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톨릭주의, 로이드존스
박만수
로마카톨릭 사상평가를 펴내며 시작하는 글
I. 로·마·카·톨·릭·체·제
II.로·마·카·톨·릭·의·중·대·한·오·류·들
III.결·론
우리는 왜 로마 카톨릭을 말해야 합니까? 그것은 성경이 그녀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 종교적 편견이나 개신교의 시기심에서 나온 비평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그렇다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는 파수꾼과도 같이 무책임하고도 비겁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와 사상을 반대하지만, 카톨릭 교도들, 즉 천주교인들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기에,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자 하며, 진리의 말씀의 은혜와 약속에 함께 참여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권면하고 호소하며 경고해 주고자 할 따름입니다.
이 일을 위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사료되는데, 그는 일반 크리스천들 사이에 매우 객관적이고도 신중한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에 대한 그의 접근은 언제나 신중했고, 소극적 비판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태도로 일관해 왔습니다. 본문 중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나아가 로이드 존스는 로마 카톨릭주의의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와 무기력함에 전적으로 기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같은 태도는 그의 설교 중에서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다뤄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역력히 드러납니다. 본고는 바로 그 단 한 번의 예외에 해당됩니다. 그것도 '마귀의 속임수'를 다루는 성경본문 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해명(?)입니다. 이렇듯 본문이 다루는 로마 카톨릭 사상 평가는 로이드 존스가 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그리고 최소한의 비평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격해 보인다면, 그것은 로이드 존스의 접근이 과격해서가 아니라, 로마 카톨릭의 가려진 실체와 실상이 그만큼 치명적이라는 반증일 것입니다.
비록 작은 분량이긴 하지만, 모든 개신교도들뿐 아니라 카톨릭 교도들이 꼭 한 번은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 객관적으로 제시한 로마 카톨릭 사상평가, 그것은 종교적 편견과 비평을 뛰어넘어서 누구나 한 번쯤 집고 넘어가야 할 바로 우리 모두의 당면과제이며, 이 시대의 영적 분별을 위한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시작하는 글
너희가 마귀의 속임수를 능히 대항하여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에베소서 6장 11절, 권위역).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사건들은 모든 크리스천 지성인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主義)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 화해(和解)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여러 운동들이 일어나고, 숱한 회의들이 개최되는가 하면, 이같은 일을 환영하는 자들은 우리(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상호존중(相互尊重) 하에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니며, 크리스천 정신의 경이로운 구현(具現)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 때문에, 현 국면(局面)을 바르게 파악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이 있는 것이며; 앞 날을 내다볼 때 사태의 긴박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蓋然性) 때문인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카톨릭의 비중이 절대다수(絶對多數)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은 전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로마 카톨릭은 '다수결 원칙'(多數決 原則)을 따르고 있는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占有)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 야기될 모종(某種)의 개연성을 예상(豫想)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영국)라고 해서 수년 내에 그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保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성격의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같은 주제로 강단에서 설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인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껏까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로마 카톨릭 교세(敎勢)가 각 나라에서 실질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는 반면, 소극적인 프로테스트의 온갖 노력들은 무기력해 보입니다. 본인은 로마 카톨릭주의의 이러한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無知)함과 무기력(無氣力)함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시간을 투자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본인은 이 문제-곧 주권과 권능,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및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속임수'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쨋든 좋습니다,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하기로 할까요? 여기에서 본인은 개개인에 관해서는 고려치 않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물론,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인 개개인들도 존재합니다. 즉 여러분이 카톨릭 교인이면서도 크리스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인의 전반적인 의도는, 카톨릭 내에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體制) 때문이 아니라 그 체제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도 개인(個人)이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개인에 대해서는 고려치 않을 것이며,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지금껏 그것이 엄청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에 대한 역사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카톨릭의 주장들이 정치적인 힘으로 발전된다는 사실도 알며,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정치적 측면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고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기독교 평신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의 소관(所關)으로 보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영적인 측면에 관심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관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