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
글머리에
생존하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우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아직 그의 사역이 완료되지 않았고 또 남은 기간 동안 지금까지 유지해 온 자신의 철학이나 가치관, 여러 입장들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덕성 교수는 지금까지 유지해 온 일관된 신념과 확고한 신학적 입장 등 사역 전체를 미루어 보면 이러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고희를 맞는 분의 이야기하고 그를 평가하는 일은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시의적절하고 필요한 작업이다.
최덕성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활동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겨 왔다. 특히 한국교회를 위한 그의 헌신적 사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귀하고, 독특하며, 탁월하다. 오랫동안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 교수로 봉직했으며 탁월한 역사적 안목과 창조적 발견으로 한국교회의 제반 문제를 날카로운 비판했다. 역사신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한껏 발현했다. 비판에만 머물지 않고 여러 필요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섬겨 왔다. 교수로 부임하기 전에는 미국에서 여러 해 목회를 했다. 최덕성은 신학자, 신학교수, 목회자로 탁월성을 보였다. 신학교육이 요구하는 자격들을 두루 갖추었다.
최덕성은 많은 분량의 저술과 독창적인 논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한국교회를 섬겨 왔다. 한국교회 기독인들의 독서율이 저조함에도 불구하고 최덕성은 다수의 독자와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최덕성처럼 넓은 고정 독자층과 지지자들을 확보한 신학자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최덕성의 저술활동은 고희를 맞이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약 20여 권의 중량감 있는 저서들은 출간했다. 그의 책들은 대부분 특별한 주목을 받았으며 높은 판매실적으로 올리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남다른 역사안목과 시대에 대한 탁월한 해석 그리고 청량음료 같은 상쾌한 비유와 언어적 놀이 그리고 산의 정상에 서서 발아래의 세상을 내려다보게 하는 것과 같은 속 시원한 그만의 해결책 그리고 분명한 신학적 입장 표명이 있다.
필자는 이와 같은 동기로 최덕성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고 그의 학문세계를 다소나마 정리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그가 평소에 관심을 기울이는 신학적 주제 혹은 사회적 이슈들에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의 많은 저작들 중에서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2005)』라는 작품이 이 주제의 논의를 하기에 적합한 책으로 보인다.
필자가 유독 이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이 작품이 그의 많은 신학 작품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책으로 보인다. 제목에 나타난 것처럼 여러 가지 개혁신학의 이슈들과 논쟁들을 다루며, 그가 제시하는 개혁신학이 실제 목회현장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하는 아이디어들, 실천적 지침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최덕성은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만 굴리는 백면서생이 아니다. 그가 배운 신학을 목회 현장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목회자이며 신학자이다.
최덕성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글쓰기 특징을 소개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신학이라는 학문은 다른 학문영역과 마찬가지로 글이 있어야 가능하다. 글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글은 글쓴이의 사상과 신학을 들여다보는 창문이다. 최덕성의 글은 그만의 독특함이 있다. 독자적인 특징을 지닌 문장 구사력을 보여준다. 아래에서 그의 작품 전체를 맛볼 수 있는 예문들을 제시하고 분석하려고 한다. 역사관과 목회관에 주목할 것이다.
나팔은 분명한 소리를 내야 한다. 최덕성은 우리 시대의 나팔수이다. 분명한 소리를 내는 신학자이다. 그의 나팔 소리는 아주 분명하다. 그는 현실세계를 넘어 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삶을 산다. 고희에 가까운 나이에도 그는 목회를 꿈꾼다. 목회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며 사랑하는가를 말해 준다. 그는 자신을 정통 개혁신학자로 여긴다. 그는 진보주의 또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사상과 태도와 신학 진술을 거부한다. 최덕성은 칼빈주의자이다. 그는 시종일관 칼빈과 관련된 개혁 신학을 견지한다. 칼빈주의자들이 주도하여 만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호평한다. 칼빈주의자와 개혁신학으로 무장해 있다. 한국 칼빈주의 진영 안에서 신학자 최덕성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평범한 수준 그 이상의 신학자임을 아래에서 소개하려고 한다.
필자 같은 범인이 최덕성 같은 거인을 평가하는 일은 무모하고 난감한 작업이다. 여전히 모골이 송연하다. 그러나 이 글이 최덕성 이해에 조금의 도움은 되리라 믿는다. 최덕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역사적 진가를 평가하는 하나의 모범이 된다면 더 큰 기쁨이 없겠다.
2. 최덕성 작품의 특징들
문학적 기교
최덕성은 그만이 가진 독특한 글을 쓴다. 20여 권에 달하는 최덕성의 저술 작품들은 몇 가지 독특한 특징들을 담고 있다. 탁월한 글 솜씨와 문학적 표현들이다. 글이라는 것은 솜씨가 있어야 독자가 재미있게 읽고 감동하며 의미를 가슴에 새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덕성의 글은 탁월하다. 지루하지 않다. 독특한 용어와 서술로 흥미를 돋운다. 분명히 목표를 조준하고 독자들을 이끈다. 난해한 신학적 서술을 할 때는 쉬운 비유나 설명을 덧붙여 글을 미학 수준에 끌어올리고 독자들이 이를 즐기면서 감상하게 한다. 가령 아래의 표현은 최덕성 글이 지닌 독특한 감각이다.
“바울은 정통파 유대인이 되려고 주후 15년 경 예루살렘으로 갔다. 갓 청년기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먼 길을 걸어서, 유월절 순례객의 일원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한 달 보름이 넘는 동안 길리기아 평야의 진흙투성이 길과 시리아 관문을 통과하고 또 산지를 거쳐 가이사랴를 지나 예루살렘에 당도했다. 유월절 순례자들은 예루살렘 거주민들보다 3배나 많았다. 숙소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베다니나 벳바게 근처 마을에서 묵거나 감람산 언덕에 장막을 쳤을 것이다.”
이러한 문체의 글들을 읽으면 소설 내레이션에 이끌려 가는 느낌이 든다. 문학성은 글을 살아있도록 만든다. 이런 점에서 이 짧은 문체의 최덕성의 글은 독자들로 하여금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의 현장에 함께 걸어가도록 만든다.
최덕성의 독특한 글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작품은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 쓰기(2000)』이다. 이 책은 최덕성의 독자적인 돋보이는 문장력과 관찰력을 담고 있다. 서울대학교는 2003년부터 교양학부 교재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여러 해 동안 많은 대학들이 글쓰기에 관한 최고 도서로 추천하고 있다.
위 책은 다양하고 해박한 지식과 함께 논문, 글쓰기, 학문이라는 난해한 영역의 글쓰기를 재미있게 지도한다. 글쓰기 기술들과 주제들을 총 망라하여 흥미진진하게 소개한다. 기존의 글쓰기 스타일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항상 비평적 사고를 강조한다. 위 책도 ‘비평적 사고와 논문쓰기’로 시작한다. <춘향전>을 소재로 삼아 비평적 사고방식을 날카롭게 소개한다.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통찰을 하고 비평적 관점을 열거한다.
“이 극적인 대목에는 두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첫째는 암행어사 첫 직무 수행을 고작 자신의 연적을 숙청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점이다. 국가의 녹을 받으며 비리척결의 임무를 부여받은 공직자가, 수많은 척결사항을 두고서 전라도 남원까지 단숨에 달려가 고작 자기의 연적 변학도를 타도한 것이다. 과연 이것은 정당한가? (중략) 둘째는 이몽룡이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야 할 고위 공직자로서 암행어사라는 공직, 공권을 이용하여 사적인 원한을 갚았다는 점이다.”
최덕성 글의 문장 혹은 문단 구성 방법 역시 독특하다. 하나의 문장은 이어지는 문장의 전제이거나 조건적 문장이고, 이것이 문단으로 발전하면 앞의 문단은 뒤의 문단의 전제와 조건이 된다. 그는 이런 식으로 자기의 논지를 세우고 그것을 하나씩 증명해 나간다. 이는 그가 평소에도 부지런히 논문을 쓰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학자라는 점을 증명한다.
최덕성은 주어를 반복하며 문장을 만들어 나가는 특징을 보인다. 한국어 일반 문장은 주어의 반복을 가급적 지양한다. 그러나 최덕성은 하나의 주어에 여러 술부를 이어가며 독자로 하여금 주어의 움직임을 관찰토록 유도한다. 『위대한 이단자들』에서 바울에 대한 글은 ‘바울’이라는 주어로 된 문장이 계속 등장한다. 전체 80여 문장에서 40여 차례나 ‘바울은’이라는 주부로 시작한다. 『정통신학과 경건』의 “6. 말씀과 성례”라는 제목의 글은 교회, 기독교회, 신약시대의 교회, 초대 교회, 속사도 시대의 교회, 2세기 후반의 교회 등 주어를 빠뜨리지 않는다.
이러한 특징을 미루어 그는 어떤 것을 설명할 때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확실하게 드러내어 글의 명료성(clarity)을 높이려고 할뿐 아니라 논의의 대상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가령, 종교개혁자들을 이야기할 때, 그는 종교개혁자라는 주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러한 경향에는 작가 자신의 신분보다 주인공을 부각시키는 저자 나름의 전략과 철저성이 드러난다. 최덕성의 글에는 ‘나’라는 1인칭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영역에서조차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논리적 구성력
최덕성은 확고한 논리적 구성과 변증적 진술로 독자들의 명료한 이해를 돕는다. 이성구 교수의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라는 글을 반박하는 “사도신경이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한가?”라는 글에서 그는 ‘왜?’라는 질문을 전제하고서 그 이유를 순서에 따라 일련번호 1, 2, 3 혹은 첫째, 둘째, 셋째를 붙이면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그의 모든 글에는 이처럼 순서가 잡혀 있고, 이 순서들은 기승전결의 구조 속에 정확하게 배치하여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결론을 도출한다.
최덕성은 독자들에게 단호함과 확고함을 심어 줄 목적으로 가끔 역설 기법을 사용한다. 그의 『위대한 이단자』라는 책의 제목은 역설적이다. 바울에서 시작하여 주기철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다가 순교로 생을 마감한 이들을 반대자들의 관점에서 ‘이단자들’이라는 별칭을 붙인다. 이는 최덕성의 남다른 이야기 전개와 설득의 한 방식이다.
그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신학 공동학술회에서 발표한 “프로테스탄트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재결합을 향한 교회론적 대화: 아조르나멘토 교회론에 대한 베커와 설리번의 논쟁을 중심으로”(2017)는 역설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 하나의 좋은 사례이다. 역설적 글쓰기 기법으로 대중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는 ‘가톨릭교회와 다시 결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 오해를 자아낼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로마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 미신적 교리들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만약 가톨릭교회가 이 교리들을 버리거나 개혁한다면, 특히 재결합의 가장 큰 걸림돌인 교회론을 바로 잡는다면, 개신교회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단일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남북통일이 당연한 과제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들의 연합과 일치, 즉 보편교회의 하나 됨이 우리 모두의 숙원임을 강조한다.
역설은 탁월한 글쓰기 기법이며, 설득력 있는 하나의 논리이다. 일반적인 논리와 역설의 논리는 결정력에서 차이가 난다. 역설은 치밀한 논리적 구성력이 필요하다. 천편일률적 사고방식이나 단순 논리에 매이지 않는다. 최덕성은 논리를 꿰뚫어 보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논리의 달관성이 그의 글과 정신에 명료성, 결정력을 제공하며 주장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 이처럼, 그는 역설의 대가이다.
3. 최덕성의 역사관
시대의 나팔수
역사신학자 최덕성의 역사관과 목회관은 주목할 만하다. 먼저 그의 작품들에는 날카로운 역사적 안목이 곳곳에 나타난다. 그는 역사가가 가져야 하는 덕목 또는 자질 중 하나가 시대적 경고 능력임을 강조한다. 그는 여러 편의 글에서 나팔수 이론을 펼친다. 나팔은 분명한 소리를 낼 때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집에서 기르는 개 이야기를 등장시켜 우리의 안일한 태도들 지적한다. ‘WCC부산총회철회촉구운동’을 주도하면서 최덕성은 집에 도둑이 침입했는데 짓지 않는 개가 있다면 무용지물이라는 비유를 들어 WCC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WCC 아이덴티티(2012)』, 『신학충돌(2012)』, 『신학충돌 II(2012)』 등은 교회와 진리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그의 역사적 통찰이 잘 서술하고 있다.
최덕성은 결기(決氣)를 가진 역사신학자이다. 다른 신학자들이 감히 뛰어들지 못하는 난감한 주제에 대한 옳고 그름을 당당하게 지적한다. 교회가 알고 싶어 하는 중요한 주제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일본기독교의 양심선언』, 『참회고백과 역사의식』, 『바르멘선언과 장로교인 언약』,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 『WCC 무엇이 문제인가?』, 『신학충돌』, 『신학충돌 II』 , 『교황신드롬』. 『위대한 이단자들』은 이와 같은 최덕성의 결기와 독특성을 잘 대변하는 학술 작품들이다.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에 나타난 역사관
최덕성의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는 그의 역사관을 담고 있다. 첫째, 그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 눈을 감고 지나가지 않는다. “과거사, 무엇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제목의 글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명제를 세운 다음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여러 가지 고질병의 원인을 과거사 청산 실패에서 찾는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지닌 여러 가지 문제점은 일제말기의 과거사에 대한 완전한 청산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한국기독교언론협회(회장 강춘오)는 기독교언론포럼 초대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현 상태의 원인을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가 저지른 과거사에 대한 청산의 실패로 본다. (중략) 이러한 견해는 한국교회의 현 상태가 과거사 청산의 실패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필자의 시각(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2000)과 일치한다.”
그는 한국교회가 일제통치 말기에 저지른 과거사에 대한 선명한 역사인식을 피력한다. 한 공동체의 기질과 전통은 과거사와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오늘은 어제와 연결되어 있고, 현재는 과거의 영향을 받는다고 전제하고,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체질과 성격에는 그것을 결정지은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다는 소견을 밝힌다. 그는 이 소견들을 점차 확대하고 심화시켜 독자가 다소 거북하다고 느낄 만큼 강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아래의 주장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역사 단절에 실패한 한국교회의 혈관에는 불순한 전통이 유전되고 있다. 신앙정기와 민족정기가 회복되지 않고 가치관이 뒤틀린 채로 흘러가고 있다. 권징질서가 무너져 버렸다. 그릇된 신앙의 좌표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신앙정기와 민족 정체성을 가진 양심의 교사다운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한국판 가룟 유다’라고 비난받을 만한 자들이 한국교회를 주도해왔다. 그 동안 친일파 전통이 각 분야에 자리 잡았다. 한국교회의 현재의 질병, 부조리, 악습이 주로 일제 말기 행각에 대한 역사 청산의 부재와 친일파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아니다.”
그의 역사관의 두 번째 중요한 요소는 역사적 과제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고 제시하며, 잘못을 저지른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이를 관계치 않고 지적하는 특징이다. 이것은 그가 역사신학자로서의 본분과 사명의식에 투철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예를 들면, “과거사, 무엇을 회개해야 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그는 (1) 신사참배, 우상숭배, 황거요배, 신도예배, (2) 신도침례, (3) 신사참배인식운동, 신사참배권유운동, 밀고, (4) 배교, 이단화, (5) 백귀난행, 부일협력, (6) 면직, 제명, 사임압력, (7) 비인도적 행각, 사회참여의 실패, 민족배신, (8) 에큐메니칼 운동, 교단 통합, (9) 황국교회사 양성소, (10) 솔선수범 등을 제시했다. 그리고 ‘광복 후, 무엇을 잘못했나?’라는 글에서도 10가지를 열거한다. 그리고 (1) 과거사 청산거부, 참회고백 거부, (2) 고려신학교 추천불허, (3) 한부선 선교사 해벌, (4) 메이첸파 매도, (5) 경남노회 제거, 제1차 장로교 분열, (6) 취소성명서 사건, (7) 주기철 목사 복권 사건, (8)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역사날조, (9) 주기철 복적 결의, (10) 한신대학교의 역사날조 등을 열거한다.
위의 열거 내용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아픈 역사들이다. 최덕성은 한국교회와 자신의 아픔을 주저치 않고 들추어내면서 그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통인 동시에 해결해야 할 과제임을 천명한다. 지금까지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배후에는 그릇된 역사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그 원인이 강자의 시각과 우상숭배자-친일전력자들의 당파적이며 자기변호적인 태도와 친일파교회사관 등이라 밝힌다. 연세대학교의 교회사학자 민경배 교수를 이런 종류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는다.
최덕성은 민경배의 그릇된 역사관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홍택기 목사 류의 과거사 청산 방법에 대한 예찬이며, 둘째, ‘불가피론’과 ‘한계 상황론’을 내세워 일제 말기에 한국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순응한 것이라고 보며, 셋째, 친일 지도자들을 일제와 한국교회 사이에서 조절의 역할을 하느라 수고한 자로 보는 것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그는 한국교회사가들 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민경배의 시각을 비판적으로 지적함으로써 이 부류의 학자들로부터 사실상 공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민경배 추종자들이야 말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어용적이고 당파적이며 위선적이며 기회주의자들이다.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신학자라면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세 번째 특징은 문제 제기를 한 다음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흐지부지한 결론을 맺지 않는다. 역사적 문제를 논의하는 일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라 답을 결론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일제말기의 한국교회 과거사 청산 과제에 대한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한국교회가 이렇게 여러 고질병을 앓고 있는 원인이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이유는 과거사에 대한 잘못된 역사인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주로 친일파교회사관을 가진 어용적 역사가들이 이런 잘못된 역사인식을 주조하는데 크게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과거사를 어떻게 말끔히 청산할 것인가에 대해서 최덕성은 복잡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공적인 참회고백’을 제시한다.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지려면 우상숭배의 심각성과 참회고백의 필요성에 대한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회의 규례에 따라 참회고백을 하고 일련의 권징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가 조롱당하지 않게 하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예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신자가 말이나 행위로 그리스도가 주라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에게 절하거나 복음의 일부 또한 전부를 부인하는 것은 그의 몸인 교회 안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교회가 이러한 죄를 범하는 자에게 공적 참회 권징을 시행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다”
최덕성이 근년에 저술한 <위대한 이단자들>은 후반부에서 이단판별의 주체와 기준을 논하고, 한국교회의 무분별하고도 질서 없는 이단 감정사들의 행태를 언급한다. 결론적으로 교파, 교단이 인정을 받는 공의회 성격을 지닌 신학자회의(theologians' council) 구성을 제안한다. 문제를 지적한 뒤에 해결책을 빠뜨리지 않고 제시한다.
최덕성의 역사관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그가 시대적 과제에 깊은 관심을 갖진 학자라는 점이다. 글을 시작하면서도 언급하였지만 최덕성은 언제나 자기 시대적 과제 해결에 앞장선다. 신학자는 자기 시대의 교회가 요청하거나 필요로 하는 질문에 답을 제공해야 하는 엄중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태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변호자다운 사명이다. 그리스도인 답고 학자다운 양심적 행동ㅇ;다. 희생과 헌신을 감내하려는 단호함이다.
그는 WCC 부산총회 개최의 부당성을 알리는 학문작업에 자신의 학문적 기량, 역량을 쏟아 부었다. 학술회를 열어 WCC의 신학적 문제를 제기했다. 『WCC 아이덴티티』, 『WCC 무엇이 문제인가?』, 『신학충돌』, 『신학충돌 Ⅱ』을 저술하여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이 단체의 독성을 널리 알리는 일에 힘썼다. 『교황신드롬』를 저술하여 이 단체가 개신교회를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좌 아래로 이른바 귀정(歸正)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규명한다. 이 단체의 선교선언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반면에 종교다원주의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음을 규명했다.
그는 이 작업 과정에서 논문집필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려고 로마가톨릭교회 신부를 찾아가 면담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WCC 총회 당일에는 항의 집회현장에 참석하여 성도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가두행진을 하기도 했다. 총회장소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청취하고 움직임들을 카메라에 담나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자 웨슬리 아리아라자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리는 WCC 총회(2013)에서 만나 대화를 했다. 아리아라자는 예수가 유일의 구원의 길이라는 진리를 부인한다. 하나님의 구원에 제한이 없다고 한다. 최덕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 유일의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다. 그는 아리아라자와 ‘정답게’ 사진을 찍었다. 이는 자기 신학에 확고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이다. 그는 만남과 대화가 모든 종교인, 사상가에게 열려 있는 의사소통의 창이며, 복음전도를 위한 선교 접촉점이라고 믿는다.
바울신학자 김세윤 박사는 2013년에 개혁주의 칭의론 또는 전통적 칭의론인 ‘이신칭의’를 비판하는 책 칭의와 성화를 출간하고 자신이 종교개혁을 완성하는 신학자로 목소리를 외쳤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페기처분하고 “행함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천명했다. 예장 고신 소속의 일부 목회자들은 그의 주장을 환영하고 2016년에 이틀에 걸쳐 세미나를 열고 김세윤에게 강의 기회를 주었다. 위대한 구원의 복음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는 상황이었다.
이 때 최덕성은 김세윤에 대항하여 대담한 목소리를 높였다. 김세윤의 칭의론을 ‘유보적 칭의론’으로 단정했다. 그 개요를 한국교회에 비평적으로 간명한 글로 설득력 있게 소개했다. 2016년 말에는 리포르만다(기독교사사연구원) 행사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이 로마가톨릭교회의 칭의론과 일치함을 최초로 밝히는 논문을 발표했다. 트렌트공의회(1547) 칭의론과 이에 대한 신학자 존 칼빈의 해독문(解毒文)을 견주어 소개하면서 김세윤과 새관점학파의 칭의론의 허구를 학문적으로 지적했다. 최덕성은 한국교회를 지키는 변증가이며, 교회의 나팔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최덕성은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에서도 자기 시대의 과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은 총 17개의 주제를 다룬다. 대부분이 시대적 과제들이며 한국교회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내용들이다. 그 가운데서 두 가지만 소개하고 싶다.
1) 사도신경 문제: 최덕성은 2004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사도신경 번역위원이었다. 새로운 사도신경 번역에 참여했다. 이를 소개하는 글에서 그는 사도신경을 예배시간에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들에 대해 언급한다. 사도신경이 세례문답 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암송용으로 꼭 적합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삼위일체 중심의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요점적으로 담고 있고 간결하여 사용하기에 편리하므로 예배 때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의 이 주장은 그때부터 한국교회 안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쳐 사도신경에 대하여 갑론을박하는 풍경이 사라지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2) 한국교회의 계급적 직분이해: 한국교회는 다분히 유교적 전통과 문화 위에 세워졌음은 부인하지 못한다. 한국인들은 주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신자로서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어지며 이 땅에 살고 있다. 그러나 삶의 많은 영역에서 오랫동안 삶을 지배해 온 유불선 문화에서 탈피하지 못한 상태다. 특히 한국인들의 의식에는 유교적인 구조가 다분히 심겨져 있다. 유교주의의 핵심은 인간중심적 사고와 가치관이며 인간을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질서와 순서를 정하고 이것이 발달하여 하나의 계급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연장자를 존경하고 선배를 우대하고 나이 든 사람의 지혜와 경험을 소중히 여긴다.
이러한 유교 문화와 의식들이 겉으로는 합리적이고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지만 교회 안에 침투한 이런 종류의 유교주의는 여러 가지 폐단을 낳고 있다. 예를 들어 장례식 제도 같은 것을 보면 한국교회는 유교적 장례문화를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교와 동일하게 부음을 하고, 초상을 치루며, 입관예배, 발인예배를 드리고 심지어 노제까지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드린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폐단은 비성경적인 계급적 직분제도가 버젓이 한국교회 안에 적용되고 시행된다는 사실이다. 최덕성은 이러한 문제점을 놓치지 않고 비평적으로 거론한다.
“일반 성도보다는 집사가, 집사보다는 장로가, 장로보다는 목사의 계급이 더 높거나 서열상 높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계급적 직분 이해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장로나 권사직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잡음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서둘러 장로가 되고 싶어 하고 집사나 권사로 선출되고 싶어 한다. 공동의회나 교인총회에서 집사나 장로로 선출이 되지 않은 일로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다른 이유를 빌미로 갈등을 일으킨다”
최덕성은 계급제도에 대한 개선책을 제시한다. 교회의 직분들은 그리스도께서 서로 다른 직능과 역할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도록 두셨으며, 집사, 장로, 목사를 포함한 교회 안의 모든 직분은 기능이 다를 뿐 다 같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에 견주어 계급적 직분이해는 교회로 하여금 민주화 사회, 평등사회, 탈권위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21세기 목회현장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이를 개선하려면 먼저 목사들이 권위의식을 버려야한다고 주장한다. 목회자들이 강단을 지성소처럼 지나치게 크게 높여 만들거나 화려하게 장식하고 설교단과 회중석 사이를 멀게 하고, 강단을 위 강단과 아래 강단으로 만들어 이중 구조화하고, 또 목사가 축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그릇된 권위의식을 버릴 것을 권한다.
이러한 주장들을 미루어 보건대 최덕성의 역사관의 중심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충실하려는 철저한 의식이 기초로 확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지향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정비 작업과 청결을 전제한다. 그의 과거는 질서 정연한 세계이다. 거룩은 질서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그의 과거인식은 탈 인본주의적 역사관으로 발전한다. 인본주의 역사관은 교회사 연구에 올바른 해석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역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 그 자체에서 얻을 수 없고, 인간의 죄와 패역이 하나님께 어느 정도로 모독적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은 인간이나 인간이 만든 것이나 인간이 일으킨 사건이 줄 수 없다고 한다. 특히 비기독인 역사가는 광활한 하늘과 궁창이 만들어지고 존재하는 까닭,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신본주의적 역사관을 가질 때 그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최덕성은 역사가 본질상 객관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역사가는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해석학적인 조건을 초월할 수 없는 존재이며, 역사는 의존적 지식 영역으로 사람은 자기의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면서 역사 연구에는 역사가의 관점이 불가피하게 개입하게 되므로 사관에 따라 특정 사건이 역사로 채택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한다고 갈파한다. 역사기록의 주관적 성격은 최덕성으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으로 역사의 문제에 개입하도록 만든다. 어차피 역사가는 자신의 사관에 따라 역사를 평가한다면 자신의 사관대로 주장하는 일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이다.
어떤 면에서 시대의 과제에 대한 최덕성의 적극적인 개입은 도전적으로 비추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기 시대의 과제에 충실한 반응이다. ‘A는 B다’라고 하는 등식은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당위의 법칙’(The law of the appropriateness)일 뿐이다. 진리는 당위의 법칙에 따라 정의된다.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Ego~eimi)라는 등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비유하고 설명했다. 최덕성의 당위적 역사인식은 진리에 대한 철저한 인식 위에 세워진 것이다. 최덕성은 옳은 말을 외침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선물한 진리와 구원과 사랑의 힘의 결과이리라.
4. 최덕성의 목회관
한편 최덕성은 목회에 관해서도 상당한 깊은 통찰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는 그의 목회에 대한 관심의 표출이다. 이 책에서 나타난 그의 목회관은 제목 그대로 창의적이고 혁신적이고 개혁적이다.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목회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다. 그의 ‘목회자 모델의 역사’라는 글은 그가 얼마나 목회에 대해 관심이 높은지를 대변한다. 그에 따르면 목회자는 교향악단의 지휘자처럼 교회를 통괄하고 지도하며 교우들을 섬기는 사람이다. 목회자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며 감독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는 사람이다. 또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 가르치며 그의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사람이다. 또 예배를 인도하며 세례와 성찬을 베풀고 신자들이 바른 길을 따라 살도록 권면하며 거역하는 자를 책망하는 자로 규정한다. 최덕성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한 2대 사역이 전도사역과 목회직무라고 한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감독직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딤전 3:1). 이렇듯 최덕성은 목회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는 최근에 사석에서 “지금이라도 목회를 시작해 볼까”라고 말했다. 그는 이처럼 목회를 사랑한다. 고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꿈을 꾸고 이 직무 수행을 사모한다. 그는 항구적인 젊은 목회자이다.
둘째, 봉사자로서의 목회자상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신약성경이 언급하는 목회자는 제일 먼저 ‘봉사자’(diakonos) 직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다. 사도이건 선지자이건 복음전파와 목사와 교사와 감독과 장로와 집사들 모두가 봉사자이다. 이러한 봉사자들이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교회의 일꾼이요, 복음의 일꾼이요,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것이다.
최덕성은 이들이 교회를 위해 어떤 태도로 일을 했는가를 소개한다. 즉 70인 역 성경의 에스더서와 잠언서의 봉사자는 ‘손을 빨리 놀리는 자’, 어전의 ‘내시’ 또는 ‘사신’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개인의 영화, 가족사랑, 자유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주인이 맡긴 하나의 일에 매진했다고 소개한다. 최덕성은 이 땅의 모든 목회자들이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거듭나야 할 것을 주문한다. 물론 최덕성은 같은 글에서 시대별로 목회자상의 변화와 발전과정, 예를 들어 감독(2세기), 성직자(3세기), 통수(4-5세기), 지배자(중세), 설교자, 목자, 부흥가(종교개혁과 그 이후) 등을 소개한다. 그러나 다양한 목회자상 가운데서도 그 중심적 역할과 기능은 ‘섬기는 자’로서의 목회자임을 강조한다.
셋째, 목회에 대한 애정이 깊은 만큼 비성경적인 목회와 목회자에 대해 거부감이 높다. 그는 역사신학자의 관점에서 목회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현장과 정서를 올바로 일해야 탁월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인들에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환경과 문화적 소용돌이 속에서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와 분별력이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서와 가치관들을 파악하는 일은 목회자의 중요한 직능이다. 그런 점에서 최덕성은 현대인들의 스트레스와 중압감, 불안, 초조, 죄악이 주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진단하고 목회자는 풍성한 교회사 지식과 정확한 역사적 안목과 함께 이런 위험한 상태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자라한 한다고 강조한다.
최덕성에 따르면 현대 목회자들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교회사 지식과 역사 통찰력이 결여이다. ‘제3의 성경’인 교회사를 교회 교육과 설교의 통합성에 필수 요소로 여기지 않으며, 신앙인격의 성숙에 별로 기여치 못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교회 안에는 기독교인이면서 인격적으로 전혀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도 인격 파탄의 행동을 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무시하고 결국 교회 갈등과 분쟁의 원인을 제공하는 주범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덕성은 이러한 사안들에 대해 현대 기독교인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신앙과 행위의 괴리로 인해 신앙은 무기력하고 실천은 수동적임을 지적한다. 더욱이 현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신앙과 신조를 가르치는 일에 미진한 실정이라고 본다. 그는 신앙(Faith)과 신조(Belief)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하면서 둘의 차이를 구별한다. 즉, 신조는 신앙의 구성 요소로서 초월적 경험과 그 관계성을 개념 또는 명제로 이해하고 해석한 결과이고, 신앙은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실천이나 충성이라고 한다.
정리하면 최덕성의 신앙관은 신조와 함께 인격적으로 성숙함에 이르는 것이며 이런 요소들은 확신과 의욕에 넘치는 삶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런 성숙과 위치와 신분을 가지도록 돕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바른 목회자가 아닐 것이다. 최덕성은 비록 특정 목회자를 지칭하여 언급하지는 않지만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현주소에 대한 안타까움을 곳곳에서 토로한다.
넷째, 목회자들을 향하여 창의적 목회에 도전할 것을 권한다. 최덕성은 시대정신에 굉장히 밝은 사람이다. 그는 시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처하는 선각자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의중에는 있으나 감히 교계나 사회의 전체 분위기 때문에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테이블 위에 펼친다. 개혁교회가 고수하는 여러 가지 전통들도 진지하게 고민하며 개선점을 찾는다. 복음전도의 열성 결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이해부족, 예배의 순서와 내용의 빈약성 등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합당한 해결책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그는 고전적 또는 보수적 태도를 견지하는 개혁주의자들과 사역자들과 대립되는 사례도 있다. 그의 의견은 간혹 파격적이다. 실제로 개혁신학포럼 세미나에서 그는 개혁교회의 예배 형식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발제하여 참가자들을 ‘놀라게’ 하고 많은 질의응답을 받은 적이 있다. 이런 그의 독창적인 생각들은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에 잘 나타난다. 그의 파격적인 주장들, 어찌 보면 개혁주의 테두리를 벗어나 보이는 주장들을 ‘21세기 목회현장과 창의적 목회’라는 글 안에서 찾아 인용해 본다.
“21세기의 그리스도인의 일꾼들이 다원화 사회에 적응하고 새로운 가치관, 문화, 정서, 취향을 가진 세대들과 교감을 가지려면 역동적으로 창의적으로 대처하고 긍정적인 의미의 자기 변신을 꾀해야 한다. 새로운 사회 구조와 문화와 정서의 변화를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숙지하며 그것에 대처해야 한다.”
“염세적인 사상으로 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은 목사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의 반항적이고 엉뚱한 태도를 악마적이라고 하거나 불손한 것으로 보는 목회자는 그들과 대화할 수 없다”
“‘자유시장’에서는 ‘훈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말에 무조건 청종해야 한다는 논리가 먹혀들지 않는다. 이 시대의 변화에 창조적으로ㅡ역동적으로 대처한 사람들은 부흥사 스타일의 목사들이다. 매력 있는 연기를 하는 설교자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의 봉사자는 설교가-부흥사 모델이다.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대부분 부흥사 스타일의 설교자들이다. 그들은 ;소비자들‘의 호감을 끄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질 좋은 자료를 목회 현장의 기호에 맞게 상품화했다. 좋은 자료를 갖기 위해 현장에 어울리고 매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투자하고 연구하고 배우고 땀 흘렸다. 그 결과로 ’소비자‘들은 인기 있는 목회자의 교회로 몰려들었다. 대형교회들이 등장했다.”
“21세기 정서에 어울리는 목회자가 되려고 하면 먼저 사물을 보는 눈을 바꾸어야 한다. 수직적 구조에서 수평적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중략) 수직적 사고구조를 가진 목사는 신세대 젊은이들을 버릇없는 아이로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21세기에는 분야별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 목회가 이루어질 것이다. 팀은 선지자 직능, 제사장 직능, 왕 직능으로 구분될 것이다. 교회의 업무는 당회를 중심으로 하는 팀웍으로 수행될 것이고 담임목사는 팀장 구실을 할 것이다”
“21세기에는 교회가 점점 대형화할 것이다. 교회당을 임대하여 사용하는 작은 교회는 점차 줄어들 것이다. 동네 목욕탕 수가 줄어들고 24시간 문을 여는 사우나 방이 성업을 하듯이 ‘풀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형 매장이나 편의점이 인기 있는 것처럼, 주일만이 아니라 주중 내내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에 사람이 모여들 것이다”
“교회는 많은 상품들을 진열해 놓고 필요에 따라 편리하게 물건을 제공하는 백화점처럼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목사단을 갖출 때 사람들의 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뇌를 발달시켜 온 오늘날의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교리적인 설교, 좌뇌로 수용해야 하는 딱딱한 설교에 흥미를 잃는다. (중략) 교회가 성장하려면 현대인과 호흡할 수 있는 스타일로 설교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상화된 설교, 역동적인 설교, 활기 찬 설교가 사람들의 호감을 끌 것이다.”
“새 시대의 젊은이들은 은유 방법의 설교를 좋아한다. 꾸짖는 스타일보다는 간접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무엇을 행하지 말라, 왜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가를 따지는 설교보다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을 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것도 사랑과 은혜의 콘텍스트에서 해야 한다.”
이상의 주장들을 정리하면, 그가 말하는 창의적 목회란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봉사이다. 목회자는 이를 위해 스스로 자기계발에 힘쓰고, 긍정적인 이미지와 자기 변신을 꾀한다. ‘소비자’인 성도들을 위해 ‘상품’가치가 높은 설교를 한다. 물론 그는 어떤 경우에도 성경에 바탕을 둔 교리와 신앙고백과 진리 전파를 등한히 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목회관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위로, 평안, 축복, 사랑’을 강조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중추적인 교리들을 설교하는 목회자를 요구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엄중함을 강조하면서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언뜻 보면 이 주장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텍스트 또는 관심중심의 목회에서 예배자 또는 수요자 중심의 목회가 병행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비한 연합이 칼빈주의의 핵심인 점을 고려할 때 목회에 대한 최덕성의 이중적 관점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조화처럼 신비한 일치로 귀결되고 있다. 이것이 최덕성 목회관의 독자적인 특징이다.
5. 최덕성의 신학적 입장
최덕성은 개혁신학을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어느 정도로 확고하게 또 창의적으로 천명하고 있는가? 그의 신학적 입장은 칼빈주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최덕성은 개혁신학자로서 칼빈주의 전통의 결함을 극복하려고 쉬지 않고 불을 지피는 학자이다. 그는 『정통신학과 경건(2006)』에 개혁신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정리한다. 이 책이 비록 예장 고신의 존재와 역사와 신학에 관한 작품이지만 최덕성은 그 한계를 딛고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세계기독교 속으로 침투한다. 가열 찬 활약으로 개혁신학이 한국교회의 신학, 세계교회의 신학으로 더욱 공고한 기반 위에 서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가고 있다고 평한다.
최덕성은 의심할 바 없는 칼빈주의자다. 그 결정적인 증거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드러난다. 그는 이 신앙고백서를 개혁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조건으로 보고 있다. 이 신앙고백서가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의 기본 교리들을 그 어떤 신앙고백서보다 더 잘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역사적 콘텍스트에서 만든 신앙고백문헌이므로 다른 지역, 다른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완벽한 답을 제공하지는 않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하는 점에서 그것의 가치는 다른 고백서와 견줄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고 평한다. 나아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정통주의 시대를 주도한 개혁주의 정통신학(Reformed Orthodoxy)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졌다고 평가한다.
최덕성은 신앙의 실천에 높은 관심을 가진 신학자다. 그는 목회 현장에 신학을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학자다. 그는 책상머리에만 머무는 신학을 거부한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실천적인 부분에 대해 자신만의 분석을 한다. 그는 이 신앙고백서가 3분의 2 가량을 개인과 사회 차원의 기독교 삶과 관계된 실천적 주제를 다룬다고 지적한다. 칼빈주의자들을 향하여 신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라고 외친다.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순종의 삶이라 규정한다. 코람데오의 삶이 개혁신학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교조적인 칼빈주의에 대한 맹타이다. 칼빈주의자들이 옛 전통만을 내세운 채 고리타분하고 고집스러우며 융통성이 없고 숨 막히는 교리 전시장이라는 딱딱한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을 감안 할 때, 최덕성의 신학은 실천적 신앙을 위한 자양분이며, 창의적 목회와 신앙을 위한 좋은 안내자이다.
최덕성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한 17세기의 교조적 문서와 그 시대의 정서에 함몰된 채 자기 자리에 머물고만 있지 않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절대적 가치를 지닌 문서로 보지 않는다. 그것마저 불완전한 문서 가운데 하나로 본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서는 지금의 시대적 입장에서 볼 때 새롭게 개선되어야 하고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 성령론과 선교론을 다루지 않은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성령은 영국 성공회의 ‘39개 신조’에는 포함되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이를 다루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고 평한다. 또 선교의 문제를 등한시 한 것은 당시 프로테스탄트 선교가 경건주의가 왕성하던 시기부터 부각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점에서도 최덕성은 철저한 개혁주의자이다. 종교개혁가들이 외친 것처럼 ‘개혁된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Reformata 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슬로건에 부합하게, 최덕성은 자신의 개혁 뿐 아니라 교회의 개혁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그는 이 시대의 행동하는 교회 개혁가 중의 한 사람이다.
최덕성 신학 논의에 첨언할 것은 그가 진보주의자들 혹은 자유주의자들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는 신학자라는 점이다. 그의 이런 태도와 특징의 기준은 오직 성경이다. 그는 진보주의자들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인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와 가르침을 무시한다고 질타한다.
“진보주의계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초기 역사들, 곧 그리스도의 성육신, 동정녀 탄생, 대속 죽음, 육체 부활, 승천 등을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아니라고 본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를 종교시장에 상품화하기 위해 그를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화하거나 고백한 것으로 보는 신자들도 있다. 예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과연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될 수 있는가?”
그는 종교다원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평가를 내린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냉혹하게 비판한다.
“자유주의 기독교를 지향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타종교와의 대화에 열성을 보여 온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은 극도로 쇠락하고 있다. 이 교회들은 교회연합일치운동에 무조건 동참하는 것이 죽음과 키스하는 것과 같으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와 달콤한 밀월을 즐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하는 성경수호자이다. 성경이 가라면 가고 성경이 멈추라면 멈추고 돌아서라면 돌아서는 사람이다. 성경이 허용하는 한계지점까지 기어이 가고야 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땅을 맨손으로 파고 또 파는 개척자이다. 동시에 실험실에서 과학적인 방식으로 현실 주제를 철저히 분석하고 실험하는 연구자이다.
최덕성의 신학은 아직 실행되지 못한 주제 대한 실험적 제안이 많다. 그그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이 넘쳐흐르는 재주꾼이다. 아이디어가 많다. 그는 자신의 출판하는 책의 표지를 직접 디자인하고 표지 그림의 상징성에도 신경을 쓸 만큼 풍부한 감성과 예술감 그리고 날카로운 지성을 겸비한 비범성을 보인다. 역동성, 예술성, 논리성을 지닌 신학자이다. 이러한 신학자와 그의 신학을 한두 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마치 바다 속의 수많은 어종을 도표별로 정리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난제임에 틀림없다.
6. 결어: 비판을 넘어 존경과 사랑으로
최덕성은 역사신학자, 교의학자로 한국교회를 섬겨왔다. 한국교회가 낳은 많지 않은 역사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의 관심 영역은 신학과 목회 현장을 넘나든다.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는다.
최덕성은 자신의 탁월한 역량과 진면목을 대중에 투영시키는 일에 관심이 많지 않은 듯 하다. 루터와 칼빈처럼, 다소 과격해 보이는 주장으로 말미암아 상대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한다. 옳은 말을 하면 적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그는 다수세력, 교회권력, 세속 권력으로 무장한 불의한 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된 적도 있다.
그는 근년에 사석에서 종종 외국에 가서 살고 싶다는 넋두리를 한다. 그 만큼 괴로움을 겪었다.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의 언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적이 있다. 그는 외로운 신학자이다. 루터처럼 극심한 역경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성되는 단계에 진입하게 한 듯하다. 그는 아이디어, 말, 부지런함을 앞세우기 보다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과 대화한다. 하나님의 언어를 이해하고 전능자와 홀로 소통한다. 어느 경우에도 흔들지 않고 거룩함과 신실함을 유지한다. 사람의 얼굴보다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사랑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갈망한다. 자신의 시대의 난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최덕성이 여러 해에 걸쳐 세계복음화를 위한 신학강의 공급 플랫폼 시스템을 구축한 것도 그가 자기 시대의 과제에 충실하려는 기본 태도를 엿보게 한다. ‘브레드 유니버시티’(BREAD UNIVERSITY)는 저비용 고효율 대중적 방식으로 영혼선점과 교회개척에 전념할 인재를 양성하는 유비쿼터스 방식의 선교 시스템이다.
혹자는 최덕성을 보수주의자, 근본주의자로 단정한다. 그는 자신을 규정한 이 용어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그는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자다. 동시에 열린 개혁주의자다. 개혁주의를 한 마디의 말로 단언하기 어려운 한계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단호하게 최덕성을 개혁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개혁주의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이해하는 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여러 해 ‘개혁주의 전통’이라는 과목을 개설하여 가르쳤다. <개혁주의신학의 활력>을 저술했고, 독자들이 선호하는 <개혁주의 전통>과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이라는 책을 번역하여 출간했다.
종종 개혁주의는 칼빈주의와 동일한 용어로 사용된다. 칼빈주의 안에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강경파들도 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Hyper-Calvinist)들은 자기들이 세운 틀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재단하고 저울질하고 독단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배타적이고 극단적이고 독선적인 칼빈주의자들의 눈에는 최덕성의 개혁주의가 ‘사이비 개혁주의’로 보일 수 있다. 최덕성은 맹목적인 개혁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역사적 기독교에 충실한 창의적 개혁주의자다.
최덕성 만큼 개혁주의 신학, 개혁주의 전통을 사랑하는 자가 많지 않을 듯하다. 개혁주의의 발전과 확산을 위해 그분만큼 노력한 학자는 많지 않다. 그가 쓴 “개혁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은 개혁주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최덕성은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동시에 관찰해야 정확히 보여 지는 인물이다. 단편적인 면만 보고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하면 실수하게 마련이다. 감히 말하지만 최덕성은 이 시대에 찾아보기 어려운 천재적 신학자이다.
최덕성은 고희를 맞아 신학 활동과 봉사의 삶을 정리하는 시점에 이르렀음에도 세계기독교가 직면한 위기를 타개하는 새로운 돌파구를 만드는 창조성을 발휘하고 있다. ‘영혼선점’이라는 공격적인 방법으로 세계복음화에 이바지하는 신학강의 공급 선교에 열중하고 있다. 신학예비 과정과 신학교 과정의 교육을 중국어, 영어, 스페인어로 무상 제공하는 유비쿼터스 교육 시스템으로, 빈곤국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 현지 교회, 신학교에 강의를 공급하여 복음전도자와 목회자를 대량 양성하는 당찬 계획이다. 구체적인 정보는 빵티비라는 별명의 브레드티비(www.breadtv.net)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 최덕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자긍심을 가지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역사적 안목을 가져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실천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는 지혜, 태도, 열망을 보여준다. 최덕성은 단순 비판을 넘어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을 지닌 신학자다.
최더함 박사(Th.D), 개혁신학포럼의 책임전문연구원, 바로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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