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비히 뉘뮐러 목사 (친 나찌 어용 독일교회의 최고위 감독)
본회퍼로부터 배운다
1. 본회퍼 기록영화
디틀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그는 누구인가? 동시대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에게 관심을 둔 많은 사람들도 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듯하다. 본회퍼 자신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모른다고 했다. 그는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해 고심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을 시를 남겼다. 자기에 대하여 아는 것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이었다.
지난해, 본회퍼에 대해 기념비적 기록영화가 제작되었다. 1시간 32분 분량의 독일어 기록 영상이다. 기독교방송은 올해 본회퍼가 세상을 떠난 날(4월 9일)을 기념하려고 재방영했다.(www.bibeltv.de/mediathek/videos/bonhoeffer-614685). 이 기록영화는 신앙적 관점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다. 기록 영상물이 거의 다 그러하듯 이 영화도 제작자 의도에 맞게 구성, 편집되었다. 편집자는 신학자가 아니다. 가끔 내용에 오류가 나타난다. 저명한 해방신학자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몇 번 등장한다. 본회퍼를 해방신학자 편 사람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것은 소중한 기록영화임에 틀림없다. 히틀러, 괴벨스의 연설, 독일 국민의 열광, 군인들의 열병 장면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본회퍼가 불의한 정치권력에 저항한 신학의 형성 과정(Werdegang)을 탐색하고, 그의 신학과 삶의 자리를 간파한다. 당시 상황에 대한 정보들도 많이 제공한다. 본회퍼에게 배웠던 학생들의 증언과 그의 유고를 모아서 책으로 발행한 친구 베트게의 증언도 담고 있다.
본회퍼는 독일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그룹에 포함된다. 개신교도들과 로마가톨릭 신도들이 존경한다.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극단의 진보계 신학자들, 심지어 사신신학자들과 해방신학자들도 존경한다. 이구동성, 자신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자랑스러워한다. 왜 그럴까?
그는 신학적 체계를 갖춘 작품을 남기지 않았지만 강한 신학적 자극(impuls)을 준다. 그의 신학적 통찰을 맛본 사람은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은 대부분 영감을 받는다. 필자도 그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본회퍼는 정통신학자인가? 자유주의자 혹은 신정통주의자인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는 누구인지”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를 매우 심오하게 깨달았다. 본회퍼는 항상 하나님을 찾았으며, 자기 신앙과 양심을 다하여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투쟁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말년에 쓴 신학작품 <옥중서한>은 괴물과 같다. 죽기 전에 불트만의 신학을 포함하는 당시의 모든 신학을 포용하는 거대한 신학적 건물을 구상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왜 본회퍼는 이런 일을 시도했는가? 그의 삶과 당시 형편을 알면 이해된다. 당시 독일에 정통 신학자가 거의 없었다. 고작 칼 바르트가 유럽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에서 구원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튀빙엔대학교에서 그를 가르친 쉴라터와 칼 하임은 분명히 매우 훌륭한 신학자였다. 필자도 그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정통 신학의 기준에는 맞지 않는다. 이러한 환경에서 본회퍼가 시대정신과 당시 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본회퍼는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확고하게 믿고 성경 말씀 그대로 살려고 투쟁했다. 이 사실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될 점이다. 당시에는 그런 신학적 기초를 가진 독일인 신학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관대하게 평가하는 까닭은 그의 글들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서 만나기 어려운 경건과 깊은 성경 이해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젊을 때 저술한 <나를 따르라>(Nachfolge)는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다. 당시의 그의 신학적 지향은 정통 기독교의 입장과 똑같았다. 이 책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나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몇 년간 신앙적으로 사경을 해맬 때 나를 살리는 양식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 독자들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다. 나는 독일에 살고 있고 물론 독일어로 이 책을 읽었다. 나는 20대 나이 시절부터 그의 신학에 매료당했다.
최근 위 기록영화를 시청하면서, 나는 한국인 독자들에게 그 내용을 알리고 싶어 그 내용을 간추리고, 소감을 덧붙였다. 명확한 오류는 고쳐 썼고,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보충했다. 기독인, 신학박사, 목사인 본회퍼의 삶의 초점은 불의한 정치권력에 대한 기독인의 저항이었다. 정치권력에 대한 기독인의 저항은 정당한가? 본회퍼의 생애는 이 질문에 긴요한 답을 제공한다.
2. 나는 누구인가?
위 기록영화 끝부분은 본회퍼의 시 “나는 누구인가”를 소개한다. 본회퍼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먼저 이 시를 감상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온종일 성경을 생각하고 나 자신을 성찰하며 묵상하곤 한다. 독자들에게 그렇게 해보기를 권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내 감방에서 나올 때
어찌 그렇게 여유롭고 명랑하고 분명한 발걸음으로 나오는지
마치 영주가 자기 성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를 지키는 간수들과
어찌 그렇게 자유롭고 상냥하고 분명하게 말하는지
마치 내가 그들을 명령하는 것 같다고.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불행의 나날들을
태연하게 웃으면서 당당하게 보내기를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 같다고.
나는 정말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그 사람인가?
아니면 나 혼자 알고 있는 단지 그 사람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해하고 갈망하고 병든 나,
누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이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색깔과 꽃과 새들의 노래를 갈망하고
좋은 말 듣기와 인간의 따뜻함을 갈망하고
전횡에 대한 분노에,
그리고 조그마한 무례함에도 분노에 떨며
큰 일을 기다리면서 근심하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들을 위해 걱정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기도하고 생각하고 일하기에는 너무나 피곤하고 마음이 비어있고
녹초가 되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그런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전자인가 아니면 후자인가?
나는 동시에 같은 사람인가?
사람 앞에서는 위선자이지만
나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만하게 애달픈 소리를 잘하는 연약한 자인가?
아니면 내 안에 아직 있는 패배한 군대와 같은가?
이미 얻은 승리 앞에서 무질서하게 도주하는
나는 누구인가?
고독한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나를 조롱한다.
내가 누구든 간에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나는 당신 것입니다.
3. 가족과 신학수업
디트리히 본회퍼의 아버지 칼 본회퍼는 베를린대학교의 유명한 정신과 교수이며, 어머니는 프로이센 귀족이었다. 8남매 중 사비네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다. 사비네보다 먼저 태어났으므로 여섯째였다. 그 가족은 사회적으로 상류층 시민계급에 속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에 발발했다. 교회를 포함한 독일의 전 국민이 황제의 전쟁 정책을 옹호했다. 황제의 선동에 영향을 받은 탓으로 주변국들이 자기들의 성장을 저지하려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도 전쟁에서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쉴라터와 같은 대 신학자도 전쟁을 지원했다. 본회퍼의 형이 자발적으로 당시 18세 나이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불행하게도 참전 2주 만에 전사했다.
전쟁은 수백만의 전사자들을 자아내고 수많은 꽃다운 젊은이들이 상이군인으로 귀가하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위선적 집단(Scheinheilige)으로 생각했다. 교회가 전쟁을 지원하고 하나님이 독일을 도우신다고 선전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지원이 줄어들었다.
당시의 독일교회 대부분의 신자들은 문화신교주의와 자유주의 신학 등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본회퍼도 오랫동안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 참 신앙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바이러스에 감염되듯이, 생각과 삶이 온전할 수 없었다.
본회퍼는 점차 반전주의자가 되었다. 형의 죽음이 본회퍼로 하여금 신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독일이 패망하자 전승국은 이 나라가 다시 전쟁 일으키지 못하도록 베르사유 협정에서 독일에 가혹한 배상 책임을 지웠다. 그런데 이것이 역효과를 가져왔다. 독일 국민은 이들이 자기들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겼다. 황제는 전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지만, 정부는 너무 연약했다.
본회퍼의 아버지는 바이마르 정권을 열렬히 지지했다. 새롭게 등장한 히틀러를 믿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자기의 가치관을 꼭 붙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이었다. 본회퍼도 처음부터 나찌를 믿지 않았다.
본회퍼 그리고 그의 가족도 교회를 잘 다니지 않았다. 당시의 교회는 하나의 사교 모임에 불과했다. 교인들 서로 간의 관계도 깊지 못했다. 목사들은 깊은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본회퍼는 1924년에 베를린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17세 때인 1923년에 튀빙엔대학교에서 신학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아돌프 쉴라터와 칼 하임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한 학기를 로마에서 공부하고 1924-1927년 베를린에서 공부를 하고 수학 과정을 마쳤다. 1929-1930에 베를린에서 조교 생활을 하면서 교수자격논문을 썼다.
당시 신학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사건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 비판적으로 성찰되고 있었다. 이때 젊은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가 등장했다. 독일, 프랑스, 영국은 모두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진정 누구 편인가? 30년 전쟁(1618-1648) 때도 제기되었던 문제이다.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이 모든 인간 행동의 가장 위에 서야 한다(Gottes Wort als oberstes Gesetz)고 했다. 인간의 교만(Anmassung des Menschen: 인간의 주제넘음)을 질책했다. 본회퍼는 그러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본회퍼는 21세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고 평가(summa cum laude)를 받았다. 그는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함께 마쳤다. 고작 4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학위 제목은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였다. 그리스도는 단지 성도의 교제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교회가 부르조아 성향을 지니고 있다. 노동자들은 사라지고 시민들이 교회를 차지했다. 성도의 교제가 이렇게 분리되면 그리스도도 분리된다는 요지였다.
본회퍼는 교회의 교제보다 인간의 교제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그리스도인이 인간 세계에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새로운 인간성을 원하신다. 교회가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임무는 국민 사이에서 일어나는, 계속 성장하는 불만 때문에 어렵게 되었다고 했다.
1920년대의 독일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때 교회는 교회다운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때 나찌가 등장했다. 지도자들도 노동자들도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시민들은 그 혼란한 시대에 강력하고 권위적인 지도자를 원했다. 당시 한 끼 식사 가격이 10억 마르크였다. 논평자(나)는 당시 화폐 50억 마르크짜리를 가지고 있다.
1929년 10월 3일 뉴욕 증시에게 주가가 폭락함으로써 경제 공황이 시작했다. 독일도 당연히 큰 피해를 입었다. 우리는 왜 독일인들이 나치당을 지원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본회퍼에게서 배운 어느 학생은 자기도 젊어서 나찌당(NSDAP)에 가입했고, 히틀러를 존경했고, 그에게 희망을 걸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희망을 걸고 열광적으로 지지했다고 말한다.
4. 할렘가의 경험
본회퍼는 독일에서 신학 수업을 마치고 2차 국가고시를 거친 뒤, 1930년에, 미국 뉴욕의 유니언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라인홀드 니버의 강의를 들었다. 니버는 사회 윤리학(social ethics)의 아버지이다. 미국의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고,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자주 흑인 신학자들의 말과 글을 인용했다. 이것은 당시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본회퍼는 처음에 니버를 환영하지 않았다. 니버에게 칼 바르트와 같은 그리스도 중심 사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신학과 윤리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꾼다는 것(Die Welt positiv zu aendern)을 깨달았다.
흑인 학생을 만나면서 할렘의 흑인 교회를 알게 되다. 상당히 큰 교회였다. 교회 건물의 규모는 백인 교회에 뒤지지 않는다. 그들이 이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어느 유명한 백인 목사(파울)가 이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본회퍼는 이 교회를 통해 독일인들의 지성적 예배 스타일과 다른 감정적 예배를 좋게 평가하게 되었다. 파울 목사가 성경적이면서도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하는 데 인상을 받았다. 본회퍼는 이곳에서 죄와 은혜와 사랑에 대한 설교를 처음 들었다. 그의 설교에는 큰 능력이 있었다. 그 “흑인 그리스도(der schwarze Christus)는 정열적으로 설교했다”고 한다.
유니언신학교에서 평화주의자인 프랑스인 친구 쟝 라세르(Jean Lasserre)를 만났다.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우정은 두터워졌다. 라세르는 예수님의 몸이 분열되어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독일교회와 프랑스교회는 하나이다. 전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지금까지 교회는 자기 국가를 방어했으므로 전쟁은 예외로 생각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지 않았다. 라세르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본회퍼와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본회퍼는 산상수훈을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라세르의 주장에게 설득되었다. 당시까지 그 가르침은 우리의 이상이며 다만 죄를 밝히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관점이었다. 라세르와의 만남이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독일에는 7백만 명의 실업자들이 있었고, 약 천오백만 명 내지 이천만 명의 독일인들이 배고픔을 겪었다. 이 상태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본회퍼는 1931년 여름에 미국을 떠나 독일로 갔다.
5. 회심과 신학교 사역
여기서 본회퍼의 회심을 소개하고자 한다. 1931-1932년에 강의도 하고 목사 안수도 받는다. 그는 학생 목사로 설교도 한다. 난생 처음 성경을 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32년에 회심을 체험한다. “나는 그 전에 기도한 적도 없고, 했을지라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대단히 만족했다. 성경이, 특히 산상수훈이 나를 이러한 상태로부터 해방했다. 그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이것을 분명히 느꼈고, 심지어 내 주위 사람들도 이것을 느꼈다. 이것은 커다란 해방이었다”(1936년 서신).
본회퍼가 정말로 성경적 관점에 부합하는 회심을 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어쨌든 위 회심 이후에 성경에 대한 관심이 달라지고 이해가 훨씬 깊어진 것을 보아 회심이라고 생각된다. <나를 따르라>는 중생된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책이다. 그는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신학과 성품은 그와 많이 다르다.
히틀러는 자기가 독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연설했다. 당시 교회는 보수적이었고 왕 제도를 좋아했다. 그래서 히틀러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국가 지도자로 믿었다. 독일교회는 늘 권력에 순종해 왔다. 히틀러는 민주주의를 없애고 자기가 영도자가 되어 왕을 계승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히틀러와 나찌 정부가 수립에 책임이 있다.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에 제국 수상이 되었다. 독일 제3제국이 탄생했다. 그가 수상이 된 지 2일 후에, 아직도 독일인들이 히틀러가 수상이 된 것을 축하하고 있을 때, 본회퍼는 베르린 라디오 방송에서 히틀러를 비판했다. 제목은 “새 세대의 지도자 개념의 변화”였다. 자기와 자기 지위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지도자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결국 망한다. 이 경우의 지도자는 미혹자이다.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방송이 꺼졌다.
히틀러는 3월에 포츠담 교회에서 제국의회의 재개를 축하했다. 새 나라가 전통적인 교회의 가치 위에 세워진 것임을 보이려고 했다. 당연히 대부분 교회 지도자는 그를 환영했다. 독일인 목사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실추된 교회 명예를 회복하고 교회를 재건하려고 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생각과 거리가 멀다. 당시의 독일교회는 거짓 교회이다.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한다.
독일교회는 영방(州)교회로서 각자 독립적으로 활동했으나 점차 나찌에 협력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영향 아래서 연합제국교회로 바뀌었다. 루드비리 뮐러가 제국 교회의 최고위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나찌 군인들과 함께 히틀러에게 손을 들고 “하이 히틀러” 하고 인사하는 성직자복의 사진의 주인공이다.
히틀러가 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을 무렵 본회퍼는 베를린대학교에서 강의를 다시 시작했다. 어느 여학생은 그가 자기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것을 강의했다고 한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거든 지금 그리고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라”(Jetzt und hier redet Gott mit mir). 그는 이 점은 계속 강조했다. 다른 교수들과 달랐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려고 했다: “너는 성경을 너에게 하는 말로 생각하며 읽어라”(Bibel musst du auf dich hinlesen). “하나님께서 너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Das Wort Gottes zu dir hin).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통한 독일 백성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이 이 널리 퍼지고 있었을 때, 본회퍼는 강의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Das Heil kommt von Jesus Christus). 구원이 히틀러에게서 온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고 가르쳤다. 대중이 믿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가르쳤다. 본회퍼가 1932년에 회심했으므로 이러한 강의가 가능했다. 종교개혁과 경건주의 이후 오랫동안 잊혀진 인격적인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신학의 주제가 되었다.
1933년 4월 1일, 나찌의 선전장관 괴벨스 연설과 함께 시민이 유대인 핍박하고 교회에서는 찬송가를 불렀다. 90세의 본회퍼의 친할머니는 겁내지 않고 유대인 가게에 들어가 물건들을 구입했다. 군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 가게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일주일 후 4월 7일에 “아리안조항”(Arierparagraph)이 발표되었다. 유대인 공무원직 금지 조항이었다. 이때 독일인들은 이를 지지하면서 마르틴 루터를 근거 삼기도 했다.
볼프강 후버 교수는 “우리는 반유대주의와 반유대인주의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반유대주의는 옛 부터 신학에서 있었으나 20세기에 여기에 인종차별주의가 첨가되었다”고 말한다. “루터의 반유대주의는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Luthers Antijudaismus ist nicht rassistisch)라고 한다.
본회퍼의 쌍둥이 자매가 유대인과 결혼했다. 여동생은 남편의 부친이 죽자 본회퍼에게 장례식 설교를 부탁했다. 그는 교회 지도부에 찾아가서 상담했다. 설교를 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았다. 교회 지도부는 히틀러를 환영했던 때와 달리 점차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설교를 거절했다. 나중에 이것을 매우 부끄러워했다.
본회퍼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도 당시의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끔찍하게 겁을 먹을 수 있었을까?”(grauenhaft aengstlich).
6. 유대인 문제에 직면한 독일교회
유대인에 대한 핍박이 거세지자 본회퍼는 목사들을 위한 교회지에 글을 썼다. “유대인 문제 앞에 직면한 교회”(Die Kirche vor der Judenfrage, 1933.4). 이것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그는 교회가 유대인을 도울 것을 요구했다. 이 글이 인쇄되어 발표되었다. 그는 정말로 용감한 사람이었다.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나섰다. 반유대인 법을 교회에 다니는 유대인에 적용하지 않아야 할뿐더러, 국가 권력의 희생자가 된 유대인을 보호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교회가 국가에 순종하는 의무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유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1) 교회는 먼저 국가에 그러한 행동이 합법적인지를 물어야 한다. (2) 교회는 국가의 행위로 말미암은 희생자를 도와줄 의무를 져야 한다. 그가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3) 교회는 극단적인 경우에 저항할 각오를 해야 한다(im Extremfall drittens bereit sein, nicht nur die Opfer unter dem Rad zu verbinden, sondern dem Rad selbst in die Speichen zu fallen).
이 주장은 당시의 교회가 정부의 과오를 묵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행동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첫 목소리였다. 당시 나찌 군대가 행군하는 장면, 국민이 열광하는 모습, 교회당에도 나찌당 표시(Hakenkreuz)가 붙어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본회퍼의 주장이 얼마나 용감하고 위험한 일인지가 실감할 수 있다.
나찌는 로마가톨릭이 과반수를 차지했던 남부독일에서 출발했다. 로마가톨릭은 처음에 히틀러를 반대했지만 점차 불이익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협력했다. 1933년 여름, 바티칸은 히틀러와 협상했다. 그 자리에는 나중에 교황 피우스 12세가 될 추기경이 참석했다. 협정서(Komkordat)는 “로마가톨릭교회는 자치권(Autonomie)을 가진다. 그 대가로 당의 정치적 삶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히틀러의 첫 외교 정책의 승리였다. 이로써 로마가톨릭은 히틀러 정권에 항거할 수 없게 되었다. 로마가톨릭 지도자 대부분은 히틀러가 로마가톨릭 신자이고 합법적으로, 분별력 있게 행할 것으로 생각했다.
나찌가 폭력을 사용하고 개신교회에 간섭이 많아지면서, 그 동안 나찌에 충성하던 개신교도들은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베르린의 마르틴 니묄러는 제1차 세계대전 때에 공을 세운 사람이다. 베르린의 유명한 목사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나찌 정책, 특히 아리안조항에 반대했다. 본회퍼와 함께 “목사비상동맹”(Pfarrernotbund)을 결성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7천 명 이상의 목사들이 가담했다. 당시 독일의 목사는 약 2만 명이었다. 다수의 목사들은 침묵하거나 히틀러에 동조했다.
본회퍼는 교회 내부의 분열을 보고 매우 불안해했다. 당시 칼 바르트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기가 고립되고 있음을 느꼈고, 자기 생각이 반드시 옳은지에 대해서도 의심스럽다고 했다.
그는 후퇴하여 영국에 있는 독일인 교회의 목회직을 맡았다. 그곳의 감독 조지 벨과 친분을 맺었다. 이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진정한 교회를 회복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독일정부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목사들을 핍박했다. 많은 목사를 투옥시켰다. 히틀러 청년 나찌당원 유겐트는 니묄러가 “하나님은 나의 지도자시다”(Gott ist mein Fuehrer)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목사관에 폭탄을 던졌다. 당사자는 물론 그의 가족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으며, 얼마나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독일교회 목회자 백여 명이 1934년 5월에 바르멘에 모여 바르트가 작성한 초안을 기초로 “바르멘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고백했다. 이것을 기초로 고백교회가 탄생했다. 당시 목사들이 거의 자유주의자 색채를 띠고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들 가운데 우리가 생각하는 보수적 신앙을 가진 목사는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주이시다”는 집단적 고백은 매우 혁신적이다. 독일교회는 전적으로 히틀러에게 협조했고, 독립교회 일부는 히틀러에 의해 핍박받았고 일부는 협조했다.
본회퍼는 18개월 후에 영국에서 돌아왔다. 1934년 8월, 나찌가 군사무기를 만들면서 군비확장을 시작하자 전 세계 목사 대표들이 덴마크에서 모임을 가졌다. 본회퍼는 당시 28세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들은 전쟁을 염려하여 평화를 유지를 의논하려고 모였다. 본회퍼는 “교회와 세상”(Kirche und Voelkerwelt)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이 유명한 설교는 “평화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전투는 무기로 싸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이기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일어나서 이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왜 행동에 옮기지 않는가?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그 부르심은 우리를 죽음으로까지 이끈다”(Wenn uns Christus ruft, fuehrt uns sein Ruf hin zum Tod, <나를 따르라>)고 했다.
본회퍼는 독일고백교회 신학교 교장으로 교수로 사역했다. 당시 대학에서 올바른 신학교육이 어렵게 되자 고백교회는 1935년 신도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차세대 목회자 양성을 위해 독일의 여러 곳에 신학교들을 세웠다. 불법적인 학교였다. 본회퍼는 핑켄발데의 신학교 원장으로 부름 받고 인도 여행 계획을 연기하고 이것을 수락했다.
그는 산상수훈을 진지하게 가르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이것을 가르쳤다. “여기에 모든 것을 폭파시킬만한 능력의 근원이 있다”고 했다. 그는 평화와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함께 공부하고 힘께 기도에 집중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도모했다.
그는 젊고 스포츠맨처럼 생겼다. 학생과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며칠 후 학생들에게 자신을 “교장”이라 하지 말고 “형제”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침대를 잘 정리하라고 했고, 정리여부를 검사했다. 고전음악과 그 이후의 음악을 함께 연주했다. 뉴욕 할렘가에서 배운 흑인 영가 “스윙 체리옷”도 가르쳤다. 핍박받는 유대인과 흑인 사이에 동일한 점을 발견한 것 같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의 경험을 했으므로 유대인에 더욱 큰 관심을 가졌다.
루터파 독일교회에서 자진 분열한 독일고백교회의 신학교 운영과 교육은 엄연히 불법이었다. 루터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학생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경비는 교인들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본회퍼는 이 신학교에 재직하면서 <제자도>를 저술했다.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견주었다. “값싼 은혜는 십자가가 없는 은혜이다. 값비싼 은혜는 복음이며,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요구한다. 이것의 값이 비싼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값비싼 것이 우리에게 값싼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신학교는 설립한 지 2년 후인 1937년 9월에 게쉬타포에 의해 폐쇄되었다. 히틀러는 1938년에 유럽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말살한다는 연설을 했고, 군중은 열광했다. 그해 11월 9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가계가 파괴당하고 회당이 불태워졌다. 이날이 유명한 Reichskristallnacht이다.
본회퍼는 “다만 유대인을 위해 소리치는 사람만 그레고리안 찬트를 부를 수 있다(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정부의 인종차별 행위를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보았다. 그러나 독일교회만이 아니라 독일고백교회조차 침묵했다.
그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가 베를린에 체류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가족 중 몇 명이 항거 운동 단체에 가담했다. 이들은 히틀러의 만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본회퍼의 형 클라우스와 두 처남이 그 모임에 들어 있었다. 변호사인 처남 한스 폰 도나니가 본회퍼에게 이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저항단”(Abwehr)이라는 이 모임은 처음부터 히틀러를 반대했다. 그를 암살하려는 모임의 중심에 섰다. 본회퍼 가족은 유대인 학살을 알고 있었고, 침묵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칼 바르트는 스위스로 돌아가고, 나찌에 항거하던 마틴 니묄러는 수용소에 들어가고, 수백 명 목사들이 감옥으로 들어갔다. 이 상황에서 친구가 본회퍼에게 미국 유니온신학교에 교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여름에 다시 뉴욕으로 갔다.
그러나 자기 행동에 확신이 없는 데 대하여 고민했다. “내가 어디에서 쓰임 받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미국에서 혹은 독일에서 사용하기를 원하실까?” 그러다가 “믿는 자는 도주하지 않는다”(Wer glaubt, der flieht nicht)라는 이사야 말씀을 읽고 자기가 도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생존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전후 독일교회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자기 백성과 함께 시험을 나누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과 나찌가 패망할 것을 확신했다.
8.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본회퍼는 뉴욕에서 독일로 가는 마지막 배를 탔다. 전운이 감돌았고, 그 후에는 배가 끊어졌다. 1939년 9월,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했되었다.
변호사 처남 폰 도나니는 그 사이에 암살 공모팀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는 본회퍼에게 그 공모에 함께하자고 권유했다. 신학자로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핑켄발트 신학교의 학생이며 본회퍼의 친구 베트게(Eberhard Bethge 1909-2000)는 당시의 본회퍼의 생각을 증언한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주변의 사람을 위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때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방책을 구해야 한다.”
본회퍼의 가르침을 받은 어느 목사는 전쟁과 유대인에 대한 불의, 이 두 가지가 그로 하여금 “살인” 음모에 가담하도록 했다. 그리스도는 평화와 공의의 하나님이므로. 그가 침묵한다면 평화와 공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증언한다.
본회퍼는 베트게에게 편지 했다. “나는 이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Ich bereue diesen Weg an keiner Stelle).
그의 이 결정은 성경적인가? 논평자인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불의의 집단에 동조하는 것은 큰 죄이지만, 그럼에도 살인하는 것은 여러 하나님 계명에 위배된다. 나는 전쟁과 불의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그분의 섭리를 따른다. 당시 자유주의에 함몰된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좋다. 기독신자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신자는 여러 불이익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거나 순교를 당할지라도 불의에 동조하지 않고 복음과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본다.
본회퍼는 정보의 전달자일 뿐만 아니라 이 항거자들의 도덕적 지주가 되었다. 히틀러 제거단에는 해군 제독 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군인의 맹세를 깨고 지도자를 죽여야 했다. 거짓말도 많이 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본회퍼에게서 큰 힘을 얻었다. 본회퍼는 목사와 간첩 노릇, 두 가지를 동시에 했다.
베트게의 증언을 들어본다: “당신은 현재에 살고 있다. 내일도 어제도 아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계속 사람이 살해된다. 이 사람을 중단시켜야 한다. 그를 죽이고자 심지어 죄를 지을지라도 말이다.”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단에 가담한 이론적 근거는 ‘죄 채무인수’(Schuldübernahme) 개념이다. 사람이 행위를 하든지 안 하든지 어차피 죄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마부(히틀러)가 미쳐서 마차에 탄 사람이 다 죽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그 마부를 죽이면 마차에 탄 사람을 모두 살릴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살인죄를 범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그를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아서 모두가 죽게 된다면, 그는 그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다.
본회퍼는 히틀러를 죽이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죄(Schuld)를 스스로 짊어지고(Übernahme: 넘겨받음) 그것을 그리스도께 다시 전가함으로 자신은 죄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논평자 나는 본회퍼가 미친 마부와 히틀러를 동일시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살인은 반대한다. 나는 그의 죄 채무인수 개념에는 동의한다.
본회퍼는 어떻게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농민전쟁 이후에 다음과 같은 루터의 괴로운 고백에서 배우지 않았을까? “그들의 모든 피가 내 목까지 찼다(나도 이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나의 주님께 떠맡긴다. 그분이 나에게 이것을 명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나 루터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루터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만, 본회퍼에게는 그러한 필연성이 주어지지 않았다.
1940년 6월에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를 복수하려고 히틀러는 파리로 가서 에펠탑을 보고 왔다. 베를린으로 돌아와 독일 국민과 함께 역사상 가장 큰 축제를 벌였다. 본회퍼는 룻 폰 클라이스트에게 갔다. 여기에서 그가 전에 알고 있었던 그녀의 손녀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를 사귀었다. 그는 스파이 노릇을 하면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윤리학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히틀러 암살 계획을 지원하지 않았다.
저항단은 몹시 실망했다. 몇 번의 히틀러 암살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다. 저항단은 영국 하원에 호소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영국은 독일 문제는 독일인이 해결하라고 했다. 그러나 영국인은 자기들 나름대로 히틀러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9. 교회는 남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본회퍼는 1942 성탄절쯤에 암살 동료들에게 “십년 후에”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썼다. 유대인의 고난에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기다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 아니다. 책임을 진 사람으로 행동해야 하고, 후대 사람들의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연합군이 1943년 우세해져 전세가 역전되었다. 나찌가 저항단을 의심하여 본회퍼와 도나니의 전화를 비밀로 도청하기 시작했다. 본회퍼는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을 했다. 그는 히틀러가 암살되고 독일에 평화가 올 것을 믿었다. 본회퍼는 1943년 4월 5일 도나니와 통화 후 몇 시간 지나 잡혔다.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부모에게 자기는 잘 적응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 부모를 안심시켰다. 실제로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불이 너무 더러워서 며칠 간 덮을 수가 없었다. 베트게가 감옥을 방문했을 때에 그는 친절하고 웃는 얼굴로 대했다. 간수들이 도와주어 글을 쓸 수 있었고, 외부로부터 책도 받을 수 있었다.
감옥에서 베트게에게 “교회는 남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라고 썼다. 교회는 세상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 모든 직업의 사람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타자를 위한 존재이다.
감옥에서 그는 계속 성경을 읽었다. 좋아하는 욥기와 시편을 읽었다. 1944년까지 전쟁이 계속되자 그는 옥살이에 익숙해져서 다시 <윤리학>을 집필을 계속했다. 1944년 7월 20일 백작 폰 쉬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 시도가 실패했다. 4명이 죽었고 히틀러는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히틀러가 철저히 조사하라고 했다. 이것은 마지막 암살 시도였다. 이로써 도나니와 본회퍼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 무렵, 본회퍼는 앞에서 소개한 시 “나는 누구인가”를 썼다. 1945년 4월 베를린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쟁에 패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히틀러는 암살자들을 모두 사형하라고 명령했다. 본회퍼도 포함되었다. 우리의 주인공 본회퍼는 플로센부르크 수용소로 이송되어 약식 재판을 거쳐 4월 9일 처형당했다. 그의 형과 두 명의 처남도 처형당했다. 본회퍼가 남긴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이제 마지막이 왔다. 그러나 이것이 내 삶의 시작이다”(Das ist das Ende, fuer mich der Beginn des Lebens).
본회퍼의 옥중서간문들은 십자가 신학에 골몰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하나님만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하나님의 “성육신적인 다가옴”과 “자신을 비우는(kenosis. 빌2:7)의 깊음”을 강조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고 자신을 비우고 낮춤으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신다. 여기에 상당히 깊은 신학적 사색과 통찰이 엿보인다. 본회퍼가 신학적 주제로 부각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핵심을 살펴본다:
진정한 신학은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서 찾는다. 진정한 신학은 십자가 신학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이성(사변)과 선행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루터는 이것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명명하고 잘못된 신학이라고 비판했다. 이 가짜 신학은 악을 선이라고 하고, 선을 악이라고 한다. 이것은 로마가톨릭 신학에 대한 폭탄선언이다. 십자가 신학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서 계시를 안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핵심 가르침으로 삼는다. 근대 대중 전도시대를 맞아서 신자의 삶에서 십자가가 사라진 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설교에서 십자가의 피, 거듭남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용도로 사용되며, 복음의 핵심을 나타내는 경건한 용어가 장식품처럼 사용된다. 이렇게 현대 복음주의도 계속 타락하여 영광의 신학이 되었다. 이것은 가짜 신학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모색해야 한다. 사회가 갈수록 불의해지고, 정권이 반기독교적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도구가 될 때에도 그리스도인이 이를 지원할 것인가? 우리는 침묵하지 않아야 한다.
송다니엘/ 독일 프랑크프르트개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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