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고등성경학교: 게세마네 기도회
고려고등성경학교는 성경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였습니다. 수준 높은 신학 사상에 대한 연구나, 비판 과목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틀을 제시함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성경에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가르쳤습니다.
강의를 맡은 분들은 목회 일선에서 오랫동안 사역하신 목사님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목사님들의 가르침은 이론과 교리뿐만 아니라 교회를 섬기면서 몸소 겪어 온 일들과 경험들을 성경과 접목시킴으로 강의는 항상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목사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학생들은 성경의 지식뿐 아니라 교단에 서신 목사님들의 고상한 신앙 인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오종덕 교장 선생님으로부터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라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공관복음을 가르친 분은 배영오목사님이었습니다. 한결같은 단정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일생을 복음서들의 기록을 대조하면서 차근 차근히 가르쳤습니다. 강의가 끝날 때까지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요한 계시록과 성경 개론은 박정덕 목사님이 가르쳤습니다. 박 목사님의 해박한 성경 지식은 살아 있는 성경 사전처럼 정확하였고 무수한 성경 구절을 거침없이 암기하여 학생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경건회 예배 시 설교를 할 때는 온 몸을 던져 영혼을 구원하듯이 열정적이었습니다.
교회사는 김장수 목사님이 가르쳤습니다. 훤칠한 키의 미남이신 목사님이 교단에 서면 멋이 있었습니다. 교황에게 파문을 당한 헨리 4세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가 교황 그레고리 7세를 찾아 눈 덮인 카놋사 성까지 가서 맨발로 사흘간이나 알현을 위해 빌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교권과 제국 권력 간의 갈등과 충돌, 교권과 세속 권력의 관계에 관하여 진지하게 설명할 때 학생들은 숨소리 하나 없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로마서를 위시한 교리 서신은 김원계 목사님이, 공동서신은 손진국 목사님, 신조는 조긍천목사님 등, 주로 학교가 위치한 대구 시내 교회에서 사역하시던 목사님들이 가르쳤는 데, 학생들은 가끔 목회 현장인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목사님들의 교회는 대부분 규모가 크지 았습니다. 작은 수의 교인들을 보살피며 알뜰하게 목회하는 모습이 정겨웠습니다.
산격동에 학교 건물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대구 시내에 위치한 서문로 교회당 부속 교실에서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앉은뱅이 긴 책상을 펴 놓고 바닥에 앉아서 공부했는 데, 교실 중 일부는 기숙사로 사용했습니다. 전등불을 끄고 자리에 누우면 어디에서 나오는 지 수많은 빈대 떼들의 공격에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잠들기 전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장교종, 변재창, 구자경, 전병두, 이 네사람이 게세마네 기도회를 만들었습니다. 매일 저녁 서문로 교회당에 모여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공통적인 기도의 제목은 전도자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감히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에는 너무 과분한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네 사람의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신학 공부를 위해서 후원해 줄 믿음의 부모님 들이 아님을 서로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장교종씨의 부모도, 구자경씨의 부모도, 저의 부모도 모두 불신자들이었습니다. 변재창씨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긴 세월 동안 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는 생활비 뿐 아니라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 데 막막하게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이 염려를 말끔하게 씻어내 주곤 했습니다.
서문로 교회 담임 목사님은 석원태 목사님이었습니다. 그의 열정적인 설교는 뜨거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슴깊이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새벽기도회 설교는 김용도 목사님이 주로 하셨는 데 차분하면서도 강한 멧세지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일 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고향으로 흩어졌습니다. 저는 다음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모아야 했습니다.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알아 보려고 광고를 보고 찾아 간 곳은 매일 학습지를 보급하는 작은 사무실이었습니다. 간단한 인터뷰를 하고 바로 다음 날부터 학습지를 돌리며 광고도 하고 공부할 학생들도 모집 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땀에 몸이 흠뻑젖도록 뛰었습니다. 무더운 어느날 언덕 깊 옆 집을 지나는 데 또래의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데, 송아지 만한 쉐퍼드가 달려들었습니다.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쳐 나왔는 데, 식은 땀이 전신을 적셨습니다.
조긍천 목사님이 어떻게 사정을 알았는 지 자녀를 위해서 매일 학습지를 구독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가을이 되자 그 회사는 멀리 이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 데, 서문로 교회당을 관리하는 정 집사님이 불렀습니다. "전 선생, 나를 도와서 연탄을 배달해 주면 좋겠네." 너무 반갑고 감사하였습니다. 리하카에 백장의 연탄을 싣고 끌어 보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백장을 싣고 가서 부엌에 넣기도 어려웠지만 끌고 가다가 오르막이라도 만나면 온 전신이 땀에 젖곤 했습니다. 매일 학습지 돌리던 때가 참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힘든 일을 잘 마치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오면 몸은 피곤에 지쳤지만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하루의 힘든 일과를 잘 끝낼 수 있음을 감사하였습니다. 삼 년의 과정을 마치던 날, 상주에서 올라 오신 구용서목사님이 저를 찾았습니다. 상주의 죽암교회에서 전도사로 일을 해 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1968년 8월 7일 수요일, 첫 부임지 상주 죽암교회로 가기 위하여 대구 기차역으로 가는 발 걸음은 꿈속에서 걷는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성경의 지식은 설교의 창고였습니다. 삼년 동안의 꿈 같은 목회를 마치고 고신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지난 날 함께 저녁마다 기도하던 게세마네 기도회 회원, 장교종, 변재창, 구자경 전도사들과 다시 만났습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기쁨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신학을 마친 변재창 선교사는 일본으로, 구자경 목사님은 시애틀로, 장교종 목사님은 부산으로, 저는 오레곤 주로 보내셨습니다. 민들레 꽃 술을 멀리 멀리 흩어 나르게 하듯이 말입니다.
전병두 목사의 글 (페이스북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