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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은사,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존 맥아더 목사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

 

방언은 성경의 세책인 마가복음(16:17), 사도행전(2, 10, 19장), 고린도전서(12-14장)에 언급되어 있다. 이 책의 8장에서(무질서한 은사주의, 부흥과개혁사) 우리는 사도행전의 본문들을 살펴보면서 사도행전은 일차적으로 역사적인 이야기이며 사도행전이 이야기하는 비상하고 기적적인 사건들은 교회 시대 전체의 규범적 패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 마가복음 16장 17절 본문은 단순히 방언을 하나의 사도적 표적으로 언급한다.(4장을보라.) 따라서 교회에서 방언의 역할에 대해 말해 주는 유일한 성경본문은 고린도전서 12-14장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는 것을 꾸짖기 위해 이 본문을 기록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바울이 말한 대부분의 내용은 방언의 사용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바울은 은사는 어떻게 임하며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은사를 정하셨는가 하는 문제 등 영적인 은사에 대해 일반적으로 논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과 방언통역 은사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지침을 제시했다. 이 두 장의 가운데 위치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은사를 사용하는 올바른 동기인 사랑에 대해 논했다. 보통 문맥과 동떨어진 채 다루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송가라고만 일컬어져 왔다. 이 장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최상의문학적 성과이며 참된 사랑이라는 주제를 심오하고 아름답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장은 무엇보다 방언의 질적 저하에 대한 바울의 논의에서 중요한 핵심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바울은 사랑의 탁월성을 주장한다. 1절은 기적의 언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이기적으로 사랑 없이 사용하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아가페(agape)사랑의 특징을 이루는 자기희생적 관심으로 서로를 섬기는 일보다는 자기를 높이거나 황홀한 체험을 즐기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바울은 이 장을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라는 말로 시작한다. “방언(tongues)”이라는 말은 글로싸(glossa)라는 헬라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혀를 뜻하는 영어 단어 ‘텅(tongue)'처럼 신체 기관을 지칭할 수도 있고 언어를 지칭할 수도 있다. 바울도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했다는 점에 주목하라.(고전14:18). 바울은 방언 자체를 비난한 것이 아니다. 다만 방언의 은사가 하나님이 의도한 방식 외에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면 그것은 유치원 교실에서 리듬 악기를 합주하는 소리처럼 잡음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방언은 하늘의 언어인가?

 

바울이 말한 “천사의 말”이란 무슨 뜻인가? 많은 사람은 바울이 방언의 은사에 일종의 천사적인 언어 내지 하늘의 언어가 포함된다는 주장을 했다고 믿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는 방언의 은사를 개인적인 기도의 언어, 하나님만이 아시는 하늘의 언어, 천상의 말, 또는 일종의 초자연적인 언어라고 믿는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그런 견해를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바울은 뒤에 이어지는 구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하나의 가정적 상황을 설정하면서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바울조차 말 그대로 그런 주장을 할 수는 없었다.)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며 자기 몸까지 불사르도록 내어주는 문제에 대해 말한다. 바울은 이론적으로 말해서 그 모든 것이 사실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랑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예를 극단적 한계까지 확장하려 했다.


더구나 성경에는 천사들이 하늘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증거가 없다. 천사들은 성경에 나타날 때마다 인간이 쓰는 보통의 언어로 의사소통한다.(예컨대, 눅1:11-20, 26-37; 2:8-14.)


성경 어디에서도 방언의 은사가 인간의 언어와는 다른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고린도전서 12-14장에 묘사된 진짜 방언이 실질적으로 오순절에 임한,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기적의 언어와 다르다는 어떤 암시도 없다. 두 군데 모두에 나오는 헬라어는 글로싸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알려진 언어로 말을 했다는 점이 분명하다. 그 때 예루살렘에 있던 안 믿는 유대인들은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했다(2:6). 누가는 계속해서 제자들이 말한 여러 방언이 속한 약 열 다섯 개의 서로 다른 나라와 지역을 열거한다(8-11절).


더욱 사투리를 뜻하는 영어 단어 ‘다이얼렉트(dialect)'의 어원인 헬라어 디알렉토스(dialektos)도 사도행전 2장 6,8절에서 언어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목도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자기들의 지역 방언으로 선포되는 것을 들었다. 그러한 묘사를 무아지경 속에서 하는 말에 적용할 수는 없다.

많은 은사주의자는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미지의 언어(unknown tongue)"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표현은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닌 언어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미지의(unknown)"라는 말은 번역자들이 덧붙인 말이고 헬라어 원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흠정역에서는 이 단어를 이탤릭체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 1절은 바울이 의미 없는 무아지경의 말이나 일종의 하늘의 언어 내지 천사의 언어를 옹호하고 있음을 입증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


더 나아가 바울은 누군가 교회에서 방언을 말하면 누군가는 통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13, 27). 만일 바울이 ‘개인적인’기도의 언어나 자연발생적인 천상의 소리에서 비롯된 무아지경의 말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런 명령은 시의적절한 말이 아닐 것이다. “통역”으로 옮겨진 헬라어는 헤르메뉴오(hermeneuo)인데 이는 ‘번역(translation)’을 뜻한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9장과 7절과 히브리서 7장 2절에서도 그런 뜻으로 사용된다.) 통역의 은사는 한 사람이 전혀 배운 적 없는 언어를 번역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메시지로 덕을 세우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다(고전14:5). 그런데 무아지경의 말이나 뜻 모를 말을 번역할 수는 없다.


바울이 인간의 언어를 염두에 두었다는 또 다른 증거는 방언이 믿지 않는 이사라엘 백성에게 표적으로 주어졌다는, 고린도전서14장 21-22절에 나오는 바울의 진술이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계시를 말씀하실 것임을 전하는 예언인 이사야서 28장 11-12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에 대한 하나의 책망이었다. 그런 책망이 의미 있는 표적이 되려면 그것은 일종의 천사의 말이 아니라 반드시 이방인의 외국어야야 했다.

 

가짜방언

 

분명히 참된 성경적 방언은 뜻 없는 말이 아니라 언어다. 그러나 오순절 및 은사주의 운동에서 방언으로 통하는 것은 진짜 언어가 아니다. 글로쏠랄리아(glossolalia)라고 자주 일컬어지는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와 같은 것이 아니다. 토론토 대학교 언어학 교수 윌리엄 새머린(William Samarin)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이탈리아, 네덜란드, 자마이카,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왔다. 나는 구 오순절 교인과 신 오순절교인을 다 관찰해 왔고 대규모 공개 집회는 물론 개인 가정의 작은 모임에도 참석해 보았다. 뉴욕 브롱크스의 푸에르토리코 사람들, 에팔래치아 산맥의 뱀을 다루는 백인들, 로스엔젤레스의 러시아계 사람들 등 다양한 문화적 배경도 보았다. ……… 방언은 실제로 어떤 면에서는 언어와 비슷하지만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무의식적으로) 방언을 언어처럼 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상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방언은 근본적으로 언어가 아니다.

 

윌리엄 새머린은 방언데 대한 연구를 해 온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러한 연구들은 우리가 오늘날 듣는 방언은 언어가 아니라는 점에 모두 동의한다. 오늘날의 방언이 언어가 아니라면, 그것은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7장) 1세기 고린도와 그 주변 지역에 존재한 신비종교는 무아지경의 말과 황홀경 비슷한 체험을 광범위하게 이용했다.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무아지경에서 나오는 가짜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방언의 은사를 더럽힌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했던 말은 오늘날의 이른바 방언과 매우 유사했다. 바울은 그런 관행은 방언 은사의 전반적인 요점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해줌으로써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들이 방언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의에 이로운 것이 아니라 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 남용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그들이 “방언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바울의 말은 방언이 ‘기도의 언어’로 사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통역하는 사람도 없이 방언을 말하는 일은 무익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반어법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방언으로 어떤 말을 했다면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은사는 하나님의 유익이나 은사를 받은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허락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서 그 점을 분명히 밝혔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더욱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여기서도 바울은 자기 교회를 위해 방언을 사용하는 일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사의 목적을 어기고 사랑의 원칙도 무시해 가며 방언은사를 사용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책망했다.(“[사랑은]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13:5). 14장 4절에서 “덕을 세우다”라는 말은 원래 “~을 세우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긍정적인 뜻을 전달할 수도 있고 부정적인 뜻을 전달할 수도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기적인 의미에서 자신을 세우려고 방언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동기는 건전한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이었다. 방언에 대한 그들의 열망은 다른 신자들 앞에서 가장 볼 만하고 눈에 띄는 은사를 사용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울의 요점은, 그런 과시를 통해 유익을 얻는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으며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방언에서 얻는 주된 가치는 자신의 자아를 세우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고린도전서 10장 24절에서 바울은 이미 이 원칙을 분명히 밝혔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 밖에도 방언은 또 다른 문제를 초했다. 방언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용되기는 했지만 방언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를 분명히 밝히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하게 만들었다. 고린도전서 14장 16-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다.“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 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다시 말해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을 말한 이들은 이기적으로 변해서, 교회안의 나머지 사람들을 무시하고, 방언의 은사로 전달돼야 하는 메시지를 모호하게 만들며, 오로지 자신의 자아를 만족시키고 남에게 과시하고 자신의 영성을 서로에게 입증하기 위해서만 방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 나오는 바울의 분명한 명령에 대해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이 구절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방식은 몇 가지 심각한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바울은 은사의 분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눈에 띄는 은사들을 선호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기 위해 편지를 쓰면서 왜 그들에게 “더욱 큰”은사를 구하라고 명령할까? 그런 말은 그저 그들에게 지위 다툼을 계속하라고 부추기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구절은 전혀 명령이 아니다. 이 구절의 영어 번역은 바울의 본의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원문에 사용된 동사 형태는 직설법(사실의 진술)도 될 수 있고, 명령법(명령)도 될 수 있다. 새국제 성경(NIV)은 직설법을 대안적 독법으로 제시하여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열렬히 사모하고 있다(But you are eagerly desiring the greater gifts)." 앨버트 반스(Alvert Barnes)는 직설법의 관점을 택하면서 19세기 중엽의 많은 주석가(도드리지 로크 맥나이트등)도 자신과 똑같은 관점을 취했다고 지적한다. 반스는 아람어 신약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고 말한다. “너희는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하니 내가 더 탁월한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다시 말해 바울은 사실상 이렇게 말한 셈이다. “그러나 너희는 눈에 띄는 은사를 질투심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책망이며 그렇게 해석해야 바울이 다음에 한 말이 더 잘 이해된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바울은 그들에게 특정한 은사를 구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띄는 은사를 구하는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는 ‘가장 좋은 길’은 그가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사랑의 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기적으로 가장 눈에 띄고 가장 화려하며 가장 선망 받는 은사를 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탐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갈채를 열망했다. 그리고 남들에게 ‘영적인’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분명히 가짜 방언을 사용하는 극단까지 치달았다. 고리도 교인들의 방언 남용은 그들의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로 그와 똑같은 문제가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방언도 그치고

 

고린도전서 13장 8절에서 바울은 매우 흥미롭고 거의 놀랍기까지 한 말을 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라는 표현에서 “떨어지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부패하다’, 또는 ‘폐지되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사랑이 천하무적이라거나 거절당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랑은 영원하며 그 효력이 영원히 지속되며 결코 과거의 유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방언은 “그치고”말 것이다. 고린도 전서 13장 8절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 파우오(pauo)는 ‘영원히 그치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방언이 일단 그치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구절이 오늘날의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만일 방언이 언젠가는 그치게 되어 있다면 그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미래에 일어날 일인가? 은사주의자들은 어떤 은사도 아직 중단되지 않았으므로 방언의 중단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대부분의 비은사주의자는 방언은 이미 그쳤고 사도 시대와 함께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누구 말이 옳은가?  나는 역사적, 신학적, 성경적으로 방언은 사도 시대에 끝났다고 확신한다. 사도 시대가 끝났을 때 방언도 함께 끝났다. 오늘날의 은사주의 운동은 성경적 방언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서의 가짜 방언의 관행과 비슷한 하나의 일탈이다.


방언이 중단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첫째, 방언은 기적적, 계시적 은사였다. 그런데 우리가 반복해서 살펴 본대로 기적과 계시의 시대는 사도들과 더불어 끝났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기적은 대략 서기 58년경에 일어난 멜리데 섬에서의 신유사건이다.(행28:7-20). 서기 58년부터 요한이 계시록을 완성한 96년까지 아무런 기적도 기록되지 않았다. 방언이나 신유 같은 기적적인 은사는 초기 서신인 고린도전서에만 언급되어 있다. 후대의 두 서신인 에베소서와 로마서는 둘 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길게 논하고 있지만 기적적인 은사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 시기에 이르면 기적은 이미 과거지사로 간주되고 이다(히2:3-4). 사도적 권위와 사도적 메시지는 더 이상의 확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1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미 신약 성경 전체가 기록되어 교회 곳곳에 퍼져가고 있었다. 계시적 은사는 이제 더 이상 어떤 목적에도 기여하지 못했다. 사도 시대가 사도 요한의 죽음과 함께 끝나자 사도들의 신분을 증명해준 표적들은 현실에서 사라졌다(참조 고전12:12).


둘째, 앞에서 살펴본 대로 방언은 믿지 않는 이스라엘 미족에게 표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은사였다. 방언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포함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였음을 뜻했다. 하나님은 이제 모든 민족에게 모든 언어로 말씀하시기를 원하셨다. 막힌 담은 무너졌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는 불순종한 한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방언은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변화의 징표였다. 교회의 성립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새날이 밝았다. 하나님은 모든 언어로 말씀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과도기가 지나가자 표적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파머 로버트슨(O. Palmer Robertson)은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절히 설명했다.

 

방언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요람에서 시작되었지만 유대교적인 특성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 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의]이행은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이행기의 표적은 교회 안에서 아무런 지속적인 가치를 갖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이라는 단일 민족에서부터 모든 민족에게로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줄 표적이 전혀 필요 없다. 그러한 움직임은 이미 성취된 사실이 되었다. 교회를 세우는 사도들의 직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특히 과도기적인 은사인 방언은 하나님의 구약 백성과 신약 백성에 대한 언약적인 표적으로서의 기능을 이미 성취했다. 방언은 이미 그 역할을 다 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더 이상의 기능은 없다.

 

더구나 방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들보다 열등했다. 방언은 주로 표적으로 주어진 은사이므로(고전14:22) 적절하게 교회에 덕을 세울 수가 없었다. 방언은 또한 자기 자신을 세우는데 악용되기 십상이었다(14:4).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모이는 집단이지 자기 민족에게나 개인적인 체험 추구를 위해 모이는 집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교회에서 제한된 효용성밖에 갖지 못했고 그래서 영구적인 은사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역사도 방언이 그쳤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방언이 신약 성경의 최초의 책들에만 언급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이후 최소한 열두 편의 서신서를 썼지만 다시는 방언을 언급하지 않았다. 베드로도 방언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고 야고보도 방언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요한도 방언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유다도 마찬가지였다. 방언은 새로운 복음의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었을 때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간략하게만 나타났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고 난 뒤 방언은 사라졌다. 방언은 중단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후대에 기록된 책들은 다시는 방언을 언급하지 않는다. 사도 시대 이후에도 그 누구도 방언을 언급하지 않았다. 클리언 로저스(Clon Rogers)는 이렇게 말했다. “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에게서는 그 어디에서도 방언의 은사가 언급되거나 암시되어 있지 않으며 심지어 발견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동방 교회와 서방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는 방언을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자기 시대에는 방언이 이미 사라졌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4세기에 저작 활동을 한 그는 방언을 애매모호한 관행으로 묘사하면서 자신은 이 은사의 특징에 대해 확신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러한 애매모호함이 생겨나는 까닭은 성경에 언급된 사실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방언의 중단 때문이다. 즉 방언은 과거에는 발생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방언에 대해 사도 시대에 맞춰진 표적이라고 썼다.

 

최초의 교회 시대에는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임했고 그들은 방언으로 말했다.” 그것은 그들이 배운 적이 없는 말이었다. “성령이 그들에게 할 말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은사는 그 시대에 맞춰진 표적이었다. 하나님의 복음이 장차 모든 언어를 통해 온 땅에 퍼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모든 언어로 성령의 전조가 나타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은 하나의 전조로 성취된 이후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그들에게 안수할 때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기대하는가?[이 수사적 질문에 대해 아우구스티투스는 분명히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했다.] ……… 오늘날 성령의 임재에 대한 증거가 이런 기적들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 증거는 무엇을 통해 주어지며 사람은 무엇을 통해 자신이 성령을 받았음을 알게 되는가? 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보게 하라. 만일 그가 형제를 사랑한다면 성령이 그의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이렇게 썼다.

 

형제들이여,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오늘날 모든 민족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우리가 그 사람도 성령을 받았다고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마음이 이런 믿음 없는 생각에 유혹받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된다………왜 아무도 모든 민족의 방언으로 말하지 않는가? 교회 자체가 이제 모든 민족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교회가 한 민족 안에 있어서 그 속에서 모든 사람의 언어로 말했다. 그 때는 교회가 모든 사람의 언어로 말함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 즉 교회가 열방 가운데서 성장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언어로 말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했다.

 

교회 시대의 첫 5백 년 동안 자신들이 방언을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이단으로 낙인찍힌 몬타누스의 추종자들밖에 없었다(3장을 보라).


그 다음으로 기독교 내에서 중요한 방언 운동이 발생한 시기는 17세기 말이었다. 프랑스 남부의 세벤(Cevennes)지방에서 전투를 벌이던 신교들의 한 무리가 에언을 하고 환상을 체험하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세베놀의 예언자들이라고 불리기도 한 이 집단은 영적인 유산이 아닌 정치적, 군사적 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의 예언은 대부분 성취되지 않았다. 이들은 가톨릭에 대해 광적으로 적대적이었고 가톨릭교회에 맞서 무력 사용을 옹호했다. 그 결과 많은 이가 가톨릭의 박해를 받아 죽음을 당했다.


그들의 정반대편에서는 종교 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 대한 가르침에 반대한 로마 가톨릭 지지자들의 집단인 얀센주의자들(Jansenists)도 18세기에 자신들이 방언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방언의 한 형태를 실행한 또 다른 집단은 18세기 중엽에 번성한 미국 내 퀘이커교(Quaker)의 한 분파인 셰이커교도(Shakers)였다. 이 분파의 창시자인 마더 앤 리(Mother Ann Lee)는 자신을 여자 예수 그리스도로 여겼다. 근는 스스로 일흔두 가지 언어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셰이커교도들은 결혼한 사이에서도 성관계를 맺는 것은 죄악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무아지경과 흡사한 상태에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방언을 했다.


다음으로 19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목사 에드워즈 어빙(Edward Irving)과 그의 교회 신도들이 방언과 예언을 말했다. 어빙파(Irvingite) 예언자들은 종종 서로 상반되는 예언을 했다. 그들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고 그들의 집회는 극단적인 난폭 해위로 특징지어졌다. 이 운동은, 예언자들 가운데 일부가 가짜 예언을 한 사실을 시인하고 다른 일부는 심지어 악한 영에게서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더더욱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 집단은 결국 가톨릭 사도 교회(Catholic Apostolic Church)가 되어 로마 가톨릭의 몇 몇 교리를 수용하고 열두 사도 직분을 만들어 내며 많은 거짓된 교리를 가르쳤다.


이 모든 자칭 방언 현상은 이단적이거나 광신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정통적인 집단들과 동일시되었다. 그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성경적으로 정통적인 신자들은 그 모든 집단을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판단했다. 진리에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분명히 그렇게 판단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 시대가 끝날 때부터 20세기 초까지 신약적인 방언 은사가 진짜로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방언은 끝났다.(고전13:8)


신약학자 토머스 에드거(Thomas R. Edgar)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은사들과 표적들은 중단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타당성을 입증해야 하는 증명의 책임은 전적으로 은사주의자들에게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비 은사주의자가 기적적인 표적의 은사는 중지되었다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성경적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비 은사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입증할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 사실은 이미 역사를 통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사 주의자들은 이 표적의 은사들이 교회 시대 동안 다시 부활할 것이며 오늘날의 현상이 곧 그러한 부활이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거의 1,900년 동안 나타나지 않은 은사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마지막 성령세례?

 

방언의 은사는 20세기에 다시 시작되었는가?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두 가지 방식 중에 한 가지로 다룬다. 어떤 이들은 방언 은사가 결코 중단된 적이 없고 단지 쇠퇴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한 집단들은 오늘날의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의 선조였다고 주장한다.그런 입장을 취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이단적 전통에 서게 된다.


반면 많은 은사주의자가 방언이 사도 시대 이후 중단되었음을 인정하지만 오늘날 은사의 출현은 일종의 마지막 성령 세례이며 말세를 위한 성령의 은사라고 믿는다.


이 두 번째 관점을 취하는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의 핵심 본문은 요엘서 2장 28절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엘서 2장 19-32절에 따르면 마지막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하늘과 당에 이적-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 나타나면서 성령이 부어질 것이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31절). 이것은 분명히 다가올 천년 왕국에 대한 예언이며 그 이전의 어떤 일을 가리키는 것일 리가 없다. 이 요엘서 구절의 문맥을 보면 그와 같은 해석이 유일하게 가능성 있는 해석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요엘 2장 20절은 말세에 이스라엘을 공격할 “북쪽군대”의 패배를 언급하고 있다. 또 요엘서 2장 27절은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큰 부흥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대환난의 또 다른 특징이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일이다. 요엘서 3장(2, 12, 14절)은 아마겟돈 전쟁 이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천년 왕국의 수립과 관련해서 일어날 사건인 열방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3장에서 요엘은 계속해서 천년 왕국을 아름답게 묘사한다(18절). 명백히 요엘서 2장은 천년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오순절에나 그 이후 어느 때에도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은 미래에 속한 한 시대를 언급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베드로가 오순절에 요엘서 2장 28-32절을 인용할 때(행2:17-21) 무슨 뜻으로 이 구절을 인용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베드로가 오순절을 요엘서 2장 28절의 성취로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순절에는 하늘과 땅에 아무런 이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피도 불도 연기 기둥도 없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지도 않았다. 요엘서의 예언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 오순절은 부분적 성취일 뿐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언의 궁극적 성취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이와 비교할 만한 예는 변화산 사건이다. 변화 산에서 주님의 영광은 천년왕국 내내 충만하게 나타나게 될 모습으로 잠시 나타난다.


베드로는 단지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께서 천년 왕국 시대에 나타내실 능력을 미리 조금 맛보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소수의 무리 가운데서 본 광경은 언젠가 성령께서 전 세계적인 규모로 행하실 일의 전조였다.


19세기 탁월한 성경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지 피터스(George N. H. Peters)는 이렇게 썼다. “오순절의 성령 세례는 성령이 다가올 시대에 행하실 일을 증언하고 있는, 미래의 예언 성취에 대한 보증이다.” 오순절에 시작된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가 올 지상 왕국을 알리는, 수평선 위에 떠오른 빛이다.


어떤 은사주의 자들은 요엘서 2장 23절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그들은 이른 비가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을 가리키며 늦은 비는 20세기의 성령 세례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성경 전체에서 “이른 비”는 가을비를 가리키며 “늦은 비”는 봄비를 가리킨다. 요엘은 사실 천년왕국 시대에도 이 두 비가 “예전과” 같이 올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23절). 그의 요점은 하나님이 천년왕국 시대에 곡식을 풍성하게 자라게 하실 것이라는 점이었다. 요엘서 2장 24-26절은 그 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충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 하리로다.”

따라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오순절이나 20세기나 성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은 요엘서 2장 28절을 방언 은사가 두 번째로 부어졌다고 말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 첫째로, 요엘은 방언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둘째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요엘의 예언에 대한 궁극적 성취가 아니었다.


토머스 에드거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견해를 제시한다.

 

교회의 기적의 은사들이 다시 나타나거나 교회 시대가 거의 끝날 무렵에 신자들이 기적을 행할 것이라는 성경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말세에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증거는 충분히 많이 있다(참조. 마7:22-23; 24:11, 24; 살후2:9-12).

 

그래서 우리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이 좋다.


오늘날의 방언은 어떤 종류의 방언인가?

 

그러면 우리는 은사주의적 체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수많은 은사주의자는 방언이 자신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고 증언한다. 예를 들어 보자

 

“방언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단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파랑새가 무슨 쓸모가 있는가? 석양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한 마디로 순전하고 완전한 감정의 고조, 말할 수 없는 기쁨, 그와 더불어 건강과 평안과 안식, 그리고 부담과 긴장으로부터의 해방이 있다.

 

이런 예도 있다.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20년쯤 젊어진 기분이었고 사람들도 내게 그렇게 보인다고 했다……나는 강건해지고 있고 기쁨과 용기와 평안과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공교롭게도 이것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성품의 소유자다.

 

이런 간증들은 방언에 대한 강력한 상품광고가 되고 있다. 방언이 정말로 건강과 행복을 줄 수 있고 사람을 더 젊어 보이게 할 수 있다면, 방언의 잠재적 시장은 무한하다.


반면 그런 주장들을 뒷받침할 증거는 미심쩍다. 오늘날 방언을 말하는 이들이 방언을 하지 않는 신자들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더 거룩하고 더 일관된 삶을 산다고 그 누구 진지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최근에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파산에 이른 삶을 산 것으로 드러난 그 모든 은사주의 지도자는 또 어떤가? 은사주의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은사를 옹호하지 않고 성경을 믿는 교회들보다 영적으로 더 강하고 더 튼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는가? 실제로는 진정으로 영적 성장과 성경적 이해에 초점을 맞추는 은사주의 교회를 발견하려면 한참을 열심히 찾아봐야 한다. 만일 은사주의 운동이 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나 신학적으로 더 나은 지식을 가진 신자를 배출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결국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방언 운동에서 빠져 나오기 전까지는 진정한 평안, 만족, 능력,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증언하는, 이전에 방언을 하던 만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왜 은사 체험은 처음의 황홀한 체험에서 나오는 감정적 흥분을 되풀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결국 환멸로 끝나는 경우가 그토록 많은가?


틀림없이 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은 방언이 어느 정도 유익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증언들의 경우와 같이 대게 그들은 방언이 그들을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이 그들을 어떻게 느끼거나 보이게 하는 지를 말한다. 하지만 겉모습이나 감정이 나아지는 것은 전혀 신약적인 은사의 결과가 아니었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실증하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아는 한 오순절주의자나 은사주의자가 실제로 확인 가능하고 통역 가능한 언어로 말을 한 확실히 입증된 사례는 없다. 언어학자 윌리엄 새머린은 이렇게 썼다. “소위 이종언어[실제언어]발화 현상의 사례들이 실재한다면 은사주의들의 주장은 극히 의심스럽다. 연구자는 그런 주장을 검증하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이야기가 크게 왜곡되었더나 소위 ‘증인들’이 언어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자격이 없거나 믿을 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은사주의 옹호자들은 이런 현상들이 신약 성경의 은사들과 똑같은 현상이라는 자신들의 억측 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면 그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방언은 사탄이나 귀신이 일으키는 현상일 수도 있다. 은사주의 운동을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은 모든 방언을 마귀의 역사로 치부하려고 한다. 나는 그럴 생각까지는 없지만 사탄이 성령의 은사로 통하는 형상들의 배후 세력일 경우는 비일비재하다고 확신한다. 결국 사탄은 모든 거짓 종교의 배후에 있으며(고전10:20) 진리를 흉내 내는 일에는 전문가다(고후11:12-15).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이 사탄의 거짓말에 쉽게 속는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4:1).


과거에 방언을 말했던 벤 버드는 자신의 비상한 능력 중에 일부가 ‘심령적이고 아마도 사탄적인 능력’이었다고 믿는다.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안 눈을 감고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여러 번 심방을 다녀 보았다. 그럴 때 나는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나는 주위에서의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식했다. 그러나 내 눈은 감겨 있었다. 나는 마치 묘하면서도 무척 생생한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몸은 거의 잠들었지만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그러나 모든 은사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

 

무아지경의 언어는 거짓 종교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최신판에는 이방 종교의 숭배 의식에서 나타나는 방언 현상에 대한 유용한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아프리카 동부에 귀신에 사로잡혀 스와힐리어나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런데 그들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이 두 언어를 알아듣지도 못한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통가(Thonga)족은 줄루(Zulu)어를 전혀 모르는데도 그들 사이에서 귀신을 쫓아 낼 때 보통 줄루어로 노래를 부른다.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은 ‘방언의 기적’으로 줄루어를 말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오늘날 무아지경의 언어는 회교도, 에스키모, 티벳의 승려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버지니아 대학교 의과 대학 초심리학 연구소에서는 주술을 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방언 현상의 사례들을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교도와 이단과 주술 숭배자들 사이에서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장구한 방언 전통의 겨우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방언이 사탄의 영향을 받아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은사주의자들도 신지한 숙고 없이 그냥 무시해선 안 될 문제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방언이 학습된 행동일 가능성이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방언은 이 범주에 들어간다고 나는 확신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찰스 헌터와 프랜시스 헌터 같은 은사주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받는 법에 대해 가르치는 세미나를 연다. 그런 방언을 어떻게 학습된 행동이 아닌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헌터 부부는 사람들을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고 찬양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감정적인 흥분을 일으킨다. 헌터 부부는 자극을 고조시키기 위해 표본이 되는 몇 마디 음절을 제시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우스운 몇 마디소리’를 따라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인 은사는 결코 그런 식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식의 방언은 ‘초자연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무리 잡아 늘려도 결코 ‘초자연적’체험은 아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거의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수많은 사람이 똑같은 말과 소리를 사용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똑같은 방법으로 말한다. 그런 방언은 충분히 들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따라할 수 있다.


존 킬달(John Kildahl)은 『방언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ongues)이라는 저서에서 여러 증거에 대한 많은 연구 끝에 방언은 학습된 능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임상 심리학자인 킬달과 그의 동료인 정신과 의사 폴 퀠벤(Paul Qualben)은 미국 루터 교회(American Lutheran Church)와 미국 국립정신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의 의뢰를 받아 방언에 대한 장기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를 모두 마친 뒤 그들은 방언이 ‘학습된 현상’에 불과하다는 굳은 확신에 이르렀다.


오타와 칼튼 대학(Carleton University)에서 수행된 보다 최근의 연구는 최소한의 교육과 시범만 있으면 거의 누구나 방언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한 번도 방언으로 말해 본 적 없고 다른 사람이 방언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는 60명의 피 실험자가 실험에 참여했다. 연구자들은 방언을 담은 오디오 테이프와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주며 두 차례 짧게 방언 훈련을 시킨 뒤에 모든 피실험자에게 30초 동안 방언을 말해 볼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실험에 참여한 모든 피 실험자가 테스트 시간 30초 내내 무난히 방언을 했고 그 중에서 70퍼센트는 방언을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과거에 방언을 했었던 우리 교회의 한 사람은 내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전 방언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한 번 보여드리죠.” 그러더니 그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에게서 들은 소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다른 방언들과 똑같았다. 그런데도 은사주의자는 각각 자신만의 ‘개인적인’기도의 언어를 받게 되어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온다.


나는 새 신자에게 방언을 가르친다는 어떤 열성적인 은사주의자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이 방언의 은사를 받도록 도우려고 그가 그토록 부지런히 애를 쓸 필요를 느꼈다는 사실이 내게는 참으로 상식 밖의 일로 여겨졌다. 왜 우리가 성령께 은사를 받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주의운동에는 방언하는 범을 기꺼이 ‘가르쳐줄’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던 도중에 나는 어느 은수주의적인 텔레비전 토크쇼를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영적인 문제가 있다고 고백하나 또 다른 은사주의자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매일 방언을 사용했습니까? 매일 당신의 언어로 말했습니까?” “아니요, 사실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고백했다.


그러자 상대편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당신의 문제입니다. 매일 방언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시작하든 상관없어요. 그냥 바로 시작하세요. 일단 방언을 시작하고 나면 성령님이 계속 방언을 하게 해 주실 겁니다.”

이 대화는 다음 몇 가지 점을 시사한다. 첫째로 만일 성령이 누군가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면 왜 그 사람은 방언을 시작하려고 애써야 하는가?


은사주의 운동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과 똑같은 은사와 능력을 누리고자 행하고 가져야 한다는 엄청난 집단적 압력이 존재한다. 영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방언이다 은사주의자들에게 왜 방언이 그들 사이의 최대공약수이자 영성과 정통성과 영적 성숙의 보편적 기준이 되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기준은 잘못된 기준이다.

킬달과 퀠벤은 이렇게 썼다.

 

우리의 연구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으로 실재하는 유익이 소리를 내는 실제적 체험보다 지도자와 집단 내 다른 구성원들에 의한 인정에 의존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방언을 하는 사람이 그 집단의 지도자와의 관계를 끊거나 그 집단에 의해 왕따를 당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 방언 체험도 더 이상 그렇게 주관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연구 대상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 환멸감이 만연해 있었다고 보고했다. 방언을 말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학습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초자연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았다. 곧 그들은 자신들이 늘 겪어 왔던 것과 똑같은 문제들과 골칫거리에 직면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칼달과 퀠벤에 따르면 방언을 하기 시작할 때 더 진지한 자세로 임한 사람일수록 방언을 중단할 때 더 큰 환멸을 느꼈다.


방언이 발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미 앞에서 제시한 바 있다. 방언은 심리적으로 유도될 수도 있다. 방언의 가장 기묘한 사례들 가운데 일부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심리적 이상 현상으로 설명된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운동 근육 자동증(motor automatism)상태에 들어가는데 이는 임상적으로 의식적 환경으로부터의 극단적인 내적 분리로 설명된다. 운동 근육 자동증은 거의 모든 수의근(voluntary muscle)을 의식적 통제에서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록 콘서트에 열광하는 어린 십대 소녀들을 보여주는 뉴스 방송을 본 적이 있는가? 흥분과 감격, 열정과 굉음 속에서 그들은 말 그대로 자신들의 성대와 근육에 대한 의지적 통제를 포기한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바닥에 쓰러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번쯤 약간의 소외감이나 우울함이나 현기증을 느끼는 순간을 체험한다. 적절한 상황만 조성되면 특히 대단이 격렬한 감정이 수반되는 상황에서, 사람은 더 이상 의식적으로 통제가 안 되는 상태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 결과 그런 상태에서 방언이 나올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방언 체험의 황홀경을 느끼는 상태는 최면 상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킬달과 퀠벤은 자신들의 연구를 근거로 이렇게 진술했다. “최면을 걸 수 있는 상태는 방언 체험의 필수 조건을 구성한다. 사람이 최면을 걸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적절한 조건 아래서는 방언도 말할 수 있다.


방언을 말하는 이들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 끝에 킬달과 퀠벤은 복종적이고 타인의 영향을 받으며 한 지도자에게 의존적인 사람들이 방언을 말할 확률이 가장 높다고 결론지었다. 윌리엄 새머린도 다음과 같이 같은 말로 그들의 견해에 동의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은 방언을 사용하는 종교에 매력을 느낀다.” 분명히 방언을 말하는 모든 사람이 이 범주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니어도 많은 사람이 이 범주에 속한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은사주의 프로그램을 거의 아무것이 나 보라. 청중들은 강단에서 나오는 어떤 말에도, 심지어 낯설고 이상한 가르침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들은 암시의 능력에 쉽게 복종하고 무슨 암시를 받았든지 그대로 행동에 옮긴다. 감정이 고조되고 압력이 올라가면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방언을 말하는 각 사람을 분석해서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의 분명한 원인을 알아 낼 방법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현대의 은사주의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방언에 대한 가능한 설명 방법은 많이 있다. 기독교 심리학(Christian Association for Psychological Studies) 회원인 맨젤 패티슨(E. Mansell Pattision)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분석 결과는 방언을 초래하는 매우 자연스런 기제를 입증하는 것이다. 심리적 현상으로서의 방언은 만들어 내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쉽니다.

 


나는 신경과 및 정신과 환자들에 대한 임상 체험을 통해 나 자신의 소견을 덧붙일 수 있다. 뇌졸중, 뇌종양 등에서 비롯되는 특정 종류의 뇌질환의 경우 환자는 자동적이고 물리적인 언어 반복의 패턴 속에서 혼란에 빠지는 상태가 된다. 이런 ‘실어증’ 환자들을 연구해 보면 방언에서 발생하는 현상과 똑같은 언어의 해체 현상을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언어 해체 현상은 정신분열증적인 사고 및 언어 패턴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구조적으로 방언과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자료는 최 손상에 의해서든, 정신병에 의해서든, 또는 의지적 통제에 대한 수동적 포기에 의해서든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언어 통제가 방해를 받을 때마다 똑 같은 언어적 상동증(무의미한 말이나 운동, 행위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증상-역주)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방언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의지적 통제에 대한 수동적 포기’ 상태로 들어가도록 교육을 받을 때가 많다. 그들은 긴장을 풀고 자기 목소리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몇 마디 음절을 그냥 되는대로 되풀이하라는 조언을 받는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선 안된다.


메스터스 신학교의 전 학장 찰스 스미스(Charles Smith)는 자신의 저서에서 현대의 방언 현상에 대한 가능한 설명 방법을 제시하는 데 한 장 전체를 할애했다. 그는 방언이 ‘운동 근육 자동증’, ‘무아지경’, ‘최면’, ‘정신적인 카타르시스’, ‘집단적 심리구조’, ‘기억자극’ 등을 통해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요점은, 방언을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은 여러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1세기 고린도 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늘 날에도 방언은 성령과 관계 없이 여러 거짓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방언은 왜 그토록 인기가 있는가?

 

오늘날에는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방언을 말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매일 방언 체험을 찾는다. 은사주의적 설교자들과 저술가들은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말세에 교회 위에 임한 광범위하고 새로운 능력의 폭발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묘사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이가 방언을 그토록 열렬히 추구하는가? 한 가지 기본적인 원인은 영적인 굶주림이다. 사람들은 방언이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는 한 방법이라는 말을 듣는다. 사람들은 방언을 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놓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또한 많은 사람은 영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데 굶주려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진정으로 교회에 소속감은 느끼지는 못했다. 그들은 특별히 영적이거나 거룩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는 이들이 거룩하고 영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말을 듣기 때문에 방언을 시도한다.


방언이 확산되는 또 다른 기본적인 원인은 다른 사람과의 인정과 안도감에 대한 욕구이다. 사람들은 ‘집단 안에’소속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못 가진 사람들 사이에 포함된다는 생각만 해도 인상을 찌푸린다. 어떤 이들에게는 은사주의 운동 안에 포함되는 것이 대단히 만족스런 일이다. 그것은 “나는 은사주의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자아실현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중요한 존재 같고 무엇인가에 속해 있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해 준다.


또 다른 설명은, 은사주의 운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화되고 기계화 되고 학문적이고 차갑고 무관심한 사회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초자연적인 세계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여기에는 그들이 체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무미건조하거나 학문적이지 않으며 실제적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방언이 오늘날 이렇게 엄청난 힘으로 폭발한 핵심적인 원인은, 너무나 많은 교회에 만연해 있는 차갑고 생기 없는 기독교에 대한 대안의 필요성일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움직임과 흥분과 온기와 사랑을 찾고 있는 이들일 경우가 많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삶에 지금 당장 이곳에 실제로 역사하신다고 믿기를 원한다. 죽은 정통신앙은 결코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은 은사주의 운동에서 만족을 찾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은사주의 및 오순절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구원관에 대해서는 우려하지만 그들이 성경을 믿고 성경을 권위 있는 책으로 제시하는 데 대해 감사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그분의 희생적인 죽으심과 육체적 부활,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살아야 할 필요성을 믿으며 뜨겁게 이웃을 사랑하며 열심히 믿음을 선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왜 그들을 비판하십니까?” 우리가 그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우리의 형제 자매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성경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덧이 별로 애정 어린 행동으로 보이지 않겠지만, 성경은 우리가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엡 4:15, 쉬운성경). 참된 사랑은 진리에 따라야 한다.

 

존 맥아더, <무질서한은사주의> (서울 - 부흥과 개혁사, 2010)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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