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박진호 목사의 글이다. 박진호는 미국 남침례교단 목ㅈ사이며 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개인 홈페이지 www.whyjesusonly.com에 실린 글이고, 크리스천투데이에도 실려 있다.
(히10:26,27) 이미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1)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6,27)
히브리서의 저작 동기와 주제
성경에는 예수를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마치 구원이 취소되는 것처럼 진술한 구절들이 제법 있습니다. 실제로 아주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이 좋아보이던 신자가 하루아침에 세속적으로 타락하여 교회출석을 중지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고도 죄를 지으면 구원은 취소되고 심판받는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상기도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구절 중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해라고 말한 까닭은 둘입니다. 첫째는 정말로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자에게는 구원의 취소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상기 본문 자체가 그런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닌데도 해석을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오해에 대해선 여러 번 다루었으므로 오늘은 둘째 오해만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성경을 해석할 때 반드시 또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일부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전부가 서신서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편지라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정해져 있고 특정한 주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특정한 수신자와 특정한 상황에 따라 저자가 강조하려는 내용이 다릅니다.
예컨대 잘 알다시피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 실제로 발생했던 성도간의 분쟁, 우상에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 음행, 성도 간의 소송, 성령의 은사의 무분별한 사용 등에 관해 영적이면서도 실제적 지침을 주려는 것이 저자 바울의 뜻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선생, 특별히 율법 준수와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주의자의 잘못을 십자가 복음과 비교 지적하여 교인들로 경계 시키려는 목적으로 저작한 것입니다.
본문을 정확히 해석하려면 히브리서도 어떤 수신자를 대상으로 어떤 상황에서 기록한 것인 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책의 제목 그대로 유대인 신자들이 대상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유대인들이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오래 고대하던 메시아임을 인정할 수 있었고 또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기왕에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함에 자기들 기득권이 줄 것을 염려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우상을 믿는 이방제국 로마보다도 여호와를 같이 믿고 따르는 유대교로부터 먼저 있었습니다.(행8:1) 거기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1세대 증인들도 시일이 지나면서 거의 죽었기에 그 후 세대들에게는 복음이 아무래도 생생한 진리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유대교에선 아무 공로 없이 주는 십자가 구원은 무효하며 유대인이라면 조상대대로 지켜온 모세율법을 반드시 준행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려면 본토 친척 아비 집과 완전히 인연을 끊어야 했습니다. 또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 힘입어야만 그런 핍박 멸시를 견딜 수 있는데다 실은 온전하게 거듭나지 않는 신자들도 많았습니다. 결국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신분적 우월성은 물론, 십자가의 영단번의 대속제사를 구약의 제사들과 비교해서 예수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단호하고도 객관적으로 변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도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장차 올 약속인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음도 함께 설파합니다.(히11, 12장, 11:26)
짐짓 짓는 죄란?
이처럼 서신을 저작한 동기는 의도적으로 기독교를 버리는 유대인들에게 배교하지 말라는 권면 충고 경계를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부인하는 잘못을 탓하려는 것이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초점입니다. 따라서 본문도 예수를 믿은 후에 알게 모르게 이런 저런 모양으로 죄를 짓는 것으로 제한해서 해석해선 안 됩니다.
본문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고 말합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구원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사 그 은혜를 믿는 자마다 아무 자격 조건 공로 없어도 영생을 주신다는 그 진리입니다. 사망의 심판만 기다리고 있던 사탄의 노예로서 죄에 복종했던 과거의 처절한 실패는 물론 그 동안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으로 묶인 종교적 속박에서도 벗어나 신자로 자유롭게 만드는 그 진리입니다.
그리고 ‘짐짓’ 즉, 의도적으로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탄과 세상과 죄악을 향하던 본성이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그 방향만 완전히 전환되었고 또 그 일을 실천할 수 있도록 내주하는 성령님의 도우심도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참 신자라면 고의로 동일한 죄를 반복해서 범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아직도 죄의 본성에 져서 수시로 쓰러지더라도 반드시 뉘우치고 고치려 노력은 합니다. 아예 작정하고 죄를 짓는다면 아직 온전히 거듭난 자가 아닙니다.
거기다 본문이 단순히 윤리적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고 말한 후반부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서 기자가 계속해서, 특별히 10장에서 강조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동물 희생 제사로는 온전한 속죄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엇이 하지 못함이라. ..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10:1-11)
반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제사는 전혀 다르다고 바로 이어서 선언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0:12-14)
본문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말했다면 앞에서 변증 진술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제사를 버리고 다시 동물 속죄 제사로 돌아간다면 구원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너희들도 정말로 곰곰이 잘 따져보아라. 동물 제사로 온전한 죄 사함이 되는지 말이다. 매해마다 죄의 심판 아래 있게 하지 않느냐? 율법을 범할 때마다 동물제사를 지내야 하는 속박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지 않느냐?”
앞뒤 문맥에서의 뜻
성경이 구원의 취소를 말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범하는 오류는 그런 뜻처럼 보이는 특정 구절만 따로 떼어내어 그 근거로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본문 해석과 논리가 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시작부터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을 앞뒤 문맥과 책 전체의 주제에 맞추어서 해석하지 않고 자기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거꾸로 성경본문을,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자기들 뜻에 맞춰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본문도 이 두 구절만 볼 것이 아니라 앞에서 잠시 살펴본 것처럼 책 전체는 물론 앞뒤 문맥에서 정확한 의미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바로 앞부분(19-25절)에선 무엇을 말합니까? 큰 제사장 예수님이 성전 휘장을 제거하였기에 모든 신자가 스스로 “예수의 피에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19절)고 합니다. 어떤 윤리적 죄를 지어도 동물 제사 없이 언제든 있는 모습 그대로 성소에 나가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2절) 마음에 뿌림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심령을 깨끗케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이 실현된 것입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 돌에 새겨진 율법과 그에 따른 동물 제사를 하나님께서 스스로 폐기시킬 것이라고 약속했고 그 약속이 예수 십자가로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라고 권한 것입니다. 새 언약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비록 죄를 짓더라도 언제든 예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끼리 서로 용서하고 세워주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기에 더욱 힘쓰라고 말합니다.(23-25절)
그 후에 “짐짓 죄를 범한 자에게는 대속 제사가 더 이상 없다”고 말합니다. 죄를 범하고도 그럼 예수십자가 보혈의 완전한 대속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다시 동물 제사로 돌아간 자에 대한 권면임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뜻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29,29절)
본문이 속한 10장은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28, 29절은 “십자가 대속의 형상에 불과한 율법을 어긴 자도 심판을 받았는데, 그 십자가를 부인하면 하나님 아들을 밟는 것이요 자기를 거룩하게 해주는 주님의 새 언약의 피마저 더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인데 얼마나 그 벌이 중하겠느냐? 정말로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기 강조합니다. 초기 유대인신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유대사회에서 추방되는 현실적 불이익은 물론 실제적인 핍박을 받게 되자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런 자들의 심령에는 예수의 피 뿌림이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식적으로 깨달았을 뿐 심령의 뒤집어짐이 없었기에 쉽게 변절 배교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들은 죄를 지으면 매번 율법의 제사로 용서를 받는 것이 옳다고 믿었던 자들입니다. 배교도 ‘짐짓’ 했으니 모든 것을 스스로 비교하여 옳다고 판단한 쪽을 택한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절감 체험은커녕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자들입니다.
요컨대 본문은 유대교로 재차 개종하려는 유대인신자들을 향해 예수 십자가 복음의 큰 은혜를 율법의 동물제사와 비교해 다시 진지하게 따져보라고 전도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자가 윤리적 죄를 지었다고 구원이 취소된다는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3/14/2019
(벧후2:20-22) 이미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2)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 후서의 저작 의도
베드로후서의 이 구절도 앞선 글 히브리서 10:26-27처럼 언뜻 보면 이미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고 세상의 더러움에 얽매여서 지면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비참한 나중 형편을 이스라엘의 속담에 비유함으로써 그런 뜻을 더욱 분명히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수신자가 누구이며, 저작 당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를 갖고 썼는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는 교회가 외부로부터 겪는 핍박에 대해 위로하고 믿음으로 이겨내라 권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후서는 교회 내부의 거짓 교사로 인해 분열되고 특별히 도덕적 타락에 빠져 배교하는 일에 대한 경고가 주제입니다.
이 서신에 어떤 지역이나 교회 이름 대신 저자인 베드로로 가름하는 이유는 수신자가 특정하게 제한되지 않고 여러 지역의 모든 신자들이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전서1:1에서 사도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한다고 밝혔습니다. 후서도 마찬가지로 소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신자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 당시 그 지역의 여러 교회가 공통적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이 서신은 순교 직전 네로 통치의 말기인 AD 66-67년경에 저작된 것으로 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지 한 세대가 채 지나기 전부터 교회 안에 이단이 침투한 것입니다. 본문의 뜻을 정확히 알기 위해선 사도가 경고한 거짓 가르침이 무엇인지부터 아셔야 합니다.
늦어진 재림
주님의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예언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사도들마저도 처음에는 문자 그대로 한 세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차츰 십자가 사건의 직접 목격자들도 많이 죽어 없어졌고 주님의 재림은 요원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거짓 교사들은 제일 먼저 재림을 대비하라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비난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1:16)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주님의 신속한 재림은 사도들이 교묘하게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비난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비난에 대해 사도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보았다”고 자신의 직접적인 목격체험을 들어 반박했습니다. 변화산에서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천국에서 불러 내려서 대화를 나누는 신령한 모습을 보았고 그 때에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1:17,18) 이어서 “경의 예언을 사사로이 풀지말라”(20,21절)고 합니다.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오역하여 그릇되게 가르친다고 지적했습니다.
거짓교사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은 없고 세상만사는 단순히 합리적인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고 선동했습니다. 재림의 심판이 없다면 이 땅에서 마음 놓고 안락과 쾌락을 즐겨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실제로 이들은 더 이상 정죄가 없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자유롭고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교인들도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라고 독려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기승을 부리던 영지주의 이단이 이미 교회마다 침투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에 기원을 두는 영지주의란 간단히 말해 물질은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고 믿습니다. 물질로 이뤄진 육체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원래부터 악한 데서 나온 것이니까 아무 문제 삼을 것 없으며 영혼만 깨끗하게 유지하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아무리 방탕해도 죄가 아니며 그것이 오히려 인간이 자유를 누리는 모습이라고 강변합니다. 영혼의 자유는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으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 바로 물질은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는 것이 그들이 깨닫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반드시 가르치고 실현해야 할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정반대 편에서 훼방 대적하는 가르침입니다. 사도는 그들의 이런 가르침에 대해 경고 정죄하며 교인들더러 참 진리인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베드로 후서의 2장 전체는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폐해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2:2)
‘저희’는 거짓 선생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호색을 하고 있으면서 교인들이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도 즉,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얻은 구원의 길이 훼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일부교인들이 참 복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짓 선생을 쫓아간다는 것입니다. 참 복음을 알면 주님을 좇아서 세상의 멸시 핍박을 기꺼이 감수하며 거룩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고 이단에 넘어간 자들이니까 덩달아서 호색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10절)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이 육체를 따라서 - 영지주의 주장대로 육체는 아무 죄가 없으니까 -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특별한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배짱 좋게 자기들 고집대로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과 그 모임인 교회를 훼방하고 있습니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13,14절)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한다는 것은 자기들이 행한 불의의 대가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낮에 연락을 취합니다. 향락은 주로 밤에 취하나 아무 염치가 없기에 낮에 온갖 타락을 담대하게 행하는 점과 흠 – 큰 죄를 범합니다. 거기다 너희와 함께 행한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그런 짓거리를 예사로 행합니다. 쉬지 않고 음행을 행하면서 믿음의 뿌리가 없는 자들을 유혹하여 함께 탐욕으로 빠트리는 저주의 자식이라고 정죄합니다.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18,19절)
거짓교사들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합니다. 자기들처럼 방탕하게 즐기는 것이 오히려 율법의 구속과 육체의 욕심에서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자랑합니다.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 즉,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지만 그런 방탕한 생활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초보 단계의 신자들을 집요하게 음란으로 유혹한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겨우 피한 자들도 다시 그들 꾐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악에 진 사탄의 종으로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의 참 자유
그리고 20-22절의 본문이 이어집니다. 그럼 여기서 ‘저희’가 누구를 가르치겠습니까? 명확한 구분이 없어 약간 모호하지만 그래도 두 가지 가능성뿐입니다. 이 2장 전체가 거짓교사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저희’라는 대명사로 지칭했기에 우선적인 가능성은 거짓교사들입니다. 또 20-22절 본문이 2장 전체를 마무리 짓는 결론이므로 거짓 선생의 꾐에 넘어가 부화뇌동한 믿음의 뿌리가 없는 자들에게도 함께 경고한 셈입니다.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하니까 마치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거룩한 생활을 하다가 다시 타락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단순히 세상의 더러운 삶을 피하려고 예수를 믿어보려 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표현한 것은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진리와 대조하여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뜻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궁극적 지식(gnosis)을 알면자유로워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진리는 육체가 행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 방종하게 쾌락을 추구하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교회는 그리스드를 알면 자유로워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주님도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고 했습니다. 단 조건을 달았습니다.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31절) 우선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임을 믿고 십자가 대속 구원의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에 거(居해)야 합니다. 그 말은 우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구원과 심판으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런 소망을 품고 항상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참 신자는 가장 먼저 지옥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또 성령이 내주하여 죄의 노예 됨에서 풀려나고 성령의 법에 따라 거룩하게 살도록 보호 인도해줍니다.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되신 주님처럼 마지막 때에 신령한 육신을 덧입고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갖고 있기에 세상의 어떤 비방 멸시 핍박은 물론 죄악의 유혹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십자가 복음 안에서만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는 초기 이단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차용하여서 참 복음만이 진리이자 인간을 자유케 할 수 있다고 변증합니다. 그와 동시에 거짓 선생들의 진리와 자유는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지적 경고합니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더러움에 다시 얽매인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 들어왔으나 곧바로 이전의 방탕했던 음행과 향락에 다시 빠진 자들입니다.
거짓 선생들과 그들의 선동과 유혹에 넘어간 믿음이 연약한, 정확히 말해 참 믿음이 생성되지도 않은 구원 밖의 교인들입니다. 베드로의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이라는 표현을 다시 보십시오.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려고 믿음을 가진 자가 어떻게 다시 그 더러움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도 음행 방탕 향락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가르침에 쉽게 넘어갈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본문의 ‘저희’는 다시 강조하지만 거짓 선생과 그들과 함께 방탕에 빠진 자들로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던 자들입니다. 정말로 믿음으로 구원 얻은 신자가 때때로 윤리적 죄에 넘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처음부터 구원과는 상관없는 불신자, 이방인, 이단들을 말합니다. 본문에 이어서 어떤 말씀이 나옵니까?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3:2-5)
먼저 선지자들의 예언과 주님이 사도들에게 가르친 복음을 기억하라고 권합니다. 말세에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 주의 재림은 없고 창조 때부터 자연 법칙대로 굴러간다고 속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창조 자체도 ‘부러’ - 의도적으로 잊으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재림이 없으면 음행과 쾌락을 추구한 삶에 대한 심판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 사상을 가진 자에게는 아무리 교회 안에서 종교적인 의식과 언행을 행해도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멸망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가 마지막에 전래 속담을 첨부한 까닭은 그들은 처음부터 개와 돼지였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의 부정한 동물의 대표로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라는 의미로 비유했습니다. 개와 돼지가 양이나 소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원래 놀던 더러운 곳으로 돌아갔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신자의 구원 취소와는 전혀 무관하며 교회에 가만히 침투한 이단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주는 경고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관한 지침입니다.
3/16/2019
(약3:1) 이미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3)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
야고보서의 특징
상기 구절은 본문 자체로도 난해하지만 야고보서 전체가 해석하기 아주 어려운 책입니다. 마치 선행을 쌓아야만 하는 행위구원을 주장하고 믿음으로 얻는 은혜구원이 부인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여질 때에 논란이 많았고 종교개혁의 선봉장이었던 마르틴 루터마저 그 진가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여러 주제를 중구난방 식으로 일관성이 없이 진술하고 있는 것 같아 해석상의 또 다른 장애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기구절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야고보 사도가 과연 행위 구원을 강조하려 했는지부터 온전히 분별해야 합니다. 또 그와 연결해서 앞뒤 문맥에서의 의미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우선 신약 서신서의 가장 큰 특징을 아셔야 하는데 특정 교회나 교인들을 대상으로 썼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는 로마서를 빼고는 이미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을 수신자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도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즉, 유대인 신자들에게 문안한(1:1) 후에 곧바로 이런 말씀이 이어집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
형제라는 호칭은 앞에서 열두 지파라고 했듯이 유대교와 로마 당국으로부터 이중 핍박은 물론 교회 안의 온갖 문제로 시달리는 유대인 신자를 다시 친근하게 부른 것입니다. 그들더러 그런 시험을 오히려 기쁘게 여기고 인내를 통해 믿음이 온전히 성숙해지라고 권면합니다.
요컨대 이미 구원 얻은 신자가 이룰 성화(聖化 sanctification)에 관한 서신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지 혹은 잘못하면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사도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서신은 그 길이가 일반 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짧은데 그런 서신 한편 내에서 수신자, 저작 의도, 주제, 강조점 등이 바뀔 리는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문제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24)는 말씀입니다. 이 한 절만 보면 행위구원을 강조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 보건대”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근거로 강조 하건대”라는 뜻입니다.
일상적으로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한 것입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예수 십자가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을 자기 구주로 영접한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해주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구원을 뜻합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칭의의 구원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면 행위도 반드시 의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로 보건대”라는 말로 사도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잘 살피면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도 따라야 구원을 얻는다.”는 즉, 성화를 강조하려는 자신의 취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가 앞에서 설명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2:14) 행함이 없으면 능히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또한 행위가 따르지 못하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곧바로 예로든 행함이 없는 믿음을 따져 보십시오. 형제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데 말로만 평안히 가고 배를 불리도록 노력하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아무 이익도 없다고 합니다. 반드시 몸에 쓸 것을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5,16절) 실제로 도와주지 않으면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아예 그런 관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2:14에서 믿음이 있다고 “말해 놓고” 그 믿은 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거짓이고 사실은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죽은 믿음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믿음이라는 뜻이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2:18) 동일한 맥락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지금 “행함이 있는 믿음”을 “행함이 없는 믿음”과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구원이 없는 반면에, 행함이 없이 믿음만 있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점을 대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20절) 그 대신에 행함이 따르는 믿음의 표본으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들고 있습니다. 결국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은 (구원을 얻은)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는 2장의 결론을 보십시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영혼 없는 몸과 비교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으려면 영혼과 몸 둘 다 있어야 합니다. 둘 중 하나가, 특별히 영혼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행함이 같이 있어야 살아있지 말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요컨대 야고보의 뜻은 믿음과 행함은 실과 바늘처럼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아예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단순히 도덕군자로 자신의 의만 높이는 치장 자랑 교만일 뿐이며 구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반면에 참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반드시 함께 따르기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한 것입니다.
목사가 더 큰 심판을 받는다면?
이런 결론 후에 전혀 엉뚱한 내용의 본문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 요즘으로 치면 목사가 더 큰 심판을 받으니까 목사가 될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칫 목사조차 온전하지 못해 구원이 취소된다면 일반 신자는 더 그럴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또한 전체 문맥에서의 뜻을 잘 살펴야 합니다. 먼저 당시 많은 이들이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말리고 있습니다. 자칫 더 큰 심판을 받기 때문인데 그 이유를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왜 선생으로써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지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 말은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너무나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2-6절)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자가 되지만(2절), 정반대로 말은 또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는데 그 불이 지옥 불에서 난다”고 합니다.(6절) 둘째는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진 말을 통제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몸도 굴레를 씌울 수 있으나(2절)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8절)
이런 설명으로 그치면 말을 잘못 통제함으로써 심판에 떨어진다고, 말하자면 목사도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심판받는다는 뜻으로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와는 정반대 의미의 말씀을 덧붙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3:9-12)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만, 감람나무는 감람만, 포도나무는 포도만 열매 맺지 다른 열매는 맺을 수 없는 이치와 같이 말입니다. 그럼 선생이라면 반드시 한 입으로 찬송 하나만 내어야지 만약 저주가 나오면 이미 선생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앞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선생도 반드시 그 가르침의 열매로는 찬송만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선생의 입에서 저주가 있으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듯이 이미 죽은 선생, 선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그 뜻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13,14절)
야고보서 전체에 일관되게 강조하는 맥락대로 행함으로 지혜의 온유함을 보이라고 합니다. 선생이라면 “위로부터 난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의 선한 열매를 맺는 참 지혜”(17절)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열매를 보면 그 믿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반면에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진리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게 되는데 그것들은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이라고 정죄합니다.(14,15절) 결국 선생을 하나님께 속한 자와 사탄에 속한 자 둘로 나누었습니다.
질문하신 구절의 뜻이 이제 더 분명해졌습니다. 첫째 야고보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대로 선생은 “화평케 하는 자로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3:18, 선생에 관한 3장의 결론)는 것입니다. 선생의 책임이 그 만큼 막중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제대로 행하지 않으면 즉, “마귀로부터 오는 정욕적 세상적 지혜로 가르쳐서 교회에 독한 시기와 다툼과 거짓을 만연하게 하는”(14,15절) 선생은 큰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죄를 범하면 구원이 취소되고 큰 심판을 받으니 목사가 될 꿈을 꾸지 말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성경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저자의 저작 의도와 강조하려는 책 전체의 주제에 맞추어 앞뒤 문맥 안에서의 뜻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3/20/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