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8장 5항>/ 김병훈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8장 5항: “주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또한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께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그의 아버지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화목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기업을 사셨다.”
본 항은 크게 두 가지의 내용을 교훈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의 효과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효과를 얻기 위하여 그가 행하신 사역의 성격에 관한 것입니다.
사역의 효과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킨 일, 그리고 화목과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사신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의 효과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란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가 율법에 순종한 일과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일을 말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두 가지 내용 가운데 먼저 사역의 효과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의 성격을 살피고, 다음 글에서 그것으로 인한 사역의 효과를 살피기로 합니다.
지금 살피는 5항에서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이 말하는 바는 앞선 4항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나셨으며,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셨다”고 고백을 한 것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4항에서 설명을 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셨음을 말하는 것은 그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가 없는 자연적 의미에서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하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 인간들과는 달리 영생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순종하여야 할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일이 ‘위격적 연합’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자 하나님의 위격이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러한 위격적 연합의 사실은 그리스도께서는 출생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분으로 나셨기 때문에 율법의 의의 보상을 통해 자신의 영생을 얻고자 하실 필요가 없으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죄인들이 영생을 얻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이 필요한가에 관련한 토론의 초점은 그리스도께서 대리속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무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무도 이 점과 관련하여 부인을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만일 율법에 불순종하는 일을 행하신다면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의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일이 있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대리속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의 자격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영생의 권리도 상실하게 되고 맙니다.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신”(히 4:15) 분이십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거룩하며 무흠하여야 할 제물의 조건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에게 속한 죄인들은 대리속죄의 은혜를 입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대리속죄를 이루시기 위하여서는 율법의 의를 이루는 완전한 순종을 행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하셨습니다.
그처럼 율법에 완전히 순종을 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자로 잉태되고 탄생하실 때로부터 이미 자신이 희생제물로서의 자격을 이미 이루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를 보이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무흠한 제물로서의 자격은 그가 거룩한 자로 성육하셨을 때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과 관련하여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순종으로 얻으신 율법의 의와 영생의 권리가 죄인들에게 전가하여 주시는 데에 그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 두는 일입니다.
죄인들의 보증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속한 죄인들을 위하여, 율법을 완전히 순종을 하시어 율법의 의를 이루심으로써 영생의 권리를 획득하시고, 그 권리를 행사하십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을 하신 것은 그가 인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자신에게 속한 죄인들의 보증인이 되는 언약적 관계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항에서 표현한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가 뜻하는 바는 우리의 보증인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으며 영생을 받을 권리를 주시기 위하여 이루신 율법의 의를 이루셨음을 가리킵니다.
즉 자신의 영생을 위하여서는 불필요한 율법의 의를 이루신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인 의지를 따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죄인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보증인으로 행하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보증인으로 율법 아래에서 순종을 하신 것을 가리켜서 ‘능동적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단번에 희생제사를 드리셨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수동적 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죄인들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하여 육체와 영혼에 모든 고난의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속한 죄인들의 죄책을 자신에게로 자발적으로 옮기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심판을 받으시어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수동적 순종은 죗값의 형벌을 치르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임의로 죄인에게서 죗값을 면제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은 사실 죗값을 치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에 대하여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죗값을 물으시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필요하다고 앞의 견해에 대하여 반박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께서 만일 다른 방식으로 작정을 하셨더라면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 죗값을 치르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 두 가지 견해들과 달리, 세 번째 견해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선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대리 속죄에 의하여 죗값을 치르지 않고는 누구도 죄사함을 받을 수 없도록 뜻을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죗값을 치르지 않고도 죄를 사하시는 일은 그의 공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의하여 죗값을 치르는 일과 관련하여 절대적 필연성을 말하는 세 번째 견해가 17세기 초부터 개혁신학에서 가장 널리 인정을 받아 왔습니다. 두 번째 견해는 가정적 필연성을 주장하는 견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전제 아래 필연성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죗값을 치르는 공의의 만족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소시니안주의자들의 첫 번째 견해가 대두되기 전에는 개혁파 일부에서도 고려했던 견해입니다. 개혁신학은 첫 번째 견해를 부인합니다.
요컨대 본 항에서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께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그의 아버지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다.”의 문장으로 교훈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공의의 속성에 따라서 율법을 범한 죄인들의 죗값을 요구하시는 작정을 행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수동적 순종을 통해 근본적이며 철저하게 속죄의 형벌을 다 갚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음을 확실하게 밝혀줍니다.
이번 항목을 살피면서 유의하여 기억할 한 가지 사항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구별에 관련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가져온 효과들에 관한 구별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적 측면과 죗값을 치루는 측면을 구별하여 전자는 능동적 순종, 후자는 수동적 순종이라고 구별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죄악의 용서와 영원한 의의 드러남”(단 9:24), “죄사함과 기업을 얻음”(행 26:18), 또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을 받는 것”(갈 3:13)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갈 3:26) 등의 구별을 근거로 합니다.
지옥 형벌에서 벗어나는 것과 천국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별이 되고, 형벌을 받는 것과 상급을 받는 것이 동일한 것이 아니며, 사망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는 것과 영생의 영광을 얻는 것이 서로 구별이 되는 것이 마땅하므로, 그리스도의 순종을 공로적 측면의 능동적 순종과 공의를 만족케 하여 죗값을 치루는 수동적 측면으로 구별하여, 전자를 통해 영생을 얻고 후자를 통해 심판을 면하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별이 마치 그리스도의 어떤 사역은 능동적 순종에만 해당이 되고, 어떤 사역은 수동적 순종에만 해당이 되는 것인 양 경직된 구분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인을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한 것일 뿐이며,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죄인에게 영생의 권리를 주기 위한 공로의 행위인 것으로만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의 단일체로서 한 편으로는 죗값을 치루는 속상의 측면을, 다른 한 편으로는 영생의 기업을 얻도록 하는 공로의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은 수동적 순종의 측면의 사역이지만, 그것은 자기에게 속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행위이며 곧 율법의 성취라는 점에서 공로의 성격을 갖기도 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열매이므로 율법의 완성이며, 능동적 순종의 측면을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죗값을 치르는 공의의 만족과 영생을 기업으로 받는 공로는 모두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한 사역의 두 가지 측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죄도 율법이 완전히 성취되는 일이 없이는 사함을 받을 길이 없는 법이며, 역으로 영생의 권리는 죄책이 다 제거되는 일이 없이는 주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어떤 능동적 순종도 그것만으로 완전히 공로적일 수 없으며, 어떤 수동적 순종도 그것만으로 완전히 죗값을 다 치르지는 못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라도 율법에 대한 자발적 순종에 의한 사랑이 함께 하고 있으며, 율법의 순종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고난을 기꺼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