회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휘그 당의 계획대로 하기로 결정했으며 중국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승인했다.

 

중국과 영국 사이에는 전쟁을 예고하는 긴장감이 돌았다. 마침내 영국은 18406월 중국에 약 4천여 명의 원정군을 파견했다. 영국 함대는 양자강 하구를 봉쇄하고 천진(텐지) 가까운 곳까지 함대를 파견하여 청나라를 위협하면서 타협을 시도했다. 타협은 결렬되었으며 이듬해 정쟁이 재개되었다. 18415월 영국함대는 광동을 공격했다. 광동이 함락의 위기에 처하자 청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굴욕적인 조건으로 영국과 타협하여 600만 불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광동에서 양국 군대를 동시에 철수시키기로 하는 '광동협정'을 맺었다.

 

청나라 정부의 이러한 굴욕적인 태도는 중국인들을 분노케 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곳곳에서 침략적인 외국인들에 대항하는 자위조직을 결성하고 있었다. 그중 한 지역의 농민군이 영국군을 포위 공격하여 사상자를 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 중국인들이 영국군을 비롯한 외국인들에 대해 얼마나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예다. 이것은 또한 청조의 대외정책에 대해서 중국민중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사건은 영국의 태도를 더욱 강경하게 몰아갔다. 영국은 중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18426월 상해를 점령하고 남경(난징)으로 진격했다. 청나라는 아주 불리한 조건으로라도 타협을 할 수밖에는 없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18428월 영국함대의 갑판에서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역사적인 '남경조약'이 체결되었다. 남경조약의 내용은

 

1. 홍콩을 영국에 넘겨준다.

2. 광동, 하문, 복주, 영파, 상해 등 5개 항구를 개항한다.

3. 개항장에 영사를 주재시킨다.

4. 중국은 전쟁 배상금 1200만 달러, 몰수된 아편 배상금 600만 달러 등을 3년 안에 영국에 지불한다.

5. 공행의 독점무역을 폐지한다.

6. 수출입의 관세를 정한다.

7. 동등한 지위에 있는 양국간의 문서 교환은 동등한 형식을 사용한다. 는 등으로 되어 있다. 그 뒤 관세에 관한 내용, 영사 재판권, 최혜국 대우, 5개항에서의 군사 정박권 등을 추가시키게 된다.

 

남경조약의 내용은 이렇게 비교적 간단한 내용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는 엄청난 것이다. 이 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며 불평등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중국이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중화사상이 여지없이 깨졌으며, 광동에만 제한시켰던 외국상인들의 활동을 다른 항구에서도 활 수 있도록 인정해주게 된 것이다. 문제가 되었던 아편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는 아편무역을 계속하겠다는 영국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번 봇물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듯이 영국과의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 후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서양 여러 나라들과도 영국과 맺은조약의 내용과 비슷한 불평등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844년에는 미국과 망하조약, 프랑스와는 황포조약을 맺게 되고 중국대륙은 서구 열강에 의해 서서히 잠식되어가기 시작했다.

 

3. 제2차 아편전쟁(1856--1860)


 이편전쟁의 패배로 맺은 남경조약은 오랫동안 지켜오던 중화의식이 무너짐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중국이 한순간에 호락호락 서양 세력들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주지는 않았다. 5항구를 열어 무역을 허용한다는 약속을 했지만 그 실행을 미루고 있었고, 아직은 내륙지역까지 외국인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영국 상인들은 항구를 벗어나지 못하는 제한된 무역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영국산업을 이끌어왔던 면제품 산업이 생산과잉이 되면서 하루빨리 넓은 시장을 개척해야 했다. 중국은 그들에게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떡이었다. 서양 자본주의 국가들은 다른 분쟁을 만들어서라도 중국을 굴복시켜 내륙 깊숙이 진출려고 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그 선두에 서 있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는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항 저항이 커지고, 영궁에 대항하는 민중운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광동의 영국상관이 공격받았으며, 광동성의 관리가 영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성내의 중국인 지역으로 영국인들의 출입을 허용했을 때 격렬한 저항이 있어 결국 그결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도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얼마 동안은 영국도 러시아와 크림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무력압력의 시기를 늦추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애로 호사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애로 호는 홍콩에 선적을 둔 중국인 소유의 배로서 선장이 영국인이었다. 이 배가 광동성에 정박하고 있을 때 중국관리가 배에 올라 영국국기를 끌어내리고 해적혐의로 중국 선원 12명을 체포했다. 사건이 일어나자 광동의 영국영사 파크스는 양광총독에 항의하고 사건의 마무리를 위한 교섭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그러자 바로 다음날 영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광주를 공격하고 청의 관청에 쳐들어갔다.

 

물론 이 모든 사건의 바탕에는 영국의 자본주의가 중국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영국 내에서는 "법률적으로 보나 도덕적인 면에서 보나 정당하지 않는 싸움이다"라는 반대 여론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중국을 완전히 굴복시키고자 했다.

 

중국인민들의 반영감정은 더욱 높아져갔고 두 나라는 극한적인 대립상태가 되었다. 영국해병이 목 잘리는 사건이 있었고 영국은 이를 이유로 영국인이 죽은 지역의 마을을 불살라버렸다. 또한 영국은 홍콩의 중국인 빵집의 빵에서 비소가 나온 것을 중국인의 음모라고 하여 홍콩에 사는 중국인 약7만여 명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명령을 내렸다.

 

영국은 중국과의 싸움에 프랑스를 끌어들이려 했다. 프랑스 역시 아시아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참에 때마침 중국에 선포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중국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 한 명이 중국관리에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8576천여 명의 영, 프 영합군은 광동을 점령하고 청에게 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했으나 청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 프 연합군의 공격은 계속되어 북경 가까운 천진을 위협하게 되자 청은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서양 강대국들과의 교섭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맺어진 조약이 천진(텐진)조약과 북경(배이징)조약이다. 북경조약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서양의 외교사절이 북경에 상주할 수 있게 할 것

* 남경조약 때 5개항 외 10여 개 항구를 추가 개항할 것

* 외국인의 중국 내륙지역 여행권리를 인정할 것

* 크리스트 교의 선교의 자유를 인정할 것

* 홍콩 옆에 있는 구룡반도를 영국에게 할양할 것

 

중국은 북경조약으로 인해 항구뿐만 아니라 내륙지방에도 외국인들의 활동을 허용하게 되었으며, 서양 자본주의가 내륙 깊숙이 침투하여 중국민중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 조약은 또한 선교사 살해를 이유로 전쟁에 가담했던 프랑스는 크리스트 교 종교활동의 자유를 승인케 함으로써 강희제 이후 활동을 할 수 없었던 크리스트 교에 대한 제한이 풀렸다.

 

3. 태평천국 운동(1850--1864), 지상천국 건설을 시도하다

 

태평천국을 이끌었던 홍수전은 영국에 의한 아편무역의 한창이던 19세기 초 1814년 광동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안은 다른 지역에서 그곳으로 이사해와 농사를 짓는 중농이었다. 홍수전은 총명하여 그의 집에서는 다른 형제들에게는 농사일을 돕게 하면서도 그에게는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신분상승의 거의 유일한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과거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하고 실망과 좌절감, 그리고 주변의 기대를 저버린 데 대한 죄책감들로 괴로워하면서 방황하게 된다. 1837년 또다시 과거시험에 떨어진 후 그는 높은 열에 휩싸이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음과 삶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는 이 열병의 고통을 겪으면서 신기한 꿈을 꾼다. 꿈속에서 어떤 노인으로부터 "악마와 요괴들을 무찌르고 세상을 악으로부터 구해내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 꿈의 내용이 그가 꿈을 꾸기 몇 년 전에 서양 선교사로부터 우연히 받았던 (권세양언)이라는 크리스트 교 포교를 위한 책의 내용과 일치함을 알고 그 꿈속의 노인을 상제, 즉 여호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신이 계시한 지상천국을 만들기 위한 종교단체를 만들었는데 이 단체의 이름이 '배상제회'. 처음에는 간청의 눈을 피해 포교활동에 나서 1년 만에 그의 뜻을 따르는 무리 2천여 명을 모았다. 그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리는 가난한 농민들, 숯을 굽거나 광산에서 일하거나 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억눌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홍수전의 주변에 모여든 것은 그가 내세운 평등이념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홍수전이 제시하는 평등사회는 천국으로 비쳤을 것이다.

 

홍수전을 중심으로 한 배상제회는 사람들을 모아 교단의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그들을 하나로 할 수 있는 교리를 정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여호아만을 섬기며 남녀와 신분의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을 선전했다.

 

1850년 배상제회에 동조하는 무리들을 모두 모았을 때 1만여 명이 모였다. 그들은 자기의 전재산을 내놓고 모두 공평하게 분배하는 등 모임 내에서부터 평등을 실현했다. 또한 가족을 풀어 헤치고 남녀를 따로 나누어 군대를 편성했으며, 청나라의 지배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만주족이 강요했던 변발을 버리고 머리를 길렀다. 그래서 그들은 자발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이듬해(1851) 이 모임의 지도자들은 광서의 금전이라는 곳에서 태평천국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선포했다.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사회는 나라이름에 보이슥이 평등한 지상낙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어 태평천국군은 청나라 군대와 싸우면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홍수전을 천왕으로 하고 그 주변에 양수청이 동왕, 조소귀는 서왕, 풍운산이 남왕, 위차휘가 서왕, 석달개가 익왕으로 가각 군대를 이끌었다.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면서 그들이 정복한 지역에서 적과 내통한 자나 약탈, 폭행을 일삼는 자들을 처벌하고 태평천국에 협력하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등으로 그 세력을 크게 확대했다. 53년 초 호남성의 중심지인 무창을 함락했을 때 태평천국군은 50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533, 마침내 양자강 유역의 남경을 정복하여 남경을 천경, 특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들이 봉기한 지 2년여 만이었다.

 

세력을 확대하고 국가조직을 갖추어나가면서 사회제도 역시 정비되어갔다. 태평천국 내의 백성은 모두 평등한 형제 자매였으며, 전족을 없애고 여자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았다. 또한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천조전무제도가 만들어졌으며, 사유재산은 인정하지 않았다. "밭이 있으면 함께 경작하고 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눠먹고 돈이 있으면 함께 쓰며 모든 사람이 균등하게 혜택받을 수 있는" 평등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멸만흥한의 깃발을 내걸고 만주족의 중국지배에 반대하여 청나라를 몰아내고자 했다.

 

태평천국의 이러한 정책을 억눌렸던 농민들에게는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었지만, 기득권 계층, 즉 재산을 많이 가진 지주, 청나라 지배 아래서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아가려는 위험한 존재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에게도 매우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청나라는 태평천국군의 제압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외국세력도 태평천국군의 세력 확대를 원치 않았다. 중국 내의 움직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영국은 1853년 영국공사가 태평천국의 수도인 남경을 방문하여 청나라와 영국이 맺은 남경조약을 태평천국 지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태평천국의 지도자들은 아편무역 이외의 자유로운 통상은 인정하지만 외국이 태평천국의 통치권에 간섭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말했다. 결국 외국세력은 태평천국의 확대가 그들이 중국에 침투하는 데에 별로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각 지방의 유력자들을 '향신'이라고 불렀는데, 이들도 태평천국 군을 막기 위해 군대를 길러 대항했는데, 그중에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사람은 호남의 중국번이었다. 청나라의 군대보다는 이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리고 있던 군대가 태평천국의 세력확대를 막는 데 더 큰 역할을 했다.

 

태평천국군은 향신층의 반격으로 주춤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의 내분에 있었다. 1856년 태평천국군은 엄청난 내분에 휘말려 지도자인 양수청이 위창휘에게 살해된 데 이어 위창휘 역시 내분의 와중에서 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태평천국의 평등사회 이념은 빛이 바래가기 시작했다. 군기는 문란해지고, 태평천국의 관리들은 토착 실력자들과 야합,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엄격한 규율과 금욕주의, 사유재산 금지의 원칙도 허물어져갔다.

 

마침내 647월 중국번이 거느리는 상군이 남경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여 남경을 함락시켰다. 홍수전은 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하기도 하고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하기도 한다. 나머지 지도자는 중국번에게 잡히기나 죽거나 하여 14년 동안 중국의 중요지역을 대부분 장악했던 태평천국은 끝을 맺었다.

 

태평천국을 무너뜨리는 데는 중국번의 상군뿐만 아니라 그의 부하였던 이홍장이 이끈 회군, 그리고 영국인 장교에 의해 훈련된 중국인 부대인 상승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양세력의 처지에서는 태평천국이 처음에는 크리스트 교 국가를 선언했기 때문에 서양이 중국에 침략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예측 아래 지켜보는 태도를 취했지만, 이들이 곧 한족의 민족주의적인 모습을 드러내자 태평천국을 공격하는 데 가담한 것이다.

 

<중국사 100장면>의 일부. 안정애, 양정현, 웹사이트에서 옮겨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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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자명종과 세계지도-선교사들의 활동(17세기 초)

중국에 서양의 크리스트 교가 들어온 것은 당애였다. 그러나 그때의 크리스트 교는 정통 카톨릭이 아닌 이단의 한 파였다. 정통 크리스트 교가 중국에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명대 후반기 부터다.

명나라 때 중국에 크리스트 교를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제주이트 교단이다. 이 교단은 중국에서는 '야소회'로 불렸다. 제주이트 교단은 1540년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성립한 카톨릭 포교단체다. 이 교단이 창립되던 16세기 유럽에서는 카톨릭 교단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들의 활동이 활발하던 때로서, 루터나 칼뱅의 종교 개혁이 이 시기를 전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주이트 교단은 이런 분위기에서 점점 위축되어가는 카톨릭의 자기혁신 및 교세확장 운동의 하나로 나온 것이다. 이들의 중심사업은 이교도 지역에 대한 카톨릭 포교활동이었다.

1542년 제주이트 교단의 창설자의 하나인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인도를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 이것이 일본에 카톨릭이 들어오는 시초다. 그는 중국에 들어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중국 카톨릭 전파의 가장 큰 공로자는 마테오 리치(중국명 이마두)였다. 그는 1583년 광동을 통해 중국에 입국했으며 1598년에는 북경에와 황제를 만나 북경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중국에는 없는 자명종(시계), 세계지도 등을 가지고 왓으며, 서양 문물 및 서양 실정을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다리 역할을 했다. 물론 그의 절대적인 목표는 카톨릭 전파였다. 그는 북경 근처에 포교당을 짓고 주로 중국의 고위관리들과 친교를 맺은며 그들을 카톨릭에 들어오게 해싿. 그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 등 명의 고위관리들이었다. 고위관리들을 중심으로 카톨릭을 소개하는 것은 제주이트 교단의 포교활동 지침의 하나였다. 선교사들은 중국에 와서는 중국어를 익히는 등 중국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노력해싿. 유학자들의 복장을 했으며 관리들에게 망원경, 자명종 등 신기한 물건들을 선물하기도 했다.

마테오 리치는 또한 중국인들에게 카톨릭을 소개하는 책을 중국어로 썼는데, 그것이 유명한 (천주실의). 이 책은 조선에 들어와 조선에서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탄생하게 하는 촉매열할을 하기도 했다.

(천주실의)에서는 크리스트 교는 불료보다는 유교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여 중국인들의 육교적인 사고방식에 접근하고자 했던 흔적이 보인다. 그는 1610년에 사망햇는데, 당시 중국의 카톨릭 신자 수는 약 2500여 명이었다. 그의 사후 교세는 더욱 확대 되어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약 15만 명 정도로 증가했다.

그러나 청대에 들어오면 중국의 카톨릭 선교활동에 변화를 보이게 되낟.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명대에 활동했던 선교사들이 유교와의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카톨릭의 내용을 상당부분 유교에 맞추려고 던 점이다. 크리스트 교의 신과 유교에서의 상제가 같다고 하여 공자의 제사나 조상숭배 등도 인정햇던 것이다. 그런데 뒤에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크 회나 프란시스코 회 등은 제주이트 교단의 이러한 유교와의 타협이 카톨릭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특히 제주이트 교단이 주로 지배층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햇던 데비해 도미니크 회나 프란시스코 회는 탁발수도회의 전통대로 일반 백성들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중국에서의 제주이트 교단의 활동은 로마 교황정에서 문제가 되었으며 청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청나라에서는 1706년 강희체 대 마테오 리치의 입장을 인정하는 선교사들에게만 중국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싿. 로마 교황청에서는 중국인 카톨릭 교도가 유고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못하도록 했다. 옹정제 때에는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크리스트 교 자체를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선교사 중의 몇몇은 궁중내의 기술자나 황가 등으로 남아 있었으나 크리스트교 선교활동은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뒤 중국에서 크리스트교 활동의 자유가 인정된 것은 쩨2차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과 프랑스에 패한 이후 맺어진 베이징 조약에서다.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활동은 카톨릭 전파 말고도 서양의 학문이 소개되는 하나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천문학, 지리학, 수학, 같은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하게 하여 선교활동에 활용하도록 교육을 받았으며, 선교활동 과정에서 이런 자연과학 지식의 일부가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의 세계지도를 제작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곤여만국전도)가 있다. 이 지도의 특징 중 하나는 중국이 지도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중화의식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세계의 위치와 각 지역의 여러 사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알레니의 (직방외기)는 중국인들에게 중국 밖의 또다른 세계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청나라 강희제 때는 선교사에게 청나라의 영토와 주변 속국들의 위치를 실제 측량하여 그리게 한 (황여전람도)가 작성되기도 했다.

마테오 러치의 수학지식을 서관계가 정리한 (기하원본)은 유클린트 기하학을 소개하고 있다. 그 외에도 달력에 관한 것, 무기 특히 화포 만드는 기술 등이 중국에 알려지게 된다.

 

62 안에는 반군, 바깥에는 적군-명의 멸망(1644)

주원장의 건국 이후 200여년이 지나면서 명조는 안으로는 환관의 횡포와 도처에서 발생하는 민란, 그리고 밖으로는 홰구와 몽고족의 공격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만주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해 명조를 압박해오는 후금() 세력은 명나라가 쉽사리 막아 내기 어려운 상대였다.

명은 이 만주족과의 싸움에 엄청난 국력을 소비해야 했고, 그만큼 백성들의 고통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의 고통이 커질수록 그 불만을 들에 엎고 반란세력들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천재지변으로 인한 기근이 심각한 지역이었던 하남과 섬서지방을 중심으로 거대한 반란세력이 형성되었다.

원래 섬서지방은 기름진 땅이었지만 잦은 가뭄으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의 국경수비 중심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군수물자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게 되자 군인들이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도 이 지역의 반란세력의 지도자 중 하나엿다. 이자성은 연안출신으로 역에서 일하는 천한 신부의 사람이었다. 그는 그 지역의 반란군 지도자의 한 사람인 고영상의 휘하에 들어가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의 거센 공격으로 인해 발란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이자성도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피해 다녀야 했다. 명 정부군의 공격으로 거의 숨통이 끊겨가고 잇던 반란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게 한 것은 청나라였다. 명이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국력을 소모하고 있을 때 청은 명의 수도인 북경 근처에까지 육박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명의 황제 숭정제는 하남, 섬서 등지에 있는 정부군을 청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북겨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군이 부경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하남, 섬서 등지의 반란군들은 다시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숨어 있던 이자성은 다시 군대를 모아 하남지역에 활동을 개시했다. 고통에 신음하고 잇던 하남지역의 농민들은 이자성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자성군은 농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토지를 고르게 분배한다거나 악독한 지주의 창고를 열어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준다든가 하여 그들의 환심을 샀다.

이자성은 세력을 더욱 강화시켜 마침내 1641년에는 낙양을 함락시켰다. 42년에는 개봉을 점령했으며, 43년에는 양양에 궁전을 짓고 스스로 신숭왕이라 칭하고 국가체제를 갖추어나갔다. 그 이듬해 다시 나라 이름을 대순으로 하고 서안을 서경으로 삼았다. 서안을 거점으로 한 이자성군은 동쪽으로 군대를 이동하며 명의 요충지를 하나씩하나씩 점령해들어갔다. 마침내 317일 이자성군은 북경에 당도했다. 북경은 명의 수도라고 하지만 그 수비는 너무 허술하여 이자성의 반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18일 저녁 무렵 황제가 가장 믿고 잇던 신하가 성문을 열고 이자성군을 불러들였다. 성문이 열리자 이자성군은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황제가 머물고 있던 궁성인 자금성 주변에는 이자성군의 함성이 들리고 북경 시내는 반란군이 방화한 불길이 여기저기서 번지고 있었다. 숭정제는 최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명의 맥을 잇기 위해 세 아들을 피신시킨 후 왕비와 후비들에게 자결을 명한 다음, 그의 딸들은 직접 죽였다. 아직은 자금성 안에까지 이자성군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만수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유서를 남긴 다음 자결했다. 그가 자신의 옷깃에 적어 남긴 유서는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죽어 지하에 가도 선왕들을 뵐 면목이 없어 머리털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 내 시신은 도적들에게 갈기갈기 찢겨도 좋지만 백성들은 한 사람이라도 상하게 하지 말라"

그가 이 유서를 남기고 죽을 때 그의 나이 서른 넷이었다.

 

63 대만, 최후의 항쟁거점이 되다-정성공의 대만 정복(1661)

명은 중국본토에서는 소멸되었지만 이 명의 명맥을 잇겠다고 하여 본토를 떠나 대만으로 들어간 사람이 있는데 그가 정성공이다.

그는 복건 출신으로 아버지 정지룡은 해적출신으로 명나라에 귀순했고, 어머니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정성공 역시 일본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중국으로 들어왔으며, 청나라 군대가 한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밀려들 때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명 황제 융무제를 만날 수 잇게 되었다. 융무제는 정성공의 비범함을 알아버고 그에게 주씨 성을 내렸다고 한다. 청의 공격을 막고 명 황제를 지킨 것은 정성공의 아버지인 정지룡 등의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정지룡은 나중에 청나라에 투항해버리고 마낟.

정성공은 아버지의 배신행위를 눈물로 만류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정성공은 이에 그의 세력을 끌고 바다로 나와 해상에서 청나라에 대항했다. 그의 목표는 북경을 장악한 청왕조를 타도하고 한족 왕조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 숙원을 달성하기 위한 발판으로 우선 남경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했다. 그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는 1658년으로 순치제의 통치시기였으며, 당시 정성공이 거느린 군대는 20만 정도였다. 군대를 몰아 해안 지역에서 몇번의 승리를 거두었는데, 계속되는 승리에 자만한 정성공 분대는 남경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는 그의 생일에 맞추어 남경을 함락시켜 남경에 십성하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청의 군대를 얕보고 담비다가 청군에게 크게 패한 뒤 그는 그의 근거지인 아모이(하문)로 철수했다. 중국본토에서 유일하게 발붙일 수 있는 곳이 이곳이었다.

북경 회복이라는 목표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신이 있는 해상전투의 근거지를 확보하려 했고, 그런 그의 생각에 떠로른 것이 대만이었다. 원래 대만은 남방계통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중국본토에서 대만을 정보했다는 기록은 수나라 때무터 보이고 있다. 그러나 대륙의 중국인들이 대만에 본격적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명나라에 들어와서였다. 특히 해안지대인 복건, 광동성 사람들이 대만으로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이 지역에 조직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중국인이 아니라 서양세력에 의해서였다. 1624년 네덜란드는 안평에 상륙했고, 그 당시 살고 있던 원주민인 '다이오완 족'의 이름을 따 다이완으로 부르게 되었다. 1624년 이래 정성공이 들어올 때까지 약 40여년 동안 네델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대만을 통치했다.

대만 정착 한족들은 이민족의 지배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저항햇으나 그때마다 많은 피해를 당했을 뿐 네덜란드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민족에게 억압당하는 것보다는 정성공이 와서 통치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 정성공의 대만 정착을 바라고 있었다.

1661년 정성공은 마침내 대만의 네덜란드 군을 공격했다. 나쁜 기상조건을 역이용하여 전개한 기습작전에 네덜란드 군은 재대로 저항하지 못했으며, 대만에 상륙한 정성공 부대는 네덜란드 총독의 부대가 수비하고 있는 대만성을 공격하여 약 1년여 만에 네덜란드 군을 몰아냈다.

대만에 들어온 정성공은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펴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비해 살기 좋은 섬으로 만들었다. 또한 토착 고산족의 생존권도 보호했다. 그러나 대만을 장악한 지 1년이 되지 못해 정성공은 39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후 그의 아들인 정경이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20여년간 대만을 통치했으나, 1683년에는 청나라의 공격을 받아 정경의 아들인 정극상이 청에 투항하고 말았다. 정성공이 대만으로 들어올 때 청나라를 못마당하게 여기던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따라 들어왔고, 따라서 정씨 3대에 걸친 통치시기가 대만이 중국화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청은 정극상의 투항으로 대만을 차지함으로써 완전한 중국지배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19세기에 들어오면 이른바 대만사건이라는 국제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건은 대만의 산지 거주 토착 만족이 유구인 어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유구는 일본의 영토였고 유구인이 살해되었다는 것은 일본인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기화로 대만을 공격하여 산지족을 죽였으며 그 군사동원의 경비를 청나라에 요구했다.

그후 대만은 청나라가 약해지면서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어갔다. 1884년 인도차이나 반도를 놓고 청과 프랑스 사이에 싸움이 있었는데, 이때 프랑스 군대가 대만의 기륭을 공격하고 팽호도를 점령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1894년 조선을 사이에 두고 청일전쟁이 일어나 청나라가 패하게 되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요동과 함께 대만을 일본에 넘겨주었고, 그후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대만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64 한족 최후의 저항-삼번의 난(1673)

이자성군의 군격을 받아 북경이 함락되고 자금성이 반란군의 발길 아래 놓이게 된 것이 1644년이었다. 이자성은 대순왕의 칭호로 성대한 북경입성식을 거행했다. 중국 천하는 이자성의 새로운 왕조에 의해 장악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자성은 법을 공표하고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는 등 국가 통치체제를 정비해갔고, 대세가 이미 이자성에게로 기운 것으로 판단한 지방 세력들은 이자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자성군에게 가장 거치적거리는 상대가 중국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산해관의 수비를 맡고 있는 오삼계였다. 산해관은 예로부터 중국의 최후 관문으로 만주족의 중국침략을 저지하는 데매우 중요한 요충지였고, 그곳에는 50만의 대군이 버티고 있었다. 그 지역의 책임자가 바로 오삼게였다. 그는 이자성군의 북경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북경으로 올라가던 중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받고 다시 산해관으로 돌아가 있었다.

한편 청나라도 태종이 죽은 후 8세 된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그의 삼촌인 다이곤이 대신 통치했다. 청은 중국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버리지 않고 중국으로 침략해들어오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중국대륙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산해관을 거쳐야 했다. 이 산해관은 명나라 장수인 오삼계가 지키고 있었다. 오삼계는 명조를 멸망시킨 이자성에게 굴복할 생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투항하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는 새로이 성장하고 있는 양세력 사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진로를 결정한 것은 이자성의 부하들이 그의 아버지와 그가 아끼던 여자를 잡아갔다는 소식이었다.

이자성에게로 기울 듯하던 그의 마음은 삽시간에 바뀌어 이제 이자성을 원수로 생각하게 되었다. 오삼계는 이자성을 치기로 결정하고 청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오삼계의 오청은 청에게는 말할 수 없는 희소식이었다. 중국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산해관이었고, 엄청난 희생을 치러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안 서는 천연의 요새인 산해관의 오삼계가 도움을 청해왔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청은 오삼계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군대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청으로서는 중국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이자성군과 오삼계군을 동시에 약화 혹은 해체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다. 청나라가 격파해야 할 두 적대세력이 서로 싸워 힘이 빠진다면 청나라는 간단히 중국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자성군과 오삼계군은 숙명의 일전을 벌이게 된다. 오삼계는 청군을 뒤에 두고, 산해관에 다가와 있는 이자성군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오삼계는 청군의 도움을 받아 이자성군을 대파했다. 이자성군은 크게 패한 뒤 한걸음에 달아나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이자성은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429일 성대하게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황제가 된 이자성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청의 막강한 철기군이 북겨으로 쳐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자성군은 지레 겁을 먹고 북겨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황제로 즉위한 다음날 이자성군은 북경르 떠나 서쪽으로 피했고, 그 다음날 청군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북경에 입성했다. 북경에 입성한 청은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을 압제자로부터 구해내려고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들은 북경에 들어오면서 "폭력을 제거하고 백성들을 구하며 천하를 편안하게 하려고 한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북경을 장악한 청나라는 명의 숭정제를 예에 따라 장사지내고 명나라 때 관료를 지냈던 모든 사람을 간직에 복귀하도록 했으며, 관청 사무에는 만주문자와 더불어 한자를 게속 사용하도록 하는 등 한족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아직도 겉으로는 청나라에 굴복한 것처럼 하고 있었으나 내심 청나라에 대항하는 명나라의 옛 장수들이 있는 한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볼 수 는 없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으로 오삼계군, 그리고 공유덕, 상가희, 겅중명 등이 있었다. 특히 오삼계는 이자성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부흥운동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영력제를 추적, 미얀마 에서 죽인 공을 세웠던 자이다.

청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남쪽지방에 이들을 왕으로 봉했다. 운남, 귀주의 오삼계, 광동의 상가회, 복건의 경중명 등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을 삼번이라고 한다. 청왕조는 명의 남은 세력을 격퇴하기 위해 이 세력을 이용했으나, 이제 명을 따르던 세력도 어느 정도 제압했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정왕조도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게 된 강희제 때에 이르러 세 왕의 세력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게 된다.

세 왕들은 청조가 그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도 들어주지 않은 것을 보고 마침내 청조에 대항하는 난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을 '삼번의 난'이라고 한다. 당시 대표적인 세력이었던 오삼계는 운남지역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태종의 딸과 자기 아들을 혼인시켜 청조와 결혼관계를 맺고, 티베트와 교역, 광산개발 등으로 만만치 않은 경제력도 가지고 있었다.

167311월 오삼계는 마침내 청조에 대항하는 군대를 일으켰다. 다른 두 왕인 경정충과 상가희의 아드린 상지신이 오삼계의 군사동원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 세 세력은 일시에 군대를 모아 양자강 이남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오삼계는 그가 거느리는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청나라의 군대와 싸웠으나, 힘이 분산되어 전세는 오삼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오삼계군이 약화될 조짐을 보이자 다른 두 왕은 오삼계와의 연합을 풀고 청나라에 굴복하려 했다. 오삽계는 전세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되돌이기 위해 그의 권위를 높일 필요를 느꼈고 그리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로 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즉위한 지 5개월 여 만에 죽고 말았다.

오삽계가 죽은 후 그의 군대는 곧바로 분열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청나라에 총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눈치를 보려 이 세력 저세력에 옮겨다니며 붙던 두 왕도 역시 청왕조에 의해 제거되고, 이후 약 250여년간 중국대륙은 만주족의 처안라에게 지배항하게 된다.

 

65 서구열강, 중국을 넘보다-광동무역의 시작(1757)

전통적으로 한족들은 세계에서 가장 중앙에 위치한 나라라는 의미로 스스로 '중국'이라고 했고,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 지구상에도 최고통치자인 신의 아들 '천자'는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문명의 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역시 한족이라고 여겼다. 다른 민족들은 중국의 교화대상인 야만족일 뿐이었다. 모두 미개한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외국과는 향상 동등한 통상관계가 아닌 조공관계를 유지했다. 유럽인들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항로의 개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15세기 말 이후 유럽인들은 중국과의 불평들 관계를 깨고 대등한 조건에서 무역 및 국가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그러나 중국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중국인들의 우월감 역시 쉽게 깨지지 않았다. 신항로 개청 이후 가장 먼저 중국과 무역관계를 맺었던 나라는 신항로 개척에 앞장섰던 포르투갈이었다. 신항로 개척 초기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가 선두주자였는데, 에스파냐는 주로 아메리카 대륙에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고 아시아 쪽은 포르투갈의 무대였다.

포르투갈은 1553년 마카오를 점령하여 그곳의 관리를 돈으로 매수, 그 관리의 이름으로 땅을 사는 방식으로 그 지역을 차지했다. 몇년 뒤 비밀리에 땅을 넓혀 포대를 세우고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관청을 설치하여 실질적으로 마카오를 식민지화했다. 이것이 서양세력이 처음으로 힘에 의해 중국 땅을 차지하게 된 시초다. 물론 중국은 포르투갈의 마카오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곳에는 계속 중국관리가 파련되고 있었다. 16세기까지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중심으로 중국과 이론을 연결하는 무역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편 에스파탸는 1565년 필리핀을 점령했으며, 아모이 항구(하문)를 무역통상 기지로 삼았다. 1626년에는 대만의 기륭을 강제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 초로 접어들면 유럽에서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른 네델란드가 앗.아 지역을 장악한다. 네덜란드는 자바 섬에 바타비아(자카르타)라는 그들의 전진기지를 전설하여 동남아시아 여러섬들을 식민지로 삼았으며 중국 및 일본과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무역로가 성행했다. 1604년 대만의 팽호도를 습격했으며, 1623년에는 대만을 점령하고 안평요새를 구축했다. 1641년에는 대만을 놓고 네덜란드와 에스파냐가 싸움을 벌렸고, 이 싸움에서 이긴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대만을 약 40여년간 지배하다가 청나라 초기 정성공 세력에 의해 밀려나게 된다.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무역전쟁에서 패한 이후 그 세력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네덜란드 세력에 대신하여 아시아 무역에서 패권은 영구과 프랑스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영국은 플래시 싸움(1757)에서 승리함으로써 인도를 독점적으로 식민통치하게 되었고 중국과의 무역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서양세력들이 중국을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광동항 하나만을 열어 외국인들의 무역거래를 제한시켰다. 이것을 광동무역이라고 한다. 광동무역에는 허가맏은 상인만이 무역을 할 수 있었는데 그들이 조직한 상인 길드를 공행이라고 한다. 이 공행은 외국과의 무역을 독점할 뿐만 아니라, 외국상인들을 관리하거나 관제를 거두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청의 관리와 외국상인들이 접촉하지 못하게 했던 것은 중국과 야만족이 대등한 관계로 만날 수 없다는 우월감의 표시였다.

광동무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나라는 영국이었다. 특히 영국이 유리하게 무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인도를 식민지화함으로써 그곳의 물자를 충분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청나라는 조공무역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고, 광동무역은 영국에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대제국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었던 영국에게 이 조공관계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영국은 청나라의 이러한 제한적인 무역방식을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무역통로를 넓히려는 영국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1793년에는 영국의 메카트니가 영국왕 조지 3세의 친서를 들고와 청의 황제를 만나려 했으나 거절당했으며, 대등한 무역관계의 개선 요구도 역시 거절당했다. 1802--1809년 동안 영국은 마카오를 뺏기 위해 3차례에 걸쳐 포르투갈과 싸우기도 했다.

영국은 중국에서 막대한 양의 차를 수입해가면서도 영국산 제품들을 팔아먹을 수가 없었다. 특히 차의 수입대금으로 많은 양의 은을 중국에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1820년 이후 중국에 수출하는 것은 면제품이 중심이었고 그들이 중국에서 사가는 것은 차, 약재, 도자기 등이었다.

마침내 영국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러한 관행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부당한 방법을 동원, 청나라와의 무역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은 아편을 몰래 청나라에 파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이러한 아편판매는 중국에게는 엄청난 문제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아편무역을 금지 시키게 되었고, 마침내는 이 문제로 인해 영국과 청나라 사이의 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66 만주족 지배의 전성기-강희, 옹정, 건륭(17세기 중엽--18세기 말)

청은 삼번의 난과 대만의 정씨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마침내 중국을 완전히 그들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족들은 세게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스스로 최고의 문화민족임을 자부했다. 그것은 중화의식으로 표현되었다. 문화수준이 낮은 소수의 이민족이 중국대륙을 통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고의 중국대륙 통치도 채 100여년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청은 250여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청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강희제(1662--1722), 옹정제(1723--1735), 건륭제(1736--1795) 시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삼번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중국을 최후로 통일한 시기는 성조 강희제 때다. 그는 대만의 정씨 정권을 굴복시켰으며 몽고를 공격하여 외몽고를 중국의 통치권 내에 포함시켰다. 강희제는 중국을 장악한 이후 한족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한족 지식인들을 청조의 통치체제에 참여시키고자 했다. 물론 많은 한족 지식인들은 이민족 지배하의 관리가 되기를 거부했다. 실제적으로 한족 지배층들의 참여 없이 넓은 중국대륙을 통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한족들을 관직에 등용함으로써 이민족 통치에 대한 한족의 반발을 무마하고 통치에도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강희제는 명의 관리들을 대부분 그 자리에 머물게 해싿. 최고위관직까지도 한족과 만주족을 같은 비율로 임명했다. 지방행정의 대부분은 한족들에게 위임하여 명대의 지방 지배층인 향신층의 지위를 게속 인정해주었다. 문자도 만주어와 한자를 같이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황제에게 올리는 공식문서만은 만주어로 통일했다.

또한 강희제를 전국의 학자들을 모아 대대적인 편찬사업에 참여시켰다. 그래서 만들어진 책이 중국 최대의 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강희자전)이다. 이 자전에는 약 5만여 자의 글자가 수록되어 있다. 그외에도 (대청회전) 등 엄청난 분량의 책들이 편찬되었다. 그 때 편집된 (고금도서집성)1만여 권일 정도로 엄청난 대작이었다.

강희제는 8세에 즉위하여 61년 동안 황제의 직위에 있었다. 그에게는 35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황태자로 지명되었으나 잘못된 행동을 많이 하여 황태자의 지위에서 밀려났다. 그후로 청조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황제가 후계자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상자에 넣어 궁중에 보관하고 황제가 죽은 다음에 그 상자를 열어 후계자를 선포하게 했다. 이 방식은 이후 관습으로 굳어졌다. 옹정제는 황제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파벌이 형성되는 등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계자를 지명하는 대신 상자 안에 후계자 이름을 넣어두었다가 황제가 죽은 다음에 열게 하는 방식을 정착시킨 것이다.

옹정재는 새로운 통치기루로 군기처를 만들었으며, 지방관들에게 자세한 보고를 하게 하고 직접 그 보고서를 읽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옹정제 때에는 한족에 대한 사상탄압 정책이 가혹하게 행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사상탄압을 '문자의 옥'이라고 한다. , 글이 빌미가 되어 감옥에 가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한 것이다. 특히 만주족을 비방하고 한족의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어김없이 이 문자의 옥에 걸려들었다. 심지어는 실수로 잘못 쓴 글자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사상탄압은 만주족의 머리 모양인 변발을 강요한 것과 아울러 한족에 대한 강경책의 대표적인 예다. 예컨대 청은 한족 지식인들을 관직에 등용하거나 편찬사업에 동원하는 등으로 회유하기도 했지만, 변발을 강요한다거나 만주족을 비방하는 사상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등 이른바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몽고에 비해 더 오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때에도 이런 청조의 정책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건륭제도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활동을 계속했으며 편찬사업도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편찬사업은 강희제 시기의 사업의 규모를 훨씬 능가했다. 이때 정리된 것이 (사고전서). 이것은 중국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즉 경전, 역사서, 여러 학자들의 문집 등을 모은 것으로, 건륭제 때 10여년간에 걸쳐 정리되었는데 약 10여만 권이나 되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편찬사업은 청 황제들의 문화에 대한 애착의 결실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족 지식인들을 회유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특히 전국의 서적을 모아 정리하는 것은 책들을 모두 검열하는 효과까지도 기대할수 있었다. 모은 책들을 모두 검토하여 청조의 입장에서 내용이 문제가 되는 책들은 전부 폐기처분했다. 무수히 많은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었고 불에 타 사라졌다.

건륭제는 60년 만에 황제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이는 강희제의 61년을 넘기지 않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말까지 130여년간의 강희, 옹정, 건륭제 통치시기가 바로 청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미 건륭제 때부터 청조 내부에 서서히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태평성대를 지나면서 알게 모르게 관료들이 부패해가고 있었다. 건륭제 말기에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던 화신이라는 자는 건륭제가 죽은 후 처벌을 받아 처형되었는데, 그의 집에서 몰수된 재산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가 권력을 이용해 모은 보물들은 황금 15만냥 등 무수히 많은 보석류 등이 수십 개의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청나라에서 20여년 동안 거두어 들이는 세금의 양과 맞먹을 정도여서 건륭제의 아들인 인종 가경제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화려하게 꽃피던 청의 내부는 이미 썩어들어가고 있었고, 19세기 초반에 들어오면 그 부패상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67 사실에 바탕하여 진리를 탐구한다-고증학의 발달(18세기--19세기 전반)

중국의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사회변동과 상황에 맞는 사상들이 발달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사상이 나왔으며, 진시황 대의 분서갱유를 거쳐 한 대에 이르면 유학이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잡는다. 따라서 학문은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대부분의 유교경전의 내용이 소멸되어버렸기 때문에 한나라에 들어오면 잊혀지고 사라진 유교경전에 관한 내용과 그 뜻을 밝혀내는 학문이 발달하는데 이것을 훈고학이라고 한다. 훈고학은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정확하게 밝혀 원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학문이다. 이 훈고학적 전통은 당나라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송나라에 들어오면 단순히 유교경전의 글자 해석이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머물지 않고, 경전이 담고 있는 전체적인 철학적 의미를 밝히는 데 관심이 집중된다. 그때 나온 사상이 성리학이고, 그 성리학의 세계관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나온 것이 양명학이다. 성리학이나 양명학은 인단과 세계, 자연의 이치를 보는 철학적 관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그와 같은 철학적 논의가 일상생활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특히 청나라의 배를 받게 된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고염무 등이다.

이들은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게 되면 처벌받기 때문에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또한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도 쉽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주로 과거의 여러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 경전의 뜻을 더욱 정밀하게 해석한다거나 역사적 사실을 좀더 확실하게 밝히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혹은 일반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는 경향도 있었다.

특히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서양의 제주이트 교단 선교사들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어 중국의 학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성립하는 청대의 학문을 고증학이라고 한다. 고증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진살을 구한다는 '실사구시'를 주장한다.

성리학이나 양명학과 같이 경전의 글자 하나 문장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철학적인 측면으로 관실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실을 구한다는 고증학자들은 우선 경전연구에 있어서는 한나라에서 이루어졌던 훈고학 쪽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훈고학으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근거한다는 말과같이 객관적인 증거를 수집하여 진실을 밝히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전해내려오던 경전 하나하나를 다시 연구하여 어떤 것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이 위조한 것도 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런 고증학적인 분위기는 역사학, 지리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했으며, 특히 옛날의 비문이나 종 등에 새겨진 글을 판독해내는 금석학 같은 진실을 밝히는 매우 중효한 방법의 하나였다.

청대 고증학의 발달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특히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고전서)인데, 이것은 수만권에 이르는 책을 모아 분야별로 분류해서 정리한 대업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편찬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청나라의 사상탄압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청나라는 소수의 만주족이 지배층이 되어 다수의 한족들을 통치해야 했기 때문에 강경책과 회유책을 교묘하게 동원해야 했다. 관직에 만주족과 한족을 같은 수로 임명한다든지 하는 것이 한족을 회유하는 하나의 예라고 하면, 한족의 민족주의적인 사상의 탄압, 변발의 강요, 만주족과 한족의 결혼금지 등은 만주족이 그들의 혈통을 잃지 않으면서 한족을 통치하기 위한 강경책에 해당한다. 그러한 강경책 중 하나가 바로 '문자의 옥'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족 지식인들이 청조를 비난하는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어길 경우 강력한 처벌을 하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사상탄압을 받아 회생되었다.

전국의 서적을 모아 검토하여 편찬한 결과인 (사고전서)도 실은 그 책들의 내용을 검토하여 청조를 비난하는 책들을 가려내어 읽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한족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현실 정치적인 문제에 눈을 들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편찬사업에 동원하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고증학은 성리학이나 양명학처럼 그 시대의 흐름을 방여하는 하나의 사상체계라기보다는 방법적인 측면의 성격이 강한 학문이덨다. 물론 유교경전이나 고전을 새록게 해석해내어 근대지향적인 사상을 찾아내려는 노력들도 행해져 성과를 거둔 부분도 있으나, 그 시대 전체를 주도할 만한 사상체계나 혹은 다가오는 근대세계를 맞아 사회의 핵심적인 사상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