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

by reformanda posted Mar 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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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

 

최덕성 교수의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2005)를 읽고


자기시대의 선견자, 동시대 신학자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에큐메니칼운동 곧 교회연합일치운동의 상징적인 단체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진보계 한국교회들은 2013년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된 이 단체의 제10차 총회 개최를 적극 환영했다. 보수계 교회들은 이 총회를 반대하거나 철회하라고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전자는 세계의 교회들이 일치하여 공동의 선교와 봉사함이 옳다고 하고, 후자는 이 총회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와해시키고 한국교회에 치명적인 독성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한국교회는 WCC 회원 문제로 분열하는 아픔을 겪었다. 1959년에 현재의 예장 합동과 통합이 나뉘고, 성결교단이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했다. 교회연합일치운동은 2000년대에 진입하면서 한국교회를 요동치게 했다.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가 강하게 울려나왔다. 교회연합일치운동의 북소리가 너무나 강하여 마치 제1계명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 행진에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이단처럼 취급받고,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면 진리에 반항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WCC 중심의 교회연합일치운동은 1948년에 출범하여 자유주의 신학과 로마가톨릭신학에 기초하여 교회 단일화 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다. ‘대문자 T(Tradition) 이론을 고안하여 로마가톨릭교회를 포함한 모든 교회들을 단일화하려고 움직이고 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반복음적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을 도입하면서 영혼구원이나 교회건설보다는 사회변혁과 인권회복과 환경개선 들의 세속적인 활동을 구원사역으로 보고 매진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종교, 이웃종교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실재한다는 문서들(바아르선언문-1990, 선교와 전도선언문: 함께 생명을 향하여-2013)을 채택하고 선언했다.

 

최덕성 교수는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5)를 저술하여 한국교회 안에 증후군처럼 일어나던 교회연합일치운동을 분석한다. 이 책을 저술한 정황과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지향(指向)해야 할 교회연합 일치운동과 지양(止揚)해야 할 운동을 구분하고, 성경에 바탕을 둔 신앙고백의 일치와 진리 안에서 일치가 전제된 교회연합일치운동이 바람직함을 논한다. 교회연합일치운동은 1960년부터 위험천만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또 교회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독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현대신학과 현대 기독교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장단점을 소개하면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진로를 제시하고 비극적인 방향성에 대한 경계를 촉구한다. 1990년대에 이르러 WCC 중심의 에큐메니칼운동이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특성을 지니고 진행되고 있으며, ‘교회화합과 일치를 위한 신학을 수립한다는 미명으로 다양한 신학사상을 포괄하는 새로운 신학 제조를 모색하고, 유서 깊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를 아우르고, 사도적 신앙과 탈사도적 신앙을 동시에 포용하려고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성경적인 에큐메니칼운동을 환영하면서도, 올바른 교회연합운동과 반대해야 할 WCC 유형의 에큐메니칼운동을 구분한다. 극심한 교회 분열은 어떤 형태로든 개혁되고 교정되어야 한다. 분파 상태는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방해하고 교회의 사회적 신인도(信認度)를 떨어뜨린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내적 하나 됨은 외적 일치로 드러나는 것이 옳다. 신자들의 친교와 유대는 기독교 생활에 부합하며 소외되거나 선교가 어려운 상황 또는 혹독한 환경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무적인 힘을 준다. 교회연합일치운동은 타교파, 이웃교단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마지막 분단민족 사회에 교회가 하나 되는 모범을 보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들이 감정의 예각(銳角)을 무디게 하여 조속히 하나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합과 일치라는 원칙을 유지하는 운동이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게 한다고 말한다.

 

진보계 교회연합일치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교회 간의 신학적 차이가 연합과 일치를 거부할 만큼 본질적이고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당대의 신학이 교리논쟁에서 벗어나 다원화 사회에서 대화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학문 활동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이 복음의 해석 작업이므로 항상 새롭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자는 것이다. 함께 부름을 입었으므로 홀로 옳음을 주장하거나 남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기독교 신학의 미진한 부분을 창조적으로 보완하고 개선해 나가자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존의 신앙고백, 교리, 신학의 정박지(碇泊地)를 버리고 새로운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나설 것을 재촉한다.

 

대사회·대정부 활동과 구제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회들의 연합기구와 연합회 활동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계열의 교회연합일치운동의 궁극의 목표는 교단통합이다. 다양한 교리와 신학을 용납하는 연합활동을 하다가 종국에 단일 교단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다양한 신학을 수용하고, 모든 종류의 종교이론을 포괄하는 단일화를 목표로 삼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소중하게 여긴 교회의 표지(標識)인 하나님의 말씀(성경, 교리)은 뒷전으로 밀어내고 친교, 성찬, 사회참여 성격의 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다. ‘개인구원, 사회구원을 각기 외치면서 교회가 진보, 보수로 나뉘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이라고 하면 진보적 교회와 보수적 교회가 일치하려면 타협을 해야 한다. 보수계 교회들이 성경만이 유일한 계시이다고 하는 태도와 성경이 무오하다고 하는 문자주의 시각을 버려야 일치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가 합하면 자유주의 기독교가 된다고 역설한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강과 탁류가 흐르는 강이 합쳐지면 탁류의 강이 된다. 탁류의 강에 뛰어들어 물을 정화하면 될 게 아닌가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연합일치 작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주도하고 교회가 정통신앙으로 선회하도록 하면 되지 않는가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이상이다. 미국과 유럽의 교회들이 좌경화의 길을 들어설 때만 해도 절대 다수의 신자들은 유서 깊은 기독교의 복음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교단의 신앙고백, 교리, 신학의 좌경화를 걱정한 신자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교회는 그들이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달았다. 다수의 신자들이 복음적,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류 교회들은 생명력을 상실했고 썰렁한 거미줄처진 폐광과 같이 되었다. 좌경화 흐름을 중단시키지 못했다.

 

저자는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고 에큐메니칼운동과 타종교와의 대화에 열성을 보여 온 유럽과 미국과 대양주의 교회들은 극도로 쇠락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교단과 일치하는 것은 죽음과 키스하는 것과 같고,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와 달콤한 밀월을 즐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당분간은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옷을 입고 화려한 주택에 살고 많은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죽은 목숨에 지나지 않는다. 당분간 생명은 지연되고 밀월을 즐길 수 있으나 죽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추풍낙엽처럼 쇠락하는 유럽과 미국의 주류 교회들의 실패는 한국교회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역사 교훈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원수를 대적하고 진리로 허리를 동이지 않으면 추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교리, 교리교육에 대한 무관심이다. 설교는 진리체계를 제시하기보다는 축복, 평안, 윤리, 인간관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런 풍토에서 진행되는 교회연합일치운동은 교리무관심주의를 조장하고, 교파 간에 신앙고백의 차이가 없다고 하는 신앙무차별주의를 심는다. 성경에 토대를 둔 역사적 기독교와 상대주의와 주관주의에 바탕을 둔 새로운 기독교가 상호보완적으로 병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은 둔화되고, 교회의 생명을 앗아가는 해독과 위험에 대한 경계심은 허물어지고 있다. 신조, 신앙고백, 신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는 교회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생명을 앗아간다. 교리를 소홀히 하는 무분별한 교회연합일치운동은 복으로 위장된 저주라고 한다.

 

저자는 총 18장에 걸쳐 현대신학과 현대기독교운동을 논한다. 생명력 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 종교다원주의의 도전, 한국교회와 종교다원주의 운동, WCC의 초혼제와 성령, 에큐메니칼 운동과 하나님의 선교,’ WCC와 종교다원주의 등 세계교회일치운동을 다룬다. 한국교회 연합일치운동, 교단장협의회와 한국장로교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와 한국교회의 분열 등 한국교회 에큐메니칼운동을 다룬다. 나아가 칼빈은 에큐메니스트인가?, 신약성경이 말하는 에큐메니즘을 논한다. 이어서 미국장로교회 안의 신학 흐름과 분열 역사를 다룬다. 미국북장로교회의 신학논쟁, 프린스톤신학교의 좌경화, 매카트니와 메이첸의 선택을 논한다. 그리고 사도신경이면 충분한가?, 기독교와 자유주의, 성경관과 신학적 정체성, 성공적인 교회일치를 위한 선결 과제를 다룬다.

 

역사신학자 존 리이스(John Leith)는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의 구성원이며 리치모든 유니온신학교에서 은퇴한 역사신학자이다. 리이스는 자신이 봉사하고 있는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위기가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답변을 신약성경처럼 분명하게 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년에 지켜본 미합중국장로교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토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시행해 온 신학교육이 낳은 재앙이라고 한다. 리이스는 미국합중국장로교회 강단에서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미국인들, 특히 젊은 세대의 미국인들이 가장 듣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신학교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복음선포의 열정을 회복하면, 교회의 부흥은 시작될 것이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상 하나이다. 하나님이 부여한 지상 교회의 영적, 내적 통일성은 외적 하나 됨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신앙고백이 다르지 않은 교단들의 단일화는 시급한 과제이다. 편파심·파당· 배타의식·독선·완전주의·우월감·장자논리·외형주의·지방주의·기복주의·물량주의·교권주의·교회교(Churchanity) 습성은 교회의 발전과 하나 됨을 해친다. 분열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여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신앙고백적으로 일치하는 점을 먼저 신학적으로 확인하고, 서로의 삶의 세계를 이해, 존중하면서 신학, 교리, 생활이 같은 교회들끼리 먼저 합하고, 차츰 그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대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리, 교리, 하나님의 말씀에는 등지고 거짓교사, 세상지혜, 이단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고 있다. 교파 통합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지극히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앙고백의 일치(Confessional Unity)를 조건으로 삼는 유서 깊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를 지향하면서 교회 외형의 일치(Ecclesiastical Unity)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결합될 수 없는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진리 중심의 에큐메니칼운동을 펼쳤고, 로마가톨릭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 등은 교회 외형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영적인 일치가 교회의 외형의 단일화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다. 기독교인들의 교제와 연합과 일치 활동은 효과적인 복음전도를 위해 언제나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 안에서 일치가 선행되지 않는 에큐메니칼 활동은 위험천만하다. 다원주의적인 하나 됨은 그리스도 교회의 내적 통일을 해친다. 정체성과 생명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된다.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 교리를 부정하거나 고백하지 않는 자들을 제재하지 않는 교회나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교회와 외형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유럽과 미국 교회들처럼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면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에큐메니칼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하나 됨의 토대인 최소한의 조건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말씀교리에 대한 신앙고백의 일치가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는다. 교회의 신앙고백적 통일성을 보전하는 것은 성경에 바탕을 둔 순수한 신앙에 대한 공적인 증거이다. 바울이 가르치고, 어거스틴이 강조하고,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진리 안에서 일치를 도모할 때 진정한 의미의 에큐메니칼운동은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개혁주의 용어로 말하자면 교회의 연합일치 활동도 성경이 제시하는 만큼 생각하고, 말하는 데까지 걸어가며, 제한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개인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을 성경적으로 변경시키는 일에 이바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교회의 신학은 그것을 주도하는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과 그 교회의 신학전통이 무엇을 고백하는가에 크게 좌우된다. 미국북장로교회(UPCUSA)의 좌경화 과정이 보여준 것처럼 교회의 신앙노선을 결정하는 신학논쟁은 별들의 전쟁이며 일반 신자들이 고백하는 것은 교단 신학의 방향 설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는 복음주의계, 개혁신학계 목회자들이 진리 안에서 연합을 도모해야 한다고 하는 단순한 조건조차 고려하지 않는 것을 지탄한다. 오히려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하자고 말하기도 한다. 탁류의 강을 정화하기는커녕 그 오염된 물결에 휩쓸리는 경향을 보인다. 변하는 것은 보수계 교회들뿐이며, 이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점차 자유주의 기독교를 따라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회연합일치운동 기구가 대정부·대사회 활동·구제 등의 일을 하는 것이 목표라면 화이부동(和而不同: 어울리면서도 동화되지 않음)의 자세로 협조하고 동참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공동으로 번역하는 등, 신앙고백, 교리,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사안별로 협력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불교 승려와 손을 맞잡고 남북통일, 민족문제, 사회정의를 논해야 하며, 이슬람교 사제와 머리를 맞대고 종교 간의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대화를 해야 하는 마당에 기독교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선한 일 하는 것을 마다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는 교회연합일치운동은 이와 차원이 다르다. 한국교회의 교회연합 일치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교단 통합, 곧 기구 단일화이다.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 협의회분열된 교회들의 연합[] 한국교회의 궁극적인 일치를 지향한다고 천명한다. 교회 외형의 획일성(Uniformity)을 추구하고 있다. 신학은 교회의 생명이며 신앙공동체의 신앙을 결정짓는다. 상대주의와 종교혼합주의로 치닫는 이른바 세계교회의 흐름에 따라가는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은 진리에 역행하고 있다.

 

기독교의 고유한 진리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포기하고, 타종교와의 만남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는 대화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배반 행위이다.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서 번성한 경교(景敎: Nestorianism)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도 없어졌다. 기독교의 고유한 복음을 양보하고 토착화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교회들이 많고 기독교인들이 많던 소아시아 지역은 현재 기독교 신앙의 불모지가 되었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이대로 나가다가는, 교리와 신앙고백에 무관한 상태가 계속되면, 경교나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한다. 저자가 예견했던 것처럼 2010년부터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축되고, 신학대학원 지원자들이 급감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 젊은이들이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한국교회의 퇴락 현상은 매우 현저하다.

 

저자는 유서 깊은 기독교 신학과 자유주의 기독교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관계가 아니라고 한다. 두 그룹은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상반되는 신념체계·사고 패러다임·신앙이해를 가지고 있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를 위협하는 어두운 세력에 대한 경계심과 저항력을 앗아간다.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신학의 신앙고백이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하는 발상을 심는다. 역사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가 상호보완적으로 병존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기독교의 핵심진리조차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풍토를 조성한다.

 

천둥이 치면 만물이 응하는 것처럼 함께 어울리다보면 남의 의견을 무의식 중에 따라갈 수 있다.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을 주도하는 복음주의계 에큐메니스트들은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자고 주창하는 반면에 자신들이 받은 신앙고백적 바탕에 대한 확신은 포기한 듯하다. 화이부동이 부화뇌동(附和雷同)으로 발전할 수 있고,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적인 언동으로 종교의 도를 어지럽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성경적 진리를 고백하는 교회라면 이미 성령 안에서 하나이다.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신약성경은 하나 됨을 조직체의 단일화로 이해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영적인 몸을 구성하고 있어도 외견상으로는 하나 되지 못할 수도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를 위해 각기 다른 길을 따랐지만 영적으로는 여전히 하나였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러 가지 이유와 부득이한 사정과 견해의 차이로 의견대립을 보이다가 나누어지기도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유지해야 하는 일치는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 교리에 대한 신앙고백의 하나 됨이다. 이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외형적인 교회일치를 도모할 필요는 없다. 교회는 사회기관이나 일반 세상 조직과 다르다. 힘의 논리나 조직에 전적인 신뢰를 두는 교회연합과 일치는 성공할 수 없다.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신앙공동체의 일치성을 깨뜨리는 것은 언제나 반()기독교 신학, 자유주의 신학, 거짓교사의 가르침이다. 이것들은 화평, 연합, 일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 교회 안에 갈등을 낳고 분열을 조장한다.

 

저자는 에큐메니칼운동 논의에서 엘리야, 아모스, 예레미야, 요한, 바울, 어거스틴, 존 위클리프, 마틴 루터, 존 칼빈은 진리파수의 사명에 목숨을 걸었던 신앙 선배들을 언급한다. 진리가 공격을 받고, 교회가 죽음의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데도, 교회가 사활이 걸린 중대한 신학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하고, 신학자들이 교회 권력자들의 비호를 기대하면서 침묵하는 것은 진리를 팔아 화평이라는 팥죽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팔은 분명한 소리를 낼 때에만 가치를 가진다고 말한다. 침묵은 인정, 동의를 뜻한다고 한다. 칼빈은 나바르의 여왕 마가렛에게 보낸 편지에서 개는 그 주인이 공격을 받을 때 짖는다. 만일 하나님의 진리가 공격을 받는데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침묵한다면 나는 개만도 못한 겁쟁이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2012년에 <신학충돌: 기독교와 WCC>, 2013년에 <신학충돌 II: 한국교회와 WCC>(2013)라는 주목받은 책들을 각각 출간했다. WCC가 부산에서 제10차 총회를 앞두고 WCC 에큐메니칼 운동을 분석하여 그 실상을 소상히 알리는 책이다. 그러나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2005)WCC 부산총회와 무관하게, 이 국제 대회가 기획된 2009년 보다 훨씬 이전에 저술되었다. 동료 신학자들이 무분별하게 WCC계 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하고 있을 때, 저자는 자기 시대의 필요에 충실한 학문작업을 해 냈다. 신학자, 교회를 보호하고 변호하는 학자다운 거보를 보였다. 저자는 이러한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신학대학원에서 여러해 <에큐메닉스>(Ecumenics) 과목을 개설했다. 그는 자기 시대의 교회의 필요에 즉각적인 답을 제시한 선견자이다.


유성근 목사, 리포르만다 상임연구원, 현 천곡제일교회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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