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이단자들
최덕성,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를 읽고/ 이용규 박사
1. 들어가는 말
현대교회 주변에는 교회들이 진리 위에 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다양한 이단들이 존재한다. 이단은 교회 안에도 있다.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태도를 취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형태의 이단도 있다. 한국교회는 2010년대에 이단 문제로 시끄러웠다. 이단들이 난무하고, 이단감별사들이 설쳐대던 시기의 최대의 신학적 과제는 이단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 최덕성 교수는 자기 시대의 교회의 필요를 채우는 신학자이다.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을 저술하여 이단 소용돌이 속에 있는 한국교회를 진리 안에 머물게 했다. 책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이단으로 정죄 당하고 순교한 위대한 증인들도 많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단이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이단이 주는 피해를 막을 수 있는가를 논한다. 이단 판별의 주체는 교회이며, 기존은 성경이지만, 교회가 명백하게 성경에 불일치하는 결정을 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소개한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 각 장마다 위대한 이단자들 곧 상을 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인들이 걸어온 고통스런 삶과 그들의 주요 신학적 사상과 교훈을 그려내고 있다. 제1부는 바울에서 종교개혁전야까지, 제2부는 마르틴 루터에서 주기철까지, 제3부는 이단 패러독스라는 제목 아래서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 “중세교회의 이단정죄: 자가당착, 적반하장,” “이단판별의 주체와 기준,” “이단 바로 보기”라는 논문을 담는다. 맺음말의에서 이단을 판별한 “신학자회의 구성”을 제안한다.
2. 역사가의 눈
저자의 머리말은 자신이 이 책 전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요점적으로 소개한다. 진리는 히말라야의 거봉처럼 언제나 온전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있다. 인간의 운무가 걷히는 짧은 순간에 그 비경을 드러낸다. 기독교 진리는 바깥세계에서 인간세계로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결과다. 치열한 이단논쟁의 열매이기도 하다. 이단논쟁은 진리를 조리 있게 이해하도록 돕고, 신학논의, 신학충돌을 국경 너머로 확산시킨다. 이단 탄압과 박해는 종종 평범한 인물을 불굴의 투사로 만들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킨다고 한다.
기독교 정통신앙은 이단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이단이 도전할 때 잠자던 교회는 분연히 일어나 대응했다. 성경과 논리로 항변하고 맞섰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성경의 핵심 진리들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정통신앙 교리를 정식화했다. 아름다운 진주가 조개 안에서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각고의 제작 과정을 거쳐 화려한 보석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진주를 버리고 조개껍데기를 얻겠다는 생각으로는 진리를 정면으로 대할 수 없다고 한다.
역사는 대부분 기득권자, 승자, 정복자의 기록이다. 권력 장악자가 자기의 관점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건을 해석하고 재구성하여 기술한다. 패배자, 피지배자는 자신의 역사에 대해 할 말을 잃는다. 역사가의 눈길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권좌의 주인공이 바뀌면 새 관점으로 역사를 읽고 재해석, 재구성하는 일이 가능해 진다. 성경과 진리성 중심의 시각을 가지면 기득권 집단이 편협하게 기록한 역사의 허점들이 보인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이 기독교사상사를 전공하고 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과 교의학을 가르쳐 오는 동안 억울하게 희생당한 순교자들, 이단으로 정죄당한 위대한 증인들의 이야기를 엮고 싶었다고 한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억울한 일을 당해 보면 거룩, 순결, 정통이라는 가면을 쓴 종교인들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당한 충성스런 증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다수파, 승리자, 기득권자의 관점이 아니라 피해자, 소수파, 진리수호자의 시각으로 역사를 균형 있게, 공정하게 파악하는 눈이 비로소 생긴다고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이 책이 소개하는 위대한 이단자들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선 정통신앙인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쳤다. 복음진리를 고백, 파수하려고 자기 시대의 신앙적 격랑을 온 몸으로 헤쳐 나갔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정치적 힘에 굴복하지 않았다. 핍박과 고문을 달게 받았다.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결박을 당하여 감옥에 갇혔다.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었다.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기도 했다”(히 11: 36-37). 맹렬한 불꽃더미에서 재로 산화되었다. 순교자의 반열에 든 이들은 하나님이 마련한 더 좋은 것, 영원한 것, 영광스런 것을 상급으로 받았다고 한다.
교회는 종종 상을 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인들에게 벌을 주었다. 진리 파수꾼들을 공격하고 박해했다. 처형, 파면, 정직이라는 끔직한 고통을 주었다. 로마교회, 로마가톨릭교회,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다 마찬가지로 성경과 성경적 진리성이 아니라 힘의 논리와 당파적 시각으로 이단정죄와 처벌을 하기도 했다. 교회, 총회, 공의회는 실수했고, 범죄를 저질러 왔다. 교회의 이단정죄는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 성경과 진리성에 충실한 결정만이 유효하다. 기독인에게는 성경에 명백하게 위반되는 교회의 결정과 가르침에 순복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한다.
이 책이 소개하는 위대한 이단자들은 진리가 평화공존 형태로 존재할 수 없음을 교훈한다.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는 교회를 해치는 맹독이다. 성경과 성경적 진리성은 언제나 진리판별의 기준이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여 하나님의 백성 또는 같은 신앙고백공동체의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 믿음의 대상이 누구이며, 그 대상이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신앙고백이 중요함을 알려준다고 한다.
한국교회는 이단들의 악의적인 공격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있다. 이단들은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덤벼들고 있다. 이단방지 목적의 강력하고 효율적이고 통합적인 대응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고조되어 있는 이단 시비 과정에서 가라지를 뽑으려다 자칫 알곡까지 제거할 수 있다. 가짜 이단과 진짜 이단, 지옥 갈 이단자와 천국 갈 이단자를 한 목록에 올려놓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가? 정치적, 교권적, 감정적, 자파 이기주의적 요인들 때문에 정죄당한 이단자가 없는지 둘러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형제자매들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한 자들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지 않는다고 한다.
저저는 이 책이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구원의 방주, 진리의 보루, 복음의 요람으로 건실하게 자리 잡고 흥왕(興旺)하는 데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한다, 무분별한 정통과 이단 판별과 이단시비로 저하된 교회의 권위와 사회적 신인도 향상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3. 내용 요약
제1부는 ‘이단의 괴수’ 바울을 시작으로 플라비우스 저스틴, 아타나시우스, 피터 왈도, 리용의 빈자들, 영국의 위클리프, 롤라드 신앙 운동, 체코 종교 개혁의 선구자 얀 후스, 피렌체의 기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삶과 신앙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한다. 위대한 이단자들이 거짓과 권력의 횡포에 의해 죽어간 가슴 아픈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그들의 용기와 순교가 진리로 가는 큰 길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 밝힌다.
프랑스 남부 리용 출신의 왈도(Waldo of Lyons)는 저자가 그려내는 대표적인 억울한 이단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의 가르침에 따라 경건하게 살면서 설교와 전도 활동을 했다. 자기의 재산과 명예를 포기하고 탁발수도사로 유럽 전역을 다니며 복음 진리를 설교하고 사람들에게 사도적 청빈의 삶을 권장했다. 그러나 부패한 교회는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적대시하고 이단으로 정죄했다.
저자는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단으로 단죄한 이유에 대해 정확히 언급한다. 왈도파 신앙운동의 장점들이 기존 교회의 문제점들이 드러나므로 체제 붕괴의 위기를 가져와 기득권 유지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새로운 신앙운동이 기존 세력에 위기를 가져오면서 점차 확산되자 부패한 로마교회의 신학자들과 사제들은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의 활동을 엄격히 통제 했다고 한다. 저자는 왈도와 왈도파 신앙운동에 대한 교회의 이단 정죄가 자신의 불의, 결함, 그릇됨을 합리화하려고 공교하게 구축한 비굴한 자기방어기재를 발동시킨 결과였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왈도파 교회가 분리주의 집단인가 하고 질문하면서 성경과 프로테스탄트 관점으로 보면 왈도파 교회야말로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신앙공동체였다고 설명한다. 덧붙여서 왈도파 운동과 나치독일치하의 독일고백운동과 일제말기의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주지는 일치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한국교회사학자들 가운데 독일고백교회는 치하하면서 일제말기의 한국의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를 분리주의 운동으로 매도하는 자들의 관점은 기득권과 힘의 논리로 역사를 평가하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시각과 일치한다고 논증한다.
저자는 종교개혁의 새벽별인 영국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신앙과 삶을 소상히 설명한다. 위클리프의 신학과 그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회개혁운동의 등장을 이해하려면 교회사 지식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신앙과 행위의 최종 권위가 전통이나 교황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했다. 참 교회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황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고 했다. 성찬식 축성 때 빵과 포도주가 변한다는 화체설은 미신이라고 했다. 저자는 이러한 발상이 로마교회의 체제와 구조를 허물 수 있는 강력한 도전이었다고 설명한다. 위클리프의 이상은 15세기의 후스파 교회 개혁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16세기 종교개혁운동에 영감을 주었다고 밝힌다.
눈여겨 볼 중요한 인물은 얀 후스(Jan Hus)이다. 보헤미아 지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솟아오른 교회개혁운동의 기수였다. 후스의 관심 주제는 주로 교회론이었다. 교회를 눈에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했다. 후스를 못마땅하게 여긴 당신의 부패한 교회는 사도적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보헤미아의 사제 후스를 이단자로 몰아 화형시켰다. 저자는 후스가 당한 고통과 불행의 의미는 독일 비텐베르크의 어거스틴 수도단 소속 사제 마르틴 루터가 불을 지핀 16세기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가 나오기까지 알려지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후스가 순교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후스는 루터의 교회개혁운동을 성공하도록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었다고 한다.
기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도 참된 신앙을 향한 순례의 인생을 살아갔지만 결국 부패한 교회에 의해 화형당하고 말았다. 저자는 사보나롤라의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사보나롤라가 죽은 다음날 몇 사람의 여인들이 화형 장소에 모여 기도했다.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그곳에 꽃을 갖다 놓았다. 화가 라파엘로는 사보나롤라가 죽은 12년 뒤에 교황 율리오 2세(재위 1503-1513)의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렸다. 새 그림에 설교자 사보나롤라를 성인들의 대열에 포함시켰다. 교황 베네딕투스 14세(재위 1740-1758)는 피렌체의 설교자(사보나롤라)를 성인 자격을 갖춘 인물로 간주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모순은 역사 속의 부패한 교회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말해준다고 논증하고 있다.
제2부는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에서 시작하여 쯔빙글리, 존 칼빈, 재세례파, 토마스 크랜머, 20세기의 신학자 메이첸과 프린스턴 신학자들, 마지막으로 주기철 목사를 다룬다.
저자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대한 치밀한 역사적 논증과 함께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간결한 문제로 서술한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루터의 단독 작품이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이다. 종교개혁전야까지의 중세후기의 교회개혁자들의 신념, 확신, 헌신, 희생, 순교 위에서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전개되었다고 설명한다.
존 칼빈(John Calvin)의 회심에 대해, 저자는 그의 회심이 ‘갑작스런 일’이었다고 말하지만 준비과정이 배제된 사건은 아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교회라는 외형을 갖추고 있어도 참 교회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님의 말씀을 짓밟고 순수한 말씀 선포를 파괴하는 종교기구는 참 교회가 아니다. 칼빈은 교회를 한 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모든 기독인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사탄이 더럽히고 부패시킨 교황의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 분리의 책임은 프로테스탄트에게 있지 않다. 저자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을 더 이상 그 교회 안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쫓아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칼빈이 교회분열의 능동적인 원인을 종교개혁자들과 프로테스탄트운동에 돌리는 교황 교회의 시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고 지적한다.
영국의 ‘위대한 이단자’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온갖 박해 속에서 목숨을 걸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 낸 윌리엄 틴데일의 이야기도 나온다. 영국에 없는 단어를 만들면서까지 히브리 원전과 헬라 원전을 영어 성경으로 번역한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억압의 분위기가 끝나고 제임스 1세가 왕명으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게 한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 하나만 해도 역사 속에 허다한 우여곡절과 순교, 헌신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성경을 우리말로 읽게 해 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헌신, 투쟁, 노력에 감사하게 된다.
주기철 목사(1897-1944)는 웅천교회의 당회장 이기선 목사(김해교회)의 영향을 받은 개혁신앙과 정통신학을 가진 장로교인이었고 성경과 하나님의 절대 권위를 중요시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굳센 믿음과 그리스도의 죽음, 십자가 신학에 근거했지만 신사참배 거부로 결국 순교했다. 그러나 당시 배교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한국교회는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의 목사직을 파면했다. 그러나 저자는 한국교회가 저지른 범죄와 악행은 도리어 주기철을 영광스러운 순교자 반열에 올리고 그를 위대한 신앙인으로 등장시켰다고 분석한다.
4. 이단 패러독스
이 책의 제3부는 이단과 관련된 중요한 논문들을 수록한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2)의 "이단 관용정신"이라는 논제(thesis)는 진리를 외면하고 감성적으로 타협하고 포용하는 경향에 대한 신학사적 반성을 요구한다. 감성주의 신학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정통신학을 미혹하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고 한다.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catholic spirit, generosity)은 독일의 급진적 경건주의 교회사가인 고트프리드 아놀드의 이단 해석과 일치한다. 웨슬리는 몬타누스, 펠라기우스, 세르베투스를 이단자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삶의 거룩함, 경건성, 성결성을 이단판별의 기준으로 삼는다. 자기와 비슷하거나 메소디스트운동에 이로운 면을 가진 이단 집단에게는 마음을 연다. 삶이 거룩하고 귀신을 내쫓는다면, 견해(opinion)가 다른 자들과 얼마든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교리적 주장, 예배 형태, 교회나 회중에 대한 견해가 어떠하든지, 관용정신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이 경건주의가 빠지는 동일한 오류 곧 편파성, 주관성, 성령주의―열광주의 함정에 매몰되었다고 지적한다.
웨슬리는 잠자는 교회, 제도와 조직 안에 가두어져 있는 교회를 일깨우려고 구원과 성결의 중요성을 외쳤다. 기독교 열광주의를 고무시키고 새로운 교회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이단 관용정신과 이단옹호 태도는 자신이 이단자처럼 취급당하는 데 대한 방어적 동기에서 나온 점을 고려해도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혼합주의로 이끄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기독인의 관심을 성경적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며, 교회의 진리의 민감성을 앗아간다고 말한다.
중세교회의 이단정죄는 자가당착이며 적반하장이었다. 서양 중세기 이단들은 성격에 따라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문화·감정·교권·정치적 동기로 정죄당한 이단이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서로를 향하여 이단이라 단죄했다. 중세교회는 기독교회 전체를 이단으로 함몰시키는 자가당착의 광대놀이를 연출했다. 둘째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이단이다. 바울당원주의자들, 보고밀주의자들, 카타리파 등이다. 엑크하르트의 신비주의, 피오르의 요아킴의 종말론과 함께, 이들의 이단사상은 부패한 교회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셋째는 신앙과 행위의 ‘권위’와 관련된 전도자형-학자형 이단이다. 중세 후기에 등장한 이단 아닌 이단들은 성경이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저자는 교회가 교회개혁가들을 이단자로 몰아 정죄하고 처형하는 자가당착·적반하장의 역사를 되풀이 했다고 지적한다.
중세교회의 이단정죄에는 교회의 결정을 절대시하는 소위 교회교(Churchanity) 관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 신념은 교회로 하여금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새로운 세력에 대항하는 이단들에 대하여 강력한 박멸운동을 펼치게 했다. 여기에 무지, 오해, 적대감, 기존 체제 보호, 감정적 동기, 괘씸죄 등이 가세했다. 그 결과로 교회는 이단자만이 아니라 무죄한 자들과 성경적 진리를 고백하는 자들까지 이단자로 정죄하여 죽이는 오류를 범했다. 교회는 당대의 최대의 살인집단이었다. 저자는 복음에 대한 무지, 진리부재, 부조리, 부패, 폭력이 이단의 흥기와 교회의 폭력을 독려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운동은 중세후기의 이단자, 이단운동을 발판삼아 지어진 장려한 건축물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을 이단자로 여긴다. 보름스의회(1521)는 마르틴 루터를 이단자로 규정했다. 트렌트공의회(1545-1563)는 의화론(義化論)을 포함한 몇 가지 교리를 확정하고 프로테스탄트 신학사상을 정죄했다. 존 칼빈은 중세 후기 로마교회의 연장인 로마가톨릭교회를 이단시했다. 그 교회를 우상숭배 집단, 거짓교회, 사탄이 더럽히고 부패시킨 교회제도라고 비판했다. 참 교회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조들이 파괴되지 않고 유지된 곳에만 존재하므로, 그 교회 곧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일이라고 했다. 중세교회의 이단정죄사는 ‘교회’가 특정 그룹을 이단이라 단죄했어도 그 공동체가 이단이 아닐 수 있음을 말한다. 이단판별의 주체와 규범 또는 기준에 대한 비평적 검토를 재촉한다.
‘이단판별의 주체와 기준’이라는 저자의 논문은 특별한 주목을 요구한다. 교회가 이단판별의 주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교회가 잘못된 결정을 할 경우가 없지 않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교회(공의회, 총회, 대회, 노회, 당회 포함)가 과오를 범할 가능성이 있고 또 범해 왔음을 지적하고, 교회라고 하는 조직체의 결정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신앙과 생활에 도움을 주는 보조 수단이라고 한다.
사도시대 이후 교회의 모든 총회(Synod)와 공의회(Council)는, 보편공의회이든 지역회의든지 간에, 과오를 범할 수 있으며, 여러 번 과오를 범했다. 그러므로 교회회의의 결정을 신앙과 생활의 법칙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에 도움을 주는 보조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
저자는 위대한 이단자들의 발자취는 총회, 공의회라는 교회 조직체가 오류, 실수, 범죄를 저질러 왔음을 확인시켜준다고 한다. 교회는 종종 상을 주어야 할 자에게 벌을 주었다. 정통신앙인을 화형에 처했다. 목사직을 면직, 정직시켜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나라 사역 활동을 하지 못하게 했다. 재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재판석에 앉아서 의로운 사람들을 정죄하고 이단으로 내몰고 박해했다. 교회는 끔직한 범죄를 저질러왔다고 한다.
네덜란드개혁교회는 중세교회가 저지른 실수를 방지하려고 교회헌법에 ‘자유’ 조항을 도입했다. 교회헌법 제31조는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에 ‘명백하게’ 위반되는 무엇을 결정하고 시행을 요구하거나 강요할 때 교인은 그것에서 자유(liberation)할 수 있음을 명시한다. 교회의 결정과 가르침이 성경과 불일치하는 경우, 기독인은 우선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할 의무를 가진다는 것이다. 네덜란드개혁교회(자유)는 이 조항에 근거하여 1940년대에 독자적인 교회로 출발했다. 이 그룹은 “31조파 개혁교회”로 일컬어진다. 저자는 장로교회 정치원리는 ‘양심의 자유’와 ‘교회의 자유 원칙’을 서술하면서 교회의 결정이 절대적일 수 없음을 표방한다.
저자는 “이단 바로보기”라는 논문에서 구원받을 이단과 지옥 갈 이단을 구분한다. 정치적 동기와 괘씸죄 등으로 이단자로 정죄된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난 이단자들을 구분한다. 이단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없지 않다고 한다. ‘구원받는 이단’은 ‘가짜 이단’이다. 교회에 의해 정치적, 교권적, 감정적 이유로 이단으로 단죄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역사적 기독교에 충실한 정통신앙을 고백한다.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를 믿는다. 구원받는 이단자는 인간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교회사의 모퉁이마다 교회에 의해 이단자로 내몰려 억울하게 희생당한 자들의 핏자국이 얼룩져 있다. 교회는 왈도, 위클리프, 후스처럼 성경과 성경적 진리성에 충실한 이단자들의 흘린 피와 고통 위에 세워졌다. 종종 선량한 기독인들을 악인으로 단죄하고 처형했다. 이단자 누명을 붙여 그들의 명예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빼앗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교회사를 배운 지식인들이 함부로 이단 정죄에 앞장 서는 점이다. 이단 진위 여부를 생각해 보지 않고, 또 어느 특정 교회가 이단이라 단죄했다고 하여 ‘진짜 이단자’라고 믿어버림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한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정통과 이단을 판별하는 한국교회 ‘신학자회의’(Theologian Council) 구성을 제안한다. 교회들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공의회(Council) 성격의 신학자 기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들,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확실하게 믿고 고백하면서 사심이 없고 공정하고 학문적인 판별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신학자회의는 한국교회의 갈등을 줄이고 실추된 권위 회복과 위상 향상에 이바지할 것이다.
신학자회의는 당사자와 충분한 의사소통을 하고, 사실 확인을 한 뒤에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갖도록 하고 오류 또는 미숙한 점들을 지적하여 고치도록 사랑으로 지도할 수 있다. 신학자회의의 지도를 받지 않고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그 사실을 당사자가 속한 교단에 통보하고 공적인 언론매체를 거쳐 교계에 공개적으로 전모를 알릴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단 시비와 관련된 한국교회의 최대 현안을 세 가지로 압축하여 소개한다. 첫째, 사랑의 태도이다. 이단판별 과정에도 사랑의 원칙이 중요하다. 형제자매에게 원망 듣는 일을 조속히 해결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제한되지 않는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 모든 인류가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만민보편구원주의에는 관용도 사랑도 베풀지 않는다. 둘째, 이단판단의 주체다운 권위와 위상을 높이는 일이다. 교회의 이단정죄가 호소력을 가지도록, 신중하고 철저하게 심의를 진행한다. 셋째, 이단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범 교단 차원의 기구 설립에 협력한다.
저자는 공의회 성격을 지닌 ‘신학자회의’ 구성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시대적 과제이라고 한다. 이단의 악영향을 막고, 교회를 한 단계 향상시킬 수 있는 비책이며, 성경과 성경적 진리성의 관점으로 교회와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한다.
5. 평가
이 책은 참된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죽어간‘위대한 이단자들’의 삶과 신앙을 한 주제로 파악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참된 교회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논평자가 보기에 이 책에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위대한 이단자들’의 삶과 신학을 당시 상황을 입체적이면서 생생하게 평이하면서도 간결한 언어와 문제로 담아내고 있다. 신학적 깊이를 신뢰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큰 특징일 것이다. 바로 그런 점이 이 책의 무거운 주제를 일반 성도들도 읽고 감동과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둘째, 세계교회사에서 종종 성경과 성경적 진리성이 아니라 힘의 논리와 당파적 시각으로 상을 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인들에게 벌을 주었던 사례들을 통해서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교회사를 통해 훨씬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눈을 뜨게 해 준다.
셋째,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 제하의 내용과 을 통해서 감성주의 신학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정통신학을 미혹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힌다. 그리고 오늘날 로마가톨릭과 세계교회협의회가 표방하는 종교다원주의와 만인보편구원주의 주장의 이단사설을 잘 지적하고 있다.
넷째, 한국에서 신사참배 거부자들이 성경과 진리성에 충실하려고 당한 고난의 삶을 분리주의자라고 정죄한 부당성을 다른 ‘위대한 이단자’들의 삶과 나란히 두고서 견주어 분석한다.
이 책은 위대한 이단자들의 삶과 신학을 분석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시대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종교 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사람들의 고난과 순교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가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한다. 종교개혁의 당위성과 위대한 거성들의 발자취를 따라 기독인에게는 성경에 명백하게 위반되는 교회의 결정과 가르침에 순복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잘 지적하고 있다.
진리가 진리로 인정받지 못하고 이단으로 정죄당한 수많은 믿음의 선각자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인들에게 위대한 이단자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야 할 이야기이다. 저자는 과거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이단 판별의 주체와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부당하게 정죄당한 이단자가 없도록 ‘한국교회 신학자회의’ 구성을 제안한다. 이는 진리를 외면하며 타협하고 포용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상호간의 진지한 대화와 인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책을 쓴 저자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문제의식과 논증은 후학들에게 신학적 역사 해석에 대한 좋은 기틀을 마련해 준다.
▶ 이용규 박사는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고신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신학자 판넨베르크의 사상에 대한 학위 논문을 쓰고 박사 학위(Ph.D.)를 취득했다. 경남 고성에서 목회와 저술활동을 하고,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교의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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