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의 다양성

by dschoiword posted Dec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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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의 다양성


신원균 박사, 페이스북 글 (2019.1.29.)


뒤늦게 페북을 시작하면서(2018년 1월) 조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개혁주의 하시는 분들의 색깔이 너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다양한 색깔을 어디까지 수용해야 할런지 어려움이 있기도 합니다.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신학자요 목회자서, 동료 목회자나 성도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칼빈주의 안에 여러 스펙트럼이 있는데,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어떻게 수용하거나 존중하거나 비판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상대방이 개혁주의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기본 교리와 신학적 방향이 같으면 좀 더 신중하고 주의하며, 존중하면서 차이점들을 대화해야 합니다. 조금 다른데 마치 그분이 개혁주의자가 아닌 것처럼 말하면 안 됩니다. 다른 개혁주의자가 나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면 그분도 나를 개혁주의자가 아니라고 비판할 것입니다. 그러면 개혁주의자들은 서로를 향해 서로 개혁주의자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면 제3자가 볼 때 누가 개혁주의자입니까?


개혁주의자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과 논쟁할 때는 분명한 선을 가지고 논쟁하고 싸워야 합니다. 진리를 지키는 본질면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칼빈주의를 표방한다고 하면서 5대 솔라, 도르트 신조나 3폼 신조 등을 존중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존중하는 목회자들끼리는 서로의 차이점과 다양성 있는 해석 차이를 가지고 개혁주자가 이다 아니다라고 너무 성급하게 비판하면 안 됩니다.


신학적 문제점은 얼마든지 토론하고 비판하고 논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해석해 내는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우리는 늘 다투기도 하고 논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로를 향해 개혁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전제를 깔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우리 모두 실패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볼 때 과연 이런 칼빈주의자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지 심히 걱정이 됩니다.


칼빈주의를 논하다 보면 성경론에서, 특히 해석론에서 차이를 많이 나타내기도 하고(성경신학과 조직신학-신조중심해석), 어떤 분은 교회론에서 차이가 많이 나타나기도 하고(장로파와 회중파), 어떤 분은 국가관에서 차이가 나고(보수파와 진보파), 어떤 분은 종말론에서 차이가 납니다.(전천년과 무천년) 이런 차이가 보인다고 해서 상대방을 바로 칼빈주의자가 아니라고 매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분이 여전히 교회에서 칼빈주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나 소요리문답을 가르치고 계시면 무슨 근거로 그 분을 개혁주의자가 아니라고 비판하겠습니까? 나의 방향과 조금 다를 뿐입니다.
우리 칼빈주의 선조들도 진리의 분별 문제로 신학논쟁은 항상 곁에 달고 살았습니다. 때로는 아주 과격하고 심각하게 비판하고 논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향해 개혁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은 가장 주의하고 또 주의한 후, 사실과 증거가 아주 명백하고, 그가 더 이상 칼빈주의를 추구하지 않을 때 마지막에 내리는 평가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 평가가 틀렸을 때는 오히려 본인이 칼빈주의자가 아닌 것으로 평가될 각오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자로서 제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칼빈주의 목사님들은 신학적으로 상당히 다른 입장을 가지고 계시고, 때론 부분적으로 잘못된 주장을 하시는 것이 명백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국가관에서는 한국적 정치 상황 때문에 제 국가관과 다른 입장을 가진 분들도 많이 봅니다. 하지만 저와 다르고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렇다고 그 분들을 칼빈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분들이 칼빈주의의 기초에서 그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면 칼빈주의자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2차 선교여행 계획의 의견 차이로 심하게 다투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 회의에서 할례문제로 의견일치를 이루어 의기투합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평가도 말씀하고 계시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의견의 차이도 있고, 판단의 차이도 언제든지 발생합니다. 하지만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원수처럼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의 칼빈주의자들은 과연 이런 논쟁과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1년 동안 개혁주의자로서 페북에 참여하면서 몇 자 적어봅니다. 개혁주의자들이여 열심히 논쟁하고 비판하시되, 원수는 되지 맙시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하여 (행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니라" (행15: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