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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의 수난주간 금요일 설교

 

 

 

1.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이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즉 유대인들에 대해 분개하거나, 가련한 가룟유다에 대해 말하면서 안타까워 하는 것으로 만족해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야기 하는 것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불평하고 정죄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차라리 가룟유다와 유대인들의 사악함에 대한 묵상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여러 유익을 준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고난을 피상적으로라도 한번 떠올리면 그것이 오랫동안 금식을 하거나 긴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유익을 준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 그림을 붙여놓거나, 십자가 상으로 장식을 하면 그것들이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준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들의 고난을 막아내기 위한 방패로 사용합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잘못 묵상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실 때 예수님을 따르며 슬퍼했던 여인들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안타까워 하면서 죄 없는 분이 그런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면서 탄식합니다. 그러나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차라리 자기 자신들과 그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신들을 위해서 울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제까지 말한 방법들, 즉 가룟유다와 유대인들의 잘못만 이야기하거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지켜준다고만 말하거나, 죄 없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기에 안타깝고 가련하다고만 생각한다면 아무리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다 해도,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II.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바르게 묵상하는 사람은, 먼저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그 심장이 공포로 얼어붙게 됩니다.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죄인에 대해 너무나도 가혹하고 엄하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 진노가 너무나 커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생자께서 죄인들을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결코 그 진노를 해결할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사야 53장 8절에 나오는 "그는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 하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이토록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죄인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우리의 표현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심각한 상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바르게 직면할 때 우리는 참으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고, 심지어는 죽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한다면, 우리는 공포로 얼어붙고, 더 깊이 묵상할 수록 그 공포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6-37절에 보면,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고 외치자, 그 자리에 있었던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포에 떨면서 사도들을 향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손을 꿰뚫은 못을 보면서 그 못이 바로 우리의 잘못된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시관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찔렀던 그 가시가 우리의 악한 생각들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의 가시가 예수님을 찌른 곳을 볼 때 우리는 오히려 수천 개의 가시가 바로 나 자신을 찔러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그 가시들이 영원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훨씬 더 엄청난 고통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어야 마땅함을 깨닫게 됩니다. 못이 예수님의 손과 발을 관통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이 영원히 이런 고통을 당하면서 더 많은 못에 박히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신 말씀이 "나의 순교를 보고서 너희가 어떤 운명에 처해져야 했는지를 깨달으라" 하시는 말씀으로 바르게 우리 마음에 울려 퍼져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묵상의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이 우리 자신을 바르게 알게 하여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고 우리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되게 예수님의 고난을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때문에 몸과 영혼에 그토록 무서운 형벌을 받으셨다면, 그것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묵상은 많은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깊이 묵상하여 우리의 죄에 대해 깊이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마음이 강퍅하고 생각이 깊지 못해 예수님의 고난을 알고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스스로 두려워하고 떨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이 바로 나의 것임을 이생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이후에 그 고난을 지옥에서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생에서 경험하지 않는다면 지옥에서 당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공포에 떨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모든 것을 직접 겪어야 할 것입니다. 임종의 순간에 이것을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알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 마음 가운데 심어주시지 않는 한, 그의 고난을 스스로 깊이 있게 묵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로 나의 죄에 대한 형벌로 경험케 하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사모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의 형벌로 알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사색하는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주어질 것입니다.

 

III.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위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곧 내가 형벌 받은 것임을 아는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자신도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쫓아다니거나, 돈으로 면죄부를 사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거나, 어떤 공로를 쌓음으로 죄를 없애보려는 잘못을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를 여러분으로부터 떼어내어서 그리스도께로 맡기고, 그분이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해결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53: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24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하셨으며, 바울은 고린도후서 5:21절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성경 말씀들을 의지하여 여러분은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고, 그가 부활하심을 통해 그것들에 대해 승리하셨음을 깨달아 두려움 없이 그것을 믿게 된다면, 죄에 대한 두려움은 부활의 능력에 의해 삼킨 바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또한 부활에 의하여 그가 죄에 대하여 승리하셨고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음을 나타내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죄 사함을 믿을 수가 없다면, 여러분은 신앙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하나님의 수중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신앙을 위하여 바른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봄으로써 공포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제는 당신을 향하여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바라보십시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여러분의 무거운 짐과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그 사랑으로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마음을 통하여 여러분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에까지 더 높이 올라가게 되고, 거기서 여러분은 이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그처럼 여러분을 사랑하실 수 없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예수님은 여러분을 향한 사랑으로 복종하셨다는 것을... 그 결과, 여러분은 요한복음 3:16절에 있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신앙과 신뢰는 확고한 것이 되고,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지게 되어서, 여러분이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서 죄의 원수가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묵상하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은, 우리가 세상을 위하여 받아야 하는 고난의 모본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위하여 슬픔과 아픔을 당해야 한다면, 그 슬픔과 아픔이 그리스도의 가시와 못들에 비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떠나기 싫은 것을 떠나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결박 당하시고 사로잡히셔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셨는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서 또다시 죄가 고개를 처들 때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교만이 다시 여러분을 공격할 때 여러분을 사랑하신 주님이 살인자들과 더불어 십자가에 달리사 얼마나 조롱과 수치를 당하셨는지를 다시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부정함과 욕망이 고개를 들면 그리스도의 연약한 살이 찢겨지고 창에 관통되고 구타 당하실 때 그 고통이 어떠하셨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증오와 시기가 여러분을 부추기면서 복수하라고 외칠 때,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많은 눈물과 부르짖음으로 여러분과 또 모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는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시련이 여러분의 몸이나 영혼을 괴롭힐 때, 여러분은 마음을 굳건히 하면서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 내 주님께서 염려와 슬픔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과 피를 흘리셨는데, 이 정도 쯤이야 나도 견뎌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이 죽음의 고통과 투쟁을 하셨는데, 종인 내가 침상에 누워있기만 바란다면, 나는 어찌 게으르고 부끄러운 종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악과 나쁜 습관들에 대항할 힘과 위로를 발견하고, 바르게 세상을 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는 것이며, 이것이 그의 고난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이름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은 말로 다루어져서는 안되고, 우리의 생활과 진실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히브리서 12:3절에서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라고 말씀하였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하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참된 명상이 사라지다시피 하여 아주 드문 것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단순한 설명으로 바꾸어버렸고, 행사로 바꾸어버렸고, 장식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출처: 한글번역 루터선집 10:203-211; 영어원서 Luther's Works 42:7-14)

 

장기영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옮김:

장기영의 덧붙임말: "성금요일에 가족과 함께 읽으면 좋을 내용입니다. 고난주간에 교회에서 선포하거나 함께 묵상해도 유익할 내용입니다. 표현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루터선집 번역을 일부 수정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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